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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100화 (99/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100)

황후회의

천리정후, 렌시엘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는 굳어 버렸다.

그야 뭐, 아름다운 몸을 드러낸 상태니까 그럴 만하지.

뺨부터 목으로, 움푹 팬 쇄골에서 매끄러운 어깨와 탐스러운 가슴으로 이어지는 라인이 황홀하다.

과연 사람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여자라고 우러러볼 미녀지만…….

“뭐야, 머리 잘랐냐?”

하지만 나는 그녀의 헤어스타일에 더 놀랐다.

엉덩이를 넘었던 길이의 백금발이 짧은 보브 커트로 바뀌어 있었다.

국민들이 보는 시선 때문에라도 머리카락은 긴 게 좋다고 했는데.

“아…….”

술에 취한 티가 역력한 렌시엘의 얼굴에 경악이 떠오른다.

물론 이성적인 여자니까 침착하게…….

“아아아…….”

어?

새어 나오는 신음이 비명이 될 기세다?

내가 당황하는데 뒤에서 움직이는 기척이 있었다.

탁!

랑에이가 한달음에 달려들어서는 대뜸 렌시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반사적으로 몸부림을 치려던 렌시엘이 뒤늦게 멈췄다.

상대가 랑에이라는 걸 알아본 눈치.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지만 일단 진정한 기색이다.

“……갑자기 뛰쳐나가면 어떻게 해?”

“아니,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는데.”

밤의 후궁에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된다.

렌시엘이라면 바로 판단하고 이성적으로 응대할 줄 알았는데.

놀라서 비명부터 지르려고 할 줄이야.

“…….”

랑에이에 이어서 이셀렌까지 알아본 렌시엘의 눈가에 이성이 돌아왔다.

끄덕.

우리 세 사람을 보고 고갯짓.

소리는 안 지르겠다는 의미에 랑에이가 내게 시선으로 물었다.

나 역시도 고개를 끄덕이자 랑에이는 손을 풀어 주고는 물러났다.

“…….”

렌시엘은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고는 말했다.

“일단 물러나시죠. 옷을 고쳐 입어야 하니.”

“그렇게 하지.”

나는 이셀렌에게 눈짓하고는 옆방인 서재로 건너갔다.

랑에이가 따라와서는 내게 시선으로 물었다.

내가 시릭이라는 걸 밝힐 거냐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할 건데 내 입으로 말할 거다. 기다려.”

“응.”

그리 말한 랑에이는 내 손을 잡았다.

무슨 의미인가 해서 보니 랑에이가 나직하게 말했다.

“다 같이 모여서 기뻐.”

“나는 이런 꼴이라서 슬픈데.”

나는 아직도 치마 두른 채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여전히 입고 있어야 하고.

시간이 흐르고.

나와 이셀렌, 랑에이와 렌시엘이 서재의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렌시엘이 나를 보는 눈빛이 아주 차갑고 싸늘했다.

“불경하고 무례하고 거칠군요.”

“너는 예의 바른 주정뱅이시고. 이제 정신 좀 들어?”

“…….”

“적진에 들어오는데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오히려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대응할 줄 알았는데 비명을 지르려고 한 게 예상외인데.”

렌시엘은 랑에이와는 정반대, 주변의 동향이나 시선을 상당히 신경 쓰는 여자다.

이셀렌이 테이블에 차를 내려놓았다.

익숙한 걸 보니 가끔 들렀던 눈치다.

렌시엘은 이셀렌에게 눈짓했다.

“고마워요, 이셀렌. 하지만 이런 식으로 보게 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내가 다녀갈 때는 늘 이런 식이었잖아.”

“그때는 혼자였죠. 적어도 남자를 데려오는 일은 없었고요.”

“난 지금 옷만큼은 여자라궁.”

“…….”

렌시엘이 싸늘하게 보았다.

나는 깜찍한 윙크까지 날려 보였다.

“몸과 마음까지 여자가 될 수는 없더라궁.”

“……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네가 보고 싶어 했던 리브라타의 막내라니까? 보자면서?”

“약속은 내일이었잖습니까? 이 무슨…….”

“네가 무슨 함정을 파고 있을 줄 몰라서. 일부러 기습 방문했다. 그 정도는 슬슬 알아차리지?”

렌시엘이 어이없어했다.

“2황후와 3황후가 있는 이상 당신을 무사히 돌려보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걱정하는 바는 알겠지만 정도가…….”

“너는 그렇게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은 내 목을 자르면 다 해결된다고 믿고 있을걸. 특히 지원사령부의 비장군 나리께서는.”

“…….”

내가 이르자 렌시엘은 입을 다물었다.

정치적인 계산을 할 줄 아는 여자니 아니라곤 못 하는 것이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빠르게 말했다.

“자, 그럼 얼른 처리하자. 지원사령부가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진범이다. 그래서 네 친위 쿠데타냐, 렌시엘?”

“……예?”

“그러니까 천리정후가 아니라, 천리 여제로 거듭나기 위해서 지원사령부와 손을 잡았냐고 묻는 거다.”

내가 묻는 건 친위 쿠데타, 렌시엘의 자작극이냐는 의미다.

렌시엘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분노로.

“……도발이 아주 지나치군요?”

“애당초 지원사령부를 만든 게 너잖아? 지휘관, 소속 인재들도 다 네가 뽑았고. 사실상 네 사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나는 빠르게 짚어 나갔다.

“제국군 검장급의 쿠데타를 유도하고, 지원사령부로 쓸어버린다. 그렇게 해서 제국군에 흠집을 내고, 정국을 주도할 명분을 얻는다. 그리고 제국군을 몰아세운다. 그게 네 그림 아니냐?”

“이셀렌, 당신은 이런 하찮은 남자와 손을 잡은 겁니까?”

렌시엘이 따져도 이셀렌은 내 눈치만 보고, 랑에이는 입을 꽉 다물었다.

내가 먼저 시릭이라고 안 밝히니까.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적어도 유언 날조범보다는 나은데?”

“……아주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하는군요.”

“지원사령부 관련 서류는 황제의 집무실, 맨 아래 서랍에서 대충 중간쯤에 있었지?”

나는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지원사령부는 원래 내가 만들려다가 관둔 거다. 너무 번잡해지고 한도 끝도 없어서. 하지만 내 필적이 남아 있었으니 그걸 들이밀면 됐겠지. 그래도 마지막 장은 크게 X 표시를 해 놨는데…… 그걸 통째로 위조하셨나?”

“지금 대체 무슨…….”

“내가 시릭 카라카스다. 환생했어.”

렌시엘의 얼굴이 딱 굳었다.

그녀는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한참을.

“……이셀렌 그리고 랑에이. 이자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믿고 지금 데려온 겁니까?”

“시릭이 맞아.”

랑에이의 말, 렌시엘은 치를 떨면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당치도 않습니다! 황후라는 자들이 어찌 이런 간사한 말에 속아 넘어가려고 합니까?”

“시릭만이 아는 정보를 알고 있어.”

이셀렌이 거들었지만 렌시엘은 고개를 크게 가로저었다.

“다른 방법으로 알아낸 겁니다. 여러분들도 짐작 가는 게 있을 텐데요?”

“아, 뭐…… 사실 계속 술술 믿어 준 게 이상했지?”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렌시엘은 내가 시릭이라는 걸 어지간해서는 믿지 않을 것이다.

천족이니까.

원래 카라카스에서, 환생의 개념은 확실하지 않다.

거기다가 천족은 환생에 부정적이다.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게 천족의 믿음이다.

나는 지구에서 카라카스로 환생했으니, 그들이 틀렸다는 걸 알았지만.

“나, 리젠 리브라타가 시릭 카라카스의 환생이 아니라 칠죄신의 사도라고 주장하려고?”

“오히려 그게 더 가능성이 크지 않습니까?”

렌시엘은 정색하고는 말했다.

나는 커피 잔을 입가로 가져왔다.

손을 쓰지 않고 마신다.

염동력.

초능력을 보여 줘도 렌시엘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뭐 사실 1차적으로 해 볼 의심이지. 사실 내가 시릭이 아니라 다른 뭔가가 아닐까? 칠죄신이 시릭 카라카스의 기억을 주입하고 보낸 스파이가 아닐까? 아니면 내가 자각은 없지만 어느 날 내 진짜 정체를 깨닫고는 칠죄신의 편으로 돌아서는 거 아닐까?”

“…….”

“아닌 거 알잖아? 사람의 영혼은 신도 마음대로 못 다룬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사람의 영혼이라는 건 다이아몬드 원석이다.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지만 너무나 단단해서 파괴할 수 없다. 또 연마하면 빛이 나고. 이건 너희들도 들었을 거다.”

나도 스승에게 들은 이야기고.

설령 칠죄신이라고 해도 사람의 영혼은 멋대로 다루지 못한다.

“신이 사람의 영혼을 주무르겠다면, 그놈의 회생인지 타락인지 시키려면 본인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난 동의한 적이 없으니 시릭 카라카스 본인이 맞다.”

“……어느 누군가에게 황제의 기억을 주입할 수도 있습니다.”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하지만 뭐 애당초 믿을 마음은 없지? 그러니까 믿지 마.”

내가 가볍게 말하자 렌시엘이 멍한 얼굴을 했다.

“언론과 경찰은 모조리 조작이라는 사람을 뭐 어떻게 설득해? 믿기 싫으면 말라지. 어쨌건 내가 지금 황도의 군권을 장악한 건 사실이니까.”

“…….”

이셀렌이 눈빛을 보냈지만 무시했다.

지금 여긴 그냥 황성이 아니라 적진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은 집어치우고 이야기하마. 당장 지원사령부를 원대 복귀 시켜. 명령권자는 너잖아.”

“……그러면 뭘 얻습니까?”

“제국군이 황도에서 물러나 주지. 단, 지원사령부 전원이 황도에서 퇴거한 다음이다.”

나는 이제 헌병대, 중앙경찰, 제국 중앙군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제국군만 황도 밖으로 내보내도 나한테는 헌병대와 경찰이 남는다.

헌병대도 돌려보내라고? 현재 쿠데타군 잔당을 잡는 문제 때문에 무리다.

정말 만약에 헌병대를 돌려보내도 나한테는 경찰이 남고.

나는 손안에 카드가 세 장인데, 반면 렌시엘은 딱 한 장.

뭘 해도 질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승리하는 방법을 고르러 온 거다.

“정치적인 모양새가 필요하다고? 그러면 네가 지원사령부를 돌려보내니 제국군도 물러가라고 ‘요청’을 해라. 그러면 제국군도 따를 거다.”

명령이 아니다.

애당초 황후들은 제국군에 대한 명령권이 없다.

랑에이, 4황후도 진즉 전역했고.

나는 가볍게 말했다.

“자, 그러면 네가 정치적인 조율자라는 인상을 세간에 줄 수 있다. 어때?”

“…….”

렌시엘은 상당히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다.

애당초 내가 뒷수습 생각 안 하고 무력으로 밀어 버리면 지원사령부는 못 버틴다.

중앙군만 해도 30만인데 지원사령부는 5만.

게임이 안 된다.

내 제안에 따르는 게 최선이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단, 이쪽에서도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

“상호 신뢰가 필요한 일입니다. 미리엘을 황성으로 먼저 돌려보내세요.”

“뭔 소리야. 미쳤냐?”

나는 정색하고는 쏘아붙였다.

“미리엘을 지금 상황에서 돌려보내면 지원사령부가 인질로 삼으려고 할걸.”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시죠. 오히려 지금 제국군이, 당신들이 제 딸아이를 인질로 삼고 있습니다. 틀립니까?”

그리고 렌시엘은 랑에이를 돌아보았다.

“랑에이, 나는 당신을 믿고 먼저 치료약을 내주고, 미리엘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지원사령부와 마찰을 빚으면서까지요. 하지만 지금 들어주지 않겠다는 겁니까?”

“그게…….”

랑에이는 쩔쩔맸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선을 보낸다.

양심에 찔리는 모양이다.

“…….”

렌시엘의 입장에서는 정말 미칠 노릇이긴 할 거다.

나야 금지옥엽, 어여쁜 내 딸 미리엘에게 험한 상황 겪지 않게 온갖 노력을 다 해 왔지만.

렌시엘에게는 믿을 수 없는 놈이, 믿을 수 없는 세력과 결탁해서 미리엘을 인질로 협박하는 걸로 보일 테니까.

렌시엘이 나를 다그쳤다.

“상호 신뢰라면 그 정도는 해야죠. 안 그렇습니까?”

“그건 안 돼. 지금 황성은 너무 위험해.”

“제가 보기에는 당신들의 소굴이 훨씬 더 위험합니다.”

“저기, 내가 미리엘하고 있으니까…….”

랑에이가 쭈뼛거리면서 손을 들었지만 렌시엘은 싸늘하게 말했다.

“약속을 깬 사람을 다시 믿으라는 겁니까? 정말 실망이 큽니다, 호선랑.”

“……미, 미안하다.”

“…….”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시릭이라는 걸 믿지 못하니 일이 이렇게 될 수밖에.

그렇다고 내가 시릭이라는 걸 믿게 해?

아니, 뭘 말해도 그냥 칠죄신의 음모라고 퉁치면 그만이다.

애당초…… 믿지 않으려는 자를 설득하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생을 믿게 한다? 그것도 환생설을 부정하는 천족에게?

매우 힘든 일이다.

“미리엘은 안 돼. 다른 조건을 걸어.”

“오르카를 황성으로 보내겠어.”

이셀렌이 불쑥 말했다.

렌시엘을 똑바로 보면서.

“우리를 믿을 수 없겠지만 이걸로 믿어 주길 바라.”

“야, 무슨…….”

딸이건 아들이건 인질로는 못 넘기지.

내가 정색했지만 렌시엘이 더 빨랐다.

“당신에게는 보다 덜 중요한 아들이겠죠.”

“…….”

그 순간 내 얼굴이 구겨졌다.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천리정후?”

“…….”

렌시엘은 자기가 말해 놓고는 좀 후회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뭐? 덜 중요한 아들?”

“시릭. 잠깐…….”

“참으라고 하지 마.”

오르카는 다크엘프의 정보망을 계승하지 못한다.

즉, 반쪽짜리 후계자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오르카는 체구는 작아도 듬직하고, 잘 자란 내 둘째 아들이다.

보고 있으면 흐뭇해지고, 어깨도 두드려 주고 싶어지고. 놀리고 싶어지고.

“내가 애들 차별하지 말라고 했지. 그거 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고.”

“시릭인 척 말하는군요.”

“아, 그래? 네가 나를 믿지 않아도…… 지금은 이셀렌에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일 텐데? 서로 우정 비슷한 뭔가를 느끼지 않았나?”

자기 종족의 약점을 교환할 정도로.

내가 쏘아붙였다.

“내가 환생하고 별꼴을 다 봤지만 이젠 이런 것도 보네? 네 딸만 소중하고, 남의 아들인 오르카는 덜 중요하다?”

“…….”

대치 상황.

그때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전하, 주무시옵니까?”

“…….”

정적.

우리 목소리가 새어 나갔나?

하지만 이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후궁의 침실은 마족들이 특별히 지었다.

안에서 나눈 대화가 밖으로 새지 않고, 반대로 밖의 목소리는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시종이 계속 말했다.

“지원사령부의 비장군, 카마엘 님이 급히 뵙고자 하십니다.”

렌시엘에겐 기회.

나에게는 위기?

아니, 나에게도 기회다.

온 김에 치고 나갈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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