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18)
우리 모두 급발진
원탁회의 1일 차 저녁.
황성의 초저녁.
객실.
나는 테라스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탁.
내 뒤쪽에 떨어지는 발소리.
그리고 다가와서는 내 어깨를 잡는다.
“시릭.”
“누가 들을지도 몰라서 무섭다니까.”
“확인하고 말하는 거야.”
이셀렌은 몸을 기울여서는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내 가슴으로 떨어지는 반짝거리는 은발.
둘만 있는 자리니 응석 부리는 거다.
나는 내 가슴 앞에 모인 이셀렌의 팔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정황은 어때?”
“예상대로 12가문의 이들끼리 식사와 밀담을 반복하고 있어. 사지타리와 스코피오가 여론을 잘 조성하고 있어. 반 이상은 네 의견에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었어. 다만 문제는…….”
“바르고나가 남았냐?”
“……응, 바르고나와 프리콘, 시피즈는 아직 관망 중이야. 서두를 것 없다는 의견. 바르고나가 주축이야.”
“하긴.”
파르메 바르고나.
오늘 회의 진행을 맡은 여자인데 제법 영민했다.
나중에 잡무 처리 맡기기에 딱이겠다.
“칠죄신의 사도 후보도 대략 나왔군.”
“그래?”
“사도의 목적은 원탁회의를 통해서 2대 황제로 등극하는 거야. 내가 내민 칼로 해결 보자는 방식, 거기에 뛰어든 녀석이 사도겠지.”
“…….”
“정말로 12가문 전원이 대표로 나서지는 않아. 이합집산과 사전 교섭이 오가겠지. 출전을 포기하는 대신에 후보에게 응분의 대가를 약속하는…….”
꼬옥.
이셀렌이 더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내가 의아해서 돌아보려고 해도 각도상 돌아보는 게 안 된다.
정작 이셀렌은 금방 손을 풀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이만 갈게.”
“뭐?”
그때 테라스 문이 열리고 가룰이 들어왔다.
“도련님, 바르고나의 아가씨가 찾아오셨는데요. 은밀하게 만나자고 하십니다.”
“…….”
이셀렌은 미리 정보 전달을 받은 건가?
어쨌든 이셀렌과 내가 함께 있는 걸 보여 줘서 좋을 게 없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해.”
응접실.
나는 파르메와 마주 앉았다.
정가르마가 인상적인 미녀.
그녀는 차를 한 잔 마시고는 바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어요. 우리에게 뭘 약속할 수 있죠?”
“…….”
나는 대답 대신에 어깨만 으쓱거려 보였다.
파르메는 빠르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말고요. 당신은 능구렁이라는 평판이 자자해요.”
“그렇습니까?”
“북방의 영지에 있을 때는 얼간이인 척 굴면서 남몰래 지혜와 무술을 갈고닦았죠. 때를 기다려서는 황도로 올라오더니 연전연승, 파죽지세의 기세로 12가문의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와서 타루스와 레오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죠. 거기다가…….”
파르메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시릭 카라카스 전하의 환생이라는 풍문까지 떠돌아다니고요.”
“아, 무슨 헛소리를.”
“알아요. 다들 어이없는 웃음만 흘리고 있죠. 하지만 당신의 계획대로, 12가문을 전부 제패한 패자(覇者)로서 민중 앞에 선다면 그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될걸요.”
오드벨이 뿌린 씨가 이런 식으로 퍼지는군.
뭐 결국 언젠가 벌어질 현상이기는 했다.
파르메는 다시 물었다.
“자, 그래서 우리에게 뭘 약속할 수 있죠?”
“황제는커녕 후보도 못 됐는데 빚쟁이처럼 구시네요.”
“당신과 운명을 함께하는 러닝메이트에게는 그만큼 약속을 해 주셔야죠. 조건에 따라서 우리들은 내일부터 이어질 원탁회의에서 당신을 지지할 거예요.”
“…….”
파르메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지타리와 스코피오가 당신을 돕는다는 걸 알아요. 케드릭과 아리에드는 감히 당신과 맞설 엄두도 못 내고 있고요. 남은 가문들, 미니아와 바르고나, 프리콘, 크와리아와 시피즈는 이제 어디에 붙는 게 유리할까 눈치 보는 중이죠.”
“…….”
“조건에 따라서는 바르고나와 프리콘, 시피즈가 당신에게 가담할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남은 기간 동안 원탁회의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죠. 칼로 결판을 내는 것도, 당신이 유리한 시기에, 유리한 방식으로 치를 수 있어요.”
파르메가 빨리 말했다.
“아니면 무력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회의를 결론 내는 것도 가능해요. 그 외 어떤 서포트도 아끼지 않을 거고요.”
“내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면?”
“타루스나 레오가에 가서 이야기를 해 보겠죠. 그건 당신에게도…….”
“모르나 보네요. 이미 그런 단계는 지났습니다.”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까 우리 셋이서 서로 노려보는 거 안 보였습니까? 이미 우리 셋은 서로 칼부림해서 결판내기로 마음들 먹었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우리들의 협조를 받는 게 사후 수습에…….”
“아까 그 계약서 봤잖습니까? 나는 12가문 전원에게 서명시킬 예정입니다.”
“…….”
“사가르나 키릭도 그걸 마다하지 않겠죠. 다 자기가 이길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파르메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까도 한 말이지만 당신의 방식은 너무 급하고 빨라요. 사람들이 마음의 준비를 할 여지도 주지 않는군요.”
“이것도 속도 조절하는 중입니다. 사실 나도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황이고, 여유가 넉넉하지는 않거든요.”
천년제국에 칠죄신의 그림자가 너울거리고 있었다.
나는 실제로 맞섰고 치명상까지 입었다.
12가문 안에 칠죄신의 사도가 있으니…… 이번 원탁회의에서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천년제국은 다시 칠죄신과 그 추종자들에게 맞서야 한다.
파르메가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쿠데타와 황성의 피바람 말인가요? 물론 수습이 보통 일은 아니지만…….”
“전쟁은 이제 시작입니다.”
“…….”
엄포가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파르메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요, 좋아요. 당신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쥐고 판단하고 있고, 12가문의 레이스를 끝내려는 것도 정말로 민심 수습을 위한 쇼로 만들려는 것 같네요.”
“믿는 겁니까?”
“믿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죠. 나에게 시키고 싶은 일은 없나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세 개 가문의 대표로 나와 교섭하러 온 게 아니었습니까?”
“바르고나와 프리콘, 시피즈는 당신을 지지하겠습니다. 이 세 개 가문은 제가 책임지죠.”
그렇게 되면 지금 나를 따르는 세력이…….
리브라타, 스코피오, 사지타리, 바르고나, 프리콘, 시피즈가 된다.
열두 개 가문의 절반이 나를 따른다.
아니, 절반 이상이다.
아리에드와 케드릭은 풍비박산이 나서 감히 입도 제대로 열지 못하는 상황이니까.
열 개 가문 중에 여섯 개를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
남는 건 레오가, 타루스, 미니아, 크와리아.
하지만 레오가와 타루스가 손을 잡는 일은 없다.
미니아와 크와리아는 약소 가문들이고…….
내가 물었다.
“오늘 밤 안으로 미니아와 크와리아를 끌어들일 수 있습니까?”
“……그러면 사실상 대세는 결정되는 셈이로군요. 해 보겠습니다.”
“뒤늦은 이야기지만 나를 고른 이유는 뭡니까? 사가르나 키릭에게 가서 2강 구도를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파르메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까 오가던 대화를 듣고는 혹시나 해서 황성 안의 상황을 좀 조사했죠. 레오가의 차남이 벌인 일, 그리고 당신이 해결한 방법을 대충 알았고요.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그래요?”
“비교적 평화롭게 해결했으니까요. 타루스의 사가르는 결과를 선전해서 자기 명성을 높이려고 했을 테고, 레오가의 키릭이라면 피를 봤겠죠. 어느 쪽이건 원탁회의는 파국이었을 테지만…… 당신은 보다 큰 그림을 그리더군요.”
파르메는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그게 황제가 되려는 야심인 줄 알았는데 설마 민심을 이야기할 줄은 몰랐어요. 한 방 먹었군요.”
“좋습니다. 그러면…….”
“아, 물론 12가문을 석권하더라도 바로 황제가 되는 건 아니에요. 당신은 100년에 걸쳐서 우리 12가문이 세상에 선보이는 대답이 되는 거죠. 그 뒤부터가 더 중요해질 테니까요.”
나는 손을 저었다.
“사가르와 키릭을 정리하는 게 우선입니다.”
“당신이 이긴다는 전제로 말하는 거예요. 지면 그냥 다 말아먹었다고 봐야 하니까.”
파르메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더니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묘한 시선.
“스무 살이죠. 연상 좋아해요?”
“예?”
그야 아내들은 다들 나보다 나이 많지?
사실 이 이야기는 금구지만.
특히 이셀렌에게 하면 정말 상심한다.
파르메는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스물셋, 연상이라서요.”
“아, 그렇군요.”
“난 황제에게는 인간 아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냥 그것뿐이에요.”
파르메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내일 아침까지 미니아와 크와리아의 협력까지 얻어 내 보죠. 저녁은 그다음에 먹어요.”
“예?”
“이런 상황에서는 남자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하는 게 보통 아닌가 싶어서요. 그럼 이만.”
파르메는 그리 말하고는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기가 차서는 혀를 내둘렀다.
“이야…….”
나보고 너무 빠르다고 하더니만 자기는 그냥 번갯불 수준이네.
아무튼 12가문 정리도 얼추 끝난 셈이다.
“이변이 없으면 남는 건 레오가와 타루스, 3파전이 되는 건가.”
그러면 사도도 그 안에 있다.
더 압축하면 키릭과 사가르, 둘 중 하나고.
지금 단계에서 알아낼 방법은 없다만.
“어차피 싸우면 나오겠지. 그 전에…….”
잠깐의 남는 시간.
마무리하기 전에 내부 단속을 해 둬야겠다.
사지타리와 스코피오.
12가문 안에서 유력한 이들.
월레스 스코피오는 아직 나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고.
우렌 사지타리는…… 나에게 아내를 잃었다.
물론 우렌의 아내는 사도였고,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사람 마음은 쉽게 정리가 안 되지…….”
만나서 속 털어놓고 정리해야겠다.
* * *
심야.
황성의 별문(別門).
소수의 인원이 긴한 일로 드나들 때 쓰는 문이다.
저녁에는 도개교를 올려서 사람이 오갈 일이 없다.
“하아암.”
경비병의 하품.
옆에 선 동료가 눈살을 찌푸렸다.
“잘한다. 하품이나 쩍쩍 해 대고. 대장이 보면 감봉이야.”
“다리도 올렸는데 뭘.”
“난리가 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정신 놓고 있어. 거기다 지금 높으신 분들이 회의한다고 한창 난리인데.”
“아, 랑에이 전하가 머무시는데 누가 감히 황성에 침입하겠어?”
동료는 잠깐 생각했지만 반대할 말이 없었다.
경비병은 청산유수처럼 떠들었다.
“거기다가 이셀렌 전하까지 오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황성에 세 분이나 머무시다니. 이게 대체 얼마 만에 있는 일인지 모르겠어.”
“그만큼 이번 원탁회의가 특별하단 거지. 정말로 황제 폐하가 나오실지도 몰라.”
“그러면…….”
드르르륵.
바퀴 끄는 소리.
“응?”
“뭐야?”
다가오는 건 여자.
차광용 검은 안경,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었다.
늘씬한 키에 색이 유달리 진한 금발.
소음은 끌고 오는 여행용 슈트케이스의 바퀴 소리였다.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양새.
멍청하게 보던 경비는 정신을 차리고는 외쳤다.
“정지! 거기 누구냐!”
“여긴 황성이다! 접근을 불허한다!”
동료도 거들었다.
여성은 딱 멈추고는 말했다.
“난 들어가야 하는데?”
“……수상한 자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라!”
경비병들은 창을 잡고 슬금슬금 접근했다.
여성은 등의 배낭과 슈트케이스 말고는 변변한 무기가 없었다.
하지만 진한 금색 머리에는 어지럽게 섞인 검은 무늬.
머리에는 호랑이 귀, 그리고 허리에는 호랑이 꼬리.
수인 중에서도 강력한 호랑이 수인이다.
알아본 경비병들은 긴장했다.
“당장 투항하지 않으면…….”
“나 그냥 조용히 들어가려고 하는데. 좀 비키지?”
여성이 나직하게 말하자 병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누군지 몰라도 심상치 않은 상대.
일단 가능한 한 생포하고…….
“실례합니다.”
그때 다가오는 기척,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비병들이 놀라서 돌아보고는 흠칫했다.
시녀의 손을 잡고 나온 건 4황녀, 리세라였다.
“아, 아니. 황녀님.”
“이런 야심한 시각에 어찌 성 밖으로…….”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분이라서요. 은밀하게 성안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병사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됩니다. 지금 이렇게 나오신 것도 당장 보고를 드려야 합니다. 지금 때가 더 심각한지라…….”
“제가 직접 천리정후 전하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는 긴하고 급하고 중대한 일입니다. 부디 부탁드리겠습니다.”
리세라가 머리까지 숙여 보이자 경비병들이 머뭇거렸다.
황녀가 이렇게까지 공손하게 나오면 경비병으로선 처리하기 어렵다.
경비병은 갈등하다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저는 날이 밝으면 리세라 황녀님이 이리했다는 사실을 윗선에 알리겠습니다. 그러니 하실 일이 있거나 취하실 조치가 있으면 바로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시녀의 손을 잡은 리세라는 호랑이 수인 여성을 향해서 손을 내밀었다.
호랑이 수인은 경비를 물끄러미 보다가 리세라 쪽으로 다가갔다.
“뭐야, 저거? 뭐 이리 꼿꼿해?”
“……여긴 황성이니까 당연하죠. 언니가 너무 막무가내세요.”
“내가 내 집에 왔는데 뭐가 더 필요해?”
“그러면 낮에 정문으로 오시지 그랬어요.”
“엄마랑 마주치기 싫어.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황성에서 지내는 건데? 이제서 국정이라도 돌보겠다고?”
호랑이 수인은 질색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세라는 조곤조곤하게 일렀다.
“언니, 랑에이 어머니는…….”
“그만, 너까지 잔소리야? 난 엄마 얼굴 보고 싶지도 않고 할 이야기도 없어. 우린 이제 남이야.”
여성은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냥 결혼이나 하러 왔다고.”
시릭 카라카스의 둘째 딸.
메이호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