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102)
정치와 부모의 마음
이틀 뒤.
늦은 오후.
황도의 스위트룸.
나는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황도는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숨어서 저항하는 쿠데타군들은 여전했지만, 상인들이 장사를 재개했고, 통행도 활발해졌다.
제국군과 헌병대, 경찰들이 오가는 길거리의 풍경.
하지만 제국민들은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인간들이야 그렇다 치고, 이종족들은 칠죄신의 시대를 살았던 자들이다.
그들에게는 이 정도 혼란은 별거 아닐지도.
달칵.
은발의 다크엘프, 이셀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가 손짓하자 방 안의 모든 호위들이 물러났다.
이셀렌은 마주 앉아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했다.
“서부군에 4황후가 있는지는 모르겠어.”
“슈뢰딩거의 고양이라고?”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그녀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만약 4황후가 작정한다면.
그녀가 서부군 내부에 숨어 있고, 그 사실을 입막음시키는 건 어렵지 않다.
이셀렌은 그래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국 어디에서도, 4황후를 봤다는 목격담은 들려오지 않아. 물론 원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기는 했지만.”
“그랬나?”
“랑에이와 비슷하지만 달라. 네가 그렇게 되고 모두가 의논할 때…….”
이셀렌은 몹시 낯선 것을 말한다는 투였다.
눈앞의 남자가 죽었던 시절을 말해야 하니까.
“4황후가 제국군을 책임지기로 했어. 우리 중에서 군부에 가장 영향력이 강하니까. 하지만 그녀는 제국군의 인사권을 쥐기는 하겠지만 머무르진 않겠다고 했어. 자기가 머무르면 문제가 될 거라고.”
“그렇지.”
4황후는 렌시엘과는 상황이 완전히 반대다.
렌시엘은 군부를 전혀 못 다루지만, 반대로 4황후는 마음만 먹으면 제국군을 움직일 수 있었다.
랑에이가 전장의 여신, 아이돌이라면 4황후는 제국군이 우러러보는 장군이었다.
인류가 집약한 제국군에는 온갖 기라성 같은 영웅호걸과 장수들이 있었지만, 4황후는 그중에서도 특별했다.
간단히 말해서 군대 승률이 나 다음이었다.
거기다가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았고.
내가 정리했다.
“내가 죽고 없는 상황, 4황후가 마음만 먹으면 제국군을 움직여서 정국을 장악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그러니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겠다. 틀린 선택은 아니다만.”
“나도 얼굴 본 지 오래됐어. 하지만 서부군을 장악하고 여차하면 황도로 올라오려고 한다면…….”
“내전이다. 제국은 멸망해.”
제국군과 제국군이 싸운다?
답이 없다.
이셀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릭, 4황후가 그럴 거라고 생각해?”
“몰라. 그리고 모르는 건 계속 따져 봐야 진척이 없다.”
나는 화제를 돌렸다.
“일단 지원사령부부터 마무리하자. 호텔 직원들에게 조치는 해 놨지?”
“한 번 더 점검할게.”
이셀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일어났다.
“그럼 이제…… 미리엘과 이야기를 해야겠군.”
곧 렌시엘을 만날 수 있다고.
나는 건넛방 앞에 멈춰 서서는 말을 골랐다.
이제 미리엘을 만나서…….
“으으음.”
평소에는 유창하던 혀가 굳어 버린다.
이유는 나도 안다.
내 소중한 딸을 저울 위에 올리기 싫기 때문이다.
정국이 어떻게 돌아가건, 내 자식들은 편하게 잘 자라 줬으면 좋겠다.
물론 오르카처럼 현장에서 싸우는 애도 있지만…… 미리엘은 아직 아이 아닌가?
다 자라지 않은 애를 어지럽게 돌아가는 판에 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잘 조율해야 이번 일이 보다 순탄하다.
나는 갈등하면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리세라의 목소리.
내가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책을 보던 미리엘이 바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상당히 긴장한 목소리.
그래도 예전처럼 리세라 뒤에 숨지 않고, 흘끔흘끔 내 얼굴을 쳐다본다.
리세라도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했다.
“오셨어요? 자리를 비켜 드릴까요?”
“아니, 음…….”
나는 잠시 생각했다.
“미리엘.”
“예.”
“곧 렌시엘 어머니가 오실 거다. 만나고 싶지?”
미리엘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짜요?”
“응, 그래.”
미리엘은 목마른 아이처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을 열려다가 머뭇거렸다.
그때 리세라가 말했다.
“미리엘 언니, 그 자리에 저도 같이할까요?”
“……아니, 아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세라가 나를 보았지만 나는 정색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다. 내가 생각을 좀 잘못했다. 그냥 만나면 돼.”
“…….”
“그럼 조금 있다 데리러 올게.”
나는 웃으면서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와서는 방문을 닫으려는데, 리세라가 손으로 붙잡았다.
나를 따라서 복도로 나온 리세라가 나직하게 말했다.
“……제가 괜한 짓을 했나요?”
“아니, 아니다. 오히려 내가 괜한 생각을 한 거지.”
리세라는 행동이 꽤 자연스러운 게 상당히 회복되었구나.
청력의 보조 덕도 크겠지만.
나는 리세라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고맙다. 네 덕분에 내가 잘못을 피할 수 있었다.”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미리엘 언니가 다섯째 어머니에게 잘 말씀드리면…….”
“너희들은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내가 다 알아서 한다.”
딸이 생각해 주는 마음은 참 기쁘다.
하지만 렌시엘은 영민한 여자다.
내가 미리엘을 이용해서 설득하려다가, 오히려 일이 더 틀어질 수가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 수단을 타협하면 끝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 타협을 안 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만.”
“…….”
“내게 다 생각이 있다. 너희들은 공부 열심히 하고…….”
리세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지,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이세요?”
“……역시 좀 안 어울리냐?”
리세라는 웃으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알겠어요.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미리엘 언니는 어리기만 하신 게 아니에요.”
“그래.”
1시간 뒤.
렌시엘이 왔다.
내가 알려 준 비밀 통로로.
주변에는 비밀에 부치고 시녀 하나만 데리고 혼자서.
지금 황성의 지원사령부와 제국군이 대치하는 상황, 이건 정말 위험한 일이었다.
내가 렌시엘을 인질로 잡아 버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한 번 오간 덕에, 우리 사이에는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다.
오는 동안 이목이 닿지 않게, 이셀렌이 많이 애썼고.
“앞으로 2시간은 괜찮을 거야.”
이셀렌의 말.
그리고 반대편 문이 열리고 미리엘이 들어왔다.
리세라의 손을 잡고.
“……미리엘.”
렌시엘이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던졌다.
차오르는 눈물.
그녀는 쓰러질 듯이 달려가서는 미리엘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많이 무서웠지?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해. 내가 못나서…… 미안해. 내가 부족해서…….”
렌시엘은 울먹거리면서 미리엘을 끌어안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우아하고 강단 있는 황후라고 해도 지금은 그저 어린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였다.
내가 시선을 피하는데 미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엄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작은 목소리.
렌시엘은 딸의 어깨를 꼭 잡고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 말하렴. 뭐든지 해 줄게.”
“아저씨를…… 믿어 주세요.”
“…….”
순간 렌시엘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나를 노려보는 시선.
어린 미리엘에게 무슨 소리를 지껄였냐고 의심하는 것이다.
한데 미리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엄마에게 이러라고 시킨 게 아니에요. 제가 생각해서 이런 거예요.”
“…….”
렌시엘은 당장 믿지 못한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미리엘은 필사적으로, 애써 말을 쥐어 짜냈다.
정말 오랜만에 본 엄마인데, 그동안의 일을 하소연하면서 엉엉 울어도 될 텐데도.
그저 스스로 말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를 도와주셨어요. 저만이 아니에요. 리세라도, 오르카도 도와줬어요. 믿어도 돼요.”
“미리엘.”
“믿어 주셔야 해요. 제발요. 제발.”
“…….”
렌시엘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어린 딸이 속은 거라고, 리젠 리브라타는 너의 신뢰를 사려고 수작을 부렸다고 의심하는 정치적 판단.
그리고 딸의 말은 무조건 들어주고 싶은 어머니의 마음.
양자가 충돌한다.
“…….”
지금 렌시엘의 마음은 내가 잘 안다.
나도 아까 저랬으니까.
딸에게 부탁해서 보다 일을 쉽게 풀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던 정치적 판단.
하지만 어린 딸에게 그런 탁한 일을 시키고 싶지 않다. 딸과 어머니의 사이에 금이 갈 만한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아버지의 마음.
“…….”
렌시엘이 나를 돌아보았다.
교차하는 시선.
망설임, 의혹.
그리고 결단.
렌시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지만 리세라, 미리엘을 데리고 잠시 옆방으로 가 주겠니?”
“예.”
“엄마.”
미리엘이 애타게 부르자 렌시엘은 젖은 눈으로 웃어 보였다.
“잘 이야기해 볼게. 조금만 기다리렴.”
“……예.”
미리엘은 리세라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나를 보았다.
부디 잘 풀리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렌시엘이 미리엘이 나가 버린 문을 망연하게 바라보자 내가 손을 내밀었다.
손수건.
분명히 울 거라고 생각해서 미리 준비해 뒀다.
“……고맙게 쓰죠.”
렌시엘은 우아하게 눈가를 훔쳤다.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이 타이밍에 파고드는 경우가 있지만 렌시엘 정도면 역효과다.
렌시엘이 손을 젓자, 따라온 시녀도 옆방으로 건너갔다.
이제 방에 이셀렌과 나, 렌시엘만 남았다.
렌시엘은 건조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지 않아요. 당신이 시릭이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다음은?”
“……하지만 미리엘은 당신을 믿고 있죠. 적어도 당신은 미리엘을 이용하려고 하진 않았어요. 그것만큼은 사실이군요.”
렌시엘이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 미리엘의 눈물도 이용하지 않으려 하는군요.”
“…….”
어린 천족의 눈물은 고급 치료약의 재료다.
이 정보로 렌시엘을 협박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실제로 케드릭 가문이 그렇게 하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렌시엘은 결정했다.
“예, 선택의 여지가 없군요. 리젠 리브라타, 나 천리정후는 이번 일에 한정해서는 당신을 지지하겠습니다.”
“같은 천족인 지원사령부보다 인간인 나를 믿어 주겠다고?”
“제국은 다종족 국가입니다. 지원사령부의 다수가 천족인 건 저도 좋아서 그런 게 아니고요.”
렌시엘은 우아한 목소리로 받았다.
그러고는 이셀렌을 돌아보았다.
“이셀렌, 함께 이야기를 나누겠어요? 그편이 더 빠를 것 같은데.”
“미리엘과 함께 있을 시간이 줄어들 텐데?”
“잘 있는 걸 봤으니 됐습니다. 당신과 랑에이가 부디 미리엘을 소중하게 대해 줄 거라고 믿어요. 그리고…….”
렌시엘은 반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술에 취해 경황이 없다고는 하나 너무나 무례한 이야기를 해 버렸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기를.”
“무슨 이야기? 기억이 안 나는데.”
오르카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이셀렌은 시치미를 뗐다.
평소처럼 냉철한 목소리지만 봐주는 것이다.
렌시엘은 한숨을 쉬었다.
“빚은 언젠가 갚도록 하죠. 그러면 바로 이야기할까요. 카마엘이 말하기를…… 쿠데타군의 잔당들이 황도 안에서 변란을 일으킬 거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벌이겠군.”
물론 쿠데타군의 잔당들이 아직 숨어 있기는 하다.
황도는 인구 4천만 명이 생활하는 제국 제일의 도시다.
헌병대와 경찰들이 뛰어다니고 있지만 하루아침에 다 정리할 순 없었다.
“쿠데타군의 잔당이 남았지만 이제 와 반격할 만한, 중심이 될 구심점은 남지 않았어. 남은 건 진짜 조무래기들이야. 규합이 안 될 텐데.”
“캐묻지는 않았지만 그럴 겁니다.”
“그게 무슨 변란인지는 알아냈나?”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기는 가늠해 볼 수 있겠죠. 내가 황성 안에 있고, 내 사람들이 황성 안에 있습니다. 지원사령부가 작전을 꾀한다면, 내 귀에 들려오게 됩니다.”
“……다시 황성으로 돌아가겠다고?”
나는 상당히 놀랐다.
어렵고도 어렵게 만난 딸, 미리엘과 10분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스로, 위험한 황성으로 돌아간단 말인가?
렌시엘은 단호하게 말했다.
“황제가 있던 곳이 내가 있을 곳입니다. 비록 나 혼자만 남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킬 것입니다.”
“…….”
렌시엘이 나를 보며 말했다.
“지원사령부가 변란을 꾀하는 걸 파악하고 당신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당신이 밖에서 움직이고 내가 안에서 호응한다면 지원사령부의 음모는 사전에 막을 수 있을 겁니다.”
“괜찮군. 좋아.”
지원사령부를 정리하고.
당당하게 황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