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06)
아껴 뒀던 카드
중앙성.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가 기거하던 성.
제국의 대소 신료들이 이 성의 어전회의장에 모여서 황제를 보좌했다.
하지만 이제 황제는 사라졌고.
어전회의장은 조용해졌다.
그 어전회의장.
두 남자가 서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지원사령부의 지휘관, 카마엘이 상대에게 따져 물었다.
상대는 오크.
사도 토구로였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후궁을 계속 관찰했고, 내외의 통로가 이어져 있다고 확신했다.”
“으으으음.”
카마엘은 이를 악물었다.
“아니, 설마 폭탄을 뿌려 댈 줄이야. 미친 거 아닌가? 황성에서 폭탄은 안 터질 텐데? 제국군은 대체 뒷수습을 할…….”
“소수의 병력만 들어왔을 거다.”
토구로는 냉정하게 말했다.
제국군의 폭탄, 일견 강력해 보이지만 만능이 아니다.
사용자는 무사할 뿐, 아군도 휘말릴 수 있다.
진짜 강자들에게 썼다가는 반대로 당하고.
카마엘은 진저리를 쳤다.
“그럼 어떻게 하지? 그 완성은 대체 언제 되는 건가?”
“나는 모른다.”
“곧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만 있으면…….”
“다시 말하지만 나는 알 수가 없다.”
“…….”
카마엘은 이를 꽉 악물었다.
오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계속 다그쳐 봐야 소용이 없다.
“좋아, 그러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밖에! 모든 병력을 소집하고 제국군에 반격한다! 이 황성은 천혜의 요새니까!”
“후궁에서 폭탄을 썼다고?”
“그래, 뭐…….”
토구로가 슬며시 웃었다.
이 무뚝뚝한 오크가 웃는 모습을 본 카마엘은 깜짝 놀랐다.
“짐작 가는 건 있다. 하지만 말하지 않겠다.”
“뭐? 지금 장난하나?”
“말하지 않겠다.”
“이놈이…….”
카마엘은 순간 칼을 움켜쥐었지만 마음을 다스렸다.
지금 급박한 상황, 자중지란을 일으킬 때가 아니었다.
“나는 아래층에 내려가서 작전 회의를 지시하겠다. 그리고 후궁으로 병력을 증원하고, 또 전방을 맡지. 너는 말할 게 생각난다면…… 나를 찾아오도록!”
“…….”
“알겠나, 토구로? 어차피 우리는 한배를 탄 몸이다. 너도 나에게 협력하는 게 훨씬 더 이로울 거야!”
카마엘은 팔을 휘두르고는 홱 돌아섰다.
5만 군대, 지원사령부의 수장이자 천족에서 촉망받는 인재건만 지금은 여유 없는 남자일 따름이었다.
토구로는 무시하고는 앞을 보았다.
황제, 시릭 카라카스가 자리에 앉아서 천하를 다스렸던 황좌.
주인이 없는 의자에는 여섯 자루의 검이 서로 교차해서 꽂혀 있었다.
제국 안에서 이름난 이들, 야심이 있는 이들은 저 검을 뽑아 보려고 했다.
황좌에 저리 흉물스럽게 놔둘 수 없단 핑계를 대고.
본심은…… 저 칼을 뽑는 자야말로 시릭 카라카스의 정당한 후계자라고 인정받는다는 야심이었다.
토구로는 검을 뽑아 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릴 따름이었다.
카마엘에게 말하지 않은 것.
후궁에 누가 왔는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토구로에게 고스란히 갚아 주겠다고, 똑같은 방식을 쓰고 있으니까.
“왔나, 리젠 리브라타.”
전사는 기다리고 있다.
이 방의 주인이 오기를.
* * *
중앙성.
나와 알베르트, 렌시엘은 후궁 영관의 지하 통로를 통해서 중앙성으로 이동했다.
렌시엘은 기가 막혀서 따졌다.
“아니, 대체 이런 건 또 왜 뚫었나요?”
“그야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중앙성에서 황제가 후궁으로 이동하고 빠져나가는 동선이지.”
“그걸 왜 저는 감쪽같이 모르고 있었죠?”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따지냐니까? 황성 설계하신 위대하신 황제 폐하에게 가서 따져.”
내가 이죽거리자 렌시엘은 부들부들 떨 따름이었다.
그렇게 지하 통로를 통해서, 중앙성의 지하로 이동했다.
식료품 창고였다.
“자, 알베르트. 상황은 어떻게 되지?”
“잠시만 기다리시길.”
중앙성은 넓다.
사람들이 항상 오가고 친위대가 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지금은 거기다가 지원사령부까지 있었다.
내부로 들어와도 천혜의 요새.
“통신이 느리지만 연결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구술해. 생각은 내가 할 테니까.”
내가 후궁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동안, 지원사령부의 병력이 후궁 쪽으로 급격하게 몰려들었다.
그동안 중앙성의 방비가 취약해졌고.
또 제국군과 일전을 벌이느라 경계가 허술해졌다.
이 틈을 노린 이셀렌이 다크엘프의 요원들을 중앙성 안으로 잠입시켰다.
물론 소수의 병력, 큰일을 벌일 정도는 아니다.
내가 원한 건 정보다.
다크엘프의 요원들은 중앙성 각지에 숨어들어서, 성안의 병력 배치 상황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그 정보들을 듣고,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음, 지원사령부가 지금 회의실로 삼은 건 5층, 전략회의실이로군.”
“문제는, 가는 길에 경비병이 가득합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회는 무리지?”
황성, 중앙성의 설계에는 내가 관여했고 경비 시스템도 내가 고안했다.
즉, 물샐틈없다.
있어도 지금 찾기는 무리다.
나는 렌시엘을 돌아보았다.
“자, 그럼 가자.”
“……예?”
“친위대는 황실을 수호한다. 즉, 네가 당당하게 전진한다면 친위대는 네 창이자 방패가 될 거다. 정면 돌파다.”
“그걸…….”
“친위대도 못 믿겠다고?”
렌시엘은 머뭇거렸다.
뭐 황실의 친위대장이라는 게 좀 답이 없는 녀석이지.
하지만 변심할 놈은 아니다.
“하나만 기억해라. 당당하게 고개 들어. 지금 황성의 유일한 황후는 너, 친위대를 다스릴 수 있는 것도 너다. 그 사실만 믿고 당당히 서라.”
“……알겠습니다.”
렌시엘은 각오를 굳혔다.
“할 수밖에 없겠군요. 최단거리를 잡아 주세요. 가능할까요?”
“그렇게 하지. 혹시나 지원사령부의 병력이 막는다면 친위대에 명령해. 쓸어버리라고.”
“……이젠 하다 하다 중앙성 안에서 피가 흐르다니. 정말 뒷수습이 어렵겠군요.”
렌시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나를 쏘아보았다.
“수습에는 당신도 참여해야 합니다.”
“리젠은 정치 같은 거 잘 몰라염~. 나는 그냥 리브라타의 막내거든여?”
“……알았어요! 인정하면 되잖아요! 인정할게요!”
“뭘 인정해? 인정하지 마. 믿지 마.”
“지, 진짜…….”
“아니, 왜 경솔하게 언론과 경찰 조사를 믿으려고 해? 그거 다 조작이라니까? 유튜부를 믿어!”
“으으으으읏.”
렌시엘은 화가 나서 또 발을 동동 굴렀다.
사실 더 적나라하게 말하고 싶은데, 알베르트가 옆에 있어서 직접적인 표현은 참는 거겠지.
물론 나는 알베르트가 입이 무겁다는 걸 확신하고 이번 일에 참가시킨 거지만.
결국 렌시엔은 손을 풀고는 말했다.
“하겠습니다. 가죠.”
1층.
우리 세 사람이 나서자 바로 친위대에게 들켰다.
창을 든 인간 남자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화, 황후 전하? 무사하셨습니까!”
“지금 병력이 필요합니다. 나를 따라오세요.”
렌시엘은 딱 잘라 이르고는 앞으로 걸었다.
친위대는 머뭇거리다가 얼른 뒤를 따랐다.
복도를 나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시녀, 시종들은 얼른 고개를 조아리고 옆으로 물러났다.
친위대 역시도 렌시엘이 딱 잘라 말하니 바로 따랐다.
따르는 친위대가 불어났다.
렌시엘은 우아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선두에 걷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상당히 긴장한 눈치였다.
과거, 제국군의 재정을 담당하던 그녀는 군과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친위대도, 말을 따를지 말지 확신이 없으니까.
지금도 사실 친위대가 돌아서지 않을까, 꽤 불안해하는 게 보인다.
“잘하네.”
옆에서 걷던 내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녀는 나를 흘끗 보았지만 손을 밀쳐 내진 않았다.
그리고 3층에 이르자…….
“황후 전하. 모시겠습니다.”
지원사령부의 병력이 나타났다.
길목을 막은 스무 명의 천족들.
렌시엘은 멈칫하다가 말했다.
“당장 물러나서 길을 비키세요. 비키지 않는다면 반역으로 간주하겠습니다!”
“황후 전하, 저희들은 그저 안전하게 모시려고 할 따름입니다.”
둘러대는 말.
이미 카마엘의 명령을 받은 게 확실했다.
렌시엘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친위대에게 명합니다. 지금부터 내 앞을 막는 지원사령부는 황실에 대한 역심을 품었다고 간주, 배제하도록 하세요.”
“잠깐만요, 황후 전하.”
내가 쓱 반보 앞으로 나섰다.
렌시엘은 나를 경계의 눈으로 보았다.
남들 앞이라고 존대까지 쓰는 내가 뭔 짓을 저지를지 몰라서.
내가 아까 여차하면 쓸어버리라고 명령하라고 말한 거야, 황후로서의 위엄을 아군에게 보이라는 의미였다.
렌시엘 스스로가 딱 각오해야 아군도 동요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공손하게 말했다.
“친위대가 저런 떨거지들에게 칼을 휘두르면 황실의 체면에 금이 갑니다. 부디 저 혼자서 처리하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
수상해.
렌시엘이 나를 의심스럽게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이 있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처결을…….”
휙.
나는 품에서 폭탄을 꺼내 보였다.
그 순간 지원사령부는 진저리를 치면서 크게 눈을 떴다.
“포, 폭렬탄!”
“치, 침착해라!”
“죽기 싫으면 비키시지?”
내가 폭탄을 손안에서 굴려 보이자 지원사령부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폭탄은 황성에서 못 쓴다는 게 정설이다.
하지만 그 예외, 내가 후궁에서 폭탄을 펑펑 까고 불태워 버렸다.
그러니 이들도 지금 반신반의하는 것이다.
확실한 건, 이런 좁은 길목에서 폭탄이 터지면 싹 몰살이다.
“황후 전하가 가시는 길을 막지 말고, 물러나라. 뒤에서 따라오는 건 용서해 줄 테니까.”
“…….”
“아, 싫어?”
“아, 알겠습니다!”
지원사령부의 병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얼른 크게 물러났다.
나는 렌시엘을 돌아보며 말했다.
“황후 전하의 위엄 앞에 저들이 주제를 알고 비켜섰습니다.”
렌시엘은 내 손에 들린 폭탄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저게 설마 여기서 또 터지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며.
“……잘했습니다. 가죠.”
전진하는 동안 친위대는 계속 합류했다.
친위대는 황실을 수호하는 이들, 렌시엘의 명을 군말 없이 따른다.
반면 지원사령부도 숫자가 늘어났지만 내가 폭탄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또 그게 터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뒤를 졸졸 따라올 뿐이었다.
사실 황성 안에서는 폭탄의 마력현상이 봉쇄되어서 안 터진다.
나도 가져온 거 다 떨어졌고, 설사 있어도 쓸 마음은 없었다.
폭탄을 던져 봐야 진짜 강적들에게는 카운터 당하고, 또 마력도 안 늘어난다.
무엇보다 민심이 동요한다.
서울 한복판, 청와대와 국회의사당에서 폭탄을 펑펑 까서 사람을 육편으로 만들었다고 해 봐라.
그 여파가 어떠할까?
코스피를 비롯한 온갖 경제지표가 사망한다. 이거 수습하려면 미쳐 버리지.
나도 어디까지나 일을 편하게, 쭉쭉 진행하려고 달고 온 거다.
“내가 뒷수습하라면 이거 절대 안 하지…….”
“…….”
순간 렌시엘은 불쑥 내 팔을 힘껏 꼬집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상황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다.
나는 팔을 흔들면서 유난을 떨었다.
“아오, 왜 갑자기 그러세요? 저는 황후 전하의 충실한 신하일 따름입니다만?”
“……두고 봐요.”
“응? 뭘 봐요? 앞으로의 정국 수습? 아, 힘드시겠네.”
“…….”
뿌드득.
렌시엘은 이까지 갈았다.
다 왔다.
5층 전략회의실이다.
문 앞에서 지키고 있던 지원사령부는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한껏 긴장한 얼굴이었다.
“문을 여세요.”
렌시엘이 위엄 있게 말하자…… 두 놈은 문을 열고 물러났다.
나는 들어가면서 친위대를 돌아보았다.
“문 부숩시다.”
“예?”
“그냥 문짝 박살 내라고요.”
친위대원들은 알아듣고는 바로 문짝을 떼어 버렸다.
내가 하는 걸 보니 렌시엘의 심복이겠거니 짐작한 것이다.
애당초 문을 박살 내면 포위당할 일은 없지.
하지만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는 지원사령부의 병력은 물경 이백오십.
친위대는 고작 팔십 명이다.
아직 친위대장도 오지 않았고…….
하지만 렌시엘은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있는 지원사령부의 수뇌부들.
그중에서도 서서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천족, 카마엘은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어서 오십시오, 렌시엘 황후 전하. 걱정했습니다.”
“지원사령부의 비장군 카마엘, 당신을 이 시간부로 해임하겠습니다.”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제국군이 황성을 공격하는 중입니다. 말씀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카마엘은 고개를 들고 주변 천족들에게 눈짓했다.
이놈이 렌시엘을 그냥 오게 놔둔 이유?
찾아오면 그냥 포박하면 된다는 생각이겠지.
지금 제국군의 공세를 막고 있다고는 하나…… 지원사령부는 1만이다.
버티면 병력이 더 몰려올 테고.
나와 렌시엘, 친위대가 날고뛰어도 자길 어쩔 수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나서면서 말했다.
“카마엘, 지원사령부가 네 사병이냐? 지원사령부는 렌시엘 황후 전하께서 황제 폐하의 유언을 따라 만든 군사 집단이다. 최종 명령권은 렌시엘 전하에게 있다.”
“누구…….”
나를 본 카마엘이 의아해했다.
시녀로 변장한 걸 기억 못 한 모양이다.
나는 지원사령부의 다른 수뇌부, 장군들을 돌아보았다.
다수가 천족들이다.
“자, 여러분. 지금 전시 작전 중인데 하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카마엘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입니다.”
“황후 전하께서 뭔가 오해하시나 보군요. 저놈부터 제압해라.”
카마엘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지만 틀렸다.
나에게는 계속 감춰 둔 카드가 있으니까.
“5황후 렌시엘 전하의 딸, 미리엘 황녀가 왜 케드릭 가문에 핍박을 당하고 있었을까?”
“…….”
멈칫.
나는 천족들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당신들은 어지러운 시국에서 황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지금 움직이고 있겠지. 일단 황실에 대한 충성은 진심일 거야.”
“…….”
카마엘은 내 말을 끊을 말이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실이니까.
카마엘이 자기 부하들, 지원사령부 전체를 통솔하는 명분이 황실과 5황후를 보호한다는 거다.
실제로는 렌시엘을 유폐했지만.
지금 이 수뇌부 천족들도 상당수가 그 사실을 모른다. 카마엘의 음모에 전원 가담했을 리가 없다.
왜냐하면…….
“다들 그 사실에 분개하면서도 의아해하지 않았나? 왜 5황후가 저리 무력한가. 군부에 영향력을 끼칠 수 없어서? 하지만 봐. 지금 친위대는 그녀를 충성스럽게 따른다. 미리엘을 보호하기만 하는 거라면 충분하다.”
“…….”
“그럴 수 없는 약점이 잡혔기 때문이지. 천족의 비밀 말이야.”
지원사령부, 천족이 다수인 이들이 흠칫했다.
내가 뭘 말하는지 부지불식간에 깨닫고.
어린 천족의 눈물, 그 비밀.
카마엘의 얼굴도 굳어졌다.
나는 확정타를 날렸다.
“천족의 그 중대한 비밀을 외부로 누설한 게 바로 카마엘이다.”
피는 적게 흐를수록 좋지.
대장의 목 하나로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