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98)
시험하는 건 나다
1시간 뒤.
나는 스위트룸 응접실에서 상대를 만났다.
월레스 스코피오.
백발이 성성한 인간 남자인데…… 어깨에 커다란 도끼를 걸치고 있었다.
대뜸 들어오시고 자리에 떡 앉더니만 나를 말없이 쳐다보는 중이시다.
“…….”
나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로 눈싸움 중.
마침내 월레스가 입을 열었다.
“노인에게 시간은 별로 없습니다. 하실 말씀 있으면 얼른 하시죠.”
“그 도끼는 뭡니까?”
“제 무기입니다. 원래 어딜 가나 들고 다니죠.”
“수틀리면 내 머리를 찍어 버리겠다는 자세로 보입니다만?”
“바로 보셨습니다.”
“…….”
협박인가?
하지만 월레스가 말할 때마다 눈에서 불길이 이는 게, 진짜로 여차하면 도끼로 내 머리를 찍겠다고 덤벼들 기세였다.
생면부지의 노장(老將)이 이토록 분노를 불사르니 좀 당황스럽다.
“나한테 원한이 있습니까?”
“사사로운 원한 따위는 없습니다. 그저 나라를 위한 충심, 간적을 척살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죠.”
“…….”
농담이 아닌데?
주변의 다크엘프들이 다가오려고 했지만 나는 손짓으로 제지했다.
발하는 기백, 여차하면 진짜로 내 머리를 쪼개려고 할 것이다.
진짜다.
이 남자는 내 머리를 쪼갤 좋은 기회다 싶어서 각오 단단히 하고 온 거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죠.”
“황후와 어린 황녀를 겁박해서 사사로운 야심을 펼치려는 자를 간적이 아니라 뭐라고 하겠습니까?”
“……황녀는 둘째 치고 두 황후는 협박이 먹힐 이가 아닌데?”
뭐 드라마 사극에서야 힘없는 황후와 황손을 겁박하는 권신~ 같은 소리가 나오지만 천년제국에서는 아니다.
당장 랑에이가 지금 나보다 강하고, 이셀렌도 모략을 부리기 시작하면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월레스는 타는 눈으로 나를 노려볼 따름이었다.
“허리에 찬 칼 한 자루만이 강함이겠습니까? 요사한 꾀와 사람을 홀리는 사특한 혓바닥도 힘인 법입니다. 내 그래서 오늘 단단히 각오하고 왔습니다.”
“뭐, 내 어디가 그토록 사악한지,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월권행위가 지나칩니다. 당장 헌병대가 황도에서 활동한 것만 해도 사상 초유의 일이었습니다.”
“언제를 짚으시는지는 모르겠는데…… 뭐 변명 안 하겠습니다. 개결하고 강직한 건 높이 사지만 지금 급한 건 다른 문제라서요.”
나는 딱 잘라 버렸다.
월레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의아한 얼굴.
나는 간결하게 말했다.
“부른 용건은 간단합니다. 이만 제국군에서 나오시죠.”
“……협박입니까?”
“권유입니다. 왜냐고요? 당신이 파벌의 수장이니까.”
“…….”
월레스는 눈을 감고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물러나면 다른 사람들은 무사한 겁니까?”
“아뇨? 그냥 거슬리면 닥치는 대로 쳐 낼 건데요.”
“…….”
월레스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자기 도끼날을 흘끗 보는 시선, 내가 거들었다.
“내가 지금 겁을 상실했거나, 당신의 각오를 우습게 본다고 여기냐고요? 혹은 내가 무력에 자신이 있어서 이런다? 아닙니다. 말했지만 나는 당신의 용기를 대단히 높이 사고 있습니다.”
“…….”
월레스는 오늘 죽을 각오를 하고 왔다.
내가 제국의 앞날에 해가 되면 바로 찍어 버릴 각오로.
물론 성공하건, 실패하건 월레스는 무조건 죽는다.
그것조차도 각오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나랏일은 별개지. 군대 안에 파벌놀이가 얼마나 문제가 되는지 잘 아실 텐데?”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파벌질 하는 애들은 늘 그런 식으로 말하더라.”
내가 다크엘프에게 손짓하자 문이 열렸다.
들어온 건 남자, 다르갈 사지타리였다.
다르갈은 내 쪽으로 오다가 월레스를 보고는 흠칫했다.
서로 어색한 분위기다.
“월레스 천검장님 아니십니까?”
“으음, 다르갈 백부장도 오랜만이로군.”
“서로 그렇게 부르는 것도 오늘까지입니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오늘로 두 사람 다 군복 벗게 됐으니까.”
“…….”
“나에게 무슨 권한이 있어 그게 가능한지는 묻지 않는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지.”
나는 테이블 위에 서류를 꺼냈다.
받아 본 두 사람이 신음을 흘렸다.
“이건…….”
“익숙한 이름들이 많이 보이죠? 예, 여러분들의 파벌 멤버라고 파악된 인물들입니다. 지금부터 즐거운 고민 시간을 가져 봅시다.”
“동료를 고발하라는 겁니까?”
월레스가 정색하는데 다르갈은 나를 의혹 어린 눈으로 보았다.
다르갈은 나를 좀 봤으니 눈치챘을 것이다.
그런 간단한 일이라면 두 사람을 나란히 부를 이유가 없다는 걸.
“말했지만 두 사람 다 이제 제국군에서 은퇴하게 됩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제국군에 봉사하는 길을 열어 드리죠.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사람은 제국군에 남아서는 안 된다는 이름 옆에 v로 체크해 주세요.”
“그러니까…….”
“단순한 거라면 각 파벌의 멤버들을 모조리 써 둘 이유가 없겠죠.”
다르갈은 눈치를 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 제한이 있습니다. 자기 파벌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하나 지목하려면, 자기 파벌의 이름도 하나 지목해야 합니다.”
“……맞교환입니까?”
“아무도 안 적어도 상관없습니다. 자유롭게 생각하세요. 30분 드리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팔짱을 꼈다.
월레스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 서류, 다르갈을 번갈아서 봤다.
다르갈은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검장님, 이거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저희가 적은 목록이 인사 평가에 반영된다는 소리는 하나도 안 했습니다.”
“내가 바쁜데 갑질 하려고 두 사람을 불렀다고?”
“……말은 끝까지 들으시죠.”
내가 으름장을 놓자 다르갈은 한숨을 쉬었다.
“저나 천검장님을 무사하게 제대하게 해 준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하셨습니다. 여기 본부장님은 사실 성격이 되게 고약해요. 웃으면서 사람 목 칠 생각만 한다니까요. 문제는 그게 합리적이고 올발라서 반박도 못 하겠다는 거죠.”
“갑자기 욕을 퍼붓네.”
“어차피 이제 더는 볼 일 없는데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닙니까?”
다르갈은 불량하게 굴면서도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젠장……. 안 적을 수가 없네.”
“…….”
“안 적을 수가 없어…….”
혼잣말을 중얼거린 다르갈은 기입하기 시작했다.
목록을 보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고뇌하면서.
월레스는 그런 다르갈을 한참 보다가 다시 나를 보았다.
“다르갈 사지타리는 다소 건방지고 입바른 소리를 하는 백부장이었습니다만 사람이 확 바뀌었군요. 본부장님이 바꾸신 겁니까?”
“본인이 잘난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걸 깨닫고는 좀 겸손해진 요즘 시대의 젊은이죠.”
“……그런 이야기를 본인 앞에서 합니까?”
다르갈은 어이없어했다.
월레스는 나를 빤히 보다가 다시 물었다.
“이미 머릿속에서 다 정리해 두신 거 아닙니까?”
“내가 대답하면 들을 준비는 됐습니까?”
“…….”
월레스는 한참 생각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30분이 지났다.
다르갈은 내게 서류를 내밀었다.
상당히 많이 고민한 흔적이 있었다.
반면 월레스는 백지였다.
내가 바라보자 월레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을 수가 없었습니다.”
“왭니까?”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이건 아니에요.”
동료를 배신하는 게 되니까?
내가 시선으로 묻자 월레스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군인이 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다 보니 갑자기 부끄러워졌습니다. 내가 뭐라고 누구를 쳐 내네 마네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제국군에서 받은 임무는 그런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파벌놀이는 군인의 본분에 어긋난다.
월레스는 그걸 깨닫고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다르갈이 입을 떡 벌리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 그게…….”
“두 사람 다 합격.”
내 말에 두 남자 다 놀란 얼굴을 했다.
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월레스 천검장은 이게 군인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펜을 놀릴 수 없었고, 다르갈 백부장은 명령에 충실하게 따라서 답을 적었다. 둘 다 제국군의 도리에서 크게 벗어나는 건 아니다.”
“그러면…….”
“아니, 그렇다고 니들 제대가 취소되는 건 아니고.”
다르갈이 김칫국을 마시자 나는 못을 박았다.
“지금 행동이 괜찮았다는 거지, 파벌놀이 한 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는 게 아니야. 뿌리를 뽑을 거다. 물론 다르갈, 네 이 자료도 참고할 거고.”
“그럼 합격이라고 하신 건 뭡니까?”
월레스가 묻자 나는 턱을 괴고 말했다.
“두 사람 다 제국군 관두고 앞으로 나랑 같이 일합시다.”
“……예?”
“두 사람 다 문제 있는 짓을 저지르긴 했는데…… 뭐 재판에 넘겨야 할 정도는 아니고. 아니, 사실 옭아맬 수는 있지만 내 아래에서 강제 노역으로 퉁치는 걸로 합시다.”
내 말에 다르갈은 어이없어했다.
“……지금 그게 설득입니까?”
“아닌데? 협박이다.”
나는 간결하게 말했다.
“제국군의 이름에 티끌만큼이라도 부끄러운 짓을 했다면 나라에 빚을 갚아야지. 그리고 나는 그걸 갚을 기회를 만들어 줄 거다.”
“…….”
“그리고 월레스, 그 도끼로 내 머리를 찍어 버리고 싶다면 언제라도 덤벼라. 내가 정말로 나라를 어지럽히는 간적이 맞다고 생각한다면야.”
월레스는 망연한 얼굴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이제 노쇠한 몸입니다만?”
“괜찮아요. 나도 요즘 계단 올라가기 벅차니까.”
“아니, 그게…….”
“하고 싶은데 하기 싫은 이유를 찾으면 그땐 정말로 늙어 버린 겁니다. 그런 멋진 도끼를 들고 오신 분에게 여차하면 날 죽일 기회를 주겠다는데 뭘 마다합니까?”
다르갈이 한숨을 쉬었다.
“억지시군요.”
“알잖아, 어차피 너희들은 제국군에 못 돌아가. 하지만 그렇다고 인재를 놀게 놔둘 수 없지.”
우렌과 다르갈은 조종당해서 제국군의 폭탄을 테러범에게 넘겼다.
물론 법률적으로는 죄를 물을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했단 사실, 행적을 덮을 수 없다.
설사 내가 덮어 준다고 해도 다른 제국군 동료들이 그들을 믿고 받아들일까?
“우렌 형은 요즘 생각이 많은 모양입니다만.”
“시간이 남아서 그래. 마음 정리하고 나한테 오라고 해. 퇴근하고 싶단 소리 나올 때까지 일 시켜 줄 테니까.”
월레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며칠 더 생각해 봐도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합격했거든요. 은퇴가 미뤄지셨습니다.”
“……불합격하면 어떻게 되는 거였습니까?”
“도끼 들고 온 깡이 마음에 들어서 사실 그 시점에서 면접은 통과였습니다.”
내 말에 월레스가 웃었다.
“됨됨이를 보려고 했는데 오히려 읽힌 건 저였습니까?”
“……이해하시죠. 본부장님이 좀 이런 분입니다.”
나한테 이미 당해 본 다르갈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다르갈은 나한테 그리 크게 당한 것 같진…… 아, 좀 심한가?
월레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사람을 여럿 봐 왔습니다만 야심은 없으신 듯하군요. 좀 예상외라서 당황스럽습니다만…….”
“지금부터 더 당황하실 테니 준비나 하시죠. 두 분에게 일부터 맡길 테니까.”
“예?”
둘 다 나를 보자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귀족원 회의를 개최해야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겠다고 하면 영 때깔이 안 나오거든요.”
“그야…….”
다르갈이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녀석이 하려다가 만 말을 대신해 주었다.
“그야 우리 리브라타는 귀족원의 말석에도 못 들어가는 한미한 집안이니까. 그런데 현재 황도를 틀어쥔 내가 귀족 가문을 찾아다니면서 참가하려고 하면? 위협하는 모양새가 되어서 영 아니지.”
“그럼 왜 개최하려고 하십니까?”
“그게 황도가 정상화되었다는 근거가 되니까요.”
나는 가볍게 말했다.
“황도의 시민들이 생필품 사재기를 안 하고, 자유롭게 외출하고, 귀족원에서 회의가 열리고 언론이 자유롭게 기사를 내고 있으면 됩니다.”
그럼 지원사령부가 황성을 점령하고 있을 명분이 약해진다.
자기 자리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마각을 드러내거나.
어느 쪽이건 최종 승리자는 나다.
두 사람을 돌려보낸 나는 중앙군 장교들의 인사 서류를 훑어보았다.
쿠데타의 연루자들, 파벌 관련자들은 좌천하고 해임시킬 생각이다.
제국군 파벌 문제는 이걸로 마무리.
이제 귀족원 회의를 무사하게 개최하면 그만이다.
그때 문이 열리고는 랑에이가 돌아왔다.
그녀는 좌우를 둘러보고, 호위들이 있다는 걸 알고는 어색하게 말했다.
“……어, 리브라타?”
“그냥 리젠이라고 불러. 아니면 본부장이라고 부르든가.”
랑에이의 얼굴.
나를 시릭이라고 부르고 싶어 하는 게 보이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랑에이는 자칫하면 이쪽으로 실수하기 쉬우니까.
“조용하게 할 말이 있는데.”
“중요해?”
“응, 중요하다.”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호위들에게 손짓을 해서 물렸다.
탁.
다들 나가고 둘만 남자 랑에이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는 한숨을 쉬었다.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태세.
내가 물끄러미 보자 랑에이가 말했다.
“렌시엘이 보자고 연락해 왔어.”
“…….”
렌시엘, 5황후 천리정후의 이름이다.
나는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너 뭐 했냐? 치료약 가져오라고 보낸 건데 그사이에 뭐가 더 있었냐?”
“으음. 어떻게 할 거야?”
“…….”
이 녀석, 뭔가 실수했는데?
내가 게슴츠레 보자 랑에이는 입을 다물고는 눈만 굴렸다.
“너 설마 내가 시릭이라고 이야기했냐?”
“아니, 안, 안, 안…….”
말을 더듬던 랑에이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실수했어.”
“뭐, 해도 상관없다. 그 여자는 안 믿을 거야.”
“응?”
“그래서 천리정후가 연락해서 뭐라는데?”
랑에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 같이 모여서 지금 상황을 정리하자는데.”
“다 같이가 누군데?”
“나와 너 그리고 이셀렌.”
“…….”
나는 잠깐 생각하곤 물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나자고?”
“……황성으로 들어오래.”
“…….”
들어가면 살아서 못 나오지?
랑에이도 내 시선에 급히 말했다.
“아, 후궁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고 해. 그걸 알려 줄 테니까 들어오라는데.”
“그래?”
사실 안다.
황성의 설계에는 내가 상당 부분 관여했으니까.
내 다음의 황제 시대에 제국군의 쿠데타가 일어날 경우, 탈출해서 헌병대에 합류할 동선까지 짜 뒀지.
나는 재차 물었다.
“우리 셋만 적진으로 들어오라고?”
“응, 거절할까?”
“아니, 간다.”
함정일지도 모른다?
거긴 내 집, 눈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다.
정말 함정이라면 역이용하면 그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