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86)
아들부터 날려 주마
오후의 웰링 저택.
나는 병원의 일을 마치고는 일단 돌아왔다.
수사본부, 사지타리 저택 처리, 또 병원까지 다니느라 오랜만에 온 거다.
현관에서 리세라가 맞아 주었다.
“다녀오셨어요?”
“그래.”
딸의 밝은 목소리에 웃게 된다.
리세라의 손을 잡은 미리엘이 우물쭈물했다.
“……다, 다녀오셨어요?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편하게 지내고 있어요.”
작은 목소리.
부끄러움을 타는지 내 얼굴을 제대로 못 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리엘은 뺨을 붉히고는 리세라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언니, 먼저 가셔도 괜찮아요.”
“으응. 아냐.”
“이제 사물의 윤곽은 보이니까요. 금방 갈 테니까 방에서 쉬고 계세요.”
“……응.”
미리엘은 나를 살짝 보았다가 종종걸음으로 떠나갔다.
내가 아쉬운 마음으로 보고 있자 리세라가 웃었다.
“언니에게는 안 밝히세요?”
“그건 절대 안 돼.”
나는 정색했다.
내가 시릭이라는 걸 밝히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이유를 꼽자면 미리엘이 첫째다.
“미리엘은 아직 어려. 그리고 최근에 너무 안 좋은 경험을 했고…….”
100년이 지났지만 미리엘은 이제 고작 12~13세나 되어 보일 뿐이다.
외모만이 아니라 정신도 아직 어리다.
아직 사춘기도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사실은 시릭이라는 걸 알려 봐. 엄청 혼란스러울 거다.”
아직 애한테, 잘 모르는 아저씨가 사실 옛날에 죽은 아빠라고 해 봐.
그렇게 믿어야 한다고 주변의 가족들이 말한다고 생각해 봐.
그러면 정서적으로 얼마나 혼란스럽겠어?
“부모가 재혼해도 저 나이 애들은 머리가 헝클어지는데…… 환생이라니. 무리야.”
“감사합니다. 정말 우리들을 우선으로 생각해 주시네요.”
“당연하지. 너희들은 내 자식인데…….”
말하던 나는 멈칫했다.
리세라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거리감이 있었다.
아, 그랬지.
왜 황후들을 멀리했냐고 물어보았는데 나는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왠지 변명하는 기분으로 말했다.
“……음, 일단 랑에이하고 이셀렌한테 내가 누군지 알렸다.”
“예, 정말로 잘됐네요.”
리세라는 내 손을 꼭 잡고는 기뻐했다.
저녁에 치킨이라도 사 온 것처럼 정말 기뻐하는지라 보는 내 마음도 풀렸다.
사실 리세라가 황후들과 화해하라고 한 적도 없다.
그냥 애가 신경 쓰는 게 미안해서 한 말인데…… 이렇게 기뻐하다니 나도 기쁘네.
“그래, 밥은 먹었냐? 조금 있다가 다 같이 저녁 먹자. 아멜리아는?”
“아멜리아는 지금 병원에 가 계세요. 곧 돌아오실 거예요.”
아, 칼비나를 돌보러 갔군.
“지금은 로데릭 씨가 손님을 맞이하고 계시는데…….”
말하던 리세라가 내 손을 놓았다.
순간 내가 아쉽게 딸아이를 보는데, 리세라는 입까지 다물고는 옆으로 물러났다.
발소리.
로데릭과 낯익은 남자가 현관으로 다가오다가 멈췄다.
낯익은 남자는 웰링 백작.
우리에게 이 저택을 대여해 준 귀족이었다.
“……아, 마침 저기 오시는군요. 하하하, 리젠 도련님. 참으로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로데릭이 난감한 얼굴이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시선으로 대답했다.
나는 웰링 백작에게 권했다.
“마침 좋은 기회인데 이야기 좀 하시겠습니까?”
내가 황도의 테러, 군사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로데릭과 알리시아도 놀진 않았다.
두 사람과 멜리우스는 리브라타의 이름으로 귀족들에게 각종 회담, 외교전을 펼쳤다.
적재적소다.
사실 나는 귀족들 비위를 맞추는 게 귀찮았다.
반면 로데릭은 진중하고 사려 깊은 데다가 장남이다.
나는 테라스에서 로데릭, 그리고 웰링 백작과 마주 앉았다.
웰링 백작은 웃으면서 말했다.
“모처럼 기거하시는 곳인데 너무 작아서 죄송합니다.”
“하하, 그러게요. 황후에다가 황녀까지 모시기에는 너무 좁죠?”
인사치레에 나는 대뜸 대꾸했다.
웰링 백작이 어색하게 웃자 나는 씩 웃었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형님과 다 하셨을 겁니다. 저를 몹시 만나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도 몇 차례 들었고요. 자, 용건이 뭡니까?”
“으음…….”
“귀족, 사교적인 이야기라면 형님과 나누시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웰링 백작님도 잘 아시겠지만요.”
내 시선에 웰링 백작은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저 약속해 주시죠. 제가 정보를 드리면 리젠 도련님도 제게 정보를 주시겠다고요.”
“약속드리죠. 계약서라도 쓸까요?”
웰링 백작은 예전에 나에게 호되게 당한 적이 있었다.
이 저택도 그렇게 따낸 거고.
웰링 백작은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냥 믿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이 저택의 구조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로데릭은 의아해했다.
반면 내 얼굴은 딱 굳어졌다.
“누굽니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말씀해 주시죠. 아니라면 웰링 백작님이 이걸 알려 주셨다는 걸 제가 퍼트릴 겁니다. 다크엘프 정보망을 통해서요. 내일이면 황도의 모두가 알게 될 겁니다.”
“뭐, 뭐라고요?”
웰링 백작이 당황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협상 자리에서 협박 자리가 됐지만 몰아친다.
“이 저택의 구조를 알고 싶어 한다면 침입할 목적이 있다는 겁니다. 노리는 건 리세라 황녀와 미리엘 황녀, 무력으로 강제로 확보하려는 거겠죠. 그것 말곤 이유가 없습니다.”
“…….”
로데릭도 그제야 이해하고는 정색했다.
나는 쏘아붙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황후? 아닙니다. 그들은 일단 혈연관계니 그냥 방문하거나 설득하는 게 낫지, 무력 충돌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면 일반 귀족이나 기사단? 그것도 아닙니다. 무작정 황녀들을 납치해 봐야 그게 무슨 득이 됩니까? 오히려 자멸하지.”
“…….”
“그럼 제국군이군요. 군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황녀들을 확보해서 명분을 세우려고 하는 거네요.”
내 말에 웰링 백작이 떡 입을 벌렸다.
안색이 새하얘졌지만 나는 물러나지 않았다.
“누굽니까?”
“……모, 모릅니다. 쿠데타라니!”
“알아야 합니다. 누굽니까?”
나는 포효까지 쓰면서 으르렁거렸다.
그냥 협상 자리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딸을 납치하겠다는데 눈이 안 돌아가겠냐?
내가 계속 노려보자 웰링 백작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5계위의 능력, 마력장.
내가 발하는 중압감이 그를 위축시키는 것이다.
여기다가 내가 포효까지 쓰면 어지간한 전사들도 두려워했다.
웰링 백작이 못 버티고 말했다.
“하, 한 다리 건너서 은밀하게 들어온 청입니다. 나도 확신은 없습니다.”
“짐작 가는 건 있겠죠. 12가문의 누구입니까.”
“……아, 아리에드입니다.”
“…….”
현재 12가문의 3위, 군대 내부의 인간 파벌 중 하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웰링 백작은 다 털어놓았다.
“저도 쿠데타 같은 건 전혀 몰랐습니다. 하, 하지만 리브라타가 황녀 두 분을 모시는 건 지나치다는 평가가 제법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리브라타를 무력으로 짓누르고 황녀들을 모셔 가겠다는 줄로만 알았다? 애들이 택배입니까?”
“죄, 죄송합니다.”
웰링 백작이 덜덜 떨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가 꾸민 것도 아닌데 더 몰아세울 건 없다.
나는 로데릭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리에드는 어떤 자들입니까?”
“12가문 중에서도 상위권, 4대 공작 중의 하나다. 공작이라고 해도 다른 가문들과는 격이 달라. 데리고 있는 기사들은 강력하고, 또 사병들도 많다. 지금 가주가 제국군 백검장, 차남은 천부장이라고 하더군.”
“강력하군요.”
하지만 백검장만으로는 쿠데타를 벌이기엔 한계가 있을 텐데?
웰링 백작은 간신히 경련을 멈추고는 내 눈치를 보았다.
“웰링 백작님.”
“예, 예.”
“제가 백작님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상황이 이렇다는 걸 알려 드리고, 또 앞으로 협조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정중하게 말하자 웰링 백작의 안색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도 눈치가 있는 귀족이다.
지금 리브라타의 주가가 고공 행진 중이라는 것, 그리고 그걸 시기하는 귀족들이 있다는 것도 안다.
그 정보를 우리에게 비싼 값에 넘길 생각으로 찾아온 거지.
하지만 쿠데타는 완전히 이야기가 다르다.
기득권, 문벌 귀족인 웰링 백작 입장에서는 정국이 혼란스러워져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
최소 가택 연금, 최악의 경우에는 재산을 몰수당하고 죽임 당할지도 모르니까.
또 위압하던 내가 풀어 주고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보인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고,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실제로 우리 리브라타는 귀족, 귀족원 사이에서 발언권이 약합니다. 웰링 백작님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제, 제가 뭘…….”
“귀족원에서 한창 잘나가시는 젊은 귀족 아니십니까? 저도 형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추켜올려 주자 웰링은 마음이 많이 풀린 눈치였다.
나는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웰링의 손을 잡고는 간곡하게 말했다.
“만약의 사태에서 저희들의 행동을 귀족원에서 지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정국이 혼란스럽지만 저는 혼란을 막고자 하는 쪽입니다. 그러니까 랑에이 황후와 황녀들이 이 저택에서 머무르는 겁니다.”
내가 황실을 내세우자 웰링은 한참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머리를 크게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형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방에서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예, 그리하겠습니다.”
웰링은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생각에 잠기는데 로데릭이 놀란 얼굴로 보았다.
“……너답지 않구나.”
“사탕발림한 거요? 진심입니다.”
내 자식들의 안전이 달린 문제 아닌가.
누가 상대건 얼마든지 부탁할 수 있었다.
“웰링 백작처럼 귀족이라는 신분을 중시하는 이는 힘으로 밀면 순간은 굴복하지만 훗날 반발합니다. 이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게 훨씬 더 잘 먹히죠. 물론 웰링도 계산적이라서 향후 정국이나 자기 입지를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유리하면 지지해 줄 겁니다.”
“리젠.”
“……음.”
로데릭이 어깨를 두드려 주자 나는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음이 좀 급했네요.”
“아니, 아니다. 나도 쿠데타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으니까. 귀족들 사이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없었는데…… 그렇게 위험하냐?”
“근시일 안에 벌어질 겁니다. D―day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앞으로 2주 안일 겁니다.”
“그래?”
“예.”
대장군 레릭이 귀환했으니까.
본래 레릭이 동부로 시찰 나간 틈에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겠지만, 그사이 내가 비요른을 정리하고 디에르크를 잡아 버렸다.
쿠데타의 스케줄표가 완전히 꼬인 것이다.
그래도, 시작한 걸 멈출 순 없겠지.
“로데릭 형님, 웰링 백작을 잘 다독여 주시고 하인켈을 불러와 주시겠습니까?”
“그래, 기분 풀어라.”
“아, 걱정 마세요.”
로데릭이 걱정하자 나는 짐짓 웃어 보였다.
“시간 나면 나랑 같이 누나 문병이나 갑시다.”
“……그 녀석은 아멜리아에게 혼 좀 나 봐야 해.”
로데릭도 쓴웃음을 지으면서 떠나갔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이마를 누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아마도 미리엘이겠지…….”
지금 황궁에서 정사를 처리하는 건 5황후다.
쿠데타군도 5황후를 잡고 신체제를 수립하려고 하겠지.
대신 아직 어린 미리엘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다.
애당초 이러려고 케드릭 가문에서 미리엘을 협박했던 것이겠지.
적들의 구상을 그려 보는데 하인켈이 왔다.
“찾으셨습니까?”
“12가문, 아리에드에 대해서 알아봐.”
“예, 이미 알아봤습니다. 여왕님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이셀렌이 한발 앞선 모양이다.
하인켈이 말했다.
“아리에드 백검장의 아들, 차남 실버 아리에드 천부장이 중앙군의 인간 장교들과 최근 자주 회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심상치 않다고 합니다.”
“그놈 아버지도 중앙군에 복무한다고? 보통 혈연관계는 다른 부대에 배치하는 게 기본 아닌가?”
“초대 황제께서 그런 규범을 정하셨으나 사후 풀렸습니다.”
“풀어? 누가?”
“4황후 전하십니다.”
일단 그렇다 치고.
“그러면 부자가 힘을 모아서 쿠데타를 계획하는 건가? 백검장인 아버지가 검장급들을 모으고, 천부장인 아들이 젊은 부장급들을 선동하고?”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두 부자의 특이 사항이 있나?”
“아들의 약점이 여자입니다. 패거리들을 데리고 고급 술집에 자주 드나든다는군요. 돈은 많이 쓰지만 진상으로 악명이 높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아들부터 조진다.”
네놈이 내 딸을 노려?
네 아들부터 날려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