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99화 (98/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99)

집으로

천리정후가 만나자고 한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초저녁.

호텔의 스위트룸.

나는 혼자 있는 침실에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짐은 다 챙겼고, 초능력은…….”

휙.

5m는 떨어져 있는 가방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자 딱 잡힌다.

손만 텔레포트해서 잡은 것이다.

이번 쿠데타 사건을 처리하면서, 텔레포트가 상당히 능숙해졌다.

“아직 6계위는 아니지만, 부위 텔레포트도 익숙해졌고. 이런 식이면 곧 네 번째 초능력도 돌아올 테고.”

순조롭다.

짐을 챙긴 나는 응접실로 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건 랑에이와 이셀렌이었다.

두 사람 다 다크엘프의 요원복을 입었다.

잠입하기에는 저게 최적이니까.

이셀렌이 일어나면서 물었다.

“약속이 내일인데 오늘 간다고?”

“적의 사정에 맞춰 주는 게 이상하지. 하루 먼저 들이쳐서 주도권을 잡는다.”

“…….”

이셀렌이 걱정하는 기색이자 내가 말했다.

“천리정후는 바보가 아니야. 만약의 사달이 벌어지면 네가 다른 다크엘프들에게 바로 알릴 거고, 그러면 제국군이 황성을 쓸어버릴 거다. 그건 그 여자도 절대 피하고 싶을 거다.”

“나는 렌시엘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지원사령부가 걱정되는 거야. 만약의 사태에…….”

“난 둘 다 의심하는 거다. 오히려 애들 남겨 두고 가는 게 더 걱정돼.”

우리 세 사람을 황성으로 불러들이고, 미리엘과 리세라를 빼내려고 하지 않을까?

물론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나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제국군과 헌병대, 경찰들을 호텔 주변에 배치했다.

지원사령부가 무슨 짓을 해도 호텔에 있는 내 딸, 그리고 주변 경계를 맡고 있는 오르카를 건드릴 수 없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역으로 생각해. 여차하면 우리가 렌시엘과 지원사령부의 수장, 비장군 카마엘의 목을 칠 기회다.”

“…….”

두 사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내가 여차하면 천리정후의 목을 사정권에 두고 있다는 걸 알고.

나는 짐짓 웃어 보였다.

“그냥 해 본 소리야. 그래도 미리엘 엄마다. 안 그래.”

“그 말은 렌시엘 앞에서는 하지 마.”

이셀렌이 상당히 조심스러워했다.

나한테 이런 부탁 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내 말에 따라 그런 반응을 보였다.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가서 보면 알겠지. 그럼 가자.”

채비를 마친 나는 이셀렌, 랑에이와 함께 지하 상수도를 통해서 이동했다.

고약한 냄새, 하지만 두 사람 다 불평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황후라고 다들 귀하게 모시지만 본래는 나와 온갖 험지를 나다닌 전우였다.

이 정도로 불평할 짬이 아니다.

앞선 내가 꺾고 돌고, 발판을 조작해서 비밀 벽을 열고 계속 들어가자 랑에이가 감탄했다.

“계속 길이 나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거다.”

“여기로 병사들을 투입하면?”

이셀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력 투입하면 무조건 피바람이야. 병사 사상자가 만 명 단위로 나올 거고, 민간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거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에 통로가 무너지는 설계도 해 놨거든.”

“뭐?”

“도주용이니까.”

쿠데타라면 황제가 황성에서 빠져나와야 할 테고, 추격군을 생매장해야겠지.

세상이 두려워하는 암살여왕도 나를 어이없다는 눈길로 보았다.

“설계하면서 그런 걸 다 따졌어?”

“재미있더라고.”

황성은 내 집, 이런저런 비밀 장치 만들면서 신바람이 났지.

당시에는 신나서 일하던 시기였고.

“다 떠나서 렌시엘과 이야기는 해 봐야 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지원사령부를 만든 건지.

그리고 앞일은 어떻게 할 건지.

만약의 경우에는 내가 직접 그녀를 처단해야 하고.

“…….”

미리엘의 어머니, 가급적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도…… 그녀의 후방 지원으로 많이 도움을 받았다.

랑에이가 제국군의 돌격대장, 이셀렌이 정보 담당이라면 렌시엘은 지원 담당이었다.

병량은 기본이고 온갖 군수품, 자원 지원을 도맡았다.

내가 정말 끔찍한 패전을 겪더라도, 그녀는 어떻게든 병력과 물자를 모아서 내게 보내 주었다.

앞서 싸우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다.

특히, 칠죄신과의 전쟁은 정말 피 말리는 총력전이라서…… 렌시엘이 없었다면 제국군은 수십 번은 공중분해 됐을 것이다.

숨은 공신, 아니 일등 공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나는 걸어가면서 물었다.

“원탁회의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계속 미뤄지고 있다. 다들 근심하고 있고. 이러다 올해는 개최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랑에이가 대답했다.

그녀는 순찰을 돌면서, 대민 업무, 민심을 파악하고 있었다.

이셀렌이 말을 보탰다.

“본래 진작 열렸어야 하는데,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심지어 12가문 안에서도 여러 문제가 있으니…….”

“리브라타가 문제가 있다고 하지?”

“……어느 정도는 그래. 리브라타가 12가문을 모조리 박살 낼 생각이냐는 소리도 나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좀만 더 가면 된다.”

천혜의 요새도 단 두 가지는 들락거려야 한다.

물과 공기다.

즉, 황성도 이 두 가지가 오가는 통로는 만들어야 했다.

물론 나는 외적의 침입에 방비해서 황성의 상수 시설은 완전히 독립시켜 두었다.

하지만 동시에, 만약의 사태에 황제가 달아날 수 있게 비밀 벽도 만들어 두었고.

100년이 지났는데도 무리 없이 작동된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후궁에 무사히 들어왔다.

7황후, 용공주의 건물로.

“…….”

텅 빈 건물.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곳곳에 마력램프는 일렁거리고, 먼지 하나 없었다.

지내는 사람이 없어도 관리하게 해 뒀으니까.

이셀렌과 랑에이는 입을 다물고는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잠시 머릿속에 황성의 지도를 그려 보고는 짐을 풀었다.

“자, 이제 적당히 변장할까?”

“……뭐?”

“경비 문제도 있으니까 변장해야지. 나는 여장해야 하고.”

“…….”

두 사람이 깜짝 놀라서 보았지만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후궁에 처음 보는 남자 놈이 돌아다니면 난리 나지.”

뭐, 나는 리젠의 얼굴이 마음에 안 들지만 사실 여장하기 적당하다.

그리고 이런 암행은 황제 시절에도 많이 해 봤고.

나는 바로 손거울을 꺼내고, 가발을 쓰고 의복을 위에 걸쳤다.

“이셀렌, 화장 좀 도와줘라. 그리고 랑에이, 너는 이거.”

빠르게 변장을 마친 나는 랑에이에게 가발을 던져 주었다.

수인용 가발이라서, 호랑이 귀도 문제없이 수납할 수 있다.

“넌 그거 쓰고, 머리카락 안에 넣어 놔.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속는다.”

“……시릭.”

이셀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너무 세심하게 일 처리를 하지 마. 황제가 무슨 이런 걸 일일이 다 챙기고…….”

“니들이 안 하니까 내가 하는 거야.”

“그게 진짜야?”

이셀렌이 나를 화장시키던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보았다.

사실 잠입이라면 그냥 이셀렌에게 다 맡겨 버리면 된다.

하지만 내가 일부러 일정을 하루 앞당기고, 이런저런 처리를 손수 다 한 이유?

“널 못 믿냐고?”

“…….”

“나는 내가 죽은 직후의 일은 모른다. 하지만 너와 천리정후 사이에서 뭔가가 오갔다는 건 알지.”

전에 이셀렌이 밝힌 정보, 무시 못 할 이야기가 나왔다.

황제 시절의 나도 몰랐던 정보, 오르카가 왕권을 물려받지 못한다는 것.

그걸 지금 알고 있는 건 나와 이셀렌 그리고 5황후 천리정후였다.

이셀렌의 일 처리와 정보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보통 경위로 넘어간 게 아니다.

사실 이셀렌은 지금 천리정후에게 약점이 잡힌 셈이다.

어차피 셋이 움직이게 된 거, 이것도 확인할 참이었다.

나는 서슴없이 말했다.

“못 믿는 거 아니다. 하지만 여지를 남기고 싶지 않아.”

“……아니, 말할게. 당신의 오해를 사고 싶진 않아.”

이셀렌이 고개를 가로젓고는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가 버리고…… 내가 정신없이 있다가 렌시엘에게 무심코 그걸 말해 버렸어.”

옆에 랑에이도 있으니까 이셀렌은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내가 죽은 직후, 오르카의 말에 따르면 3일 동안 물도 입에 안 대던 이셀렌에게 천리정후가 찾아와서 달랬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이셀렌이 왜 그렇게 넋이 나갔는지 말해 버렸고.

본래의 암살여왕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실수였다.

그만큼 나, 시릭 카라카스의 죽음이 그녀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이셀렌은 이마를 짚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렌시엘은 그걸 듣고 자기만 알고 있는 건 불공정하다면서 자기 종족의 비밀을 알려 주었지. 뭘 말하는지는 알 거야.”

“…….”

미성년 천족의 눈물이 고급 치료약의 재료가 된다는 것.

즉, 암살여왕과 천리정후는 서로 종족의 큰 비밀을 교환했다.

이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시에 내가 어이가 없어서 되물으니까 그녀가 그러더군. 향후에 내 도움이 필요할 텐데, 이런 일로 서로 앙금이 남으면 큰 손해라고. 앞으로 서로 마주할 때마다 일방적으로 약점을 잡혔다는 생각에, 내가 그녀를 견제하게 될 거라고.”

“…….”

“서로 힘을 합쳐서 제국을 지켜 나가려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그 비밀을 알려 주는 거라고 천리정후는 그러더군.”

이제야 행간이 이해가 간다.

케드릭이 괴롭히는 미리엘을 구출하는 일, 그걸 천리정후가 이셀렌에게 의뢰했던 이유.

이셀렌도 천족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운 유대였다.

이셀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시릭, 나는…….”

“그래, 하고 싶은 말은 알았다.”

나는 이셀렌의 어깨를 탁, 탁 두드려 주었다.

이셀렌은 그런 천리정후가 변심할 리가 없다고, 분명 무슨 사정이 있는 거라고 변호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 황후들 사이에서도 여러 일이 있었다.

가발을 고쳐 쓰던 랑에이가 멀뚱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

“……뭘 그렇게 보는데?”

도도도.

랑에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더니 내 오른손을 자기 어깨 위에 올렸다.

물끄러미.

“……너도 두드려 달라고?”

“응.”

하긴 생각해 보니 랑에이도 진짜 고생 많이 했다.

랑에이는 제국민의 신망을 받는 호랑이 돌격대장이다.

그녀가 황도를 돌아다닌다는 사실만으로도 범죄율이 낮아지고, 은신했던 쿠데타군이 항복해 왔다.

내가 두 여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자, 랑에이는 마침 좋은 기회라는 듯이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자 이셀렌도 묻는다.

“……야.”

조금 있으면 껴안을 기세다.

내가 점잖게 손을 물리자 이셀렌이 아쉽게, 랑에이가 물끄러미 바라본다.

“비주얼이 영 아니야…….”

둘 다 분위기를 탔나 본데, 난 지금 여장했다.

속옷은 멀쩡하지만 시녀용 치마 입고 여자 가발 쓰고 화장까지 했다고.

그런데 다크엘프 여왕님과 호랑이 미녀를 양손에 안고 있으면 정말 꼴이 볼만할 거다.

이셀렌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얼굴이었다.

“……아, 으응. 아무튼 잠입 루트를 만들어야지. 이미 알고 있어.”

“어떻게 아는데?”

“가끔 은밀하게 렌시엘을 만날 때가 있었으니까.”

그럼 일단 믿어 볼까.

5황후의 후궁.

3층 구조, 우리들은 다락방을 통해서 들어갔다.

원래는 밖에서 열리는 문이 아닌데, 이셀렌이 가끔 교체해서 드나들었다고 한다.

“문제는…… 렌시엘의 시녀들은 다들 천족이야.”

“뭔데? 내가 그거 막지 않았냐?”

종족 간의 벽을 허물라는 의미로, 나는 일부러 황후들의 시녀들에게 종족을 따지지 않게 해 뒀다.

작은 것 같지만 중요한 일이다.

“다들 후궁을 비우면서 유명무실해졌으니까.”

“그러면…….”

“몇 명 쓰러트릴게.”

랑에이가 나섰다.

이셀렌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시간이면 렌시엘은 술을 마시고 침실로 돌아올 거야. 둘만 쓰러트리면 돼.”

“……천리정후가 술을 마셔?”

“……보면 알아.”

들으면 들을수록 놀라운 이야기.

이셀렌은 별로 말하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무튼 가자.

탁!

랑에이는 일단 작심하면 정말 재빠르게 상대를 덮쳐들 수 있었다.

벽을 가볍게 밟고 훌쩍 뛰어서는 상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읏.”

시녀들은 기척에 고개를 들려다가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둘을 쓰러트린 우리 세 사람은 기절한 시녀들을 데리고 침실로 들어갔다.

넓지만 정갈한 침실.

내가 찾아오던 시절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 마시던 찻잔도, 벽에 걸려 있는 그림도.

다 내 기억대로다.

“…….”

이셀렌과 랑에이는 기절한 시녀 둘을 옷장 안에 넣은 다음에 조치하고 있었다.

수면약을 투여해서 못 깨어나게.

내가 가만히 보자 랑에이가 불쑥 돌아보았다.

“왜?”

“아니, 그냥…….”

제국의 두 황후가 직접 잠입하고, 시녀복으로 변장하고, 또 이렇게 사소한 일 처리까지 하는 걸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롭다.

생각해 보니 원래 우리는 이랬다.

내가 제국의 황제이기 이전에, 두 사람이 황후이기 이전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였고, 작전을 함께하는 전우였다.

“그냥 오랜만이다 싶어서.”

“응, 옛날 생각 나네. 재밌어.”

랑에이는 부드럽게 웃었다.

이셀렌도 표정에는 안 드러내도 눈가가 누그러져 있었다.

준비를 마친 우리 세 사람은 침실 옆, 서재로 건너갔다.

통로의 문을 살짝 열어 두고.

끼이이익.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

이어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그럼 술상을 준비해 주세요.”

“……전하, 너무 드셨사옵니다.”

“시끄럽습니다. 하라면 하세요.”

“…….”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렌시엘은 저렇게 말할 여자가 아닌데?

다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이어진다.

“다들 전하, 전하, 전하, 그 소리밖에 못 하는 겁니까. 대체 나보고 어쩌라고요.”

지치고 피곤에 젖은 목소리.

내가 기억하는 렌시엘의 목소리가 맞긴 한데…… 동시에 엄청 위화감이 들었다.

여자 친구의 숨겨진 모습을 본 기분?

“답답하고 갑갑하군요. 옷이…….”

옷 벗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이셀렌과 랑에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두 사람 다 놀란 반응이었지만 상관없다.

오히려 좋은 기회, 내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끼이익.

나는 문을 열고 침실로 들어갔다.

“무슨…….”

백금발의 천족이 멍하니 나를 돌아본다.

한 손에는 술잔, 다른 손으로는 막 속옷을 벗으려던 참이다.

지금 렌시엘도 밖의 사람을 소리쳐서 부르거나 일을 키울 수 없다.

이 사실이 알려졌다가는 황후의 품행 문제가 될 테니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나다.”

“…….”

렌시엘의 얼굴에 경계의 기미가 떠올랐다.

나는 대뜸 가발을 벗어 던지면서 말했다.

“네가 보고 싶어 했던 리젠 리브라타다.”

그리고 네 남편인 시릭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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