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04)
내가 원조다
이틀 뒤, 초저녁.
나는 황도의 지하 상수도에 있었다.
동행은 하나.
다크엘프 알베르트였다.
“……우리 둘뿐입니까?”
“나야 하인켈을 쓰고 싶은데, 그래도 전투 능력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아서.”
“아니, 저기. 본부장님.”
알베르트는 나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이다가 말했다.
“너무 무모하지 않습니까?”
“황성에는 1만 병력이 있어. 두 명이 가나 오십 명이 가나 마찬가지야. 그렇다고 천 명을 데려가면 당연히 적에게 들키지.”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알베르트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주제넘지만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본부장님은 너무 몸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내가 나서야 애들이 덜 죽어.”
그리고 직접 최전선에서 싸워야 나도 강해질 수 있고.
누구에게도 내색하지 않았지만 나는 은근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사도 토구로의 몸을 빌렸던 그것.
5초도 안 된 짧은 순간이었지만 칠죄신이었다.
최악의 경우, 칠죄신을 다시 마주할 수 있다.
한데 나는 아직 5계위다.
보통 사람들은 7계위가 끝인 줄 알지만 사실은 그 위가 있다.
내 예전의 모든 능력을 되찾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이상으로 강해져야 한다.
“본부장님.”
알베르트가 다시 불렀다.
“생각이 있으신 건 알겠습니다만. 주변 사람들을 좀 더 믿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부디 몸을 아끼시고요. 제가 보기에는…… 본부장님은 능히 새로운 시대를 세울 영웅이십니다.”
“말은 고마운데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서 분위기가 안 사네.”
“이런 자리니까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저는…….”
알베르트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본부장님께서 여왕님을 행복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야, 무슨…….”
알베르트는 내가 시릭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데 재혼을 권하다니?
황실의 근간을 무너트리는 일 아닌가.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녀 간의 일을 남이 뭐라고 하겠습니까만…… 여왕님께서는 최근에 상당히 평온해지셨습니다. 폐하가 돌아가신 이후로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모습이셨죠. 우리 다크엘프들도 말은 안 하지만 여왕님에게 여유가 돌아온 걸 알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
“그리고 아주 극히 몇몇 사람은 이게 본부장님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오해하면 곤란한데.”
내 대답에도 알베르트는 고개를 슬쩍 숙여 보였다.
“두 분이서 뭘 하시건 저희들이 완벽하게 감출 수 있습니다.”
“세상에 완벽한 비밀은 없다. 그리고…… 너, 이셀렌에게 이거 말하면 진짜 죽어.”
내 정체, 비밀 유지 차원에서라도 그럴 수 있었다.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예전부터 각오했습니다. 아무튼 드릴 말씀은 이 정도입니다. 그저, 본부장님이 앞으로 쭉쭉 뻗어 나가시는 걸 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요 100년간, 너무 답답하게 살아서 말입니다.”
“이런 냄새를 맡고 있으면 당연히 답답하지. 얼른 나가자.”
나는 알베르트를 데리고 비밀 통로를 나아갔다.
팍팍 치고 나가면서 알베르트에게 물어봤다.
“최근에 지나다닌 흔적은 있지?”
“예, 그렇군요.”
“그러면 다수의 인원이 움직인 흔적은?”
“으음…….”
나와 이셀렌, 랑에이가 한 번 왕복했고.
렌시엘도 따로 왕복했다.
만약 비밀 통로를 들켰다면, 적들이 뭔가 수작을 부리지 않았을까?
노련한 요원인 알베르트를 데려온 건 이걸 확인하려는 것도 있었다.
“통로의 먼지, 발자국이 균일한 걸로 보아서는 다섯 명 안팎이 최근에 이동한 것 같군요.”
“그래, 알겠다.”
알베르트의 실력은 확실하다.
나는 믿고서 팍팍 진행했다.
최종 갈림길.
오른쪽으로 쭉 나아가면 7황후의 후궁으로 이어진다.
나는 일단 오른쪽으로 나아가서 사다리를 붙잡았다.
“잠시 여기서 기다려라.”
알베르트에게 나직하게 이른 나는 사다리를 중간까지 오르고는…… 투시력을 발휘했다.
정신력이 강해지면서 투시력으로 뚫어 보는 두께, 볼 수 있는 시야도 늘어났다.
사다리의 위쪽, 방이 보인다.
나는 시야를 크게 돌리면서 둘러보았다.
“…….”
사람의 발끝이 보인다.
혹시 청소하는 시녀인가 싶었지만 계속 고정이다.
적이 기다리고 있다고 봐야겠지.
나는 소리 없이 사다리를 내려왔다.
“반대쪽이다.”
갈림길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왼쪽 통로를 열고, 진행했다.
다시 사다리를 올라서 같은 일을 반복.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나는 사다리를 내려와서는 알베르트에게 말했다.
“이제부터는 황성의 후궁 안으로 들어간다.”
“그럼 여장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다행히도 우리 둘 다 눈이 썩을 일은 없다. 어차피 우리 머리카락만 보여도 죽이려고 들 테니까.”
적들이 매복한 상황이다.
시녀들은 죄다 물려 두고 아군이 아니라면 바로 죽이라고 이야기가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렌시엘의 위치인데…….
중앙성으로 옮겨서 유폐?
아닐 거다.
지원사령부, 카마엘은 렌시엘을 명분으로 삼아서 지금 황성에 눌러앉고 있다.
구금, 억류하고 있단 사실을 세간에 드러낼 수 없다.
일단 성안의 시녀에게라도 들키면 걷잡을 수 없으니까.
“천리정후는 5황후의 후궁, 자기 방에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몸이 안 좋다고 누워 있는 게 가장 쉬운 방식이니까.”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여왕님도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 말한 계획대로 간다. 수시로 이셀렌에게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통신이 불안정하다고는 들었지만 그래도 계속 시도해라.”
“예.”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마친 나는 사다리를 올라서 위로 갔다.
덜컹.
오르는 내내 투시력을 쓴 나는 방으로 올라오고도 계속 주변을 살폈다.
없다.
여기, 1황후의 후궁에는 아무도 없다.
“비밀 통로가 여러 개라고는 생각을 못 했나 보군.”
여기도 정말 오랜만에 온다.
불쑥 이런저런 감회가 솟는다.
나는 감상을 쫓아내고는 알베르트에게 말했다.
“일단 지붕으로 올라서, 적들의 정황을 파악한다. 그리고 최단 루트로 5황후의 후궁으로 들어간다.”
“예.”
적들은 7황후의 후궁만 집중 마크하고 있었다.
나와 알베르트는 소리 없이, 다른 후궁 건물의 지붕을 넘어서 접근했다.
5황후의 후궁에 도착.
전에 이셀렌이 했던 대로 다락방을 통한 침투까지 완료했다.
“자, 여기부터가 문제인데…….”
일단 투시력으로 복도를 살피니 세 놈이 있었다.
“아마 침실 안에는 최소한 둘이 있겠지. 이제부터는 싸워서 돌파해야 한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본부장님은 여력을 아끼시기를.”
“무리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알베르트는 웃어 보였다.
“제가 의외로 싸움을 좀 합니다.”
“좋아, 그럼 맡겨 보지.”
떡은 떡집에서, 이런 잠입 암살은 다크엘프에게 맡기는 거다.
나는 투시력으로 확인한 적의 위치를 알베르트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자 알베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끼이익.
툭, 데구르르르.
문이 열리면서 소리가 난다.
동시에 알베르트는 구슬을 던져서 바닥에 굴렸다.
“응?”
경계를 서고 있던 첫 번째 천족이 무심코 고개를 숙인 순간.
푸우우욱.
알베르트가 날린 단검이 놈의 목을 파고들었다.
놈이 눈을 부릅뜨면서 쓰러지려고 하는데, 알베르트는 나선 계단의 아래로 몸을 날렸다.
그러면서 좌우로 다시금 단검을 날린다.
푹! 푸우우욱!
박히는 소리.
털썩!
정확하게 알베르트가 2층에 착지한 순간, 첫 번째 놈의 몸이 쓰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발소리를 죽여서 내려가니 알베르트는 남은 두 놈을 확인 사살하고 있었다.
“…….”
솜씨가 대단하다.
보통 카라카스에서는 원거리 무기를 잘 생각하지 않는다.
마력방어를 하면 튕겨 나가니까.
하지만 기습으로, 마력방어를 하기 전에 쑤셔 넣으면 원거리 무기도 통한다.
그렇게 첫 놈을 기습해서 잡아도, 쓰러지는 소리가 울린다?
바로 마력질주로 두 번째, 세 번째 놈도 잡아 버리면 된다.
떨어지면서 투척하는 건 쉽지 않은데, 알베르트는 노련하게 해치웠다.
“…….”
우리 두 사람은 발소리를 죽이고는 침실 안쪽을 살폈다.
문을 투시하니, 의자에 앉아 있는 렌시엘이 보인다.
예상대로 적은 두 놈이다.
벽에 기댄 놈, 창가를 바라보는 놈.
나는 알베르트에게 손으로 적의 위치를 알려 주고는 서로 분배했다.
이 건물 안에는 저 두 놈이 끝.
파악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걷어차면서 들어갔다.
콰아앙!
“뭐…….”
창가의 놈이 돌아보는 순간 내가 날린 투검이 놈의 목을 관통했다.
알베르트가 날린 단검은 벽에 기대어 있던 놈의 관자놀이를 꿰뚫었고.
털썩!
두 놈이 죽었다는 걸 확인한 나는 문을 닫고는 렌시엘에게 다가갔다.
“렌시엘, 괜찮…….”
“…….”
말하려던 나는 굳어 버렸다.
렌시엘이 쓰고 있는 가시관, 이마에는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의자에 앉은 그녀의 양 손목에는 가시가 돋은 금속 도구가 채워져서 결박되어 있었다.
이마와 손에 피를 줄줄 흘리는 백금발의 천사.
“함정입니다. 돌아가세요.”
하지만 렌시엘은 대뜸 그 말부터 했다.
자기를 구해 달란 소리는 안 하고.
나는 알베르트에게 시선을 보냈다.
애당초 이걸 예상하고 알베르트를 데려온 거다.
렌시엘이 다시 말했다.
“리젠 리브라타, 함정이라고 했습니다. 후궁에는 병사들이 수없이 깔려 있습니다. 얼른 빠져나가야 합니다.”
“알고 왔다.”
“……예?”
렌시엘은 기막힌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말을 더듬었다.
“제, 제가 보낸 편지는…….”
“네가 슈퍼 큰불 같은 소리를 하겠냐? 이미 함정인 거 알고 왔다.”
“그, 그런데 대체 왜…….”
“미리엘을 엄마 없이 키울 수 없으니까 왔지.”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렌시엘이 피 흘리면서 묶여 있는 걸 본 순간, 속이 확 뒤집어졌지만 말해 봐야 소용없다.
함정이니 돌아가란 소리부터 하는 여자니까.
알베르트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이게 손목은 풀 수 있습니다만…… 철제 관은 무리입니다. 마력현상까지 일으켜서요. 여기서는 무리입니다.”
“그래? 그러면 일단 손목만 풀어. 시간 걸리냐?”
“5분이면 됩니다.”
“좋아, 적당하네. 이셀렌에게 보고는?”
“이미 했습니다. 작전행동에 들어가신다고 합니다.”
렌시엘은 멍하니 나를 보았다.
“……리, 리젠 리브라타? 당신 뭘 하려는 거죠?”
“내가 원래는 가급적 평화적으로 일을 끝내려고 했거든. 피를 적게 흘려야 사후 수습이 편하니까.”
“…….”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아니더라고? 내가 이번에 싹 쓸어버려도 고생하는 건 너잖아? 정국 수습에 뼈 빠지게 고생하는 건 너잖아? 내가 봐줄 필요는 없지?”
“……예?”
렌시엘이 입을 떡 벌렸다.
늘 우아하던 천족이 넋이 나가니 매력적이군.
나는 픽 웃었다.
“아, 걱정하지 마. 만 명 다 죽인다는 건 아니야. 근데…… 한 천 명 정도는 죽여도 될 것 같더라.”
나는 품에 손을 넣고는 잠깐 생각했다.
이제부터 벌어질 일, 용공주에게 사과를…….
“아, 아니지. 이런 파티를 자기 없이 했다고 삐지기나 할 여자지.”
“자, 잠깐만요. ……그게 뭡니까.”
“에이, 알면서.”
나는 손안의 물건을 이리저리 돌려 보였다.
폭렬탄과 작렬탄이었다.
“제국군이 품질을 보증한 폭탄, 대장군님이 직접 제공해 주셨습니다.”
“뭐, 뭐를? 대체 뭘 하려고요?”
“황성에서는 폭탄이 안 터진다? 그렇긴 해. 단, 후궁은 예외다.”
쿠데타가 벌어지면 황제는 후궁 쪽의 비밀 통로로 탈출하고, 폭탄으로 그 통로를 붕괴시켜야 하니까.
나만이 아는 극비 사실이었다.
“하, 하지 마세요.”
렌시엘은 두려움에 떨었다.
내가 지금부터 뭘 벌일지 짐작하고.
나는 창문을 열고는 저 멀리 건너편을 보았다.
적들이 잔뜩 잠복해 있는 7황후의 후궁.
건물에 가려서 안 보이지만 투시력으로 궤도를 잡고…….
“투수, 준비하시고…….”
“아, 안 됩니다!”
렌시엘은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아직 묶여 있는 상태다.
나는 힘껏 몸을 틀었다가…… 창밖으로 폭렬탄과 작렬탄을 뿌렸다.
내가 투포환 선수도 아닌데 당연히 안 닿지.
하지만 나는 염동력으로 셋을 전속력으로 날려 보냈다.
쨍그랑!
7황후의 후궁, 유리창을 깨고 들어간 폭탄들이 터져 나갔다.
퍼어어어어엉!
“끄아아아아아!”
“아아아악!”
폭발 소리.
이어지는 적들의 비명 소리가 밤하늘을 찢는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불길.
나는 웃으면서 손을 털었다.
“이 짓도 오랜만이네.”
테러범들의 폭탄 테러?
그거 원조가 나다.
당한 대로 돌려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