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93화 (92/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93)

너희들의 절망과 좌절이

머리의 통증.

무지막지한 피로감, 눈꺼풀이 강제로 감기려고 한다.

하지만 귀에 들려온 소리, 딸아이의 비명에 내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미리엘이 잡고 있던 손, 꼭 잡고 일어나면서 반대쪽 손을 앞으로 뻗는다.

의식이 깨어나기 직전, 오간 소리는 다 들었다.

상황 파악은 끝났다.

뻑!

“크악!”

미리엘을 끌어당기던 천족의 안면이 뭉개지면서 코피가 터진다.

놈이 미리엘의 손을 놓고 물러나자, 나는 바로 돌려 찼다.

빠악!

뻗어 낸 내 발차기가 놈의 목을 후려쳤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지만 마력을 쓸 순 있다.

연타에 놈은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졌다.

“뭐, 뭐야!”

남은 한 놈의 비명.

막 리세라의 양손을 밧줄로 묶으려던 중인데…….

“아버지!”

리세라가 나를 부르면서 밧줄을 뚝 끊어 버렸다.

지금은 몸이 불편하다지만 리세라도 마력은 있다.

놈이 당황하는 순간, 나는 달려들면서 손바닥을 뻗었다.

놈이 부지불식간에 나를 향해 칼을 휘두르거나 말거나.

“떨어져, 새끼야!”

1초라도 빨리 내 딸을 구하는 게 중요하다!

놈의 안면을 붙잡고 벽에 처박은 나는 즉시 놈의 옷깃을 교차로 잡고 목을 졸랐다.

“커, 어억…….”

버둥거리는 놈의 몸이 곧 늘어졌다.

기절시켰다.

어린 딸 앞에서 극단적인 장면은 가능한 한 보여 주고 싶지 않으니까.

또 이놈들에게 정보를 캐낼 게 있었다.

“아, 아버지. 얼굴이…….”

“응?”

리세라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부르자 나는 내 뺨을 문질렀다.

너무 서두르느라 몰랐는데 얼굴이 베였다.

“괜찮아. 안 죽는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리세라는 얼른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조심스럽게 내게 다가온 딸아이가 뺨의 피를 훔쳤다.

“으음, 세라야. 눈은 좀 괜찮냐?”

리세라가 어색하게나마 혼자 움직이는 걸 보니 눈이 많이 회복된 모양이었다.

리세라는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저보다 아버지가 더 걱정이에요.”

“음, 그게…….”

나는 대답하려다가 머뭇거렸다.

미리엘이 우리 둘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세라는 왜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러?”

“…….”

“…….”

어, 어쩌지?

나도, 리세라도 서로 너무 경황이 없었다.

내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데 리세라가 생긋 웃으면서 수습했다.

“너무 놀라서 말이 잘못 나왔어요. 실수했어요.”

“…….”

딸아, 그게 통한다고 생각하니?

미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리세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언니도 힘들면 아빠 소리가 먼저 나오잖아요. 저도 사실 그래요.”

“그랬어?”

미리엘은 순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쁜 얼굴이다.

자기만 그런 줄 알았는데 여동생인 리세라도 똑같다는 걸 알고.

“그럼 나도 힘들면 아저씨를 아빠라고 불러도 되는 거야?”

“음, 다른 사람들 있는 데서는 안 돼요. 저랑 꼭 약속이에요? 어머니들 앞에서도 절대 안 되고요.”

“그것만 지키면 돼?”

미리엘이 반가운 얼굴을 했다.

기대에 부풀어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

나는 어색하게 말을 골랐다.

“아니, 그게…….”

아이 정서에 몹시 안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리세라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아서 하겠다는 의미다.

내가 미리엘의 눈을 피하면서 쓰러진 두 천족을 살펴보는데…… 갑자기 의식이 아득해진다.

“아…….”

머리가 멍해지고 졸음이 쏟아진다.

사실 나는 지금 자고 있어야 한다.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서 강제 전원 off, 이제 막 충전 시작했는데 또 켜 버리면?

다시 꺼지려고 깜박거리지.

“괜찮으세요?”

내가 비틀거리자 리세라가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부축했다.

미리엘도 깜짝 놀라며 달려와서 내 손을 잡았다.

“아빠!”

“…….”

정신이 팍 들었다.

내가 바로 서도 미리엘과 리세라는 내 팔과 손을 놓지 않고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괜찮다. 괜찮아.”

“……엄청 무리하고 계시잖아요.”

“아저씨, 조심하세요.”

미리엘은 내 손을 붙잡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면서 고개를 푹 수그린다.

엉겁결에 나를 아빠라고 불렀다가, 다시 아저씨로 고치고.

많이 혼란스러울 텐데…… 부끄러워하면서도 내 손을 잡은 작은 손에는 꼭 힘이 들어간다.

내가 쓰러지게 놔두지 않겠다고.

“둘 다 고맙다. 난 괜찮아.”

지금 내 상태를 알겠다.

쓰러지기 직전에 긴급 수혈 받은 거다.

리세라와 미리엘의 정신력이 흘러들어 오면서 내 정신력을 보충해 주고 있었다.

초능력을 안 쓴다면 당분간 활동할 수 있다.

“그나저나…….”

나는 내가 쓰러트린 천족들을 살펴보았다.

군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리세라가 설명했다.

“오르카와 다른 분들은 지금 저택을 경비하고 있어요. 비밀 통로로 들어온 것 같아요.”

“…….”

제국군이 정면에서 시선을 끄는 동안 이놈들이 리세라와 미리엘을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제국군은 검과 군복을 상시 착용한다. 긍지니까.

잠입 임무라서 군복을 벗었다?

리세라와 미리엘이 세 살 어린애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같이 가자는데 따를 리가 없다.

“오히려 군복을 입은 게 정상인데. 신뢰감을 줄 테니까…….”

깨워서 물어보면 되겠지만.

내 상태도 안 좋고, 지금은 딸들이 우선이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벽에 기대 있던 검을 잡은 내가 걸으려고 하자 리세라가 다시 부축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부축해 드릴게요.”

“아니, 그래서는…….”

“오르카와 합류하실 때까지만이라도요.”

“…….”

사실 두 딸은 어디 안전한 곳에 숨기고 싶다.

하지만 저 천족들이 비밀 통로로 들어왔다면 이 저택에서 안전한 곳은 없다.

가능한 한 내 근처에 둬야 한다.

“미안하다. 좀 부탁할게.”

“이게 뭐가 미안하세요. 앞으로도 쭉 도와 드리고 싶은데요.”

리세라는 나를 왼쪽에서 부축했다.

그러자 미리엘도 내 오른팔을 잡고는 말했다.

“……저, 저도 아저씨 걷게 도와 드릴게요.”

“…….”

저 흉악한 놈들 앞에서 무서웠을 텐데.

어린 딸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워서…… 눈가가 아려 왔다.

나도 모르게 말했다.

“미리엘도 다 컸구나.”

“저 다 컸어요?”

“응, 잘 컸다.”

경황이 없는 중에도 흐뭇했다.

저택 현관.

내가 도착하자 부상자들이 상처를 돌보고 있었다.

그중에서 아는 얼굴.

팔이 피범벅이 된 하인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군!”

“아…….”

“일어났다.”

내가 모르는 이들, 다크엘프 요원들이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셀렌이 나를 반드시 지키라고, 내가 일어나면 전황이 바뀔 거라고 한 거겠지.

나는 리세라와 미리엘에게 눈짓하고는 내 발로 섰다.

아군 앞에서는 멀쩡해 보여야 한다.

나는 다가온 하인켈에게 물었다.

“전황은?”

“3차 전투로 양자의 사상자가 다수 나왔습니다. 지금 불리합니다.”

하지만 하인켈의 얼굴에는 걱정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일어났으니 다 뒤집어 주리라는 기대인데…….

나는 작게 말했다.

“내 상태가 지금 말이 아니다. 평소처럼은 못 싸워.”

몸과 마력은 회복되었는데 정신력이 바닥이다.

무리해서 초능력이라도 썼다가는 바로 다시 잠들 수 있었다.

알아들은 하인켈이 낮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단 너랑 오르카랑 교대해라. 오르카에게 말해야겠다.”

“예.”

하인켈은 얼른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갔다.

그동안 나는 부상자들을 둘러보면서 시선으로 인사했다.

쓰러진 나를 지키겠다고, 내 자식들을 보호하려고 목숨을 건 이들이니까.

다들 희망에 찬 눈으로 내 시선을 받아 주었다.

“후우우우.”

낯선 이들의 기대, 정신력을 받아들이면서 조금 머리가 맑아졌다.

사실 이렇게 정신력을 흡수하는 건 위험하다.

애당초 정신력을 마구잡이로 흡수하는 건 절대 금물이었다.

잘못하면 미쳐 버린다.

스승님도 몇 번이고 위험을 경고했고.

그래서 모두에게 약간씩, 내가 의식을 유지할 정도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때 오르카가 들어왔다.

요원복 여기저기가 피로 더러워진 오르카는 깜짝 놀라서 나와 리세라, 미리엘에게 다가왔다.

“어, 리, 리젠 리브라타! 일어났어?”

“……음.”

나는 오르카를 향해서 다가가려다가…… 갑자기 눈앞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다들 보는 앞에서 픽 쓰러지면 안 되지?

나는 양팔을 확 벌려서, 마치 오르카를 포옹하는 것처럼 쓰러졌다.

“뭐, 뭐야. 갑자기?”

반사적으로 받아 준 오르카는 깜짝 놀랐다.

“상태가 안 좋다. 적에게 들키면 안 돼. 아군도 알면 사기가 떨어진다.”

“…….”

오르카도 바로 알아듣고는 나를 끌어안았다.

급하게 달려온 아군을 격려하는 것처럼.

“으음…….”

그러자 오르카의 정신력이 흘러들어 온다.

다시 회복.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바로 서서 물었다.

“전황은 어때?”

“적들은 오십 전후, 우리는 서른 명 남았어. 아슬아슬한 상황, 다행인 건, 적들도 당장 증원을 요청하진 못하고 있어. 시내에서 헌병대, 경찰들과 충돌한 모양이라서.”

“알겠다. 이셀렌에게 연락해서 돌아오라고 해라.”

“그러면…….”

오르카는 걱정스럽게 보았다.

당연히 이셀렌도 지금 격하게 뛰어다니고 있을 것이다.

“아는데 그래도 불러와야 해. 일단 웰링 저택의 적을 몰아내고, 내가 건재하다는 걸 알린 다음에 제국군과 헌병대를 써서 치고 나가야 한다. 이셀렌은 결국 제국군과 헌병대를 다룰 수 없어.”

아르센, 레릭의 문제가 아니다.

원래 헌병대와 제국군은 황제를 따르는 이들이지, 황후의 명을 받는 이들이 아니다.

“그리고 내가 잠들었던 방에 천족 둘이 쓰러져 있다. 애들 시켜서 꽁꽁 묶고 데려와. 마력 못 쓰게 조치하고.”

“응? 천족?”

“황녀들을 노린 침입자다. 근데 제국군이 아니야.”

오르카가 의아한 눈빛으로 묻고 있었다.

쿠데타군이 아니라면 누가 황녀들을 노렸냐고.

내가 말했다.

“그걸 지금부터 알아볼 거다. 빨리해.”

“알았어.”

오르카가 바로 부상이 경미한 다크엘프들을 손짓으로 불러서 지시를 내렸다.

또 리세라와 미리엘에게 모포를 둘러 주고, 비어 있던 의자에 앉히고는 병사들에게 지키게 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하는 모습에 나는 흐뭇해졌다.

아들도 잘 컸다.

잠시 기다리자, 천족 두 놈이 밧줄에 묶여서 끌려왔다.

옷을 입고 있어서 안 보이지만 다크엘프의 고문 도구를 차고 있을 거다.

마력을 일으키진 못한다.

“소속은?”

“…….”

두 놈 다 입을 나란히 다물었다.

나는 피곤한 눈가를 주무르면서 오르카에게 손사래를 쳤다.

“여기서 고문하지 마라. 시간도 없고, 소득도 없다.”

“제국군이 아니라며? 알아내야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짐작 가는 건 있다.”

천족 둘이 나를 의심스럽게 보았다.

동요를 숨기려는 시선.

나는 픽 웃으면서 말했다.

“아리에드 공작 혼자서 쿠데타를 일으키기에는 뒷심이 부족해. 그쪽에서 보낸 놈들일 거다.”

“그게 누구지?”

오르카가 성급하게 말했지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페널티를 안고 갈 순 없다.

당장 대량으로 정신력을 흡수해야 한다.

그것도 내가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종류로.

방법이 있다.

“우리만 알면 섭섭하지. 나가자.”

내가 걷기 시작하자 리세라와 미리엘은 의자에서 일어나서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머뭇거리던 미리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조, 조심히 다녀오세요!”

“응. 고맙다.”

딸의 응원.

힘든 중에도 힘이 난다.

웰링 저택의 정원.

피 냄새와 시체들.

정원의 수풀, 나무 뒤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내가 나오자 지붕에서 사람이 훌쩍 뛰어내렸다.

엘프, 멜리우스였다.

“일어났나, 리브라타의 아들?”

“그래, 넌 얼굴이 좋아 보인다?”

“적들은 다크엘프가 대다수였다. 마구 쏴 죽이니 기분이 좋더군.”

“…….”

아군이 오르카와 다크엘프들인데도 이러네.

이놈은 진짜 죽을 때까지 마이웨이일 것 같다.

내가 손짓하자 하인켈이 얼른 의자를 가져왔다.

“고맙다.”

나는 의자에 앉아서 한숨을 푹 쉬었다.

전장에서 우두머리가 이리 편한 모습을 보여 주면 안 되는데…… 내 상태가 너무 안 좋다.

나는 데리고 나온 천족 둘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이 누구인지, 누구 명령을 받았는지 절대 말을 안 하시겠다?”

“…….”

“괜찮아. 나도 그쪽이 나으니까. 오르카, 여기서 제일 목청 큰 게 누구냐?”

“나다.”

멜리우스가 당당하게 지원했다.

“그럼 멜리우스,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그대로 적들에게 외쳐라. 쩌렁쩌렁하게.”

“그렇게 하지.”

멜리우스는 목을 가다듬고는 내 옆에 섰다.

나는 양손으로 잡고 바닥을 누른 칼자루 끝에 턱을 괴고는 말했다.

“반란군, 너희들의 우두머리는 얼간이다.”

멜리우스가 그대로 따라 하면서 정원에 내 이야기가 울려 퍼진다.

“다크엘프인 오르카가 있다고 다크엘프들 부대를 보내? 오르카가 설득될 리도 없고, 제국군에 성을 밝힌 다크엘프들 역시 손을 늦출 이유가 하나도 없다. 진짜 아무 생각 없이 편성한 거다.”

수풀 여기저기, 제국군의 신음과 반응들이 있었다.

다크엘프는 정보 전달이 뛰어난 거지, 전투 능력이 뛰어난 게 아니다.

웰링 저택을 단시간 내에 함락시키려면 수인 부대를 투입해야 했다.

아, 대장군 레릭이 수인이니 쿠데타에 못 끌어들인다고?

다크엘프를 보내면 같은 다크엘프인 오르카가 머뭇거리고, 수인은 쿠데타에 반대할 것이다?

이종족에 대한 선입견, 모르니까 저지른 바보짓이지.

모든 종족의 황제였던 나로서는 한숨이 나온다.

“정말 인간다운 발상이로군.”

“정말 인간다운 발상이로군!”

“……야, 방금은 혼잣말이었어. 오프더레코드야.”

“방금 말은 취소하겠다!”

멜리우스가 쩌렁쩌렁하게 외친다.

나는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쉬었다.

“쿠데타를 벌이는 반란군, 너희들은 이용당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시간 끌기가 아니라 그 증거가 있다. 바로 우리 옆에 있는 천족 두 놈을 봐라.”

흠칫.

천족들이 그제야 내 의도를 알아차리고는 경악했다.

나는 지체 없이 말했다.

“너희들에게 쿠데타를 부추기고, 숨어서 이득을 보려는 3세력이 보낸 첩자 놈들이다.”

내가 바로 흡수해도 탈이 없는 건 바로 검은 아우라.

사람이 절망하고 좌절해서 흘리는 정신력.

적들의 전의를 부수고 날 두려워하게 해서.

싸울 힘으로 바꾸고, 정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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