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17)
지금 원탁회의를 연 이유
내 선언에 다들 술렁거렸다.
중년 남자가 급하게 물었다.
“칼로 결정하겠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 누구시죠?”
“프리콘 가문의 가주, 비트로입니다. 자세하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입니다. 싸워서 가장 강한 이에게 몰빵하잔 거죠.”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무 흉악하지 않습니까?”
“칼로 황제를 뽑는다니. 물론 시릭 카라카스 폐하께서는 제국 최강이셨지만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시릭 폐하는 문무 겸비, 또 지용과 덕망을 한 몸에 갖추셨던 분인데 어찌 칼만으로…….”
다들 불평, 반대 의견이 쏟아졌다.
나는 일단 말하는 이들을 하나하나 눈여겨보았다.
목소리들이 알아서 줄어들어 간다.
내가 말하는 걸 끝까지 들어 보기나 하잔 심경으로.
“여러분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들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여기서 우리들, 인간들이 결정한다고 해서 그가 반드시 황제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건…….”
“예, 다른 이종족들에게 황제로 마땅하다는 의견을 이끌어 내야죠.”
취직만 해도 서류 심사부터, 다단계 면접을 거치잖은가?
12가문의 일원이라는 건 서류 심사.
원탁회의는 1차 면접장이다.
최종 면접은 따로 기다리고 있었다.
시피즈의 크론이 헛기침을 했다.
“이치는 알겠지만 그래도 좀 아니다 싶습니다. 우리들이 칼로 싸워서 후보를 내자고요? 그게 1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원탁회의의 결론이냐고 사람들이 비웃을 겁니다.”
“비웃음이 두려우면 정치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다들 멈칫하는데, 나는 새삼스럽게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12가문의 여러분들은 다들 영지가 있고, 영민들이 있으시잖습니까? 또 이 자리에 나올 정도라면 영지 경영을 어깨너머로라도 배우시거나 실제로 해 보셨겠죠. 그게 매번 성공적이었습니까?”
“…….”
“여러분들이 선정을 베풀려고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었을 겁니다. 농번기에 비가 안 온다거나, 혹은 홍수나 태풍으로 쓸려 나간다거나. 그러면 영민들이 누굴 욕하겠습니까? 황제? 칠죄신?”
나는 크론을 똑바로 보았다.
“영주 그리고 영주의 자식인 여러분들입니다. 사람들의 위에 선다는 건 비난과 불평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으으음.”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 시국이 아주 어지럽고 민심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 원탁회의에서 단호한 결의를 보여 줘야 합니다. 그래야 민심이 새롭게 정돈되고 하나로 모을 수 있습니다.”
내가 원탁회의를 서둘러 개최한 이유 중 하나가 이거다.
쿠데타와 황성의 피바람으로 동요한 민심을 수습하는 것.
기나긴 기다림, 100년 만에 황제 후보가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민심은 확 변한다.
회의를 진행하던 파르메가 말했다.
“바르고나의 파르메입니다. 의견은 알겠지만 그래도 굳이 무력으로 결판 지을 이유가 있습니까?”
“말했지만 시국이 어지러우니까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예, 여러분들이 말씀하신 대로 시릭 카라카스 폐하의 장점은 단순히 칼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민중에게는 희망의 등불, 강력한 황제가 필요합니다. 민중에게 가장 중요한 건 밤에 안심하고 집에 돌아가는 것, 그리고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잠드는 겁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입니다.”
“…….”
“기사들의 호위를 받는 여러분들이야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많이 불안해합니다.”
내가 비아냥거리자 키릭의 옆, 트로이의 대타로 나온 남자가 발끈했다.
“듣자 하니 이야기가 너무 일방적이군요. 우리를 어린애 취급합니까?”
“그랬다면 굳이 말도 안 하고 대가리 깨 버렸겠지?”
“……뭐라고?”
나는 놈을 보며 말했다.
“어디의 누구라고 이름부터 밝혀.”
“내가 누군지 알고…….”
“야, 키릭. 너 애들 간수 안 하냐?”
내가 레오가의 장남, 키릭을 보면서 갑자기 말하자 분위기가 굳어졌다.
특히 나에게 덤벼들었던 레오가 놈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물론 나도 가늠하고 한 거다.
아까 트로이가 했던 것처럼, 이놈도 키릭의 지시를 받고는 이러는 것이리라.
키릭은 물끄러미 나만 볼 뿐, 입을 열지 않았다.
팽팽한 분위기.
“그만, 그만. 모처럼 모였는데 전혀 진척이 없잖습니까. 아, 나는 타루스의 사가르입니다.”
근육질의 남자가 손사래를 쳤다.
타루스.
12가문에서 1, 2위를 다투는 가문이다.
사가르가 계속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민심이 동요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원탁회의가 어떻게든 결론을 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다만 그 방법이 굳이 무력이어야 하는 건 좀 납득이 되질 않는군요.”
“그게 알기 쉽고…….”
나는 단서를 더 달았다.
“민중들이 보는 앞에서 결판을 낼 겁니다.”
“뭐라고요?”
“……결투를 다 불러 모은 자리에서 한다고요?”
“진 가문은 얼마나 망신을 당하라고?”
“너무 좀 앞서가는 거 아닙니까?”
다시 아우성들.
나는 그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그럼 황도의 민심을 수습하는 데 이거보다 나은 의견 있습니까?”
“아, 아니…….”
“갑자기 그걸 물어보면…….”
따지던 이들이 입을 다물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여러분들은 지금 내가 황제 하려고 다들 모은 줄 압니까?”
“…….”
정적.
다들 그거 아니었냐는 얼굴이다.
나는 대놓고 혀를 찼다.
“내가 황제 하고 싶었으면 나한테 훨씬 유리한 방법을 썼을 겁니다. 다들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내 뒤를 어느 분들이 봐 주시는 줄 알 텐데요? 그런데 내가 굳이 여러분들을 이렇게 불러 모은 거? 황도의 백성들이 보고 들으라고 한 겁니다!”
“…….”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습니다. 이거 기본 중의 기본 아닙니까? 우리가 12가문이라고 으스대기 전에 지금 불안해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뭘 해야 할지 생각해야죠.”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이들은 12가문이라고 하면서, 황제 후보로 교육받았으니 최소한 이런 마음가짐 정도는 갖추지 않았을까?
적막.
그때 타루스의 사가르가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네. 우리 타루스는 찬성합니다.”
“으음…….”
“타루스가 이러면…….”
다들 동요했다.
12가문에서 최강을 다투는 타루스가 찬성하면 무게가 확 쏠린다.
하지만 사가르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말해 두는데 나는 리브라타와 교섭 같은 거 안 했습니다. 주먹으로 싸우면 내가 다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도 있고.”
“…….”
레오가의 장남, 키릭이 돌아보았다.
사가르는 코웃음을 쳤다.
“백성들의 불안을 씻어 줘야 한다는 말, 지금은 강한 황제가 필요하다는 말, 그거 두 개는 마음에 드는군요. 솔직히 내가 이긴다고 해도 이종족들을 어떻게 설득할지는 감이 전혀 안 오는데…….”
“그럼 이거 하나는 약속합시다. 누가 뽑히건 간에 12가문은 그 사람을 위해서 전력으로 서포트하겠다고.”
시피즈의 크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약속을 한다고…….”
“여기 계약서가 있습니다. 다들 돌려 보세요.”
“계약서라고 해도…… 으허어억!”
내가 내민 계약서를 읽어 본 크론이 쓱 읽어 보다가 경악했다.
내용 자체야 별거 아니다.
다만 공증인의 이름이 문제다.
이셀렌이 적혀 있으니까.
“……아, 암살여왕이 공증을 선다고요?”
“뭐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딴청을 안 피우겠죠?”
내 말에 계약서가 원을 그리면서 돌았다.
다들 살펴보고는 경악, 그리고 경계하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다크엘프의 공증은 원래도 강력하지만, 그 수장인 이셀렌이 직접 공증을 섰다는 건 다크엘프 전체의 문제다.
즉, 소문대로 세 명의 황후들이 나를 지지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셈이다.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지. 아주 좋은데?”
도리어 사가르는 자신만만한 얼굴을 했다.
자기가 이길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다.
“그래서 리브라타, 뭐 어떻게 싸우자고요? 열두 명이 전부 링으로 올라가서 최후에 남는 게 승자, 뭐 그런 겁니까?”
“그건 너무 품위가 없고요. 각 가문에 대표 한 명씩을 보내서 일대일로 싸웁니다. 단, 12가문 전원이 참가할 필요까지는 없고요.”
나와 사가르의 대화에 파르메 바르고나가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이야기가 너무 급하고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것 같습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오늘 당장 결론을 내는 건 급하다고 생각합니다.”
“말했지만…….”
“리젠 리브라타, 당신의 의견은 알겠고 일리는 있어요. 하지만 반드시 그것만이 정답은 아닐 겁니다. 당신이 강하고 현명하다는 건 알지만 우리들에게 적응 시간도 주지 않고 급하게 끌고 나가려 하고 있어요.”
파르메가 조목조목 말하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수긍하는 빛이었다.
더 다그치는 법도 있겠지만…… 이들은 내 신하가 아니다.
내 아래에서 굴러 본 애들이야 바로바로 적응하고 따라오겠지만 얘넨 이제 시작이지.
좀 시간을 줘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찬성한다.”
그때, 회의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던 키릭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타루스의 사가르에 이어서 레오가의 키릭까지 찬성한 것이다.
12가문 안에서 1, 2위를 다투는 이들이 찬성하면 무게가 확 쏠릴 수밖에.
키릭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미리 말해 두지. 관용은 없다. 난 상대를 죽이겠다.”
“…….”
술렁.
사가르를 제외하고 다들 경직된 분위기였다.
그만큼 레오가, 키릭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키릭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게 싫다면 기권해라. 굳이 많이 죽일 필요는 없지. 특히 리브라타.”
키릭은 내가 아니라 내 옆, 로데릭을 쏘아보았다.
“전에 살려 줬더니 주제도 모르는군.”
“…….”
로데릭의 얼굴이 붉어졌다.
수치와 분노.
자존심이 다친 반응.
키릭이 로데릭에게 말했다.
“네 동생마저도…….”
“아, 나도 그쪽 동생 살려 줬잖아?”
나는 키릭의 말을 끊었다.
대충 짐작이 갔다.
예전에, 로데릭은 황성의 원탁회의에 참가해서 큰 수치를 당했다고 했다.
그게 바로 이 키릭이라는 놈에게 당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차남인 트로이가 안 왔군.”
소곤거리는 목소리들이 돌아다닌다.
리브라타와 레오가의 충돌, 입단속들을 해서 아직 모르고 있던 모양이다.
일어선 나와 키릭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러자 사가르도 원탁을 치고는 일어났다.
“이거 둘이서 눈싸움만 하나 본데 칼싸움할 거면 나도 좀 끼워 주지 그래? 오래 기다릴 것 없이 그냥 우리 셋 중에서 이긴 놈을 후보로 몰아주는 건 어때?”
“그만, 그만! 세 사람 다 앉으세요.”
파르메 바르고나가 중재했다.
그래도 우리 셋이 듣지 않자 파르메가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회의 진행은 제가 맡았습니다. 자꾸 이러면 파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
우리 세 사람은 서로를 쏘아보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면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정적이 이어진다.
파르메가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오늘은 더 이상 나올 이야기가 없겠군요.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들 하루 생각해 본 다음에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결론 내리기로 하죠. 찬성하십니까?”
“예.”
“그러지.”
“느리군.”
나, 키릭, 사가르가 나란히 대답했다.
다른 이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그리고 다른 이들도 긴장해서는 우리 세 사람을 보고 있었다.
직감.
다들 알아차린 것이다.
결국 칼로 결정 날 거라는 것.
그리고 우리 세 사람 중에서 한 명만이 남을 거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