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13)
내가 끝내겠다
제국 재상, 오드벨이 폭탄을 터트렸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모인 데서 대뜸 나보고 황제, 시릭의 환생이냐고 묻다니.
이놈이 어떻게 알았지?
추측은 나중, 일단 대답해야 한다.
나는 어리둥절한 척을 했다.
“환생? 그거 뭐, 사람이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민간전승 말씀입니까?”
“예. 맞습니까, 아닙니까?”
“그야 아니죠? 세상에, 절 황제모욕죄로 몰아가실 생각입니까?”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면서 다른 귀족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저 엘프 놈이 훼까닥 맛이 가서 미친 소리를 하는 것 같다고.
“으으음. 이건 좀…….”
“오드벨 백작, 너무 좀 뜬금없는 소리 아닙니까?”
“갑자기 폐하의 환생 이야기라뇨. 무슨 마녀의 수정구도 아니고.”
효과가 있어서 다들 오드벨을 질책했다.
오드벨은 싹 다 무시하고 나만 상대했다.
“답변을 들었으면 됐습니다.”
“…….”
정적.
오드벨이 자리에 앉자 귀족들이 신음을 흘렸다.
귀족들은 정치적으로 사고한다.
제국 재상을 100년 넘게 역임한 오드벨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시릭의 환생 운운했는가?
워낙 황제 빠돌이로 유명해서? 그래도 왜 하필 여기서? 계산한 거 아닐까?
삼백 명의 귀족들이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계산한다.
귀족원장 도르테가 헛기침을 했다.
“으으음. 잠시 이야기가 복잡해졌습니다만. 그래서 리젠 리브라타? 하려던 말씀을 계속하시죠.”
오드벨은 나중에 족치자.
나는 말을 다시 시작했다.
“지금 어지러운 시국이라 다들 정신이 없으신 건 압니다. 하지만 황후 전하들의 큰 그림, 그간 있었던 혼란, 온갖 사건들도 테러범들의 정체를 밝히고 수습하는 과정이었고요. 이제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으음.”
“실제로 제국군도 황도에서 단계별로 철수하고 있잖습니까? 빠른 시일 내에 정국 정상화를 위해서 많은 분들이 불철주야 노력하니, 귀족원 여러분들도 최대한 협조해 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정중하게 말하자 귀족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본래 귀족원은 오늘 이 자리에서 정국의 혼란에 대해서 질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난 그게 내 책임이 아니라, 임시 통치자들인 황후의 그림이고 나는 대리라고 덧칠했다.
이러면 더는 사사건건 따지기는 어렵지.
거기다가 오드벨이 괜한 소리를 던져서 머릿속의 셈법도 복잡해진 상황이고.
장내가 정리되자 내가 말했다.
“먼저 크로셀 후작의 사건부터 마무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리시아 크로셀의 작위 계승을 귀족원에서 인정해 주시죠. 그녀는 황후 전하의 명을 받아서 음과 양으로 온갖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크로셀 후작의 사건은 아직 조사 중입니다.”
“이미 충분히 시일이 지난 거 아닙니까? 여기서 무슨 조사를 더 합니까?”
“그거야…….”
귀족들은 시선만 교환하고 말을 흐렸다.
뭐 크로셀 후작의 영지가 알토란이라니, 작위를 몰수하고 나눠 먹고 싶겠지.
파벌들 사이에서 이미 이야기는 대충 끝났을 거다.
뭐 이것도 예상하고 왔다.
내가 굳이 귀족원에 출두한 거?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위해서다.
“뭐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내가 올해 원탁회의를 개최하겠습니다. 이번 원탁회의는 특별히 황성에서 개최될 것이고…… 마지막 원탁회의가 될 겁니다.”
“헉.”
“무, 무슨…….”
“지금 제위에 대한 야심을 드러낸 겁니까!”
다들 기겁했다.
나는 가볍게 대꾸했다.
“내가 황제가 되겠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만?”
“그, 그게…….”
“그저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100년 동안 회의했으면 됐잖습니까? 슬슬 결말을 낼 때가 됐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놈의 황제 뽑기, 내가 끝내겠습니다.”
올해 12가문의 레이스가 끝나고 2대 황제를 만들겠다.
귀족들이 다들 침을 꼴깍 삼키는데…… 갑자기 오드벨이 불쑥 말했다.
“저는 찬성합니다.”
“…….”
다들 경악해서는 나와 오드벨을 번갈아 보았다.
이젠 황후들이 사전에 제국 재상인 오드벨을 포섭하지 않았나, 의심하는 중이다.
아까 나와 황후들의 관계를 추궁했던 로시 자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알리시아 크로셀의 승계 건을 인정해 달라는 겁니까?”
“아니요. 마음대로 하시죠. 단, 원탁회의는 올해가 마지막입니다. 이건 변함없습니다.”
나와 황후들이 한 이불을 덮었다는 모욕적인 소문?
달리 보면, 그만큼 내가 지금 권력자인 황후들과 밀접하단 의미다.
그런 내가 원탁회의 종결, 2대 황제가 탄생할 거라고 선언했다.
또 개최 장소가 황성이라면, 황후들이 승인했다는 이야기고.
다들 나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다고 몸을 사리게 된다.
“아, 알겠습니다. 크로셀의 사건은 오늘 표결에 부치기로 하죠.”
“예. 뭐 그러면 안건이 더 있습니까?”
귀족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2대 황제.
그 화두는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린다.
쿠데타 시도? 황성의 피바람? 이 어지러운 정국도 2대 황제가 태어나면 모두 다 리셋된다.
나는 이 수를 던지려고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거다.
다들 서로 눈치를 살피는데…….
로시 자작이 또 입을 열었다.
“그러면 2대 황제는 어떻게 뽑을지 결정한 겁니까?”
“아뇨. 원탁회의를 열고 결정할 겁니다.”
“만약 올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요?”
로시가 도전적으로 묻자 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의 작위가 무사하겠죠.”
“무…….”
로시는 물론이고 다른 귀족들도 싹 얼어붙었다.
이들이 제국 각지에서 영향력을 떨치는 귀족들이라고? 황제는 사이즈가 완전히 다르다.
그때 거구의 남자가 일어났다.
“껄껄껄. 그거 참 재미있는 이야기로군. 마침내 2대 황제가 나타나신다는 건가? 그래서 아까 시릭 폐하의 환생이니 뭐니 밑밥을 뿌렸던 거고?”
“나와 리브라타의 아들은 오늘 처음 본 사이입니다. 토비우스 공작.”
오드벨이 냉정하게 말해도 토비우스는 웃었다.
토비우스 공작, 귀족원의 3대 거물 중 하나다.
계속 잔챙이를 보내다가 본인이 마침내 나선 것이다.
“그런데 다들 하나는 잊지 않았나? 원탁회의에서 결론이 난다고 끝은 아니란 말이지. 그를 이종족들이 인정해야 해.”
“아…….”
다들 까먹었던 사실이 떠오르자 귀족원의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토비우스가 나를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즉, 모든 황후들이 인정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겠나?”
“황후분들이 제국을 위해서 지금 불철주야 노력하고 계시는데, 그분들 사이에 반목이라도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군요?”
“…….”
내 반격에 토비우스는 웃기만 했다.
뭐, 황후들이 각자 개인플레이 하고 있던 게 맞다.
그러니 렌시엘 혼자서, 황성에서 힘겹게 제국을 지탱하고 있었지.
그런데 오드벨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8황후 전하께서는 이번 원탁회의를 지지하실 겁니다.”
“……뭐라고?”
토비우스가 멈칫했다.
귀족계의 노물도 순간 당황한 것이다.
그 틈에 내가 말했다.
“본래 원탁회의는 100년 동안 계속되어 온 논의, 거기서 결론이 나면 황후들이 심사에 들어가면 됩니다. 지금 토비우스 공작께서는 너무 앞질러 가신다고 생각합니다만?”
“……으음.”
토비우스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두 분의 말씀이 맞구려. 이 늙은이는 새겨듣고, 제국을 위한 여러분들의 분투를 응원하겠습니다.”
여기서 더 뻗대 봐야 소용이 없다.
토비우스는 그리 생각하고는 휙 달아나 버렸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귀족원장이 정리했다.
“그러면 오늘 안건은 여기까지 정리하기로 하고, 원탁회의 직후에 다시 모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귀족원 회의가 끝났다.
나는 라운지 의자에 앉아서 나오는 귀족들의 면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들 흠칫흠칫하면서 내 시선을 피했다.
원탁회의가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내 선언, 온갖 정치적 계산을 하면서 내 심기를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고…….
“잠깐 옆에 앉아도 되겠습니까?”
“…….”
아까 나와 황후들이 한 이불을 덮는 사이라는 의심을 던진 놈, 로시 자작이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다리만 바꿔 꼬고는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로시 자작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저격수겠지.”
“……예?”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잘 들어. 난 지금 기분이 아주 나쁘거든.”
나이가 다섯 살은 어린 내가 대뜸 반말하자 로시 자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건물을 나가는 귀족들이 우리 두 사람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지금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모를 것이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저잣거리에서 황후들에 대한 음해가 흘러 다닌다고 해도 그걸 공개적으로 꺼내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야. 젊은 네놈은 네 파벌에서 공을 세워 보겠다고, 황후들을 저격하는 역할을 떠맡았지.”
“…….”
“하지만 내가 수월하게 넘겨 버리고, 원탁회의에서 황제가 결정되겠다는 예언까지 하니, 아차 싶었겠지. 그래서 지금 수습해 보고자 나한테 온 거고.”
로시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무 말도 못 했다.
내가 너무 정확하게 맞혔고, 또 너무 적나라하니까.
내가 계속 보자 로시는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마, 말씀이 맞습니다.”
“너에게 그 저격수 역할을 시킨 게 누구지?”
“그, 그건…….”
망설이던 로시가 아주 작게 말했다.
“……토비우스 공작입니다.”
“…….”
파벌이 다른데?
토비우스 공작은 행여나 불똥이 튀지 않게, 적대하는 파벌의 젊은 귀족을 섭외한 것이다.
진짜 능구렁이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그런 불측한 마음을 품은 놈들의 명단, 그리고 정보를 나에게 가져와. 아니, 나한테 직접 올 필요는 없고 내 형님인 로데릭 리브라타에게 은밀하게 전달해. 그 정보의 정확성과 신용에 따라서 앞으로 네 처지도 달라질 거다.”
“…….”
“목 날아가기 싫으면 처신 잘해라.”
리브라타는 12가문의 말석, 귀족원에 참석해 본 적도 없는 한미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 리젠 리브라타로 인해서 주가가 엄청나게 뛰어 버렸다.
이번 원탁회의에서 황제가 나온다면 내가 유력한 후보일 정도로.
로시는 내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그리고 나중에 너한테 청소 역할 맡길 테니까 그것도 염두에 두고.”
“예?”
“불측한 소문을 떠벌렸다면 그걸 지우는 것도 네가 해야지. 기억해 두고 있으라고.”
내가 싸늘하게 말하자 로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놈이 도망가듯이 달아나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애들이 들을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저딴 놈이…….”
리세라야 내 정체를 알지만.
오르카나 미리엘, 다른 아이들은 아직 모른다.
또 알리는 게 능사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시릭이라는 정체를 감추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애들에게 괜히 마음 쓰게 하기 싫다는 부분도 상당한 지분이 있었는데.
“그랬는데…….”
오늘 사람 돌아 버리게 만들어 주네.
기다리던 놈, 빨강 머리의 엘프가 나오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대놓고 사고를 쳐 준 제국 재상, 오드벨이었다.
놈이 나를 무시하고 지나치려고 하자, 나는 놈의 어깨를 잡고는 막았다.
“잠깐, 나 좀 봅시다.”
“퇴근해야 합니다. 집에서 토끼 같은 아내와 여우 같은 아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거 힘들겠…….”
아니, 이 새끼가 결혼했을 리가 없잖아!
반사적으로 풀어 줄 뻔한 나는 정신을 차리고 더 힘을 주어서 잡았다.
“퇴근하기 전에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야근 수당 나옵니까?”
“그건 알아서 타 먹으시고, 좀 보자고요.”
내가 으르렁거리자 오드벨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층에 빈방이 있을 겁니다. 방음이 잘되는 방이죠.”
원래 귀족들은 틈만 나면 밀담을 하니, 귀족원 건물에도 당연히 방음 처리한 회의실이 있었는데…….
다른 선객이 있었다.
내가 시릭 카라카스의 환생이라는 의구심, 거기다가 원탁회의가 올해로 끝난다는 선언에 다들 정보 교환에 여념이 없는 것이다.
“이쪽으로 오시죠.”
오드벨은 먼저 앞서더니만 3층 구석방으로 들어갔다.
빈방이다.
나는 손을 털고는…… 일단 방문을 걸어 잠갔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다.
오드벨은 그런 나를 보고는 말했다.
“제 정조가 위험하군요.”
“아니, 목숨이 위험하지. 이 뱀…….”
털썩.
그 순간, 오드벨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꿈에서도 뵙고 싶었습니다, 폐하.”
“…….”
제국 재상이면 행정부의 수장이다.
그 오드벨이 자진해서 바닥에 머리를 박는다?
내가 황제라는 걸 확신해서다.
잠깐 당황하던 나는 혹시나 해서 물었다.
“……너 지금 선수 치는 거지? 사고 쳐 놓고 일단 머리 박으면 내가 결국 봐줄 거라고 생각하고 이러지?”
“…….”
묵비권 행사하시겠다?
“다문다고 내가 넘어갈 줄…….”
나는 쏘아붙이려다가 멈칫했다.
오드벨은 머리가 좋다.
나는 설마해서 물었다.
“환생했냐고 다들 듣는 데서 물어보면 나는 무조건 부정할 수밖에 없어. 자칫하면 황제모욕죄를 뒤집어쓰니까. 그런데도 굳이 물어본 건, 너, 밑밥 깐 거지?”
“…….”
“……너, 나 또 황제 시키려고 터트린 거지? 내가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겠다고 다들 보는 앞에서 굳이 환생한 거냐고 물어본 거지? 일단 대중에 의혹을 뿌려 둔 다음에 나중에 근거를 하나하나 제시해서 나 천 년 정도 황제 시키려고?”
“…….”
“대답 안 하면 나 황제 안 한다?”
“폐하가 똑바로 보셨습니다!”
넌 곧바로 맞을 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