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12)
믿지 않아도 발등은 찍힌다
귀족원.
제국의 귀족들이 모여서 의견을 나누고 취합하는 단체다.
그들의 결론은 강제성이 없고 요청, 권고, 권유였다.
하지만 그래도 무시해도 되는 게 아니다.
귀족들은 각지의 봉건영주들이었다.
제국보다 훨씬 오래, 길게는 천 년 이상 지방을 다스리던 호족들이다.
칠죄신의 시대도 버텼던 그들은 영지에서 영향력이 강했다.
기사와 병사라는 무력들도 갖추고.
그 귀족들 중에서도 가려 뽑은 삼백 명이 모여서 회의하는 게 바로 귀족원이다.
지금 제국의 잠정적인 지배자인 황후들이라고 해도, 귀족원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진행할 수는 없었다.
“물론 나는 싹 대가리 깨려고 왔지만.”
대기실에서 서류를 살펴보던 내 말에 마주 앉은 하프엘프 여성이 한숨을 쉬었다.
“무슨 험악한 말이에요?”
“상대는 알리시아 크로셀, 내 약혼녀였었던 여자지.”
“……누구에게 설명하는 거예요?”
“아니, 너무 오랜만이다 싶어서. 내가 너무 소홀했지?”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알리시아는 어색한 얼굴이었다.
“이제 우리 사이에 뭐 강제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그리고 나도 좋아서 리브라타 가문을 돕는 거예요. 제국을 위해서, 또 황제 폐하가 남기신 것들을 수호하기 위해서.”
“그래, 고맙다. 하지만…… 너도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있을 텐데?”
나는 테이블 위의 서류들을 툭, 툭 두드리면서 말했다.
내가 요구했던 귀족원의 주요 멤버들, 그중에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이들의 정보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로데릭과 알리시아가, 그동안 귀족들과 교섭하면서 얻은 정보였다.
알리시아가 의아해했다.
“예? 뭐가…….”
“크로셀 가문의 문제가 아직도 안 끝났지? 오늘 끝내자.”
크로셀 후작은 제국에 대한 반역을 도모하다가 나에게 처단당했다.
그리고 내가 그 사실을 귀족원에 알렸는데…….
아직 알리시아는 크로셀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 작위는 여성도 승계 가능하다.
칠죄신과 전쟁 중에는 양자라도 들여서 대를 이을 정도였으니까.
문제는 크로셀 후작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 영지를 몰수해야 하지 않느냐는 여론들이다.
“진작 처리되었어야 하는 문제인데, 뭘 이런 거 가지고 질질 끌지. 역시 귀족원은 일 처리가 너무 느려.”
“아, 리젠. 마음은 알겠지만 당신이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돼요. 내가 알아서…….”
“괜한 소문이 붙을까 봐?”
넘겨짚었지만 알리시아가 멈칫하는 걸 보니 정답이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나와 황후들의 관계에 대한 추문이 돌고 있다?
그러면 나와 파혼한, 내 전(前) 약혼녀인 알리시아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어떨까?
우리 둘 사이에는 정말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온갖 억측이 떠돌 것이다.
거기다가 알리시아는 하프엘프, 아름답다.
나는 잘라 말했다.
“나에 대한 온갖 소문이 붙으면 내 주변 사람들에게도 붙지. 가끔 먼지를 털어 줘야 일이 편하다. 거기다가 너는 여자고, 앞으로 결혼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깔끔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어.”
“……가차 없네요.”
“이걸 모른 척하는 게 더 나쁜 놈이지. 거기다가 너는 물심양면으로 나와 형님을 많이 도와줬으니까. 더더욱.”
알리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젠, 나는 그런 보답을 바라고 당신을…….”
“좀 바라라.”
나는 말을 끊었다.
“사람이 일을 했으면 마땅한 보상을 받아야지. 어깨에 힘도 주고, 돈도 벌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그래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거다.”
“…….”
“그게 안 되면 사람이 돌아 버린다.”
내가 황제를 때려치우고 싶어졌던 게 그래서니까.
고생해서 제국을 발전시켰지만…… 계속 혼자서 먹고 자고 마시다 보니 속이 문드러졌다.
사람이 일하면 보람이 있어야 한다.
“자, 가자.”
싹 정리해 버리자.
귀족원.
ㄷ자 모양으로 배치된 좌석에는 기라성 같은 귀족들이 착석했다.
나는 정중앙에 비어 있는 의자에 착석했다.
1 대 300으로 면접 보는 상황,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면면들을 관찰했다.
대체로 뒷줄에 앉을수록 발언권이 강하다.
거의 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다.
그야 인간들은 100년 사이에 다 죽었고, 그 아들과 손자가 작위를 계승했을 테니까.
“…….”
그런데 맨 뒷줄에 저놈이 있네?
붉은 머리카락의 엘프가 팔짱을 끼고 있었다.
물론 인간이 아닌 종족도 제국에 공을 세우면 작위를 받는다.
하지만 보통 이종족들은 그들 내부 사회를 우선해서 작위에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귀족이 되더라도 위세가 높지도 않고.
하지만 저 엘프는 예외다.
제국 재상, 오드벨 백작.
6황후의 오빠, 리세라의 삼촌인 그는 제국에 융화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00년이 지나는 동안, 귀족원에서도 발언권이 높아진 모양인데?
“…….”
오드벨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무 유심하게 봐서 나는 질색하고는 시선을 피했다.
아, 저놈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데.
오드벨이 어떤 녀석이냐면…… 옛날에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는 황제 폐하의 개새끼입니다.”
“아니, 개는 귀엽기라도 하잖아. 넌 징그러우니까 뱀 새끼지.”
“뱀은 지혜롭고 끈질긴 동물이죠. 성은이 망극합니다.”
……그래서 내 뱀 새끼가 되신 분인데.
능력은 있지만 이래저래 골 아픈 놈이다.
그러자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온다.
나를 오늘 난도질하겠다는 야심가들의 눈빛도 보이고.
“흠.”
나는 대놓고 코웃음을 치고, 다리를 꼬았다.
몇 명은 안색까지 변했다.
그들에게는 한미한 집안의 나부랭이가 나대는 걸로 보일 테니까.
나는 그들과 시선을 하나하나 마주치면서 도발했다.
꼬우면 조금 있다가 덤벼 보라고.
“모두 입장하셨습니까? 그러면 지금부터 제1291회 귀족원 회의를 개최하겠습니다.”
그때 귀족원장 도르테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선언했다.
귀족원장은 어디까지나 중재자, 실권이 있는 이는 아니다.
도르테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황제 폐하를 기리면서 다들 1분간 묵념하겠습니다.”
정적.
내가 슬쩍 눈을 뜨고 둘러보자 다들 진지하게 묵념 중이다.
나, 시릭 카라카스는 인간, 귀족들에게도 제국을 세운 영웅으로 숭배되고 있었다.
하긴 테러범들도 내가 세운 제국을 인간이 계승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울 정도니까.
“…….”
한데 맨 뒷자리의 오드벨 역시 눈을 뜨고 나를 보고 있었다.
아, 또 뭐야.
나는 그냥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묵념이 끝났다.
“그럼 의제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그동안 미뤄졌던 크로셀 후작 가문의 처우와…….”
“리브라타 가문의 만행을 탄핵하고자 합니다!”
“제정신입니까, 리브라타!”
“아무리 12가문의 일원이라도 그렇지, 국정을 이리 어지럽히다니?”
“지금 황도 안이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알기나 하는 겁니까?”
“새파랗게 젊은 놈이 어디서 함부로!”
“황성 안에서 감히 피를 뿌리다니, 역적이나 할 짓 아닌가!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가!”
“온갖 독선적인 초법적 조치! 제국의 법치를 이리도 깔아뭉갤 수 있나?”
로데릭과 알리시아가 상대하고 막아 줬던 비난들.
내가 귀족들의 공식 석상에 나오니 일제히 터져 나왔다.
나는 그냥 다 흘려 넘겼다.
이런 아우성 무시하는 거야, 황제 시절에 많이 해서 하품이나 나온다.
“자, 자. 이러면 진행이 안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때 콧수염이 인상적인 인간 남자가 일어나서 말했다.
드리게스 후작.
귀족원의 중진 중 하나다.
“모처럼 리젠 리브라타가 그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서 해명하려고 온 자리입니다. 한 사람씩, 차근차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 리젠 리브라타는 잘 모를 테니 각자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다마스 남작이오!”
덩치가 커다란 인간 남자가 벌떡 일어나서는 말했다.
아마 사전에 짜 뒀겠지.
다마스는 나를 보며 말했다.
“근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올바른 해명이 있어야 할 겁니다!”
“어떤 일 말입니까?”
“지금 시치미를…….”
“아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구체적으로 짚어 줘야 나도 해명을 시도해 보죠?”
내 말에 다마스는 멈칫했다가 말했다.
“황성에서 피를 뿌린 일 말입니다!”
“그건 제국군과 황후 전하들에게 여쭤보셔야죠.”
“무슨…….”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설마 내가 제국군에게 명령해서 그런 몰상식한 일을 했다고 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다마스는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리젠 리브라타! 당신은 테러 수사본부장으로서 헌병대와 경찰, 제국군을 쥐락펴락했잖습니까! 지금 그걸 부인하는 겁니까?”
“그거야 제국군에게 수사 인원을 제공받은 거고요. 그런데 일개 수사본부장이 30만 중앙군에게 명령을 한다고요?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러니까…….”
주장의 근본부터 부정하자 다마스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내가 그동안 보인 행적들을 다 숨길 수는 없다.
종종 아르센, 레릭을 불러서 밀담을 나누고 명령을 내렸으니까.
모처럼 공식적인 자리니, 다 처리해 버리자.
“아, 아직 소식이 늦으신가 보군요. 그건 전부 다 황후 전하들의 큰 그림이잖습니까? 지금 랑에이 전하와 이셀렌 전하, 렌시엘 전하가 황성에서 함께 머무르시면서 상황 수습에 전력을 다하고 계시고요.”
“……그것 말입니다만. 아, 나는 로시 자작입니다.”
젊은 청년, 로시가 일어나서는 나를 도발적으로 노려보았다.
“항간에 아주 불측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황후 전하와 당신이 부적절한 관계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구체적으로는요?”
“한 이불을 덮었다 이겁니다.”
로시가 음산하게 웃자 나도 이를 드러내면서 웃었다.
저놈은 반드시 조져 놔야겠다.
이런 소문이 내 아이들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나는 일단 기억해 두고는 말했다.
“증거는 있습니까? 제국은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됩니다. 괜한 소문으로 사람을 핍박하면 곤란하죠.”
“당신이 리브라타 영지에서 벌인 행적들이 그 증거 아니겠습니까? 그건…….”
“내가 여색을 탐하고 다녔다고요? 아니죠. 구체적으로는 그러다가 맞고 다녔다는 겁니다. 내가 실패율이 좀 많이 높습니다.”
내가 가볍게 인정하자 로시는 멈칫했다.
그럼 치고 나가자.
“그리고 여러분들은 좀 어이없는 이야기를 하는군요. 황후 전하는 이종족입니다. 어린 인간인 내가 그분들 눈에 차겠습니까?”
“아니, 그건…….”
“로시 자작께서는 자신의 성적 매력에 대해서 과하게 자신감이 있으신가 봅니다? 근데 난 없습니다. 다크엘프만 해도 인간 남자는 상대도 안 해 준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천족 여성까지 유혹한다고요? 그런 비법이 있으면 나도 좀 배워 보고 싶은데요?”
상당수의 귀족들이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객관적으로는 인간인 내가 황후들과 애정 관계일 확률이 낮다.
그냥 황후들이 마음에 안 드니까 씹어 댈 거리가 필요한 거지.
나는 서슴없이 말했다.
“제 외모야 나름 예쁘장하지만 그것뿐입니다. 그런데 이미 제국을 통치하고 계신 황후분들이 한미한 집안의 인간 나부랭이와 함께하실 마음을 품는다고요? 그것도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나? 그런 로맨스는 소설에서 나와도 개연성 없다고 독자에게 욕먹어요.”
“으음, 그게…….”
내가 이렇게 스스로를 낮춰서 카운터 칠 줄은 몰랐던 로시는 침묵했다.
보통 귀족은 자기 명예, 체면을 중시하니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지금 상황 수습만 해도 정신이 없습니다. 이 자리는 귀족원이고, 제국의 높은 분들이 모여서 정사를 논하는 자리입니다. 술집의 안줏거리도 못 될 이야기를 꺼내면 시간 낭비죠.”
“…….”
“나는 황실을 위해서 충실하게 일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곧 모든 일을 해결하겠다고 약속드릴 수는 있습니다.”
나는 좌중의 분위기를 확 휘어잡았다.
그간의 일, 상황도 공식적으로 정리했고.
자, 이제부터는 해답편이다.
“나, 리젠 리브라타는 이제 제국의 평온을 바라면서 원탁…….”
“잠시만.”
그때 내 말을 가로채고는 놈이 말했다.
뒤에서 계속 듣고 있던 엘프.
제국 재상 오드벨이다.
“오드벨 백작?”
“갑자기 무슨…….”
귀족들은 다들 당황했다.
각 파벌들 사이에서, 오늘 나를 물고 뜯으려고 온갖 소스들을 준비해 왔고, 공격 순서도 정해 놨을 것이다.
한데 오드벨이 갑자기 앞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오드벨은 일어나서 말했다.
“오드벨 백작입니다. 리브라타의 아들에게 질문할 게 있습니다.”
“……하시죠.”
아, 갑자기 불안하네.
저놈은 일은 잘해도 다른 의미로 골 때리는데.
나보고 앞으로 천 년은 더 일하라던 놈이…….
“당신이 시릭 카라카스 폐하의 환생이라는 게 사실입니까?”
야.
야, 이 뱀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