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108화 (107/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08)

돌아왔다

어전회의장.

칠죄신의 사도, 토구로가 있다.

제국군의 입성, 지원사령부의 무장해제 과정을 잠깐 지켜본 나는 계단에 올랐다.

한데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온다.

알베르트 그리고 렌시엘이었다.

“아니, 왜 둘 다 올라와? 계속 자리 지키라니까.”

“저는 오늘 밤에 천리정후 전하의 안전을 우선하고 있습니다.”

“당신, 지금 혼자서 뭘 하려는 거죠?”

“…….”

렌시엘은 손을 뻗어서 내 팔을 잡았다.

내가 뭐 하러 가는지 안 눈치.

절대 보낼 수 없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전회의장에서 처리할 일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면 되잖아요. 왜 당신이 해야 하는 건데요?”

“그야…… 내가 리젠 리브라타니까?”

“거짓말!”

렌시엘이 비통하게 외쳤다.

그녀는 내 팔을 가로젓고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짓말! 거짓말! 또 그렇게 맨날 심술이나 부리고! 절 놀리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아, 왜. 못 믿겠다며.”

“……가지 마요.”

나는 알베르트를 향해서 눈짓했다.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이에 오간 대화로 봐서, 알베르트도 슬슬 내 정체를 알았다고 봐야지.

이셀렌에게 말해 놔야겠다.

렌시엘은 내 팔을 꼭 붙잡고는 몸을 떨었다.

“가야 해.”

“……못 보내요.”

“적이 기다리고 있다. 내가 상대해야 하는 적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딴 놈들은 못 막아.”

사도 토구로는 보통 적이 아니다.

검에 심장이 꿰뚫리고도 멀쩡했다.

칠죄신에게 심장을 바치고, 은총을 받은 놈.

놔뒀다가는 황성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놈은 날 기다리고 있다.”

토구로는 바보가 아니다.

지금 황성이 포위되었다는 것, 이미 지원사령부가 끝났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도망가려면 진작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혼자 어전회의장에 있다.

날 기다리고 있는 거다.

“렌시엘.”

“…….”

“넌 늘 그랬지. 날 전선으로 보내는 게 너무 걱정된다고. 다른 여자들은 내 곁에서 싸우는데, 자긴 그것조차도 할 수 없다고.”

렌시엘은 후방에서 병사와 군량, 온갖 인적자원을 모아서 제국군을 받쳐 주었다.

정말 대단한 업적, 몇 번을 치하해도 모자란다.

“마음은 고맙다. 하지만 내가 싸워야 한다. 내가 싸움을 피하면 내 전우가, 내 가족이 다치고 죽는데 어찌 일신의 안전을 우선할까?”

“…….”

렌시엘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망울은 글썽거리는데 아슬아슬하게 흘러내리지 않는다.

“늘, 늘 그런 식으로 말하고! 전 결국 떠나는 당신의 등만 바라만 봐야 하죠. 하,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너무 오래…….”

“아, 전 리젠인데요.”

“…….”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염? 설마 제가 쉬릭 콰라콰스의 환생이라고요? 어머나, 세상에. 어쩜 그리 불경한 생각을 할 수 있담?”

빠직!

렌시엘이 주먹을 붕붕 휘둘렀다.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단 여자의 주먹질은 참으로 기품이 없었다.

나는 주먹을 삭삭 피하면서 외쳤다.

“내가 렌시엘을 화나게 만들었다! 나는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다, 당신. 진짜 너무해요! 이런 상황에서도 절 놀려요!”

“이런 상황이니까 놀리는 거지. 그리고 계단에서 위험하니까 그만해.”

뭐가 됐건 아내를 걱정으로 울리는 것보다야 낫지.

내가 손목을 붙잡자 렌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는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어전회의장까지는 같이 올라가요.”

“내려가서 일 봐. 뒷수습하는 자리에 네가 자리 지키고 있어야 문제가 적어져.”

“알아요. 잠깐 맡기고 왔지만 정신없으니까 금방 돌아갈 거예요.”

뭐 제국군이 지원사령부 무장해제 수순에 들어가긴 했다.

잠깐은 괜찮겠지.

나는 결국 렌시엘의 손목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렌시엘은 아까 한 주먹질이 새삼 부끄러웠는지 입을 꼭 다물었다.

“너, 이거 다 끝나고 머리 그 관을 벗고 치료약 마셔라. 흉 진다.”

“치료약을 함부로 낭비할 순 없습니다.”

“하라면 좀 해. 그게 뭐가 낭비라고.”

“좀 격을 갖추고 말씀하세요.”

“내가 볼 때마다 속 터질 것 같으니까 마시라고.”

내가 딱 자르자 렌시엘은 한참 말이 없었다.

꼬옥.

내 손을 잡은 렌시엘은 나직하게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

“전 리젠인데염?”

렌시엘이 다시 주먹질을 했다.

어전회의장.

거대한 문.

폐쇄되어서 닫혀 있다는데 지금은 열려 있었다.

“내가 여기서 죽었지…….”

“…….”

옆에 선 렌시엘은 흘끗 나를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얼굴.

하지만 지금 렌시엘은 머리에 쓴 철제 관 때문에 마력을 쓸 수 없는 상황이다.

설사 쓸 수 있다고 해도, 지금 싸움에는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위험하다.

“그럼 난 일하러 갈 테니까 너도 가서 일해.”

“……무사히 돌아와야 해요?”

“이미 돌아왔잖아.”

렌시엘은 그래도 내 손을 꼭 잡고는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힘을 주니 그제야 마지못해서 놓아준다.

등에 꽂히는 시선.

하지만 나는 앞만 보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발소리가 크게 울리는 대리석 바닥.

거대한 홀.

제국의 기라성 같은 문무백관들이 여기에 줄을 서서 내 명을 기다리고 받들었다.

나는 여기서 제국을 다스리고, 발전시켰다.

“보고 싶은 얼굴들은 하나도 없는데, 보기 싫은 얼굴이 하나 있네.”

회의장의 끝.

황좌를 바라보는 남자를 향해서 나는 걸어갔다.

검은 후드를 벗은 뒷모습.

오크.

사도 토구로였다.

놈은 내가 왔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황좌만을 바라보았다.

나의 검들.

여섯 자루의 검들은 황좌에 X자로 교차해서는 꽂혀 있었다.

“저 꼴이면 누가 앉아도 엉덩이가 쪼개지겠군. 황좌에 앉는 자, 엉덩이를 바쳐라인가?”

“시릭 카라카스.”

펄럭!

토구로는 망토를 휘날리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리젠 리브라타다……라고 하고 싶지만.”

나는 한숨을 쉬었다.

“칠죄신에게 들었냐?”

“그분이 잠시 내 육체에 머문 순간, 알 수 있었다.”

웅혼한 목소리.

토구로는 보통 각오로 나를 맞이한 게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칠죄신을 추방하고 그 종복들을 벤 시릭 카라카스다. 나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느냐?”

“본래는 많았다. 내 형제와 부하, 친구들은 모조리 너와 제국군의 손에 죽어 갔으니까.”

“…….”

“하지만 그건 전장의 일이었다. 공평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대체 뭐냐? 내 동포들을 죽이고 세운 나라가 이렇게도 쉽게 흔들리는 것이란 말이냐? 네가 없다고 서로 의심하고 주저앉고, 금방 바닥을 보이는 것이더냐?”

토구로는 분노하고 있었다.

제국이 취약하단 사실에.

그의 꾐에 사람들이 넘어가고, 사직이 위태로워진단 사실에.

“살인범이 사람 죽여 놓고 왜 이렇게 쉽게 죽냐고 한탄하는 격인데…… 놀랍게도 공감이 되려고 하네.”

“우리를 멸절시키고서 세울 국가였다면! 더 튼튼했어야 했다! 그게 전장의 패배자에 대한 예우 아닌가? 이럴 거였다면 대체 왜 그 많은 전란을 치렀단 말이더냐!”

“……그래, 뭐.”

나도 사실 환생하고, 제국이 엉망이 됐단 거 알고 온갖 감정이 샘솟았지.

하지만 나는 정색했다.

“제국을 뒤흔드는 네놈이 할 말이 아니지. 남을 함정에 빠트려 놓고 뭐 잘난 척이야?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지 마라.”

“…….”

“뭐? 나라가 흔들려? 백주 대낮에 폭탄을 펑펑 까고 쿠데타 시도까지 일어나는데 흔들리는 건 당연하지. 애당초 저 황좌가 100년이나 비어 있었는데도 나라가 유지된다는 게 감탄스럽다.”

나라에는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 게 상식이다.

하지만 천년제국은 100년이나 황제가 없었는데도 버텼다.

비록 이종족에게 100년은 긴 시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또 온갖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나라가 유지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거다.

“달은 차면 기울고, 기운 달은 다시 차오르는 법! 나라가 흔들린다면 다시 일으켜 세울 마음을 품는 게 당연하다. 그 제국을 뒤흔드는 장본인이 뭐가 대단히 실망스럽다고 지껄이는 거냐?”

“네 국민들이 이리 어리석은데도 한스럽지 않은가?”

“처음부터 다 알고 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처음부터 황제였을까? 제국군이 처음부터 강성했을까? 내가 인류 사이에서 떠오르자 시기하는 이들이 많았고, 믿지 못하고 등을 돌린 벗들도 많았다. 나를 배신한 부하들도 많았고!”

“…….”

“하지만 그 이상으로 나를 믿어 준 사람들이 많았기에, 나를 믿고 싸우고 죽어 간 전우들이 수백 배는 많았기에 제국이 만들어진 거다.”

나는 토구로를 노려보았다.

이놈은 내 나라의 적, 내 백성들의 적이다.

“군자도 사흘만 굶으면 도둑놈이 된다고 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 그냥 어려운 상황을 만들지 마!”

“…….”

“내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에도 온갖 범죄는 일어났다. 나 아닌 누가 다스려도 마찬가지, 그걸 국민들이 어리석다고 경멸할까? 아니, 먼저 백성들의 환경을 다시 살피고 범죄율을 줄일 생각을 해야지! 그게 정치다!”

황제는 만백성의 아버지다.

착한 놈도, 나쁜 놈도, 영웅도, 범죄자도 모두 다 내 자식이다.

엇나가면 가르치고, 벌을 내리고 때로는 단호한 철퇴까지 휘두르겠지만, 그래도 그건 내 손으로 해야 한다.

그게 지배자의 의무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범죄를 부추기는 네놈의 더러운 입으로 내 백성들을 깔보지 마라! 네놈만 없었더라면 그들 중 다수는 오늘 밤에도 가족들과 식사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 아침을 꿈꾸고 있을 테니까!”

토구로는 신음을 흘리면서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말을 짜내려고 하지만 안 되는 모양새.

나는 검을 들었다.

“자, 문답은 끝이냐? 이제 칼로 상대해 주마.”

“그 전에 사과할 일이 있다.”

“말해라.”

“네 아들, 오르카를 노렸던 건 미안하다. 몰라서 한 일이다.”

토구로는 진짜로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오르카를 노린 자체가 아니라, 아버지 앞에서 자식을 해치려고 한 것에 대한 사과였다.

나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은 확실하다.

“좋아. 더 있나?”

“네가 한 번은 이겼고, 한 번은 무승부였다. 오늘로 승패를 가리려고 한다.”

“무승부라고?”

“나는 그때 신에게 몸을 맡길 수도 있었다.”

“…….”

토구로와의 두 번째 싸움.

그때 칠죄신이 계속 활동할 수도 있었단 이야기인가?

만약 그랬다면 무승부, 아니 내가 위험했다.

내가 시선으로 묻자 토구로가 계속 말했다.

“전에 신체 이야기를 했었다. 기억하나?”

“그래.”

“내가 바로 신체다. 정확히는 신체 후보다.”

“……신체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게 사도라고?”

사람이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칠죄신은 육체를 갈아탄다.

전에 토구로의 몸에 임했을 때, 놀라기는 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그게 되는 놈이었으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니 다르다.

칠죄신은 이제 카라카스에 없다.

최종 결전에서 나에게 패퇴하고, 저편으로 추방당했다.

“너 말고 사도들은 얼마나 더 있지?”

“디에르크는 죽었다. 내가 알기로는 하나 더 있다. 그 이상이 있는지는 모른다.”

“다른 사도는 누구지?”

“그건 네가 이기면 말해 주겠다. 이 조건이라면 너도 지금 싸움에 필사적으로 임하겠지.”

토구로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 말을 해 준 건, 이 싸움을 받아 주는 너에 대한 예우다, 황제. 너는 다른 부하들을 끌고 올 수도 있었는데 혼자 왔으니까.”

“여러 명 데려와 봐야 지금 네 상태는 정상이 아니니까. 차라리 나 혼자 상대하는 게 낫지.”

“좋다. 검을 뽑아라! 황제!”

토구로가 중후하게 말하자 나는 진즉부터 쥐고 있던 검을 내밀어 보였다.

침묵.

“……검을 뽑아라.”

“뽑았잖아.”

“저기 황좌에 꽂혀 있는 네 애검, 칠성칠요(七星七曜)를 뽑으란 말이다!”

토구로가 버럭 소리쳤다.

나는 혀를 찼다.

“아, 설마, 그러라고 여기서 기다린 거냐? 내가 저것들을 쫙 뽑은 다음에 너와의 결전을 벌일 거라고?”

“그래! 나는 최선을 다할 각오로 여기에 있다! 너도 후회를 남기지 마라!”

“나 요즘 쟤랑 별거 중이야.”

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토구로는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저거 삐졌어. 내 말 안 듣는다. 칼 하나 부러트렸다고 나한테 말도 안 하고 힘도 안 빌려줘.”

“……지금 날 깔보는 거냐?”

“진짜라니까. 지금 저기에 여섯 자루밖에 없잖아.”

토구로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인간은 거짓말을 하지. 하지만 상관없다. 죽기 싫다면 최선을 다해라!”

말한 순간, 토구로의 몸을 타고 남색의 마력이 솟아올랐다.

6계위.

그리고 놈의 발을 중심으로 마력이 물결치면서 원형으로 퍼져 나갔다.

6계위 능력, 마력영역.

“……어.”

큰일인데?

난 아직 5계위인데, 6계위에게 덤빈다고?

그것도 계위 능력까지 쓰는 놈에게?

자살행위인데?

“잠깐, 시간 좀 줄래?”

“……뭐냐?”

“내가 저기 꽂혀서 폼 잡는 놈이랑 대화의 시간을…….”

토구로가 달려들었다.

야, 진짜로 타임 요청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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