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20)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2황녀의 방문과 결혼 선언.
그리고 내 거절까지 단숨에 이뤄졌다.
메이호는 원탁 위에 앉은 채로 나를 삐뚜름하게 보았다.
“너가 리젠 리브라타? 요즘 잘나간다면서? 그래서 나랑 결혼 안 하겠다?”
“하하하, 제안은 무척이나 감사드립니다만.”
“정치적으로 불리해진다는 건 알잖아? 속생각이야 어쨌건 생각이라도 해 보겠다고 둘러대야 할 텐데?”
“…….”
오, 내 딸아이가 지혜롭구나.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지만…… 다들 나를 묘하게 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인지 몰라서.
메이호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아니면 눈치를 채고 있는 건가? 이 원탁에 모인 게 어째서 너희들인지?”
“예?”
그야 12가문의 일원이니까.
하지만 당연히 알고 찾아왔을 메이호의 문장은 이상하게 어색했다.
우리들이 모인 게 아니라, 모인 게 우리들이라고?
메이호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공통점이…….”
터어엉!
그 순간 회의실 바닥이 크게 흔들렸다.
훌쩍 뛰어서, 단숨에 방 안으로 어와 착지한 여자가 빚어낸 충격파였다.
희고도 검은 머리.
늠름한 미모, 2황후 랑에이였다.
“……메이호, 이 무슨 경우 없고 버릇없는 짓이지!”
랑에이는 원탁 위에 앉은 메이호를 보고는 꾸짖었다.
내 앞에서야 개냥이, 아니 호냥이처럼 구는 랑에이지만 정색하면 이렇다.
원탁회의의 참가자들도 다들 랑에이의 등장에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었다.
메이호는 비스듬하게 돌아보다가…… 천천히 선글라스를 썼다.
“귀찮은 여자가 왔네. 다들 내가 했던 이야기는 잘 기억해. 난 농담이 아니니까. 각오했으면 찾아오고.”
“당장 나와라.”
랑에이가 딸에게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사실 그럴 만했다.
지금 메이호는 원탁회의를 어지럽혔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랑에이는 내 정체를 아니까 더 그렇지.
메이호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먼저 걸어 나갔다.
“…….”
랑에이는 원탁을 향해서 머리를 숙여 보였다.
“어린 딸아이가 철없는 짓을 저질렀다. 사과하겠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몰라도 다들 못 들은 척, 웃어넘겨 줬으면 한다.”
“으으음…….”
사람들이 신음을 흘렸다.
고개를 든 랑에이는 나를 흘끗 보았다가 나가 버렸다.
황후와 황녀가 사라지자 원탁은 조용해졌다.
파르메가 말끝을 흐렸다.
“……좀 정신이 없는 상황이군요. 일단 대략적인 논의는 끝났으니 싸울 일시와 장소, 그리고 자질구레한 합의를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을 취합하면 될 것 같군요.”
“거,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다들 넋 나간 얼굴이고 정신없어 보이는구만.”
사가르가 툭 말했다.
“아니면 2시간 정도 쉬고 오후 느지막하게 다시 모이든가.”
“……그래요. 다들 생각을 추스를 필요가 있네요. 그러면 2시간 뒤에 다시 모이기로 하겠습니다.”
파르메가 받아들였다.
메이호의 선언만이 아니라 그 뒤, 랑에이의 언동까지 문제였다.
다들 새삼스럽게 정치적인 셈을 하는 게 보인다.
분위기가 어수선해졌으니 쇄신할 필요가 있다.
나도 일단 회의실에서 나왔다.
황성의 정원으로 향하는 내 뒤에 다르갈 사지타리와 월레스 스코피오가 따라붙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다르갈이 급하게 묻자 나는 정원의 정자를 가리켰다.
나도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다.
정자에 앉자 다르갈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이것도 본부장님이 생각하신 연출입니까?”
“아니야.”
“……정말 아닙니까?”
월레스가 참견했다.
“다르갈 군, 본부장님도 정말 모르시는 게 맞네. 적어도 랑에이 황후의 언동에서는 계산이 느껴지지 않았어. 솔직히 말해서…….”
월레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가정집에서나 보이는 반항기의 딸과 속 썩이는 어머니 같더군.”
“그렇게 보여도 그렇게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황녀와 황후 사이에 골이 패었다는 의혹을 살 수 있으니까요. 그것도 12가문의 원탁회의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다르갈이 나를 보고 말했다.
“본부장님이 최종 후보로 남으신 다음에 이종족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사실 이 인정이라는 게 되게 모호하게 구술되어 있는데…… 보통 황후들의 인정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황녀의 인정도 가능하다? 황후들을 제치고 그 자식들의 인정을 받는 방법도 있다?”
다르갈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택지가 늘어난 겁니다. 거기다가…… 메이호 황녀는 아름답더군요.”
“그런가? 내가 보기에는 불만이 많은 아가씨 같던데. 그 나이대 아가씨는 예민하지.”
“수인 아닙니까? 저보다 나이는 훨씬 더 많을 텐데요.”
“그건 인간의 관점이야. 거기다가 부모 자식이라는 거, 더 복잡한 문제야. 하물며 황후들은…… 폐하를 시해했다는 의심도 받으니까.”
월레스가 말하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원탁회의에 참석한 우리들의 공통점이 뭐지?”
“인간입니다.”
다르갈이 냉큼 말했다.
나는 혀를 찼다.
“그거야 우리 모두 다 알아. 그런데 메이호는 왜 굳이 찾아와서 그런 소리를 했을까?”
“예? 그게…….”
“랑에이 황후는 주변머리가 없고 정치에 신경을 안 써. 하지만 딸인 메이호는 신경을 쓴다.”
자기 어머니의 부족한 점을 메워야겠다고 열심히 공부했다.
나에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고.
즉, 메이호의 이번 원탁회의는 감정적이고 무분별한 난입이 아니라…… 정치적인 계산이 동반된 것이다.
월레스가 생각하고는 말했다.
“만약 원탁에서 최종 후보가 결정되고 그가 인간 남자라면, 황제의 다섯 딸 중에 한 분과 결혼하기로 이야기가 흐르겠죠. 하지만 장녀분과 셋째 따님은 나이가 걸리고 넷째분은 아이를 낳지 못하십니다. 그러면 메이호 황녀님이나 막내 황녀님일 텐데…….”
“메이호의 이 난입은 황후들과 의논하고 한 게 아니야. 돌발 행동이지. 그리고 우리가 모인 게 아니야. 모인 게 우리라고 했어.”
다르갈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은 이야기가…… 아니군요.”
“그래. 달라.”
우리가 모였다는 표현은,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다.
모인 게 우리라는 말뜻은, 모집 공고를 보고 모였다는 뉘앙스다.
주어가 다르다.
월레스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공통점이라는 말을 하려다가 마셨죠.”
“종족은 전원 인간, 성별은 남녀죠. 나이는 아닙니다. 12가문의 일원? 그건 다 아는 사실인데……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난입이었다면 고작 그 말을 하려고 황후와 대립까지 불사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르갈은 말을 받았다.
우리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 생각했다.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는다.
“출신 지역? 아닙니다. 직업도 아니고요. 인간 귀족, 12가문이라는 것 말고는 어떤 공통점도 없어 보이는데요.”
“뭐라도 좋으니까 말해 봐.”
메이호를 다시 만나서 물어볼 생각이지만.
미리 정보를 파악해 두는 게 일 처리가 빠르지.
랑에이와 메이호가 대화할 시간도 주고.
다르갈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건 정말 뜬금없는 이야기입니다만…… 본부장님, 마력 각성을 늦게 하셨죠?”
“그래. 왜?”
“그 전까지는 마력이 없으셨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르갈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12가문에 대해서 이래저래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12가문의 일원인데 마력이 없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뭐?”
제국의 모든 귀족들은 마력을 쓸 줄 안다.
이건 상식이다.
마력이 아예 없는 경우는 리젠 리브라타가 최초라고 생각했는데…….
다르갈이 말했다.
“제가 파악하기로는 두 건이 더 있었습니다. 약 23년 전, 제 아버지의 막냇동생이 마력이 없으셨습니다. 그걸 비관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고요. 그리고 약 70년 전, 바르고나 집안의 장녀가 마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
나, 리젠까지 합치면 세 건이다.
이러면 우연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월레스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만약 그런 경우가 있다면 가문의 수치라고 여겨서, 가능한 한 숨기려고 했을 겁니다. 드러나지 않은 사례가 더 많을 겁니다.”
“다르갈. 보다 은밀하게 정보를 모아 봐라. 나는 잠시 다녀오마.”
정보를 쥔 당사자, 메이호와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봐야겠다.
황성은 넓다.
랑에이와 메이호가 어디로 갔을까?
사람 눈에 띄는 곳은 아니겠지.
그러면 랑에이가 자기 후궁으로 데려갔나?
“후궁으로는 내가 못 가는데…….”
그때 복도 모퉁이에서 하인켈이 나타났다.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하인켈이 내게 말했다.
“랑에이 황후 전하와 메이호 황녀님은 지금 남성 수리관의 3층에 계신다고 합니다.”
“그래? 알겠다.”
이셀렌이 당장 알리라고 말한 거겠지.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더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은 가능한 한 빼라.”
“예, 알겠습니다.”
예민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을 테니까.
이셀렌이 조치를 바로 취했는지, 가는 길에 점점 인적이 줄어들었다.
수리관으로 들어가서 3층으로 오르는데……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포효와 고함.
“……으음.”
가정교육, 자식 다루는 법은 종족마다 다르다.
랑에이는 보통 대범하고 너그럽지만 자식을 혼내야겠다 싶으면 진짜 애들 눈물 빠지게 했다.
오히려 내가 옆에서 말려야 했지.
내가 머리를 긁으면서 계단을 오르는데…….
달려오는 메이호와 엇갈렸다.
“…….”
선글라스를 써서 눈은 안 보인다.
나를 보고 잠시 멈칫했던 메이호는 곧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아, 음.”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일단 3층으로 올라갔다.
랑에이에게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3층 가장 끝 방.
바닥이 갈라진 위에 랑에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축 늘어진 호랑이 귀와 꼬리.
어지간히 낙담하고 있었다.
“랑에이.”
“…….”
랑에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는 나를 보았다.
힘없는 표정.
“……원탁회의는?”
“잠시 쉬고 왔어. 이리 와.”
“…….”
랑에이는 잠깐 망설이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메이호랑 싸웠어.”
“뭐, 부모 자식 간에도 싸울 수 있지. 화해하면 돼.”
내가 정석적으로 말해도 랑에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어. 혹시 싸운 게 오래됐냐?”
“……90년은 넘었어.”
세상에.
내가 깜짝 놀라는데 랑에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내가 먼저 사과해도 안 듣고, 갈수록 심해져. 그나마 리세라나 애들하고는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뭐 때문에 싸우는데?”
“……말하기 싫어.”
랑에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랑에이를 끌어안았다.
내 자식 때문에 아내가 기운이 빠져 있는데 모른 척할 순 없지.
내가 안아 주자 랑에이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다 해결해 줄게.”
“……진짜?”
“그럼. 당연히 그래야지.”
나하고 아내 사이에 문제가 있지만, 자식은 별개다.
난 내 아이들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내와 자식 사이에 금이 가길 바라지 않는다.
아내와 자식이 서로 싸워서 집안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아빠가 중재를 해 줘야지.
“메이호가 이상한 소리를 했지만 괜찮아. 그냥 취소시키면 되지. 취소 안 돼도 어차피 내가 다 잡고 이길 테니까 문제 하나도 없어.”
“……시릭.”
랑에이는 내 옷자락을 잡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랑에이는 담백한 거지, 무정한 게 아니다.
다른 아이들도 자기 자식이라고 여기면서 예뻐하고 아끼는 게 랑에이다.
그런데 자기 딸하고 100년 가까이 대립하고 있으면 속이 어지간히 아팠겠지.
“이런 문제는 진작 말하지 그랬어. 바로 해결해 줬을 텐데.”
“……신경 쓰게 하기 싫어서.”
나약한 말.
나는 멈칫하고는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혹시 내 문제인가?
월레스가 말했던 문제, 황후들이 날 시해했다는 억측으로 자식들과 사이가 벌어진 건가?
리세라나 미리엘, 오르카는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리세라는 영민한 애고, 미리엘은 아직 어리다.
오르카는 암살여왕을 믿고 있었고.
“후우우우…….”
돌이켜 보면 나는 너무 갑작스럽게 죽었고, 100년이나 집을 비웠다.
그간 부모 자식 간 사이에 금이 갔어도 이상하지 않다.
“괜찮아, 랑에이. 괜찮아. 내가 있잖아.”
“…….”
랑에이는 내 품에서 고개를 떼고는 올려다보았다.
금색 눈동자에 어린 눈물이 아름답다.
살짝 젖은 입술이 움직인다.
“뽀뽀하고 싶어.”
“…….”
“안 돼?”
너무 적나라한데.
랑에이는 나를 빤히 보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호랑이 귀가 쫑긋쫑긋 움직이고 하얗고 검은 꼬리가 좌우로 바쁘게 움직인다.
내가 시선을 피하자, 랑에이는 내 손목을 꽉 잡았다.
“이셀렌하고 렌시엘하고는 했으면서.”
“야, 그거야…….”
아니, 이런 건 변명할수록 없어 보이지.
랑에이는 빤히 보면서 내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 랑에이가 나보다 힘이 센가?
아니, 나도 6계위라서 이제…….
“뺨은 해도 돼.”
나는 생각을 접고 말했다.
딸하고 사이가 벌어져서 상심한 배우자에게 이 정도 위로는 해 줘야지.
랑에이는 아쉬운 얼굴을 하다가 살짝 발돋움해서 내 뺨에 입을 맞췄다.
길고도 길게.
한참 뒤에 랑에이가 입술을 떼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가늘어진 눈, 젖어 든 입술이 너무나 아름답다.
랑에이는 배고픈 호랑이처럼 보챘다.
“더 하고 싶어.”
“알았어. 그럼 반대쪽, 이번이 마지막.”
“…….”
불만이 가득한 시선.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하기 싫어?”
“아니, 할래.”
랑에이의 입술이 가까워진다.
나는 랑에이의 머리를 끌어안으려다가 멈칫했다.
등 뒤의 인기척.
불안한 마음에 돌아보니.
“…….”
복도에 선 메이호가 포옹하는 우리 둘을 보고 있었다.
경악한 얼굴로.
“아, 그래서 거절한 거였구나. 그래서…….”
“…….”
내가 아까, 다들 보는 앞에서 메이호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
그걸 오해해서 넘겨짚은 메이호가 랑에이를 노려보았다.
“배신자…….”
한 맺힌 목소리.
그 순간, 나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구차한 변명을 꺼내 들었다.
“오해다!”
가족끼리 그러겠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