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27화 (126/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27)

적의 정체

눈을 뜨니 시원했다.

“음.”

그야 옷을 벗고 있으니까.

살아 있네.

일단 나는 누구지?

시릭 카라카스이자 리젠 리브라타.

바로 대답이 나오는 걸 보니 기억 오염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사실 몇 가지 옛날 기억이 추가로 떠오르긴 했는데…….

쓱쓱.

간지럽다.

내 가슴을 젖은 수건으로 닦는 손길.

은회색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아멜리아다.

“아이잉.”

“…….”

멈칫.

아멜리아의 늑대 귀가 흔들리더니만 나를 올려 보았다.

나는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억지로 염동력으로 움직여서, 내 가슴을 양손으로 감추는 포즈를 취해 보였다.

“엄마, 부끄러워.”

“……도, 도, 도련님!”

와락.

아멜리아는 몸을 내던지듯이 나를 끌어안았다.

“아이고, 엄마! 나 죽어~.”

“거, 걱, 걱정했잖아요!”

아멜리아는 평소답지 않게 엄청나게 목소리가 올라가 있었다.

경악과 불안으로 덜덜 떨리는 몸.

“모, 못 일어나실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으음.”

아무래도 내가 좀 오래 잤나 본데?

나는 아멜리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른 손으로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몸이야 뻣뻣하지만, 염동력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력해졌다.

“미안해, 아멜리아. 또 많이 걱정시켰네.”

둘만 있는 자리라면 좀 더 이것저것 말하고 부드럽게 달랠 텐데…….

지금 이 황성의 객실, 넓은 침실 안에는 나와 아멜리아만 있는 게 아니다.

제국군 남자, 그리고 헌병대 제복을 입은…… 미레이가 있었다.

방구석 테이블에 앉아서 케이크를 포크로 떠먹다가 놀란 토끼 눈으로 본다.

“……!”

나와 아멜리아의 포옹을 보고 놀라시더니.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천장을 올려다보네.

제 딴에는 눈을 피해 주겠다고.

그 와중에 턱은 움직이시고?

“……씹어? 씹네? 네 목젖을 강조하는 이유가 뭔데? 왜 꿀럭거려? 그래, 너 엘프다! 목 길어!”

“켁, 켁! 뱉을 수는 없잖아요! 먹는데 왜 그래요!”

미레이가 억울하다는 듯이 항의했다.

제국군은 이 일련의 소동을 무표정하게 넘기고 앞만 보고 있었다.

그래, 저래야 내 오른팔답지.

벌컥!

“뭐야, 일어났어?”

그때 옆방 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칼비나와 로데릭이었다.

두 사람은 급히 침대로 다가와서는 나를 살폈다.

“몸은 괜찮으냐, 리젠?”

“아, 예. 제가 잠든 지 얼마나 지났죠?”

“오늘로 10일째다.”

“…….”

세상에.

역시 수백, 수천 명의 정신력을 마구 빨아들인 후유증이 너무 심했다.

칼비나는 침대 옆, 과일 바구니에서 사과를 꺼내더니 과도를 잡았다.

“일어났으니 축하 선물을 줘야겠는데. 엄마, 좀 비켜 봐.”

“…….”

칼비나가 거듭 말하니 아멜리아는 눈가를 훔치면서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네요. 좀 진정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아냐, 아멜리아. 그냥 여기 있어.”

“아닙니다. 일어나셨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아멜리아는 나에게 얼굴을 보이기 싫다는 듯이 종종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나는 일단 로데릭을 돌아보았다.

“열흘 동안 상황은요? 몸은 멀쩡한데요.”

“천리정후 전하께서…… 특급 치료약을 사용하셨다.”

“…….”

세상에.

그건 천족에게 세 개인가밖에 없지 않나?

내가 황제 하던 시절에도 안 먹은 건데.

그만큼 내 상태가 위험했었군.

침대 옆의 의자에 앉은 칼비나는 사과를 날렵하게 깎는가 싶더니…….

“자, 입 벌려.”

과도로 사과 조각을 찍어서는 내게 내밀었다.

로데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칼비나, 접시를 제대로…….”

“…….”

나는 가만히 칼비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엄청나게 차갑다.

칼비나가 아멜리아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장난만 치는 여자 같지만 제국군이고 실력은 일류다.

그리고 나는 환자고.

사과 조각 너머에서, 지금 칼로 나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여차하면 바로 찔러 버리겠다는 기세.

“…….”

내 호위를 서던 제국군도 갈등하고 있었다.

당장 칼비나를 막긴 해야겠는데, 거리 차이가 있어서.

로데릭이 정색하고 호통을 쳤다.

“칼비나! 그만두지 못해! 너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게 우리 동생인지, 뭔지 모르잖아? 난 오빠처럼 사람이 좋은 건 아니라서.”

“…….”

대답하려던 내 눈에 미레이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케이크를 꼴깍 삼키고는 다시 포크를 가져가는 게 보인다.

쟤는 무슨 막장드라마 시청 중이냐?

“……아, 젠장. 저거 보면 긴장하려다가도 못 하겠어. 미레이 좀 내보내요.”

“아니, 특관님은 왜 저만 보면 그러세요! 제가 싫으면 싫다고 하세요!”

“너무 좋아서 평생 안 봤으면 좋겠다!”

나는 짜증을 내고는 홱 몸을 뻗었다.

칼비나가 내민 사과를 향해서.

“으아.”

칼비나는 그녀답지 않게 깜짝 놀라서 과도를 뒤로 뺐다.

나는 아랫니로 냉큼 캐치하고는 사과를 우드득 씹었다.

“아, 이거. 열흘만인데 대뜸 사과부터 먹어도 되나? 수프 같은 걸 먹었어야 했는데.”

“너…….”

“내가 시릭 카라카스라는 거요?”

뭐, 칠죄신과 싸우면서 말하기도 했고.

내가 열흘이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동안 남매인 로데릭과 칼비나도 이리저리 알아봤겠지.

나는 우드득, 우드득 사과 조각을 씹으면서 말했다.

“왜, 황제 나리가 두 분의 남동생 몸을 차지했다고요? 내가 칠죄신도 아니고 그게 되겠습니까? 칠죄신이라고 해도 살아 있는 영혼이 들어가 있는 몸이라면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요.”

“나도 그 이야기는 아는데, 그렇다고 순순하게 너를…….”

“리브라타의 비밀 이야기, 칼비나 리브라타 7세.”

나는 불쑥 말했다.

이번에 꿈속에서 몇몇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로데릭과 칼비나가 의아하게 보는데 나는 유창하게 말했다.

열흘 만에 일어났다는데, 아멜리아의 포옹과 미레이의 눈치 없는 짓에 기운이 솟는다.

“리브라타 백작 가문의 딸인 칼비나는 평소에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어요. 한데 마침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 대해서 궁금해졌지 뭐예요? 그래서 아멜리아에게 물어봤답니다. 하지만 어머나 깜짝, 아멜리아는 그런 교육 쪽으로는 너무 담백했어요. 생식기가 다르다는 생물학적인 답변을 했죠.”

“자, 잠깐. 리젠?”

로데릭이 당황했다.

나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칼비나는 남자의 생식기는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어요. 어디서 확인해야 할까? 마침 눈앞에 띄는 사람이 있었어요. 바로 백작 가문의 장남, 로데릭 리브라타…….”

“으아아아! 아아아아악!”

로데릭이 비명을 지르면서 내 입을 막으려고 달려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피하고, 손으로 로데릭의 팔을 막으면서 힘차게 외쳤다.

“물론 로데릭은 미쳤냐면서 싸늘하게 무시했지만, 아주 큰 문제가 있었어요! 생각보다 칼비나가 날래고 너무 강했던 거랍니다! 그리고 더 문제는 그녀에게는 잘 부려 먹을 수 있는 동생인 리젠이라는 놈이 있었어요! 그래서 협력을 얻어서…….”

“리젠! 말하지 마라! 대체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로데릭은 내 입을 누르려고 손을 뻗었다.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피하면서 비장하게 외쳤다.

“로데릭은 칼비나의 날랜 공격에는 가까스로 달아났지만 사실 그건 함정! 기다리고 있던 동생의 후방 기습에는…….”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로데릭이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부정했다.

늘 근엄하게 우리를 타이르던 형이 이러자 나도 웃음이 엄청 터졌다.

의자에 앉아 있던 칼비나도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다, 다행히도 로데릭이 비명을 지르면서 아멜리아를 부르는 바람에 미수에 그쳤어요. 하지만 3남매는 아멜리아에게 엄청 혼나고 큰 꿀밤을 맞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로데릭의 엉…….”

“야, 인마아아아아아!”

로데릭이 내 멱살을 잡고 탈탈 흔들었다.

나는 그때마다 웃음을 터트렸다.

칼비나는 아예 침대를 퍽퍽 두드리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심지어 경호를 서던 제국군도 입가가 꿈틀거리면서 웃음을 참았다.

배가 아플 정도로 웃은 우리 셋은 녹초가 되어서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허어어억. 아, 뭐, 이제 좀 믿어져요?”

“……로데릭 오빠의 슬픈 비밀을 아는 이상 넌 내 동생이지.”

칼비나의 말에 로데릭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너희 둘을 동생으로 둔 게 내 잘못이다. 아니, 그리고 칼비나! 넌 그런 게 확인하고 싶단 건 그렇다 쳐도, 왜 하필 나냐! 옆에 네 말을 잘 듣는 리젠도 있었잖아!”

“그치만 리젠은 나보다 생긴 게 예뻐서 남자로 보이지 않았거든. 아멜리아가 항상 지키고 있었고, 또 내가 누나니까 지켜 줘야지.”

“……오빠인 나는 내다 버리고?”

“괜찮아요, 형. 다들 그렇게 남자가 되는 거니까!”

“니가 칼비나보다 더 악질이다.”

우리 셋은 같은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좀 분위기가 진정되자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대충 설명하면 시릭 카라카스가 죽은 뒤에 리젠 리브라타로 전생했고, 살다가 그 기억이 깨어났다 이겁니다. 나는 댁들 동생 맞아요.”

“오구오구, 그러셨어요, 폐하?”

“……아, 폐하라고 부르지 마요. 진짜로 부탁이니까.”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가능하면 하던 대로 동생인 리젠으로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뭐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얼렁뚱땅 두 사람에게 믿어 달라고 하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

“리젠, 너는 내 동생이다.”

로데릭이 진지하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리브라타의 비밀 이야기, 두 번째. 로데릭의 첫사랑…….”

“리제에에에엔!”

한바탕 소동을 끝낸 나는 바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대장군 레릭과 헌병대장 아르센 그리고 제국 재상 오드벨.

황후인 랑에이, 이셀렌, 렌시엘.

리세라나 메이호 같은 자식들은 부르지 않았다.

정치적인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내가 일어났다. 상황들은 어떠냐? 제국 동향은? 민심은?”

“…….”

침대에 앉은 내가 말하자 다들 시선을 교환했다.

깨어난 나를 보고 반가워하면서도 바로 입을 열지 않는다.

하나같이 줄초상이라도 난 기색.

……이놈들, 뭐 사고 쳤나?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말했다.

“황도의 민심이 엉망일 텐데 일단 귀족원부터 조져야 한다. 건수는 있지? 토비우스 공작이 원탁회의를 훼방 놓으려고 했을 거다. 그걸 빌미로 귀족원을 누르고 협력을 강제로 얻어 낸다. 오드벨.”

“……예, 폐하.”

“준비 다 해 놨지? 토비우스 조질 수 있게?”

오드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계속 말했다.

“그럼 일단 그렇게 하고. 지금 너희들만 부른 건 당분간 너희들만 알고 있어야 하는 정보가 있어서다. 사실 진작부터 의심은 하고 있었는데……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뭐가 말입니까?”

“제국해방군, 테러범들의 계획은 너무 촘촘하고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됐다. 객관적으로 솜씨가 기가 막힌다.”

나는 새삼 짚어 나갔다.

크로셀 후작의 모반 시도.

제국 철도 테러.

그다음에는 루크 케드릭을 부려서 미리엘을 핍박하여 황성을 홀로 지키는 렌시엘의 정신을 몰아넣고.

사지타리의 사도, 디에르크는 폭탄을 빼돌리고 단말로 사회의 혼란을 초래.

사도 토구로는 카마엘과 쿠데타를 획책, 렌시엘 스스로 지원사령부를 황성으로 불러들이게 한다.

그리고 혼란을 거듭한 민심이 폭발할 때, 원탁회의를 개최.

키릭 레오가를 2대 황제 후보로 추대한다.

“이 계획들이 하나같이 촘촘하고, 설사 실패해도 응용할 수 있게 짜여 있어. 하루 이틀 만에 짠 게 아니고 고단수다.”

“…….”

왜 다들 침묵이지?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말했다.

“즉, 제국해방군 안에 뛰어난 전략 브레인이 있다. 토구로, 디에르크, 키릭이 이걸 짠 거 아니야. 그것들은 눈앞의 전술을 짜낼 수 있을지언정 이런 큰 그림은 못 그려.”

“……그러면?”

이셀렌이 내게 물었다.

비장한 목소리.

마치 총대를 메듯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이걸 하려면 제국 내부의 사정, 군 내부 사정도 잘 알아야 해. 결론은…….”

나는 잠시 뜸을 들였다.

거의 확실하지만 너무 위험한 지적이니까.

“4황후다. 4황후가 제국해방군의 두뇌다.”

“…….”

“근거? 상황이 이렇게까지 막장으로 흘러가는데도 4황후 모습이 보이지 않아. 본래 대장군으로 활동했던 여자, 제국군 안에서 여전히 발언권이 높으니 진즉 황도로 왔을 거다. 그리고 12가문의 선정과 관련해서 보면…….”

“시릭.”

랑에이가 나직하게 불렀다.

계속 근거를 대려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니들 아까부터 무슨 일이야? 니들 뭐 사고 쳤냐?”

“……4황후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어.”

처음부터 무거웠던 분위기.

불안한 예감.

나는 이마를 누르고는 한숨을 쉬었다.

“아, 설마 그거냐. 진짜로 저질렀냐?”

“…….”

“그래, 원탁회의가 열리면 테러범들의 계획이 끝날까? 아니야, 하나 더 준비해 놨겠지. 그런 여자니까.”

4황후는 제국군에서 나 다음가던 지휘관이다.

그녀의 전술, 전략적인 혜안은 나도 감탄할 때가 많았다.

4황후가 손을 댄 거라면, 그녀가 이 모든 전략을 수립한 게 맞다면.

여기서 안 끝난다.

그리고 내가 그녀의 입장이라면 무슨 수를 쓸지 감이 온다.

“……어느 쪽이냐?”

랑에이는 대답 대신에 가지고 온 종이를 내밀었다.

「시국이 어지럽고, 음모와 모략이 날뛰는 어지러운 시대다.

나는 부족한 몸이라서 오래전에 물러났으나 권력을 탐하는 사특한 무리들이 거짓 황제를 옹립하려고 모략을 꾸미니 더는 참지 못하겠노라.

제국의 4황후인 내가 직접 모든 일을 바로잡고자 한다.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자, 용맹한 자는 당장 무기를 들고 갑주를 걸치고 서쪽으로 오라!

우리는 제국의 깃발 아래 하나가 되어서 모든 것을 해방하는 빛이 되리라!」

“……황도 곳곳에 나붙었어.”

“붙이는 자를 잡아내고 있긴 합니다만. 조무래기들이라서 별 소득은 없습니다.”

“이미 황도의 시민들에게 소문은 퍼져 버렸고요. 막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셀렌, 서부군이 호응했나?”

“제국의 서부군 20만이 4황후 철혈성군(鐵血聖君)의 지휘 아래 깃발을 올렸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명분을 대고 있지만…….”

“반란이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부턴 내전이네.”

제국군과 제국군이 싸우는.

내전이 다가온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