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 번 고인 황제놀음-88화 (87/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88)

책임지고 지워 버려야지

십검장이 어이없어하더니만 뒤를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두 제국군이 나서면서 마력을 일으켰다.

“흠.”

하지만 그 순간, 멜리우스가 일어나면서 술병으로 제국군의 머리를 내리쳤다.

쨍그랑!

“억!”

반사적으로 마력을 방어한 제국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깨진 병 조각이 눈으로 튀었으니까.

그 틈에 하인켈이 놈의 목울대를 치고는 다른 놈의 사타구니를 걷어찼다.

아슬아슬하게 피한 놈이 긴장한 얼굴로 하인켈을 노려보았다.

“이, 이놈들이 미쳤나?”

“헌병대! 해보자는 거냐!”

“응.”

나는 가볍게 손날을 휘둘렀다.

얼른 검을 뽑으려던 십검장은 몸을 젖히면서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휘청거리는 발걸음.

아무래도 너무 취한 모양이었다.

나는 가볍게 발을 걸어서 십검장을 쓰러트렸다.

“어어억!”

그리고 넘어진 십검장의 배를 무릎으로 찍어 버렸다.

염동권으로 위력을 더해서.

“커어억!”

술과 안주가 잔뜩 들어가 있던 십검장은 괴로워했다.

멜리우스와 하인켈이 남은 놈들을 정리한 걸 확인한 나는 무릎으로 누른 채로 내려다보았다.

“헉, 허어억.”

십검장은 비틀거리는 중에도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손목까지 내 다리에 눌린 상태다.

그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미, 미친놈들. 이러면 일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이러냐?”

“먼저 마력 불러일으키고 칼 뽑으려던 건 넌데? 그럼 나는 그냥 가만히 앉아서 칼 맞아야 했냐?”

웅성거리는 소리.

나와 일행들이 제국군을 제압하자 손님들도 심상치 않다는 걸 알고는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리 이야기를 맞춰 둔 종업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에게 귀띔하고 있었다.

오늘 술값은 안 받을 테니 이만 돌아가 달라고.

공짜 술이라면 다들 싱글벙글 집에 가지.

나는 제압한 십검장을 다그쳤다.

“소속하고 이름.”

“…….”

꾸우우욱.

내가 무릎에 힘을 가하자 십검장은 참지 못하고는 외쳤다.

“글렌 십검장. 중앙군 백호부대 3돌격대 지휘관이다.”

“돌격대라면 전위부대잖아?”

“그래,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돌아간다면 없던 일로…….”

“야, 무서운 게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는 거야.”

나는 십검장의 허리에서 칼을 풀고는 멀리 던져 버렸다.

기사건 전사건, 일단 칼이 사라지면 역량이 많이 떨어진다.

십검장이 내 눈치를 보자 나는 무릎을 풀고는 일어났다.

“일어나라.”

“…….”

“일어나서 실버에게 안내해.”

“무, 무슨…….”

내가 그냥 충동적으로 일을 벌인 게 아니라는 걸 글렌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나는 포효를 쓰면서 위압했다.

“부하들 죽일래?”

“…….”

다른 둘도 하인켈과 멜리우스에게 처리당한 뒤다.

글렌은 망설이는 얼굴로 일어났다.

나는 하인켈에게 말했다.

“하인켈, 여기서 이 둘 지키고 상황에 맞춰서 행동해라.”

“예, 알겠습니다.”

나는 베아트리체를 바라보면서 눈짓했다.

민간의 협조에 감사하다고.

베아트리체도 살짝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글렌의 등을 툭 쳤다.

“자, 가자.”

나는 멜리우스와 함께 계단으로 향했다.

3층.

실버와 청년 장교들이 전세 내고 흥청망청한다는 곳으로.

글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만두지 않겠나? 지금 시국이 어지러운데 헌병대가 제국군에게 시비를 걸다니?”

“너희들이 술집에서 여자 끼고 노는 시국이잖아.”

“우리들은 어디까지나 대의를 위해서…….”

타다닥.

그때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

찢어진 옷, 젖가슴이 드러난 여자가 우리들을 보고는 멈칫했다.

내가 글렌을 옆으로 밀어서 자리를 만들어 주자,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부은 얼굴. 젖은 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대의를 위해서 술집에서 여자를 때려?”

“……으, 으음.”

글렌은 할 말이 없는지 신음을 흘렸다.

3층 도착.

나는 글렌을 앞세우면서 말했다.

“글렌, 네놈은 십검장이니 천부장인 실버보다 위잖아? 그런데 하급자의 여자를 모시러 아래층으로 내려와? 정상적인 제국군이라면 이게 말이 되냐?”

“…….”

“서로 친해서 술자리에서 야자를 텄나? 아니, 그래도 정도가 지나치지. 너는 실버가 아니라 그 아버지가 백검장이라서 시다바리 노릇을 하는 거야. 맞지?”

글렌이 돌아보고는 눈을 부라렸다.

“뭐 어쩌란 말인가? 헌병대 사정도 마찬가지 아닌가? 자네도 인간이라면 이게 어쩔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어쩔 수 없다니? 뭐가?”

“위로 오르려면 인간들끼리 똘똘 뭉칠 수밖에 없어! 너무 좁은 문이니까! 너도 출세하고 싶다면…….”

“출세하려고 군인 하냐? 일반적인 군대도 아니라 제국군이?”

나를 따르던 제국군은 역사상 사상자를 가장 많이 낸 군대일 거다.

그걸 다들 아는데도 지원자들은 끝도 없이 몰려들었다.

칠죄신에게 맞서 피로 자유를 사려는 의로운 자들이 뭉친 군대.

그게 바로 제국군이다.

“높은 계급은 그만큼 더 많은 목숨을 책임져야 한다. 아첨과 뇌물을 바쳐서 오를 자리가 결코 아니다.”

“제국군의 창시자, 시릭 카라카스 폐하가 말씀하셨지.”

멜리우스가 덧붙였다.

아, 이놈도 내 팬이었지.

하지만 글렌은 나를 보며 비웃었다.

“케케묵은 소리를 하는군. 시릭 카라카스 폐하께서 지금 상태를 보시면 그런 소리는 안 하실…….”

“해.”

찌이이익.

나는 글렌의 가슴에서 계급장을 힘으로 떼어 버렸다.

“…….”

글렌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분노와 살의.

군인에게서 그 가슴팍의 계급장을 뜯어낸다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글렌이 마력까지 일으키면서 나를 노려보았지만, 덤비지는 못했다.

자긴 칼이 없는데 나는 차고 있으니까.

나는 차갑게 말했다.

“왜? 이 시국에 술 마시고 여자 끼고 상관의 아들에게 아첨하는 놈이지만 계급장은 소중하냐?”

“네, 네놈이 뭘 안다고…….”

“이딴 거 알고 싶지 않았어, 새끼야.”

이젠 다른 의미의 실망감이 몰려온다.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사실 나는 제국군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불만론자, 과격분자는 어디에나 있는 거니까.

그래도 내 오른팔, 나와 함께 피를 흘린 전우들 아닌가.

“기대 이상의 실망이다, 실망이야.”

“…….”

“더 할 말 없어. 걷기나 해.”

글렌은 이가 부러져라 갈더니만 몸을 돌렸다.

복도 끝 방.

글렌이 문 앞에서 멈추자 나는 뒤에서 말했다.

“소리 안 나게 문 살짝만 열어 봐.”

“들킨다.”

“취해 있다면 안 들키겠지. 들켜도 상관없고.”

끼이이익.

문을 살짝 열자 소리들이 흘러나온다.

“그러니까 사지타리 빌어먹을 놈들을 얼른 깔끔하게 사형시켜야 한다니까. 대장군이 뭘 그리 꾸물거리는지 모르겠어. 멍청이가.”

“아, 그러니까 실버 님이 확 다 정리하셔야 한다니까요. 대의! 대의 말입니다! 인간의 대의!”

“시릭 카라카스 폐하께서 인간이었는데, 털 뭉치 짐승들하고 잘난 척하는 엘프들, 깃털 달린 것들이 날뛰다니.”

“황후들? 대체 그게 뭡니까? 황제 폐하를 시해하고 지들끼리 나눠 먹겠다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싹 다 쳐 죽여야 해요! 황제 폐하의 뜻을 이어서 우리 인간의 세상을 다시 열어야 합니다!”

“암! 그래야지! 대의를 따라야지!”

“실버 님, 만세! 곧 아리에드 가문의 세상이 열릴 겁니다!”

뭐, 더 들을 게 없네.

“확 열어.”

끼이익!

글렌이 문을 활짝 열자 안의 광경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직사각형 식탁에 둘러앉은 군인 스물.

술이 거나하게 취한 놈들이 각자 미녀들을 끼고 있는데…….

“…….”

문턱을 밟고 선 나는 멈칫했다.

여자들만 다 알몸이었다.

주변에는 찢어진 옷가지들.

페르세포네는 여자가 접대한다지만 대놓고 이렇게 천박한 가게는 아니다.

온갖 고락을 겪었을 여자들이 표정 없이, 혹은 눈물을 머금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짐승 취급당하는 수치와 굴욕을 참아 가며.

“……아.”

어질어질하다.

제국군 군복을 입은 놈들이 이런 추태라니.

“제국군은 사람을 짐승 취급 하는 신을 물리치고자 일어났을 텐데…….”

내가 문설주를 잡고 한숨을 쉬자 상좌에 앉은 놈이 이죽거렸다.

“저건 뭐야? 헌병대 년이야? 놈이야?”

“오오, 헌병대 여자가 실버 님에게 몸을 바치려고 왔나 봅니다!”

“실버 님의 매력은 헌병대도 어쩔 수 없죠! 몸이 달아서 찾아오는…….”

퍼어억!

나는 문가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벽이 울릴 정도의 진동.

아첨하던 놈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노는 걸 딱히 막진 않았지. 않았는데…….”

황제인 나는 섹스와 결혼, 출산을 장려했다.

칠죄신과의 전쟁에서 인구가 너무 줄었으니까.

인류 존속을 위해서라도 필요한 일이다.

또 제국군은 매번 생사를 오가는 전쟁을 치러서, 이성과의 잠자리로 불안을 달래고 마음을 녹여야 했다.

당시 제국군은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라서 다들 알아서 했고.

인류를 위해서 싸우는 전설적인 영웅이 구애하면 보통 두근거리지.

인기 끌겠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제국군이 된 전우들도 많았고.

“하지만 이건 아니지. 이 개새끼들아. 니들, 민간인에게 누가 이래도 된다고 했어? 얌전히 술만 마실 것이지 어디서 사람에게 이런 모욕을 줘!”

“뭐?”

“……저거 뭐야?”

“글렌 십검장! 저거 뭐 하는 놈인데 데려왔어!”

호통을 치는 놈의 계급장은 방패, 특병 놈이었다.

한국군으로 치면…… 병장이 소령에게 지랄하네?

술자리라도 있을 수 없는 일, 위계질서도 개판이었다.

하지만 상좌, 실버의 바로 옆자리인 걸 보니 총애받는 것이리라.

이게 바로 파벌의 해악이다.

공적인 계급을 무시하고, 사적 인맥이 우선시되는 거.

나는 여자들에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여자들 다 나가요.”

“나가는 년은 다 뒤진다?”

상좌에 앉은 청년, 실버가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오늘 지배인이 말했죠? 펄헤븐이라는 소리 들으면 다 피하라고.”

“…….”

눈치를 보던 여자들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옆으로 비켜 주자 줄줄이 다 나간다.

나는 멜리우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계단 쪽으로 가 있어. 내려가는 놈 있으면 잡거나 대충 넘겨. 무리하지 말고.”

“알겠다.”

멜리우스가 물러나자 다들 더 어이없어하는 얼굴이었다.

이종족 전사, 엘프를 믿고 내가 이러나 싶었는데 아니었으니까.

실버가 헛웃음을 흘렸다.

“……저 새끼 뭐야? 글렌! 넌 뭔데 저런 새끼를 데려왔어!”

“실버 님, 제가 처리해 보겠습니다. 저 헌병대 새끼 옷을 찢어발겨서 알몸으로 춤추게 하죠!”

아까 글렌에게 말을 까던 특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이 갈지자걸음으로 문가로 다가오자 나는 바로 손을 날렸다.

짝! 짝! 퍽!

뺨을 연속으로 갈긴 다음에 깔끔하게 앞차기!

염동장의 응용으로 쭉 밀어내자 놈의 몸이 순식간에 식탁 끄트머리까지 밀려났다.

“으, 으으으. 우웨에엑.”

밀려난 특병이 테이블 위에서 구토했다.

“으억!”

음식과 안주 위에 토사물이 쏟아지자 다들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데 실버는 정색하고는 특병의 머리를 술병으로 내리쳤다.

“이 새끼가! 더럽게 어디서!”

쨍그랑! 쨍그랑!

한 번 친 것도 모자라서, 다음 병을 거꾸로 잡고는 내리친다.

특병의 얼굴이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주변의 다른 장교들은 놀라며 실버의 양팔을 잡고 뜯어말렸다.

“실버 님! 그러다가 죽습니다!”

“고정하시죠!”

“죽이면 큰일입니다! 큰일이 눈앞 아닙니까!”

실버는 좌우를 돌아보며 외쳤다.

“아, 진짜! 기분 다 잡치네! 글렌! 베아트리체는 어디 있어!”

“집에 갔다.”

내가 건조하게 말하자 실버는 새삼 나를 돌아보았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길.

“너 뭐 하는 놈이야? 헌병대? 이관 놈이 뭘 믿고 이래? 왜 시비야?”

“쿠데타.”

움찔.

다들 안색이 변했다.

특히 실버는 입을 떡 벌리는 게…… 뭐 그냥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문설주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이거 뭐 더 볼 것도 없네. 술집에 모여서 민간인을 희롱하면서 대의랍시고 쿠데타를 논의하고 계셨다? 병력 이동이고 뭐고 계획하고 계셨다?”

“아, 아닙니다.”

“왜 헌병대에게 존댓말을 해!”

“우린 아무것도 몰라! 어디서 트집이야!”

우왕좌왕하는 놈들.

술기운을 깨겠다고 얼른 마력을 불러일으킨다.

한편으로는 내 얼굴을 살피는 기색.

내가 추가 병력을 데리고 온 건가, 무슨 깡인가 싶어서.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세한 건 경찰서에 가서 듣지.”

“……헌병 아니야?”

“대테러 수사본부장, 리젠 리브라타다. 일하는 김에 쿠데타도 막으려고.”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안 믿겠지만, 나는 지금 니들이 입고 있는 군복에 애정이 있다. 지금 당장 스스로 계급장을 떼고 무릎을 꿇으면 불명예제대와 구속 수사로 끝내 주마. 즉, 앞으로 기나긴 감옥 생활에서 팔다리 병신으로 고생할 일 없을 거란 얘기다.”

“…….”

“하지만 괜히 저항하면 너희들은 제국군의 오점, 수치라 여기고 끊어 버리겠다.”

실버가 글렌을 돌아보았다.

“저놈 병력 데리고 왔어?”

“…….”

나를 멍하니 보던 글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실버가 검을 잡으면서 말했다.

“저 새끼, 죽여 버려.”

“그, 그게 상대는 헌병대……. 아니, 수사본부장이라면…….”

“일단 그냥 죽여 버려! 아버지에게 이야기해서 덮어 버리게!”

실버가 호통을 쳤다.

“모르겠어? 저놈이 살아 돌아가면 우리 다 죽어!”

“틀렸다.”

나는 바로 서면서 말했다.

“나한테 덤비면 다 죽는 거지.”

이놈들은 제국군의 오점이다.

그럼 제국군 총수로서, 책임지고 지워 버려야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