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07)
땡처리도 이 정도면 예술
전투, 전쟁에는 피가 흐른다.
공성전은 상호 피해가 크고, 거기다 황성이라면 더 커진다.
정면으로 공격하면 수만 명의 사상자를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최소 인원으로 적을 교란하고, 대의명분인 렌시엘을 확보한다. 도중에 폭탄으로 사상자를 발생시켜서 적의 경거망동을 막는다.
그리고 전방의 제국군으로 적의 시선을 모으고, 마지막으로 수장인 카마엘을 친다.
이러면 사상자를 확 줄일 수 있다.
계획대로 다들 보는 앞에서 카마엘과 대치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제부터 마무리다.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가 천족과 결혼하게 된 이유. 그 진실에 대해서는 아나?”
나는 천족들을 둘러보았다.
지원사령부의 천족들, 외모들은 젊지만 오래 살았을 거다.
개중에 낯익은 얼굴, 다비엘이 보인다.
천족 중에서 제법 급이 높은 남자, 나는 그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시릭 카라카스는 뭔가를 알아 버렸고, 천족은 양자택일해야 했다. 그래서 결혼을 해서 천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된 거다.”
“…….”
천족은 다른 종족과 절대 혼인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자존심이니, 고고하다느니 여러 평이 오갔지만 진실은 따로 있었다.
결혼하면 자식을 낳게 되고, 그 배우자도 알게 되니까.
미성년 천족의 눈물이 고급 치료약의 재료라는 걸.
1급 치료약은 치명상도 회복시킨다.
특급 치료약은 숨만 붙어 있으면 살려 내고, 불치병도 치료한다. 심지어 불로장생까지 가능하단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재료가 천족 아이의 눈물이라고?
이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종족의 명운이 흔들린다.
나는 지원사령부에 일렀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지?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겠다. 또 이 자리의 일은 천리정후 전하께서 책임지고 함구시킬 거다.”
“내가 보증하겠습니다.”
렌시엘이 얼른 거들었다.
이 자리에 천족이 다수라고는 하지만 아닌 종족도 있다.
내가 에두르는 이유를 안 것이다.
“설마…….”
“무슨…….”
천족들은 방금까지 명령을 내렸던 카마엘을 의혹 어린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천족에게 이 비밀은 세상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걸 외부로 발설했다면 누구도 용서받을 수 없다.
카마엘은 얼른 부정했다.
“무슨 소리! 나는 그걸 절대로 밖에 발설한 적이 없다!”
“그러면 내가 어떻게 알고 있냐?”
나는 내 가슴을 가볍게 쳐 보였다.
“지원사령부의 제군들, 천족 여러분들. 나는 리젠 리브라타다. 근래에 내 이름을 많이 들었겠지?”
“리, 리젠 리브라타!”
“제국군을 선동한 놈 아닌가.”
천족들이 입을 떡 벌렸다.
지금 황성 앞에서 제국군과 한창 전투 중인데, 그들을 휘어잡았다는 장본인이 눈앞에 있으니까.
하지만 섣불리 나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워낙 대담하게 굴기도 했고, 또 내 옆에는 천리정후가 있으니까.
각 종족은 자기들 안에서 지위 고하가 있다.
렌시엘은 천족 안에서도 신분이 대단히 높았다.
나는 설명했다.
“그래, 보다시피 나는 인간이다. 인간이 어떻게 그 비밀을 아냐고? 미리엘 황녀 전하를 구출하면서 알게 되었다. 자, 미리엘 황녀 전하가 경솔하게 이야기를 흘렸을까?”
“…….”
“아니야! 케드릭 가문이 황실을 능멸하고 멋대로 굴 수 있었던 게 그 비밀을 손에 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케드릭 가문이 테러범들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 이제 다들 알고 있을 거다!”
천족들이 멍하니 내 이야기를 듣는다.
나는 그들을 한번 쓱 둘러보면서 사기를 치기 시작했다.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나는 그 비밀을 알고 비분강개했다. 그리고 대체 일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더듬어 추적해 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천리정후 전하께서도 많은 협조를 해 주셨다. 나처럼 중앙에 연줄도 없는 귀족이 단숨에 제국군, 철도헌병대의 지원을 등에 업은 게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무슨…….”
“다 황후 전하들, 특히 정국을 주관하던 천리정후 전하께서 많이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
렌시엘이 기가 막힌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사기를 치는지 깨닫고는.
나는 지금까지 테러범이 벌였던 온갖 사건들, 지금 제국군과 지원사령부의 전투까지도 죄다 황후들의 큰 그림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안 믿을 거라고?
내 말에 다들 은근히 안도한 기색들이었다.
대중들은 진짜 혼란보다 가짜 질서를 선호하니까.
높으신 분들도 통제를 못 한다는 것보다는, 사실 전부 알고 계셨다는 게 잘 먹힌다.
이걸로 정국은 안정, 싹 땡처리다.
“그…….”
렌시엘은 나에게 말을 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무슨 걱정인지야 안다.
그녀가 제국군을 통제 못 한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것도 짜고 치는 연기였다고 하면 된다.
내가 레릭을 시켜서 간단한 퍼포먼스만 보이면 그만이지.
나는 마무리에 들어갔다.
“그렇게 사지타리 가문, 그리고 다른 사건들을 조사하던 끝에 나는 천족의 안에서 그 비밀이 흘러나왔다는 걸 알았다. 그걸 흘린 게 바로 카마엘, 너다!”
“무슨 헛소리를! 증거가 대체 어디 있다고!”
카마엘이 분하게 외치고 주변을 돌아보았다가 당황했다.
천족들이 슬금슬금 카마엘에게서 떨어지고 있었다.
“무, 무슨! 너희들, 나보다 저 인간을 믿는 거냐?”
“100년 동안 정국을 주관해 온 천리정후를 믿는 거지.”
내가 다들 들으라고 말했다.
렌시엘은 100년 동안 홀로, 이 황성에서 제국을 유지하고자 고군분투해 왔다.
그녀의 노력을 다들 알고, 느끼고 있으리라.
내가 카마엘이 천족의 비밀을 밝힌 반역자라고 지목하고, 천리정후의 지지까지 받으니.
지원사령부의 천족들은 모두 카마엘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자, 카마엘.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심문을 거친 끝에 날개를 베어 내고 교수형에 처하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겠다.”
천족들은 어찌 그런 심한 형벌을 입에 담냐고 놀란 얼굴이었지만 이 정도는 당연하다.
내 딸, 미리엘이 케드릭에게 괴롭힘을 당한 건 이놈이 누설한 탓이니까.
“으으음.”
장내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집히자 카마엘은 분한 신음을 흘렸다.
렌시엘을 잡으면 바로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인간인 내가 천족의 비밀을 입에 담은 순간, 모든 게 틀어졌다.
천족들에게는 그게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한 비밀이니까.
나는 지원사령부 수뇌부를 보고 말했다.
“다들 무기를 내려놓고 물러나라. 그러면 관대한 처우를 약속하겠다.”
물론 이 중에서도 카마엘에게 적극 협력한 놈도 있겠지.
그건 나중에 조사하고 처벌하면 된다.
지금 밖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 카마엘을 속전속결로 제압하고 전투를 끝내는 게 우선이다.
“으음.”
눈치를 보던 천족들이 내 쪽으로 오려는 순간.
카마엘이 검을 뽑더니 홱 휘둘렀다.
“크아아악!”
주변의 천족 둘이 날개가 베이면서 비명을 질렀다.
비명과 아우성.
하지만 지원사령부의 수뇌부들 역시 노련한 이들이었다.
셋이 검을 뽑고 맞받는데…… 카마엘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다들 손목이 날아가고 피가 튀었다.
카마엘의 칼이 움직일 때마다 뒤이어서 따라붙는 붉은 핏줄기.
알아본 나는 얼른 말했다.
“물러나! 요검이다!”
“요, 요검!”
천족들은 맞서려다가 말고 얼른 뒤로 물러났다.
슈르르르르륵.
자세를 바로 한 카마엘이 손에 쥔 검, 붉은 피가 일렁거리면서 나선으로 감긴다.
요검(妖劍).
마검(魔劍)이라고도 불리지만, 마력검하고 혼동이 와서 보통 요검이라고 부른다.
검 자체에 부가 기능이 있고, 때때로 자아까지 어린 검이다. 당연히 강력하다.
그러면 다들 쓰면 되지 않냐고?
요검은 칠죄신이 만들어 낸 장난감이다.
쥐는 순간, 칠죄신에게 영혼이 저당 잡힌다.
“요, 요검이라니.”
“카마엘, 당신 미쳤습니까!”
지원사령부, 친위대 할 것 없이 경악했다.
요검을 쥔 자는 인류의 적, 그게 상식이니까.
카마엘이 패악스럽게 고함을 쳤다.
“이게 뭐가 어때서! 황제도 요검을 썼잖아!”
“아닌데.”
설명하기 복잡하지만 아니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무엇보다 황제는 아군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걸로 끝난 이야기 아니냐?”
“…….”
카마엘은 나를 노려보면서 이를 바드득 갈았다.
궁지에 몰린 쥐.
나는 혀를 찼다.
“블러드 레인, 저급이로군.”
“……뭐?”
“칠죄신이 준 장난감이라고 기뻐하면서 받았겠지. 그게 압도적인 힘을 줄 거라고 생각했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제국을 무너트리고 다가올 난세, 그 혼란 속에서 네 위치를 굳건하게 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 그 검만 있으면.”
“…….”
“그렇게 착각하게 만드는 게 바로 요검이다. 얼간아.”
사람의 영혼은 강고하다.
마음만 단단히 먹으면 검 따위에 홀릴 리가 없다.
결국 자기가 먼저 영혼을 바쳐 놓고, 검 탓을 하는 거지.
“이 검만 있으면 세상을 자기 발아래에 무릎 꿇릴 수 있다고, 이 검만 있으면 뭐든지 해낼 수 있다고. 쥔 놈이 그런 착각에 빠져서 미친 짓을 하니까 마검이지.”
“…….”
“아니라는 걸 지금부터 보여 주마. 다들 물러나라.”
나는 이르고는 검을 뽑았다.
주변이 모두 물러나는 가운데, 나는 앞으로 걸어갔다.
서슴없이.
“하아압!”
일그러진 얼굴, 카마엘의 기합.
그러자 검에 감겨 있던 핏방울이 나를 향해서 날아왔다.
빗발치는 탄환처럼.
보통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겠지만 나는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그냥 서 있었다.
파바바박!
핏방울은 죄다 내 염동결계에 막혀 버렸다.
보이지 않는 막에 막혀 버리자 카마엘은 당황했다.
“……뭐, 뭐야?”
카마엘이 베어 버린 천족들, 그 시체에서 다시 핏방울이 파바박 떠오른다.
그래서 카마엘의 앞에 핏빛 보호막을 만드는데…….
“천족은 원래 강하지. 거기다가 공방일체의 마검을 쥐니 더 강해지셨다?”
“그래!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럼 약한 나는 방어나 해야겠네.”
나는 검을 한 손으로 잡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자신 있으면 들어오라고.
“이놈이!”
격분한 카마엘이 나를 향해 맹공을 펼쳤다.
나는 가볍게 스텝을 밟아 피하고, 가끔 염동결계를 펼쳐서 핏방울을 막아 냈다.
내가 계속 방어와 회피만 하자, 카마엘은 기세가 더욱 올랐다.
차차창!
카마엘은 날렵하게 검을 휘두르고, 쉬지 않고 핏방울을 쏴 대면서 나를 몰아붙였다.
유효타는 하나도 없었지만, 카마엘은 내가 소극적으로 굴자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다.
“멍청한 인간 놈! 나는 천족, 그것도 2품계인 케루빔이다! 나한테 이길 거라고 생각했느냐!”
“천족은 날개에 마력을 저장하고 있어서 전투 지속 시간이 더 길지. 근데 내가 이길 거다.”
“얼간이 놈! 계속 막고만 있으면서…….”
말하던 놈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 못 하는 표정.
연속해서 몰아붙이던 자기가 왜 머리가 핑 도는지 모르고 있었다.
때가 왔다.
내가 놈의 목을 노리고 가볍게 찌르니, 카마엘은 필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그것도 어설프다.
푸우우욱!
나는 가볍게 파고들면서 놈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가 빼냈다.
“뭐, 뭐…….”
“내가 사술을 썼냐고? 아니, 그건 너지.”
“어, 어어어…….”
카마엘은 피에 젖어 드는 자기 가슴팍을 내려다보면서 눈을 끔뻑거렸다.
대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가 안 돼서.
“자기가 베어 죽인 상대의 혈액으로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한다?”
“커, 으으으…….”
“희생자의 피를 다 썼으니 그다음에는 네 피를 쓴 거다. 넌 지금 혈액 부족, 빈혈이다.”
카마엘은 평소에 마검을 감췄을 테고, 또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린 적도 없으리라.
그러니 이 메커니즘도 몰랐지.
하지만 사용자의 안전을 고려하면 그게 마검이겠냐.
“쿠우욱.”
카마엘이 자기 가슴을 누르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이놈도 5계위, 거기다 단체의 수장이니 상당한 실력자였을 것이다.
하지만 마검을 손에 넣고는, 천하무적이라도 된 것처럼 자만했다.
그 결과가 이 맥없는 죽음이다.
퍽!
나는 깔끔하게 놈의 목을 쳐 버렸다.
쿠우웅!
비틀거리던 카마엘의 몸뚱이가 쓰러졌다.
파스스슥.
피를 뿌리며 싸우던 마검도 바스러진다.
저급품의 결말이었다.
“자, 그럼…….”
정리를 마친 내가 돌아보자 렌시엘과 친위대, 지원사령부가 숨죽이고 나를 보았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에 자기들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직감에.
나는 렌시엘에게 말했다.
“황후 전하, 지원사령부는 당신이 만든 단체입니다. 그러면 인사권과 통솔권도 지금 당신에게 있는 겁니다.”
“……예, 그렇습니다.”
“지금 당장 제국군과의 전투를 중단하고 성문을 개방하세요. 그리고 지원사령부의 수뇌부들은 일체의 저항 행위를 멈추라고 부하들에게 명령하고요.”
“…….”
천족들은 당황했지만 내 의견에 반대할 순 없었다.
그들이 따르던 카마엘이 천족의 비밀을 밖에다 유포한 반역자였으니까.
렌시엘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지금 당장 전투행위를 멈추세요. 이후의 일은 내가 살펴보고 처결할 것입니다. 죄 없는 자는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
나는 어지간하면 싹 다 처벌할 건데?
애당초 렌시엘이 후궁에 감금된 데에는 카마엘 말고도 다른 여럿이 관여되어 있으리라.
찾아내서 쓸어버릴 예정이다.
하지만 지금은 렌시엘이 일하게 놔두자.
“자, 문제는…….”
이제 카마엘은 잡았고 황성의 일도 곧 끝날 것이다.
하지만 사도 토구로는 어디에 있지?
이미 빠져나갔나?
그때 알베르트가 다가와서는 속삭였다.
“카마엘이 여기 오기 전에 어전회의장에 있었다고 합니다. 오래전에 폐쇄된 곳인데, 뭘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다만?”
“들어간 사람은 둘인데, 나온 건 카마엘 하나였다고 합니다.”
“……한 놈이 남아 있다라.”
카마엘과 단둘이 밀담을 했을 인물.
한 명밖에 없다.
나는 결정하고는 말했다.
“렌시엘 전하.”
지시를 내리던 렌시엘이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황제의 검들은 어전회의장에 있죠?”
“예, 이미 폐쇄되었습니다만…….”
“거기 좀 쓰겠습니다.”
사도, 토구로와 최종 결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