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92)
거부할 수 없는 부름
황성의 회의실.
천리정후가 벌컥 화를 냈다.
“방금 시릭이라고 했습니까? 감히 무엄하게도 황제의 이름을 참칭한 자가 있단 말입니까? 그건 절대 써서는 안 되는 이름일 텐데요?”
“……말이 잘못 나왔어.”
“…….”
대답한 상대, 천리정후는 랑에이를 의심스럽게 보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이 호랑이는 우격다짐, 힘을 써서라도 치료약을 뺏으려고 할 것이다.
원래 전쟁터에서 돌격하는 것밖에 모르는 여자다.
정치나 민심의 동향, 주변의 시선 같은 건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황성을 홀로 지켜 오던 천리정후와 랑에이가 무력으로 충돌한다?
그러면…… 세간은 랑에이가 변란을 일으킨 제국군의 편에 섰다고 착각하게 된다.
타오르는 불길이 화염이 된다.
“……일단 드리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미리엘을 반드시 보호하고, 혼란이 끝나면 미리엘을 당신이 직접 데려와 주세요.”
“알았어.”
“…….”
천리정후는 노여움을 억누르면서 몸을 돌렸다.
“기다리세요. 당장…….”
“황후 전하!”
그때 문이 열리더니 병사가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친위대, 황제와 황성을 지키는 특별한 병사들이다.
“병사들이 몰려와서는 개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국군입니까?”
“아닙니다. 지원사령부라고 합니다!”
“…….”
잠깐 생각하던 천리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여보내세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예, 제가 불렀습니다. 그들은 무엄한 제국군에게서 황성을 지켜 낼 겁니다. 사령관이 오면 나한테 바로 오게 하세요.”
“알겠습니다.”
병사가 물러나자 천리정후는 한숨을 쉬었다.
한시름을 놓았다.
“……아니.”
사실은 안심할 때가 절대 아니다.
그녀가 지원사령부에 힘을 주고 키웠지만, 제국군에는 칠죄신과의 싸움을 거친 역전의 용사들이 즐비해 있다.
황제와 함께 칠죄신을 쓰러트린 영웅호걸들.
인간들은 죽었지만 이종족들은 고스란히 현역이었다.
그들이 몰아치면 지원사령부도 오래 못 버틴다.
‘안 돼, 절대 티를 내서는 안 돼……. 나는 언제나 모두 계산대로인 것처럼 굴어야 해. 사실은 전혀 아니지만.’
천리정후는 문득 목이 탔다.
술, 술이 필요하다.
정말 제정신으로는 못 버티겠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외줄 타기를 수십 년을 하고 있다.
“지원사령부?”
랑에이가 의아하게 말했다.
천리정후가 이마를 찌푸리고는 돌아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시릭의 유언대로 만들었고 당신도 동의했을 텐데요?”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
랑에이는 입을 다물었다.
내부에 흐르는 위화감을 설명할 수 없어 하는 얼굴.
천리정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긴 오늘 밤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됐습니다. 치료약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미리엘을 잘 부탁드립니다. 2황후 호선랑.”
“미리엘은 내 아이기도 해. 당연히 지킨다.”
“그래요. 그럼 됐습니다…….”
사실 자기가 가고 싶지만.
모두 다 팽개치고 딸아이를 데리러 가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황제가 사라지고, 모두 다 가 버리고.
텅 비어 버린 황성.
조각나 버린 제국.
껍데기만 남은 것이라고 해도 마지막까지 지켜 내야 한다.
그게 5황후, 천리정후 렌시엘이 택한 책무.
황제에 대한 속죄니까.
웰링 저택의 정원.
다크엘프 오르카는 웰링 저택을 방어하고 있었다.
쳐들어오는 다수는 제국군으로 복무하던 다크엘프들.
1차, 2차 돌격까지는 막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군 병력이 줄었다.
옆에 선 하인켈이 말했다.
“경찰이나 다른 쪽에 지원을 요청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쪽도 지금 정신이 없을 거야. 오히려 그쪽이 더 위태로워. 여기로 병력을 증원하면 적도 여기로 몰려온다.”
오르카는 냉정하게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지금 쿠데타군에게 황자, 황녀의 가치는 동일하지 않다.
그들에게 우선순위는 미리엘>리세라>오르카다.
설사 오르카를 잡는다고 해도, 암살여왕을 흔들 수 없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반대로 미리엘을 붙잡는다면 5황후, 천리정후를 겁박할 수 있다.
거기다가 미성년, 대중에게 내세우고 조종하기 딱이다.
“쿠데타군은 아직 저택 안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냥 내가 나서서 시선을 끄는 건지, 이미 미리엘 누나와 리세라 누님이 퇴거하신 건지 갈피를 못 잡고 있어.”
그러니 쿠데타군도 병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찔러보고 있었다.
허허실실 전법이다.
하인켈이 물었다.
“저택 안의 비밀 통로는 괜찮습니까?”
“적들도 모를 거야. 그래도 혹시 몰라서 병력을 배치해 뒀다. 정말 최악의 상황이면 미리엘 누나와 리세라 누님은 그쪽으로 피하게 하고…….”
그때 멜리우스가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들린다. 놈들이 다시 오는군.”
“…….”
지금까지 잘 싸우긴 했지만 이 엘프는 좀 이상하다.
오르카가 떨떠름하게 보자 멜리우스가 대뜸 받아쳤다.
“내 피부색에 불만이 있나?”
“날 종족 차별주의자라고 의심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내 형제, 자매들은 다들 종족이 다르니까.”
오르카는 발끈했다.
황자로 대우해 달라는 생각은 없지만 이 엘프는 지나치게 거침없잖은가.
멜리우스는 담백하게 말했다.
“나는 폐하와 함께 싸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땐 하지 못했지. 그러니 그분의 자식들과 제국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 기분이 아주 좋다. 더 문제 있나?”
“…….”
빠르지만 가감 없는 말.
오르카는 당황했지만 곧 웃었다.
“황제 폐하 만세.”
“폐하 만세.”
하인켈도 말을 보탰다.
서로 종족이 다르고 입장이 다르다.
멜리우스는 엘프고, 하인켈은 다크엘프들의 전체주의에서 떨어져서 독립 행동 중이다.
하지만 황제의 이름 아래에서 셋은 하나였다.
멜리우스는 활을 잡고는 말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강궁.
우거진 수풀 사이를 노려보면서 활시위를 당긴다.
피이이잉!
순식간에 날아간 화살.
“커어어억…….”
조용하던 정원에서 신음 소리가 울린다.
화살에는 마력을 싣지 못한다.
마력방어를 하면 튕겨 나가고.
하지만 그 마력방어는 상시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즉, 다인 전투 상황에서 화살은 여전히 강력한 무기였다.
“다크엘프 잡는 건 좋아하거든.”
핑! 핑!
멜리우스는 순식간에 화살을 두어 방 쏘더니만 몸을 돌렸다.
“나는 다시 옥상에서 저격하면서 보조하겠다. 잘해 보자!”
오르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괴짜 엘프도 리젠 리브라타를 지키겠다고 목숨을 거는 건가?”
“……음, 나름의 농담일 겁니다.”
“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맞다. 같은 뜻을 품었다면 종족과 입장이 뭐가 중요할까?”
희망찬 말과 달리 오르카는 최악의 상황도 각오했다.
지휘관이니까.
랑에이가 시간에 맞춰서 오지 못한다. 이셀렌도 위치를 들켜서 당하고.
그리고 쿠데타는 성공, 병력들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웰링 저택은 점령당한다.
“…….”
여기 병력들, 멜리우스도, 하인켈도 죽을 것이다.
오르카? 리세라? 미리엘?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는 굴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삶의 전부를 바쳐서 이룩한 제국을 무너트리는 쐐기.
명분으로 이용당하고 천년제국은 더럽혀지리라.
“절대로 그럴 순 없어…….”
“전하.”
“하인켈, 이건 2황자로서 하는 부탁이다. 상황이 급해지면 네가 책임지고 리세라 누님과 미리엘 누나를 탈출시켜라. 네 주군은…… 내가 마지막까지 보호해 보겠다.”
“……그럼 전하께서는?”
“나는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을 것이다.”
사로잡혀서 이용당하느니 자결하겠다.
앳된 얼굴, 작은 체구의 청년이 말하는 모습에 하인켈은 문득 목이 메었다.
황제 폐하의 아들다운 선택이었고 결정이었다.
“……전하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괜찮다. 이기면 된다.”
핑! 핑!
밤하늘을 계속 가르는 화살 소리.
슬금슬금 접근하던 적들이 뿔이 났는지 함성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3차 돌격.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이었다.
자정의 웰링 저택.
미리엘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다.
리세라의 손을 잡고.
리세라는 조용하게 침대 위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라야.”
“예, 언니.”
리세라는 빙긋 웃으면서 돌아보았다.
눈은 상당히 회복되었다고 했다.
“아저씨 못 일어나?”
미리엘은 침대에 누운 이 남자, 리젠을 뭐라 불러야 할지 몰랐다.
매우 고마운 사람인데 어쩐지 대하면 부끄럽고 눈도 못 마주치겠다.
물론 미리엘이 수줍음을 많이 타긴 했지만 유달리.
고르고 고른 호칭이 아저씨다.
리세라는 차분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침이 되기 전에 일어나실 거예요.”
“저기…….”
미리엘도 돌아가는 정황이 흉흉하다는 것쯤은 알았다.
오늘 밤에는 아주 크고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울까?”
“예?”
“그게,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는데…….”
미성년 천족의 눈물은 고급 치료약의 원액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비밀.
하지만 여동생인 리세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침대에 누운 아저씨도.
리세라는 놀란 얼굴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 아니에요. 곧 랑에이 어머니가 돌아오실 거예요. 그럼 돼요.”
“……나도 뭐라도 하고 싶어.”
미리엘은 나직하게 말했다.
어린 천족인 그녀도 안다.
자기가 힘이 없고 걸림돌이라는 걸.
“엄마도 나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거야. 내가 빨리 크질 못해서…….”
“……미리엘 언니.”
리세라는 손을 잡고 일렀다.
“언니의 마음은 알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우실 필요는 없어요.”
천족의 눈물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하품하다가 나오는 생리적인 눈물은 치료약이 되지 못한다.
심장을 쪼개는 고통, 슬픔이 평범한 눈물을 치료약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믿고, 지켜보고 있어요. 저랑 같이…….”
“응.”
“얼른 일어나라고 손을 잡아 드릴까요?”
리세라가 빙긋 웃으면서 리젠의 손을 잡았다.
동생이 권하자 미리엘은 부끄러워하면서 천천히 손을 잡았다.
“……이상하게 따뜻해.”
우는 그녀를 끌어안고 괜찮다고 해 주던 손.
오래전에 알았던 손 같았다.
망설이던 미리엘이 리젠의 손을 꼭 잡자 리세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쌓이고 있었다.
‘랑에이 어머니가 너무 늦으셔. 역시 다섯째 어머니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겠지.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다는 걸 절대 믿지 못하실 테니까. 그리고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위험이 커질 텐데…….’
리세라는 쓰러진 리젠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부디 얼른 기운을 차리시기를.
하지만 최악의 경우, 언니만이라도 피신시켜야 한다.
“언니.”
“응?”
“숨바꼭질 놀이 할까요?”
리세라가 웃으면서 말하자 미리엘이 정색했다.
“안 해. 날 따돌리려고 하지 마.”
미리엘이 외견이 어려서 종종 착각하는데, 그래도 다섯 살짜리 어린애 속임수에는 안 넘어간다.
리세라는 실수를 인정하고는 솔직하게 말했다.
“……언니만이라도 피하셔야 해요.”
“나 혼자 숨으면? 너랑 오르카는?”
“…….”
“나쁜 사람들이라고 해도…… 나는 함부로 해치지 못할 거야. 알아.”
지금 황성의 5황후에게 가장 잘 먹힐 인질이니까.
케드릭 가문에 시달렸던 미리엘도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있어야 다른 사람들도 너희 둘을 함부로 못 대하잖아. 절대 안 숨어.”
“…….”
리세라는 초조해졌지만 언니를 설득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
그때 미리엘이 탄성을 질렀다.
“움직였어.”
“예?”
“아저씨 손가락.”
“……예?”
리세라가 깜짝 놀라서 보았다.
침대에 누운 리젠의 손, 미리엘이 꼭 잡은 손.
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검지만.
조금 뒤에는 두 손가락, 세 손가락이 경련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셀렌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이대로 쓰러지면 며칠이고 못 일어나신다고 했는데?
당황하고 있는데 밖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린다.
“쉿.”
들어온 건 천족 남자 둘이었다.
리세라가 멈칫하는데, 남자가 정갈하게 말했다.
“모시러 왔습니다. 리세라 황녀님, 미리엘 황녀님. 조용히 따라와 주시죠.”
“…….”
“황성은 안전합니다. 자, 어서.”
남자가 거듭 미리엘을 달래듯이 손을 뻗었다.
미리엘은 몸을 뒤로 물리면서 똑바로 쳐다보았다.
“누구세요?”
“……5황후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
리세라는 직감했다.
거짓말이다.
5황후, 천리정후는 미리엘을 매우 아낀다.
데려가더라도 이런 식으로 하진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만약 그런 일이라면…… 황성으로 갔던 랑에이가 직접 치료약을 들고 와서는 설득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이 말하는 어조.
너무 딱딱하다.
결정적으로 몸에서 피 냄새가 풍긴다.
‘군인…….’
어떻게? 제국군이 아닌가?
오르카가 막고 있는데 어떻게 들어왔지?
‘……설마 비밀 통로로?’
아니, 아무튼 언니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갑자기 미리엘이 리세라의 팔을 잡아당겨서는 자기 뒤로 숨겼다.
“……나만 갈게요. 리세라는 여기에 놔두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미리엘 황녀님. 두 분 다 모셔 오라고…….”
“거짓말인 거 알아요. 하지만 리세라까지 데려가려고 한다면 난 소리칠 거예요.”
“…….”
미리엘은 한껏 애를 쓰고 있었다.
눈이 불편한 여동생을 지키려고.
리세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생각했다.
복도의 호위들은 이미 다 당했다.
오르카는 지금 전장 한복판, 상황을 모르고.
방법이 없다.
두 천족 남성은 정중하게 말했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두 분 다 모셔 오라고 했습니다.”
“거짓말.”
“자, 따라오시죠.”
실랑이는 그만, 두 남자가 밧줄과 재갈을 꺼냈다.
본색을 드러내고 미리엘을 향해서 손을 뻗친다.
“아…….”
미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또 그 시커멓고 어두운 방으로 끌려가는 것인가?
거기서 아무것도 못 하고 덜덜 떨어야 하나?
아니, 혼자라면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눈이 불편한 동생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든!
“저리 가! 놔!”
필사적인 몸부림.
뜻밖의 저항에 남자가 당황하고는 얼른 재갈부터 물리려고 했다.
하지만 미리엘은 필사적으로 몸을 흔들고 도리질 치면서 저항했다.
“싫어! 도와줘요! 아…….”
아빠?
하지만 아빠는 이제 안 계신…….
꽈아아악.
그 순간.
미리엘이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네가 끌려가게 절대 놔두지 않겠다고.
미리엘은 깜짝 놀라서는 홱 돌아보았다.
단단하게 붙잡은 손.
그 주인을.
“……아빠?”
딸이 부른다.
아버지가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