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23화 (122/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23)

원탁결전, 개막

황도의 야외 체육관.

각종 무대 행사와 공연을 위해서 만든 곳이다.

사회자의 인사, 소개말과 더불어 무대 뒤에서 사가르와 키릭이 등장했다.

둘 중 하나가 칠죄신의 사도, 신체라고 봐야겠지.

“타루스 님! 승리를 기원합니다!”

“레오가는 불패! 역사를 다시 증명할 때입니다!”

관객석에 가문의 응원단들이 플래카드를 걸고 난리였다.

다행히도…… 리브라타는 없군.

있으면 쪽팔려서 살 수가 없었을 거야.

10만 관중의 대다수는 황도의 시민들, 그들은 웅성거리는 게 누구의 편도 아니었다.

키릭과 사가르, 그리고 나까지.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저 높으신 분이니까.

즉, 오늘 무대 위에서 단순히 승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승리하느냐도 상당히 중요하다.

키릭과 사가르의 대치.

사회자가 목소리를 키우는 마력현상을 일으키는 마이크에 대고서 두 사람을 소개하고 기나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두 놈의 태세를 살폈다.

다들 계획이 있다.

내가 이 싸움을 민심 수습과 12가문을 정리하는 계기로 삼았다면.

칠죄신은, 칠죄신의 사도는 이 자리를 피로 물들일 계획일 것이다.

그리고 내 딸, 메이호는 이걸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면…….

내가 생각하는데.

시합이 시작되었다.

“으아아아아!”

관객석까지 떨쳐 울리는 고함 소리.

사가르가 외치면서 대검을 휭 휘둘렀다.

깔끔한 일격, 검에는 남색의 마력.

거기서 그치지 않고, 휘두르는 도중에 마력영역이 뒤따르면서 뻗어 나간다.

완벽한 연계, 나였어도 쉽게 못 피했다.

한데 키릭은…….

그냥 제자리에서 막았다.

마력장의 효과 덕에 몸이 밀려나지는 않았지만 뒤이은 마력영역까지는 못 막는다.

우드드득.

키릭은 비틀거리면서 몸을 수그렸다.

마력영역은 사람마다 효과가 다르다.

토구로가 마비였다면 사가르는 중력, 보다 강력한 상위 영역이다.

“흐아아압!”

그러자 사가르는 기합을 지르면서 키릭의 목을 잡고 조르기 시작했다.

마력영역에 휘말린 순간, 이미 키릭은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니 기절시켜서 깔끔하게 시합을 끝낼 생각…….

화르르륵!

“어…….”

“으, 으아아아아!”

지켜보던 관중들이 비명을 지른다.

키릭의 멱살을 잡은 사가르의 팔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크아아악!”

사가르는 얼른 물러났지만, 순식간에 손을 태우고 팔로 옮겨붙은 불꽃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

마력방어마저도 뚫고 들어가서 태우는 불!

“…….”

나는 어느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있었다.

나는 저게 뭔지 안다.

엘프의 정령마술!

“……말도 안 돼.”

키릭은 인간이다. 엘프나 하프엘프가 아니다.

한데 엘프만이 쓸 수 있는 정령마술을 구사했다.

그것도 상대를 직접 태워 버리는 고위 단계까지!

“앉아.”

내 옆에 앉은 메이호가 손을 잡고 당겼다.

내가 옆을 돌아보니 메이호가 말했다.

“이제 알겠어?”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네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간다. 12가문이 뭔지, 네가 루크 케드릭을 왜 거론했는지도.”

12가문에 나처럼 마력이 없는 사례가 여기저기에 있다.

엘프만이 쓸 수 있는 정령마술을 구사하는 레오가의 키릭.

그리고 루크 케드릭은 흑마력을 썼다.

나야 전쟁 시기에 흑마력을 빈번하게 봐서 넘겼지만, 사실 보통 인간은 흑마력을 쓰려고 해도 적응을 못 한다.

받아들인 순간 8할로 즉사하는데도 루크 케드릭은 성공했다.

이게 바로 12가문의 공통점.

“으, 으으음!”

오른팔이 타오르는 와중에도 사가르는 서 있었다.

초인적인 인내력이다.

하지만 더는 싸울 수 없다!

“그만둬!”

“흐아아압!”

사가르가 내 만류에 반발하듯이 왼손으로 검을 휘둘렀다.

팔이 타는 와중에도 집중력을 발휘해서 마력검까지 썼지만.

키릭은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디디면서 검에 불꽃을 감아 휘둘렀다.

캉!

검이 부딪친 순간, 불꽃이 옮겨붙는다.

사가르의 검으로, 그리고 왼팔로.

“아, 아아아아아!”

그게 한계였다.

양팔이 타오르는 사가르는 비명을 지르면서 몸부림을 쳤다.

12가문의 대표, 황제가 되겠다고 나선 6계위의 강자가 살아 있는 장작이 된다.

사회자가 급하게 외쳤다.

“승리! 승리입니다! 그만…….”

“…….”

하지만 키릭은 멈추지 않았다.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사가르의 얼굴에 손을 뻗는다.

화르르륵.

“그아아아아아!”

사가르의 얼굴이 불탄다.

비명을 지르는 입구멍에서 불꽃이 더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게 너무나 끔찍한 광경이었다.

정적.

십수만의 관객들이 아연해서 굳어 버렸다.

이건 시합이 아니다.

그저 화형식이다!

놔둘 수 없다.

결단한 나는 내 손을 잡은 메이호를 돌아보았다.

“혼자서 이런 비밀을 안고 있었으니 무섭고, 불안하고, 힘들었겠지. 누구도 믿을 수 없었겠지.”

“무슨 소리를…….”

“하지만 나는 이 이상 상황이 이렇게 막 나가게 놔두지는 않을 거다. 너를 더는 외롭게 두지도 않을 거고.”

그간 나에게 날카롭게 굴었던 메이호는 믿을 수 없단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뭐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목말은 다음에 태워 주마.”

나는 그 말을 남기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아빠!”

리세라의 목소리, 지금은 무시한다.

타다다닥!

염동력까지 이용해서 크게 도약한 나는 몇 번 발을 구르고 시합 무대 위로 올라갔다.

내가 달리는 동안에도 사가르는 계속 괴로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내가 무대 위에 올랐을 때는 이제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잿더미가 남았을 따름이었다.

그 앞에 선 키릭은 웃고 있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표정이 변하지 않던 놈이 불타는 시신을 보고 희열에 찬 미소를 띠고 있다.

“…….”

나는 놈을 노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사회자는 갑자기 난입한 나를 알아보고는 어찌 처리해야 할지 고심하는 눈치였다.

나는 무시하고는 키릭에게 다가갔다.

“……너, 그거 뭐냐?”

“각성 능력이다.”

각성 능력이라는 건 통상적인 마력, 계위 능력과는 완전히 다른 고유 능력이다.

아무나 익힐 수 있는 건 아니고, 어떤 구체적인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불현듯 깨닫는 힘.

나, 시릭 카라카스도 익히지는 못했다.

내 초능력을 본 사람들은 상당수가 각성 능력이라고 이해했지만…….

“아니잖아?”

“그래. 그냥 그렇게, 그렇게…… 둘러대면 될 거라고 하더군.”

키릭이 나를 돌아보았다.

사람을 잿더미로 만든 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그러고는 사회자를 향해서 손을 내민다.

“내 승리인데 승리 소감 정도는 말해야지. 내놔라, 마이크.”

“……여, 여기 있습니다.”

사회자는 잔뜩 겁을 먹고는 키릭에게 마이크를 홱 던져 주었다.

키릭은 나를 보며, 겁을 집어먹은 관중들을 보며 말했다.

“왜 그렇게 놀라지? 이게 너희들이 기대하던 거 아니었나?”

“…….”

“나는 강하다. 누구보다도 강하게 군림하는 황제가 될 것이다. 내 말을 따르지 않는 녀석은 싹 다 태워 버리겠다.”

키릭은 즐겁게 말했다.

지금까지 표정이 없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사람을 불태우는 게 너무 즐겁다는 얼굴로.

“눈앞의 도전자를 꺾고 나는 황제, 염제(炎帝)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

일방적으로 선언한 놈이 마이크를 내게 던져 주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가르 타루스의 시신을 수습해라. 이렇게 놔둬서는 안 된다.”

내 말에 정신을 차린 진행 요원들이 얼른 들것을 가지고 올라왔다.

시커멓게 타 버린 시신을 수습하는 이들은 감히 키릭을 보지도 않으려고 했다.

다수의 인원이 올라온 덕에 금방 정리되었다.

무대 위가 정리되자 내가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던져 주는데…….

―그게 끝? 더 말하지?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전조도 없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기면서.

키릭의 목에서 칠죄신의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다.

키릭이 나를 보는 동공에는 검은 열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모처럼 오래 기다려 온 무대잖아? 나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양말 꾸러미까지 준비하고 착한 아이가 되어서 오늘만을 기다려 왔다고.

“…….”

다행히도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관객들에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혀를 찼다.

칠죄신이 이렇게 쉽게 돌아올 리가 없다.

설사 사도가, 키릭이 영혼을 바쳤다고 하더라도…… 고작 그 정도로는 안 된다.

“허세 부리지 마라. 어차피…….”

―허세는 네가 부리는 거지.

화르르륵.

키릭의 검에 검은 불꽃이 나선으로 감겨들었다.

아니다.

토구로를 변이체로 만들어서 인형놀이 할 때와는 다르다.

칠죄신이 직접 키릭의 몸에 임한 것이다!

“…….”

이게,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이걸 막겠다고, 이런 일이 다시는 없게 하겠다고 수많은 전우들이 그리 장렬하게 싸우고 죽어 갔는데!

칠죄신이 키릭의 얼굴로 웃었다.

―아까 정령마술을 쓴 걸 보면 알잖아? 이 키릭이라는 게, 12가문이라는 게 아주 특별한 혈통이라는 걸.

“…….”

―인간은 원형이지. 백지에는 이거저거 그려 보고 싶어지고.

아키타입(archetype).

카라카스에서 첫 종족, 원형은 인간이었다.

그 인간의 수명을 확 늘이고 아름답게 만든 게 엘프.

머리 위에는 동물의 귀, 허리에 동물 꼬리를 달고 육체적으로 강인하게 만든 게 수인.

인간이라는 설계도를 바탕으로 옵션을 추가한 식이다.

그래서 인간과 일곱 이종족이라는 식으로 일컫는 것이다.

반박하는 이론도 많지만 거의 정설이다.

지상에 군림하는 신, 칠죄신이 말한 거니까.

자기가 인간을 원형으로 삼아 일곱 이종족을 창조했다고.

“……그래서 인간을 갖고 장난을 쳤다고?”

―그릇이 비었으면 포도도 담고, 사과도 담아 봐야지. 네 심장도 인간의 것이 아니잖아?

“…….”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덕분에 그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잖아? 유사 이래 가장 빠른 성장, 기뻤나? 즐거웠…….

칠죄신이 말하는데 나는 일부러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칠죄신도 멈칫했다.

신을 앞에 두고 이렇게 무시하는 존재는 없으니까.

“그래, 이제 다 알겠다.”

하지만 지상에서 단 한 사람.

나는 신을 무시할 수 있다.

내가 바로 황제, 인류의 대표니까.

“이제 알겠어.”

메이호가 12가문에 대해서 하려던 말.

황후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

전부 다 이해가 간다.

“12가문은 네 놀이터, 인체 실험장이었다 이거지. 그래서 네가 보다 쉽게 강림할 수 있게 만드는 제물이었다 이거고. 너, 그 말이 하고 싶어서 튀어나온 거지? 나보고 놀라고 경악하라고?”

―……안 놀라나?

“네 그림자가 너울거리는 걸 12가문은 몰랐다.”

나는 단호하게 끊었다.

칠죄신은 12가문 전체가 오래전부터 자기 재림을 위해서 음모를 꾸며 온 이들이라고 오해하게 유도하고 있지만 아니다.

당장 리브라타만 해도 직계, 방계까지 합치면 서른 명이 넘는다.

그런 가문 열두 개가 100년 동안 칠죄신의 재림을 도모하는데 찍소리도 안 날까?

내 심장도 마찬가지, 적어도 칠죄신이 의도한 바는 절대 아니다.

“이들은 그저 불행한 이들이다.”

내가 칠죄신을 쓰러트리기 전, 그 여파에 휩쓸려서 간간이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이들.

보통 인간들보다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들.

그게 바로 12가문이었다.

“전부 계획대로? 나한테 목 날아가고 도망쳤던 것도 계획대로라고 하시지? 네 힘이 약해진 것도 계획대로고?”

―제법…….

“다시 제가 말하겠습니다.”

그 순간 다시 키릭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검에 너울거리던 흑마력도 사라진다.

칠죄신을 돌려보냈다고?

“…….”

역시 약해졌다.

놈은 다시 재림했다고 야바위를 치는 건데, 전성기의 힘이 아니다.

키릭은 나를 보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이제 너만 불태우면 되겠군.”

“……즐겁냐?”

상식적으로 키릭에게 해야 할 말은 많았다.

칠죄신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

황제가 되겠다는 놈이 이렇게 많은 눈앞에서 사람을 직접 불태우면 어떻게 정치하려고?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그래.”

내 질문에 키릭은 빙긋 웃었으니까.

이어서 키릭은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난 어린 시절부터 물건을, 사람을 불태울 수 있었다. 이게 재미있는데…… 남들은 기겁하더라고. 거기다가 보통 인간은 할 수 없는 능력, 엘프의 능력이니까. 꽁꽁 숨기면서 살기 괴로웠는데…… 황제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

“황제가 되면 마음대로 사람을 불태워도 되니까.”

키릭의 눈이 생일 케이크를 선물받은 아이처럼 반짝거린다.

이놈이 굳이 동생을 시켜서 리브라타를 떠보려고 했던 이유?

단순한 차도살인이 아니었다.

자기가 직접 나서면, 사람을 불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으니까.

사람을 불살라 버리는 거에 행복해한 놈.

무슨 이야기를 더 할까.

“됐다. 넌 들어가고 칠죄신 나오라고 해.”

“……뭐?”

“어차피 너 죽이면 그다음 칠죄신 튀어나올 거 아냐. 귀찮으니 보스전만 치르자.”

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키릭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놈의 검에 불꽃이 폭발적으로 어리기 시작한다.

“……지금 나를 무시해?”

“오해하지 마. 너 처음 본 순간부터 쭉 무시했다.”

키릭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스킵 좀 하자는데 말을 안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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