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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21화 (120/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21)

이 제국을 지켜 낼 사람은

내가 랑에이와 포옹하고 그 이상을 하려던 게 들켰다.

당연하지만 누가 봐도 위험하다.

나는 시릭 카라카스지만, 보통 이걸 모르니까.

그런데 그걸 하필 딸아이에게 들켰다?

자기 엄마랑 90년 이상 대립하고 있다는 메이호한테?

랑에이는 당황하다가 얼굴을 굳혔다.

“메이호, 인사해라. 이 사람은…….”

“……닥쳐! 배신자! 아빠를 또 배신했어!”

쩌렁쩌렁한 고함.

메이호의 갈라진 목소리에는 한과 슬픔, 절규가 어려 있었다.

랑에이마저도 멈칫할 정도로.

메이호는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 난 당신을 절대로 용서 안 해. 절대로! 두 번 다시 나한테 말 걸지 마!”

“…….”

메이호는 그 말을 남기고는 달려가 버렸다.

남겨진 우리 둘은 멍하니 서 있었다.

랑에이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려고 하자 나는 얼른 부축했다.

“야, 랑에이.”

“…….”

“괜찮아, 메이호에게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말이 하나도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랑에이는 한숨을 길게 쉬더니 자기 발로 섰다.

“시릭, 신경 쓰지 말고 바깥일에 집중해라.”

“야, 메이호가…….”

“애들은 신경 쓰지 마. 늘 저러니까.”

“…….”

아닌데.

누가 봐도 지금 메이호는 크게 상심했다.

하지만 랑에이는 고집스럽게 말했다.

“집안의 소란으로 네가 밖에서 하는 일이 어지러워져서는 안 돼. 집안 단속은 나한테 맡겨라. 이셀렌과 의논해서 메이호가 밖에 이야기 못 하게 잘 조치할 테니까.”

“……일단 알았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할 말이 없지.

다시 모인 원탁회의는 남은 사안을 처리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대략적인 개괄은 정해졌으니까 이제 남은 건 황도에 공표하는 수순, 시합 일시, 장소, 뭐 그런 행정적인 문제들이었다.

각 가문들의 기여 문제가 있지만 파르메가 논리적으로 진행했다.

원탁회의의 결론을 내는 원탁결전, 그 큰 그림이 거의 정해졌다.

그리고 밤이 되었다.

황성의 객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마주 앉은 건 리세라였다.

은밀한 이야기라서 둘뿐이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메이호가 친엄마인 랑에이와 문제가 생겼다고 그걸 이셀렌이나 렌시엘에게 말할까?

또래의 형제자매들에게 불평을 늘어놓겠지.

소거법으로는 동성.

미리엘이 아직 미성년이라는 걸 감안하면 리세라에게 말하리라.

하지만 이런 민감한 화제를 딸아이에게 상담하는 건…… 아빠로서 부끄럽다.

“메이호 언니에 대해서죠?”

“……그래.”

리세라가 내 속을 읽은 모양이다.

이렇게 된 거, 나는 솔직하게 물었다.

“아는 게 있으면 좀 말해 줘라. 어떻게 된 거야?”

“우리들은 다들 아빠를 좋아했지만, 메이호 언니는 특히 더 좋아했어요.”

뭐, 내가 늘 목말 태워 주긴 했지.

나는 새삼 과거를 회상하면서 말했다.

“나는 검은 머리고 랑에이는 흰머리인데 자긴 왜 노랑머리냐고 울었지.”

“예, 그러셨죠.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많은 일들이 있었어요. 다들 아버지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요. 특히 메이호 언니는 심각했어요.”

리세라는 잠시 말을 아꼈다.

하기 어려운 말을 어떻게 포장할까 고민하는 기색.

나는 딸이 불편하지 않게, 내가 먼저 말했다.

“나, 시릭이 죽은 게 황후들의 음모라는 소문 때문이냐?”

“……사실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메이호 언니는 여러 어머니들을 믿지 않아요. 어머니들이 아버지를 죽인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어요.”

“야, 그건…….”

내가 표현할 단어를 찾는데 리세라가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들은 10년 동안 얼굴도 마주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그리된 건지 우리들도 많이 궁금해했거든요. 그리고 메이호 언니는…… 어머니들이 잘못한 거라고 굳게 믿었고요.”

“…….”

“메이호 언니는 무슨 일인지 랑에이 어머니에게 몇 번이나 물어봤대요. 하지만 결국 대답을 듣지 못했고…… 결국 언니는 어머니들이 잘못했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생각이 더 굳어졌고요.”

그래서 랑에이와 메이호의 사이가 크게 벌어진 건가.

좀 이해가 간다.

나는 이마를 주먹으로 누르면서 정리했다.

“원탁회의에 난입해서 결혼하겠다는 선언도, 랑에이나 다른 황후들과는 전혀 의논하지 않은 거지?”

“예. 메이호 언니는 다른 어머니들도 잘 믿지 않아요.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정말 보통 일이 아니군.”

“……제가 언니에게 말씀드릴까요?”

“아니, 그러지 마. 역효과다.”

지금 메이호는 크게 오해했다.

내가 시릭이라는 걸 밝힌다?

절대 안 믿는다.

원래 사람을 설득하려면, 일단 들어 볼 마음이 되게 만드는 게 기본 조건이다.

지금 메이호의 입장에서는…….

수십 년을 넘게 싸운 어머니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는데, 사실 그게 아버지의 환생이라는 걸 믿으라고?

다들 짜고 날 속이려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지.

보아하니 리세라는 메이호와 이야기가 통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역효과일 거다.

나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리세라, 일단 메이호가 진정되면 내가 달래고 잘 설득해 보마. 그 전까지는 네가 메이호 옆에 있어 줘라. 힘들겠지만 이야기 들어 주고, 메이호 편이 되어 줘.”

“……괜찮으세요? 아버지 마음도 편찮으실 텐데요.”

“아냐. 이런 부탁 해서 내가 오히려 미안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분명히 나와 너희들의 어머니 사이에서 큰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너희들의 앞길에 장애가 되거나, 너희들의 마음이 다치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리세라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황제이던 시절, 너무 힘이 들어서 너희들이 그런 고민을 하는 것도 모르고 제대로 돌아봐 주지 못했구나. 미안하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벌충하겠다.”

“아버지, 너무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아니다, 이건…….”

“우리들을 위해서 억지로 어머니들과 화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리세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멈칫하는데 리세라는 다시 말했다.

“물론 그러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무리한 봉합은 결국 다시 문제를 불러오니까요. 저는 그저 아버지가 이렇게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기쁘고 든든해요.”

“…….”

리세라는 천천히, 느릿하게 손을 뻗어서는 내 무릎을 누르고 있던 손을 맞잡았다.

아직 눈이 완전히 보이는 게 아니라서, 느리고 조심스럽게.

리세라는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도 만약, 만에 하나 그 시절을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그건 아버지의 일방적인 인내가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

갑자기 눈시울이 확 뜨거워졌다.

딸에게 이런 말을 듣다니.

황제 시절에 내내.

밤마다 혼자 먹었던 식사, 술상이 떠오르는 동시에.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나는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난 정말 행복한 아버지야.”

“그래요, 이러다가는 정말 메이호 언니랑 결혼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야,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는…….”

내가 기겁하자 리세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요. 언니도 사실을 알면 엄청나게 부끄러워하실걸요. 나중에 언니가 무슨 말을 할지 엄청 기대돼요.”

“……우리 세라는 생각보다 짓궂구나.”

“전 원래 장난치고 노는 걸 좋아하는걸요. 아시잖아요?”

그래.

숨바꼭질이라면서, 내 집무실 책상 아래에 숨어서는 빤히 올려다보는 게.

그러다가 살짝 잠들어 버린 네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모른단다.

“…….”

나의 보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세라는 이야기를 돌렸다.

“그런데 사실…… 언니가 좀 이상한 이야기를 했어요.”

“응?”

“황성을 떠난 게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12가문에 대해서 조사를 하셨다고 해요. 아버지의 유언, 대체 무슨 기준으로 그 가문들을 선택하신 건지 이해가 안 간다면서요.”

그래, 사실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다.

12가문과 원탁회의는 내 유언이라 날조된 것, 즉 황후들의 그림이다.

이셀렌이나 랑에이, 렌시엘은 아는 바가 없다.

그런데…… 이 12가문은 무슨 기준으로 고른 걸까?

황실에 대한 충성도? 가문의 세력?

둘 다 아니다.

아까 다르갈과 월레스와 모여서 의논해도 뚜렷한 기준은 나오지 않았고.

이게 메이호가 원탁회의에 난입했던 이유인가?

리세라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는 어머니들을 믿지 않았어요. 그래서 12가문과 어머니들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지 않나 싶어서 캐 보신 모양이에요.”

“그런데?”

“중요한 걸 알아내셨다고 했어요. 그게 뭔지는 듣지 못했지만요.”

리세라는 잠시 뒤에 말했다.

“그리고 하나 더,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뭐가?”

“메이호 언니는 지금 제 눈이 약해진 걸 보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어요. 전 설명하려면 많이 말해야겠다 싶었는데, 그냥 넘어가 주시더라고요.”

나는 머릿속에 새겨 두고는 말했다.

“혹시 메이호가 먼저 말하면 뭔지 말해 주렴. 하지만 억지로 먼저 물을 필요는 없단다.”

“중요한 일이잖아요.”

“아니, 어차피 내가 이길 거다. 그다음에 알아보면 될 일이고.”

나는 힘차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리세라도 밝게 웃었다.

“예, 믿고 있을게요. 아버지.”

칼로 2대 황제 후보를 정하는 결전.

원탁결전에서 싹 다 없애 버리면 된다.

* * *

황성의 중앙성을 기준으로 북쪽에는 후궁이 있다.

남쪽, 남성은 손님들이 머무는 곳이고.

그리고 동성(東城)은 각종 오락시설들이 있다.

황제 시릭의 방침.

일한 만큼 쉬는 것도 중요하다.

공연장을 시작으로 수영장, 체력 단련실, 카페, 각종 문화시설…….

관리들은 물론이고 황제인 시릭도 종종 이곳에 와서 쉬었다.

황후와 그 자식들도 마찬가지.

“…….”

메이호도 시릭과 랑에이의 손을 잡고 여기서 놀았다.

오래전의 이야기.

100년, 아니 115년 전의 이야기다.

동성의 꼭대기.

제국기가 휘날리는 좁고도 좁은 깃대에 외롭게 선 메이호는 한숨을 흘렸다.

손에는 술병 하나.

주방에서 적당한 걸 하나 받아 왔다.

“정말 싫다…….”

이럴 때는 아버지만 떠오르면 좋겠는데.

아버지의 추억을 떠올리면 어머니도 떠오른다.

두 사람의 손을 잡고, 여길 뛰어다니던 시절이 생각나 버린다.

“…….”

하지만 그 시절은 사라졌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갈라지고 남남이 됐다.

이유? 모른다.

어머니에게 몇 번이고 물어봤는데도 대답해 주지 않으셨고.

그러면 아버지에게 물어보겠다고 하자 랑에이는 정색하며 꾸짖었다.

그런 일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어머니의 진노에 처음에는 얼어붙었던 메이호는…… 그게 10년이 되어 가자 반항심이 생겨났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가족이 깨져 버렸단 말인가?

가정 파탄의 가장 흔한 이유는 불륜이다.

하지만 황실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아버지, 시릭 카라카스는 황제. 여러 번 결혼하는 게 당연했다.

오히려 너무 숫자가 적다고, 부인을 더 들이라는 신하들의 간청도 아버지는 물리쳤다.

자식인 그녀가 봐도 금슬 좋은 부부였다.

그러면 어머니가 바람이라도 피웠나?

하기 싫은 상상,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된다.

일곱 분이 일제히 그런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하아아아…….”

그래도 참고 지내면 언젠가 회복되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덜컥 돌아가셨다.

메이호가 추억하던 그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뛰어놀던 시절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절망 그리고 분노.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서 모였을 때.

가족들만이 모인 자리에서.

내내 참던 메이호는 결국 폭발해서 랑에이와 황후들에게 쏘아붙였다.

아버지가 죽은 건 전부 당신들 때문이라고.

아버지가 잘못하셨을 리 없으니까, 전부 당신들이 잘못해 놓고 제대로 사과하지도 않아서 일이 이렇게 된 거라고.

메이호는 자기가 말하고도 너무 심했다 싶어서 후회했지만…… 더 경악스러운 건 다음이었다.

황후 중 누구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다들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할 말이 없다고 입을 다물 뿐.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

아연했다.

믿고 싶지 않았던 걸 확인한 기분이었다.

누가 부정해 주기를 바랐는데.

그 이후로 메이호는 랑에이와 다른 황후들을 믿지 않았다.

어찌 믿겠는가?

12가문이 뭔지 알아 버렸으니 더욱.

“……더 실망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배신하다니.”

성질이 나서 다시 쏘아붙이러 돌아간 방에서.

랑에이가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

그때는 절망스럽고 비통스러웠지만…….

“……그래, 외로우셨어? 마음대로 해.”

어차피 이제 남남이다.

알아서 하라지.

메이호는 이를 사리물었다.

“나는 아빠 편이야. 나만큼은…….”

어머니가 배신했으니 그녀가 아빠 편을 들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 이 제국을 지켜 낼 사람도 오로지 그녀뿐이지.

12가문?

그 더러운 허위를 밝힐 때가 왔다.

“두고 봐……. 두고 보라고. 내가 당신들이 저지른 일을 똑똑히 밝혀 줄 테니까.”

메이호는 술을 마시면서 중얼거렸다.

눈가에 고이는 눈물은 애써 모른 척하고.

어머니를 아끼는 마음이 산산조각 나는 괴로움마저 모른 척하고.

칼로 2대 황제 후보를 결정하는 싸움.

원탁결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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