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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10화 (109/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10)

혼자일 땐 죽었지만, 둘이 되니

칠성칠요의 일검(一劍), 월검 탐랑.

칠죄신에게도 타격을 줄 수 있는 검이다.

하지만 나는 연이은 전투로 정신력과 마력을 많이 소비한 상태다.

장기전으로 끌고 갈 여력이 없다.

단기 결전!

“으아아압!”

나는 이제까지 쓰던 검, 아르센에게 받은 검을 비검으로 날려 보냈다.

피이이잉!

마력을 휘감은 검이 날아갔다.

하지만 토구로, 아니 변이체는 대수롭지 않게 팔을 휘둘렀다.

팔의 궤적을 따라서 검은 마력이 줄기줄기 뿜어지면서 비검이 튕겨 나간다.

“하아아압!”

나는 그 직후, 탐랑을 꽉 잡고는 마력질주를 사용하면서 앞으로 쭉 달려들었다.

―가소롭군. 불나방도 아니고…….

변이체가 웃으면서 다시 팔을 휘둘렀다.

검은 마력이 채찍처럼 내 몸을 치고 들어온다.

나는 염동결계로 막았지만…….

푸아아악!

뚫고 들어온 검은 마력이 내 왼쪽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긋고 지나갔다.

내장이 타 버리는 아픔.

하지만 버틴다!

나는 마력질주를 멈추지 않고, 그대로 탐랑을 변이체의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다.

푸우우욱!

―이게 뭐 어쨌다는 거냐? 정신이 이상해졌나, 황제?

칠죄신이 비웃거나 말거나, 나는 탐랑을 옆으로 그어 빼내면서 휘둘렀다.

하지만 칠죄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놈은 지금 토구로의 몸을 변이시켜서 인형놀이 하는 중이다.

무대 밖에서 인형에 줄을 매달고 흔들고 있는데, 그 인형을 찔러 봐야 조종하는 놈에게 타격이 가겠는가?

―기대 이하로군!

칠죄신은 팔을 휘둘러서 내 머리를 내리치려고 했다.

나는 마력으로 방어하고, 염동결계에 온 힘을 다했다.

염동결계도 공격이 너무 세면 뚫린다.

하지만 정신력을 퍼부어서 염동결계도 강화할 수 있다.

사실 첫 번째 염동결계는 일부러 뚫리게 놔둔 거다!

까아앙!

공격이 튕겨 나가자 칠죄신은 의아해했다.

그 순간, 나는 탐랑으로 놈의 팔뚝을 쳐서 날려 버렸다.

―으으음?

칠죄신은 날아간 팔을 다시 이으려고 하지만 안 된다.

탐랑의 능력.

벤 상대의 생명력을 먹어 치워서 재생을 억누른다.

발동에 시간이 걸리지만, 칠죄신 같은 적에게 매우 효과적이다.

줄을 아무리 흔들어 봐야 인형 자체의 수명이 다해 가는 중이니까!

―이런 벌써! 아, 그 검이 또……!

칠죄신은 이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화를 내면서 온몸에서 마력을 뿜어냈다.

푸아아아악!

변이체에서 검은 마력이 사방팔방으로 튀어나오면서 나에게 덮쳐든다.

하지만 나는 강화한 염동결계로 버티면서 위로 손을 뻗었다.

격돌 전에 비검으로 튕겨 나갔던 검.

그 검이 아직도 하늘에서 맴돌고 있었다.

“가라!”

내가 손가락으로 변이체를 가리키는 순간.

아직도 마력을 머금고 있던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뭐…….

한참 전에 날려 보내고 잊었던 검이 덮쳐들자, 변이체는 뒤늦게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제자리에서 선회하면서, 탐랑을 크게 그었다.

푸아아악! 퍼어어억!

내가 휘두른 탐랑이 놈의 목을 쳤고, 떨어진 검이 놈의 몸뚱어리를 수직으로 관통했다.

푸우우욱.

그리고 마지막 순간, 변이체가 필사적으로 날려 보낸 흑마력 가시가 내 복부를 관통했다.

염동결계도 한계였다.

“……으음.”

화끈하다가 차갑다.

상당히 안 좋은 곳에 맞았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후후후후, 하하하하하하! 그래, 이래야지. 황제. 너처럼 끈질기게 발악하는 영혼은 좀처럼 없단 말이지? 하지만 너는 지고 내가 이긴다! 신이 지는 거 봤나?

“…….”

변이체는 머리가 날아갔는데 아직도 움직이고 있었다.

일렁거리는 마력이 사그라드는 게, 곧 소멸하겠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남은 마력을 끌어모으고 팔을 쳐든다.

최후의 일격, 내 머리를 치겠다고.

“으으음.”

내가 물러나면서 태세를 갖추려는데.

움찔!

공격하려던 변이체가 갑자기 굳어졌다.

―뭐…….

당황한 음색.

하지만 목만 남은 몸뚱어리는 결사적으로 팔을 저으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훌쩍 뒤로 물러난 변이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내가 졌다, 황제.

“…….”

칠죄신이 아니었다.

몸의 본래 주인인 토구로.

목이 날아가고 전신이 난자되어서 이미 몸은 죽었는데도.

영혼만이 남아서 내게 말하고 있었다.

털썩.

물러난 토구로의 몸이 내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경의.

승자에 대한 예우를 보이는 것이다.

“너…….”

토구로는 그의 영혼을 바친 주인에게 저항했다.

기다리는 건 영혼이 찢겨지는 고문.

그걸 알면서도 토구로는 뒤로 물러났다.

비겁한 전진보다 당당한 후퇴를 택했다.

―내 영혼은 신에게 바친 것, 하지만 이 싸움은 내가 하고 내가 진 것이었다. 그렇게 끝나는 게 맞다.

“…….”

―네 승리다, 황제.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강한 적이었다, 토구로.”

―……후후.

침묵 뒤의 소리.

그게 웃음소리라는 걸 깨달은 순간.

토구로의 몸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아아아악.

먼지처럼 바스러지는 모습.

왕답게 싸우고 왕답게 죽었다.

다 끝났다.

지켜보던 나는 긴장을 풀었는데…….

“아.”

머리가 핑 돈다.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한 번 크게 베이고 복부가 뚫렸다.

“…….”

싸우는 중에는 일부러 안 봤는데.

내려다보니 아주 끔찍한 광경이었다.

“에일리언 두 마리는 깐 것 같은데?”

주먹만 한 구멍이 뚫려 있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장기 손상이 심각하고.

그나마 쇼크사, 출혈사 하진 않았다.

전투로 심신이 고양되면 보통 심박 수가 빨라지는데, 리젠의 육체는 외려 느려지고 있었다.

“으음, 죽긴 싫어서 이런가?”

내가 중얼거리는데…… 손안의 탐랑이 갑자기 홱 날아갔다.

파악.

스스로 날아서 황좌로 돌아간 검은 다시 원래대로 꽂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뭐야. 볼일 끝났다고 모른 척하냐?”

내가 투덜거려도 전우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도 힘을 빌려준 걸 보니, 머지않아 다시 함께하겠지.

나는 가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자, 이럴 때를 대비해서 랑에이가 가져온 1급 치료약을…….”

피잉.

가슴 주머니를 더듬은 순간 현기증이 일어났다.

자상에 관통상,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혼절했다.

거기다 정신력이 거의 바닥나서, 기절하기 직전이다.

지금 기절하면? 사망이지.

“어, 음.”

얼른 마셔야겠다.

하지만 혈당 부족인지 손끝이 차가워지면서 잘 안 움직인다.

툭, 데구르르르.

나는 손을 덜덜 떨면서 치료약을 꺼내려고 하다가 바닥에 떨어트렸다.

“젠장. 이거…….”

머리가 핑핑 돌고, 귀가 뜨겁다.

염동력은 무리고.

결국 손으로 잡아야 하고, 구멍 뚫린 복부를 굽혀야 하는데…… 지옥이지?

일단 주저앉아서 일을 처리하는 게…….

“으으으윽.”

앉으려고 하기만 하는데도 엄청난 통증.

내가 이를 깨문 순간, 더 심각한 소리가 들려왔다.

빠각.

“…….”

밟았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발로 밟아 버렸어?

어이없게도 치료약의 태반이 바닥에 스며들었다.

“아…….”

털썩.

나는 배가 찢어지건 말건, 주저앉아서 치료약을 손끝에 묻혔다.

보통 치료약은 음용이 기본이지만 급한 경우에는 환부에 바르기도 한다.

음용보다는 효력이 확 떨어지지만.

“에라.”

손가락 끝에 치료약을 바르던 나는 허탈해졌다.

몇 방울 남은 걸 발라 봤지만 수습이 안 된다.

“아, 정신력도 바닥이고. 그냥 여기서 죽어야 하나?”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보이는 건 낯익은 천장.

생각해 보니 나는 이 어전회의장에서 한 번 죽었잖아?

그때도 혼자.

지금도 혼자.

여기서 또 죽는 것도 운명이다 싶다.

“죽긴 싫은데. 지금 내가 죽으면 안 되는데…….”

하지만 시시각각, 죽음은 이미 내 턱밑까지 치닫고 있었다.

눈을 감은 순간 얼굴이 떠오른다.

리세라와 오르카, 미리엘.

내 사랑스러운 자식들.

“……죽을 순 없지.”

애들을 슬프게 할 순 없다.

내가 지켜 줘야 한다. 전하고는 다르다.

나는 이를 악물고는 몸을 돌렸다.

후드득.

피가 바닥에 쏟아지지만, 상관없다. 기어서라도…….

삐걱.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

고개를 든 내게 보이는 하얀 다리.

“시릭!”

비명을 지르면서 상대가 달려온다.

그녀는 얼른 내 옆에 앉아서 나를 붙들고 상처를 살피려는데…….

“으아아악!”

“미, 미안해요! 괘, 괜찮아요?”

“아니, 사실 뻥이야.”

나는 렌시엘에게 씩 웃어 보였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던 렌시엘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노, 놀랐잖아요. 이, 이런 상황에서…….”

“치료약 있으면 얼른 줘. 아니면 그냥 죽어야 해.”

“여기요.”

렌시엘은 얼른 치료약을 나에게 내밀었다가 멈칫했다.

“마실 수 있어요?”

“노력해 봐야…….”

내가 말하려는데 갑자기 렌시엘이 치료약을 자기가 마셔 버렸다.

세상에.

이 여자가 날 죽이려고 이러나?

내가 놀렸다고 이런 식으로 갚아 주나?

등골이 오싹해져서 굳어 버리는 순간, 렌시엘이 입술을 겹쳐 왔다.

내 뺨을 손으로 잡은 그녀가 입술을 통해서 내게 치료약을 넘겨주었다.

어미 새가 아이에게 모이를 주는 것처럼.

꿀럭.

다 넘어가고 나서도 한참 동안, 렌시엘은 나를 붙든 채 그대로 있었다.

환자인 나는 가만히 있었고.

“……후아.”

“…….”

렌시엘은 입술을 떼고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얀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조, 좀 어때요?”

“지금 이거 불륜이야.”

“……아, 아니잖아요! 치료 행위였어요!”

렌시엘이 당황했지만 나는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뻥 뚫렸던 구멍에 새살이 돋고 막혀 있었다.

물론 싹 다 나은 게 아니다.

렌시엘이 나에게 먹인 건 1급 치료약, 치명상을 중상 정도로 낮춰 주는 거다.

“죽진 않겠네.”

나는 뒤로 벌러덩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렌시엘은 내 상처를 살피면서 머뭇거렸다.

안도한 얼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표정.

“너 가서 일하라니까. 마력도 못 쓰면서 왜 여기에 왔어.”

“……혹시 몰라서요. 안에서 소리가 안 들리는 거 같아서 들어와 본 거예요.”

“그래. 그럼 의사랑 들것 불러와.”

“기다려요. 당장…….”

“당장은 아니야. 치료약 마셨으니까 안 죽잖아. 지금 상태 위중한 병사들도 있을 거다. 걔네들부터 치료하라고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은 제국에서 가장 귀한 몸이에요!”

“전 리젠인데욤?”

“…….”

확!

렌시엘은 너무 화가 나서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덜덜 떨었다.

내가 중환자라서 차마 내려칠 순 없으니까.

나는 픽 웃었다.

“내가 시릭이라면 당연히 할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죽을 상처라면 모를까. 1급 치료약까지 마셨는데 긴급 치료 받을 필요 없잖아?”

“그래도…….”

“그것도 있고, 네가 나를 너무 귀하게 여기면 이래저래 안 좋아. 일단 청춘 남녀로 보이니까. 괜한 오해 사면 일이 복잡해진다.”

“그…….”

렌시엘이야 이제 내가 시릭이라는 걸 인정했지만.

그걸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게 만드는 건 별개다.

나는 조용히 불렀다.

“렌시엘.”

“……왜, 왜요.”

“잘했다.”

“……예?”

나는 어전회의장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한 번 죽었던 곳.

혼자일 땐 죽었지만, 둘이 되니 살아남았다.

“놀리는 거 아니야. 네가 애쓴 덕에 황제가 없는 제국이 100년이나 버틸 수 있었다. 남들은 너를 무능하다고, 혹은 문약하다고, 군부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는 허수아비라고 하더라도…… 너는 충분히 잘 해냈다.”

“…….”

“나라 지켜 줘서 고맙다.”

렌시엘은 눈을 깜빡깜빡하다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애써 감추려고 해도.

투명한 눈물이 하얀 뺨을 타고 내리는 건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렌시엘.”

“……왜, 왜요.”

“내가 지금 아파 죽겠는데…… 가슴은 안 다쳤거든?”

렌시엘은 울먹거리면서 나를 돌아보다가…… 쓰러지듯이 내 가슴팍에 고개를 묻었다.

음.

사실 아팠지만 내색하지 말자.

“아, 아아아아…….”

렌시엘은 내 가슴에서 오열했다.

그동안 혼자서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 그래…….”

나는 그 말만을 하면서 렌시엘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었다.

다 큰 어른도. 남들이 우러러보는 황후도.

목 놓아 울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일을 했으면 보답을 받아야지.

“고맙다.”

작은 감사와 격려가.

때로는 너무나 큰 힘이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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