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22)
100년의 거짓말이 끝나는 날
원탁회의 결말.
칼로 2대 황제 후보를 가리는 원탁결전.
이 소식에 황도의 민심이 들끓었다.
당연히 황제는 무력이 강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너무 황당한 것 아니냐는 것까지.
원탁회의 결정을 인정할 수 없다는 여론들도 있었지만 일은 착착 진행되었다.
이제 황도의 수십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와 타루스의 사가르, 레오가의 키릭이 칼로 결판을 벌인다.
선수 대기실.
나는 눈앞의 두 놈을 바라보았다.
제국 재상 오드벨과 제국의 중앙대장군 레릭.
각각 제국의 문과 무를 대표하는 두 인물이건만…….
“오늘따라 더 멍청해 보이는군요, 레릭.”
“폐하의 앞이라서 널 살려 둔 게 잘못이군. 입으로 똥 싸게 해 줄까?”
“당신이 이미 싸고 있잖습니까? 연중무휴 화장실 냄새가 풍기니까요.”
서로 얼굴을 본 순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내가 한숨을 푹 쉬자…… 재깍 입을 다물지만.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 왜? 계속 서로 싸워. 얼른 싸워. 나는 오늘 죽어라 싸워야 하는데 너희 둘이 속까지 팍팍 썩여 주는구나.”
“아닙니다, 폐하! 이건 레릭을 본 순간, 저지능에 대한 멸시가 발동된 겁니다. 저 같은 고학력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지병이죠!”
“폐하, 명령만 하시면 당장 이 엘프 놈의 수급을 베어서 밖에 내걸겠습니다. 그냥 재상을 하나 새로 뽑으시죠?”
나는 한숨을 또 쉬었다.
오드벨이 허둥지둥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폐하. 죄송합니다. 제국군이 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한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너, 엘프인데 자꾸 개소리할래? 폐하가 우리 제국군과 침식을 같이하는 거야 당연하지.”
“그래도 환생하셨다면 나에게 가장 먼저 알려 주셨어야지.”
레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마음은 나도 안다만. 사실 내가 아니라 아르센이 가장 먼저 알았어.”
“뭐! 아르센이었다고? 대체 왜지! 왜 우리 둘을 놔두고 그 헌병대를 먼저 골라잡으신 건데! 우리들의 충성이 그리 못 미더웠단 말인가?”
“나도 그거 때문에 고민 많이 했다? 근데 아무래도 아르센이 우쭐한 거 보니까…… 그 새끼가 결혼해서인 것 같아.”
“역시 폐하는 기혼자를 더 예뻐하시는 건가. 하긴, 보통 직장에서는 기혼자를 우대하지. 음.”
“그런가? 우리도 얼른 결혼해야 하나?”
“하지 마. 니들은 절대 결혼하지 마.”
내가 우리 국민 둘 살렸다.
이 두 놈과 결혼한 여자는 복장이 터져서 화병으로 죽을 테니까!
여하튼 둘을 조용하게 만든 나는 이마를 눌렀다.
“오드벨, 민심의 동향은 어떠냐?”
“바람잡이를 다수 동원한 결과, 상당수의 민심이 폐하의 정책에 호의적으로 변했습니다. 역시 황제는 강해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가 잘 먹힌 것 같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황도에 바람잡이까지 뿌리셨네?”
“…….”
“아니, 화내는 거 아니야. 사실 할 거라고 생각했어. 생각했는데…….”
나는 상황 확인, 정보 정리에 들어갔다.
“너, 황후들이 내 유언이라고 가져온 거 보고 어떻게 생각했냐?”
“그야 날조죠.”
“……뭐?”
레릭이 경악했다.
오드벨은 레릭을 흘겨보았다.
“너도 그때 폐하의 마지막 모습을 뵈었으면서도 몰랐냐? 그때 폐하는 정정하셨다. 또 폐하는 그런 유언장을 남기실 분이 아니야. 신하라면 마땅히 주군의 성정과 생각을 깊게 헤아리고 한발 더 앞서서 미리미리 준비를 해 놔야지. 이 발 닦개도 못 될 짐승 놈아.”
“……잠깐, 너 황후들이 폐하의 유언이라고 거짓말을 한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다고!”
레릭이 기가 막혀서 부르짖었다.
오드벨은 코웃음을 쳤다.
“그걸 몰랐을까? 오히려 내가 적극 협조했는…….”
잘난 척 말하던 오드벨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빤히 보고 있다는 걸 그제야 상기하고.
오드벨이 얼른 바닥에 머리를 박으려고 하자 나는 손을 저었다.
“하지 마.”
“폐, 폐하. 신은 결코 삿된 마음을 품고 그런 짓을 한 게 아닙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
“…….”
오드벨은 내가 관련되면 미친 소리를 하지만, 평소에는 영민하다.
즉, 황후들이 유언을 날조했다는 걸 눈치챘을 놈이다.
내 시선에 오드벨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내가 머리를 박게 하거나, 기타 굴리는 건 일종의 구두 견책이다.
이후에 이 사건을 더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머리 박는 걸 막는다? 더 큰 벌을 내리겠단 의미다.
나는 건조하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상황을 말해 봐라.”
“……폐, 폐하의 시신을 발견하고 나서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때 황후들이 폐하의 유언이라고 가져온 걸 수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모른 척 덮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폐하의 죽음으로 권력의 공백, 너무 큰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건 나도 알아. 내 말은…… 그 유언을 누가 꾸민 거 같냐?”
이셀렌, 랑에이는 무관하다.
렌시엘은 지원사령부 관련만 날조했다.
12가문과 원탁회의를 누가 날조했는가?
오드벨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4황후 전하, 아니면 용공주겠죠.”
“그래.”
내 예상도 마찬가지지만, 오드벨의 생각을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오드벨, 네 생각으로는 12가문의 공통점이 뭐라고 생각하냐?”
“인간 귀족 가문이었습니다.”
“그런 단순한 대답 말고. 내 유언을 날조한 건 황후다. 그런데 12가문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을까?”
“…….”
오드벨은 한참 생각했다.
제국 행정을 책임지는 두뇌.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어떤 공통점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장 생각하기 쉬운 건, 황후들의 장기말입니다. 하지만 그걸로 보면 뒤죽박죽입니다. 실제로 황후들도 12가문을 통해서 뭘 획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요. 당시의 세력 순? 귀족원에는 더 강한 가문들이 많았습니다.”
“그래, 계속해 봐라.”
내 재촉에 오드벨의 목소리에 기세가 올랐다.
“재력? 이종족과의 친밀도? 아니면 전쟁 중에 세운 공헌도? 전부 아닙니다. 12가문 전부에 해당하는 공통점은 없습니다. 주사위를 굴려서 뽑았을지도요.”
“그랬을까?”
“아뇨. 아닙니다. 유언을 날조하는 데 그런 방식을 쓸 리 없어요. 당시의 혼란했던 상황, 정국 수습을 최우선으로 생각할 겁니다. 즉, 정상적이라면 자기들에게 도움이 되는 가문들을 우선해서 넣어 두고, 눈속임으로 두세 개를 추가하는 정도가 정석입니다.”
“그러면 네 결론은?”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어떤 법칙이 있습니다. 황후들은 그걸로 결정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벨은 신바람이 나서 말했다.
“어떤 규칙인지는 몰라도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정보이고, 상당히 귀중한 겁니다. 그거까진 확신할 수 있…….”
덥석.
말하는 오드벨의 멱살을 레릭이 잡았다.
레릭은 아까의 말다툼과는 차원이 다르게 화내고 있었다.
“넌 황후들이 폐하의 유언이랍시고 장난질을 친 걸 알면서 모른 척했단 거냐!”
“…….”
오드벨은 입을 다물었다.
괴로운 표정.
하지만 이내 정색했다.
“그러면 어째야 했다는 거냐? 폐하가 돌아가셨을 때의 그 혼란, 황후들이 가져온 유언장이 가짜라고 소리치랴? 그러면 더욱 큰 혼란이 벌어졌을 거다!”
“그래도 폐하의 유지라는 거짓말로 세상을 속이다니! 나는! 나와 제국군은 그 유언을 폐하의 뜻이라고 계속 믿어 왔단 말이다!”
레릭은 노호성을 지르면서 문밖을 가리켰다.
“저 밖에 가득한 민중! 2대 황제의 탄생을 기다리는 황도의 백성들은 뭐냐! 네놈과 황후들은 100년이나 그들을 속였냐? 너는 그들에게 가서 사실 그게 황후들이 만든 가짜 유언이었다고 할 수 있겠냐!”
“…….”
“오드벨! 난 원래도 네놈이 싫었지만 이건 절대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는 100년이나 속았다고!”
레릭은 분노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받아치려던 오드벨은 입을 꽉 다물었다.
나는 손을 저었다.
“레릭, 놔라.”
“……폐하. 이놈을 용서하시는 겁니까?”
“일단 놔.”
“…….”
내가 거듭 말하자 레릭은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오드벨을 놓아주었다.
오드벨은 나를 돌아보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거짓임을 알고 눈을 감은 죄, 벌을 받겠습니다. 단, 부디 그 벌은 폐하가 다시 황제가 되신 다음에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폐하가 다시 황제가 되신다면 기쁘게 죽을 수 있습니다.”
“난 아직 결정을 안 했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분노하는 레릭과 숨겨 왔던 오드벨, 두 사람에게 들으라고.
“당시에 그런 유언이 필요했다는 건 납득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12가문을 정한 방법, 황후들에게 숨겨진 의도가 있던 것 같다. 판단을 내린다면 그다음이다.”
“예, 최선을 다해서 받들겠습니다.”
“레릭, 네 분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래도 이놈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는 일은 잠깐 미뤄 다오.”
레릭은 한숨을 섞어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12가문과 원탁회의, 황후들의 임시 통치.
그걸 내 유지라고 100년을 믿고 따랐던 레릭으로서는 어마어마한 분노와 당혹일 것이다.
나는 거듭 말했다.
“일이 벌어진 경위에 대해서 완전히 안 다음에 행동을 결정해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일단 가슴에 품어 두겠습니다.”
레릭도 애써 납득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만 가자.”
원탁결전의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가 정해졌다.
장소는 제국 체육관.
먼저, 무대 위에서 키릭과 사가르가 싸운다.
승자는 충분한 휴식을 하고, 그 승자가 나와 싸운다.
관객석은 이미 만석, 서서 보는 사람들도 가득했다.
현재 추정 관객 20만, 시간이 지나면 더 몰려들 것이다.
물론 나는 VIP석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다음 시합을 치를 대전자이니 이 정도는 당연하지.
“…….”
그리고 내 옆에는 메이호가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옆에 앉는 게 너무너무 싫다는 반응.
그래도 선글라스로 표정을 감추고, 자리를 지킨다.
옆에 리세라와 미리엘이 있으니까.
리세라는 눈이 불편하단 사실을 이미 알고, 미리엘은 어리다.
자기가 함부로 자리를 비울 수 없단 정도는 안다.
“또 이 자리를 관객석의 사람들, 황도의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지. 정치를 고려하니 함부로 못 굴어.”
“……뭐?”
메이호는 날카롭게 말했지만 나는 웃기만 했다.
랑에이가 주변머리가 없는 대신에, 메이호가 대신 이런 주변의 시선에 민감했다.
어머니를 돕겠다고 익힌 거다.
나는 앞만 보며 말했다.
“나에 대한 악감정이 많은 건 안다. 하지만 오해다.”
“귀가 썩을 것 같거든? 조용히 안 해?”
“네 어머니가 그럴 사람이더냐?”
“시끄러워.”
내가 타일러도 메이호는 딱 잘랐다.
랑에이의 불륜 상대라고 오해한 내가 뭔 말을 해도 무시할 기세다.
“…….”
리세라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거들어 주고 싶단 표정.
나는 가볍게 말했다.
“괜찮다. 내가 하마.”
“……누구에게 말하는 거야?”
메이호는 인상을 팍 쓰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그다음에는 리세라를 돌아보았지만, 리세라는 타이밍 좋게 미리엘을 돌아보고 있었다.
메이호도 미리엘을 보고는 움찔하고 입을 다물었다.
메이호에게 셋째 미리엘은 아직 어린 귀여운 여동생, 험악한 언행을 보여 주고 싶진 않은 거지.
나는 무릎에 손을 얹고는 말했다.
“아니라고 말해 봐야 지금은 믿고 들을 마음은 없나 보구나. 나를 좋아해 달란 이야기는 안 한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 이야기는 할 수 있겠지?”
“너랑 할 이야기는…….”
“12가문에 대해서 뭘 알고 있지? 숨겨진 비밀이 있었나?”
메이호는 나를 돌아보고는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노려보았다.
금색 동공이 유달리 날카롭다.
메이호는 나직하게 말했다.
“당사자인데 아무것도 모르나?”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걸.”
“루크 케드릭을 상대했다면서? 아직도 몰라?”
“…….”
그 이름이 갑자기 왜 나오지?
메이호는 싸늘하게 웃었다.
“머리가 좋은 인간이라고 소문이 자자한데 자기가 해 놓고 모르나 보네.”
“…….”
내가 검토하고 있자 메이호가 심술궂게 말했다.
“힌트를 줄까? 카라카스에서 인간과 일곱 이종족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뭐지?”
“뭐?”
“너무 많이 말했어.”
“…….”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나와 랑에이 사이에 나온 딸, 메이호는 호랑이 수인이다.
하지만 그녀도 스스로를 이종족이라고 일컬었다.
인간과 이종족이라는 분류, 이건 종족 차별적인 표현이 아니니까.
다들 받아들이는 정설. 인간이 모든 종족의 원…….
“이걸로는 모자라? 힌트를 더 줄까?”
메이호가 곰살맞게도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지나치게 친절한데?”
“말해 줄 수도 있어. 당장 정리한다면.”
“…….”
누가 들을지도 모르니 에두르는 말.
랑에이와의 관계를 정리하라는 협박이다.
메이호는 날카롭게 말했다.
“그게 오래갈 순 없어. 미친 짓이야.”
“내가 아니라 상대가 더 뜨거운데?”
“……죽어 볼래?”
메이호의 목소리가 낮아지고 험악해졌다.
치밀어 오르는 살의, 당장이라도 나에게 덤벼들 위협이었다.
호랑이의 딸은 호랑이.
보통 사내라면 오금이 저리겠지만, 나는 외려 흐뭇했다.
메이호가 이젠 남남이라고 부르짖고 뛰쳐나갔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랑에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겠지만.
“……나를 깔봐? 후회하게 해 주겠어.”
내 웃음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메이호는 고개를 돌리고 앞을 보았다.
나와는 더는 말하지 않겠다고.
그때 사회자가 말했다.
“지금부터 원탁결전! 2대 황제 후보를 뽑는 싸움을 시작하겠습니다!”
100년의 거짓말을 끝낼 싸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