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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84화 (83/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84)

네가 뭘 잘못했는데?

내가 시릭이라는 걸 밝히는 데 걸림돌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1. 단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어야 한다.

2. 그래서 말한다고 믿을까?

3. 믿더라도 내게 충성할까?

제국을 세우기 위해서 숱한 고락을 겪어 왔던 나는 배신당한 경험도 여러 차례 있었다.

100년이 흘렀고 테러범들이 준동하고 있다.

내 신하였던 이들이 날 죽이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도 이제 5계위를 넘어섰고, 초능력도 강해졌다.

만약의 경우에는 아르센도 있고.

그리고 중앙군의 수장, 레릭은 휘어잡아 두는 게 낫다.

좋은 기회니 정체를 밝히자.

병원 휴게실.

미리 정리했는지 사람 하나 없었다.

아르센, 레릭만 데리고 들어온 나는 혀를 찼다.

“하긴 의사 휴게실을 빌릴 수도 없지. 그래도 병원에서 다들 쉬는 공간인데 니들 때문에 이게 뭐하는 민폐냐?”

“죄송합니다.”

아르센은 바로 머리를 박았다.

철도헌병대의 대장이 원산폭격 하는 광경.

대장군 레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이런……. 아르센 미쳤냐!”

“…….”

“너는 폐하가 만드신 철도헌병대의 대장이다! 그런 놈이 지금 어디서 그런 추잡한 짓이야! 얼른 일어나지 못해! 어디서 머리를 함부로 숙여!”

레릭은 격분하여 아르센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아까 서로 으르렁거렸지만 칠죄신과의 전쟁에서 둘은 전우였다.

아르센은 몸을 떨쳐서 레릭을 뿌리쳤다.

“닥치고 얼른 머리 박아! 이 또라이 늑대 새끼야!”

“뭐? 폐하가 달아 주신 계급장이 부끄럽지도 않냐! 너 같은 게 헌병대를 지휘하다니! 폐하가 보시면 통곡을 하시겠다! 통곡을!”

“그래, 니들 하는 거 보고 있으니까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눈물이 나와.”

나는 의자에 앉아서 심드렁하게 말했다.

레릭이 눈을 번뜩거리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뭔 수작질이냐? 넌 아르센의 부하가 아니었냐?”

“그냥 간단하게 가자. 내가 시릭 카라카스다. 100년 만에 환생해서 지금 여기에 왔다.”

“…….”

레릭이 굳었다.

눈동자도 깜빡거리지 않은 그의 꼬리가 뻣뻣하게 올라섰다.

그리고 일어나는 마력. 남색.

6계위다.

수인은 육체적 능력이 남다른 대신에 마력이 잘 안 오른다.

6계위면 수인 중에서도 톱클래스다.

레릭은 나를 노려보면서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폐하를 욕되게 하는 자, 살려 둘 수 없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 안 그러면 죽여 버린다.”

“네가 아르센보다 똑똑하냐?”

“……제가 더 똑똑합니다!”

아르센이 머리를 박은 채로 외쳤다.

레릭은 아르센을 향해서 노호성을 질렀다.

“아르센! 저런 인간 사기꾼이 하는 말에 속은 거냐! 넌 폐하도 몰라보냐! 폐하는 저렇게 계집애처럼 안 생겼어!”

“……아, 이 머저리 늑대야. 그냥 머리 박아. 제발.”

아르센은 속이 타서는 레릭에게 애걸하다시피 빌었다.

하지만 레릭은 내 쪽을 돌아보면서 바로 몸을 날렸다.

수평으로 쭈욱 날아오면서 연속 돌려차기!

하지만 난 첫 방은 살짝 뒤로 뛰어서 피한 직후, 공중에서 연속으로 돌려 찼다.

빡! 빠아악!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다리를 맞물리고 충돌한 우리 둘은 동시에 튕겨 나갔다.

하지만 나는 뒤쪽의 테이블을 향해 떨어지면서 염동력을 발휘했다.

뻑!

“크으윽.”

막 착지했던 레릭은 내가 던진 의자에 머리를 맞고 비틀거렸다.

핑핑 돈 직후에, 안 보이는 궤도로 던지면 노련한 전사도 못 피하지.

다른 의자에 안착한 나는 혀를 찼다.

“너 기습할 때마다 그 3회전 돌려차기 쓰는데, 그만하라니까. 정직하고, 막히면 딜레이가 커.”

“……어떻게?”

레릭은 이해 못 하는 얼굴이었다.

레릭 같은 거구가 단숨에 연속 돌려차기를 날리면 보통 대응을 못 한다.

한 방은 막아도 후속타에 당하지.

나야 간단하게 깨지만.

“내가 너 처음 만났을 때도 2회전 돌려차기 깨 줬잖아. 피겨스케이팅도 아니고 횟수만 늘리고 있네.”

“…….”

과거를 거론하자 레릭은 멈칫했다.

물론 이 정도로 믿는 건 아니다.

그저 내가 보통 상대가 아니라는 걸, 주먹으로 쉽게 잡을 수 없다는 걸 인정했을 뿐.

나는 턱을 괴고는 말했다.

“얼른 뭐 물어보든가. 내가 시릭이라는 증거를 대라고 해 봐. 다 해 줄게. 내가 여자 여덟 번 소개해 줬는데 죄다 실패한 놈아.”

“뭐, 뭔 소리야! 나 그런 거 아니야!”

레릭은 반사적으로 발끈했다.

레릭은 군인으로서는 훌륭하지만 연애 쪽은 그냥 파멸적이었다.

그런데 본인도 은근히 외로움과 쓸쓸함을 타기에 내가 몇 번 여자와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는데…….

아, 생각하니 한숨 나와.

“내가 너 여자 소개시켜 주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긴 아냐? 네 주문대로 맞춰 주면서도 그냥 막 고르면 안 돼. 여자 쪽이 네가 싫은데도 황제 폐하의 명을 거역하지 못해서 결혼하면 보나 마나 불행해질 테니까. 그래서 나름 강단 있는 아가씨로 고르긴 했지만 어떻게 죄다 파토 내냐?”

“……아, 아니야. 나 그런 거 아니야.”

레릭은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부인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제발 군대 축구 이야기 그만하라니까? 그래, 너 매 경기마다 해트트릭 하셨어요. 응? 대장군님이 드리블하는데 누가 막아? 십검장이 막아?”

“……다, 다섯 골 넣었는데.”

“축구는 5 대 0인데 연애는 0 대 8이네? 좋겠다? 니가 언더테이커야? 소개팅만 나가면 연전연승하게?”

레릭은 얼굴이 시뻘게졌다가 버럭 화를 냈다.

“아! 그거! 그냥 다 헛소문이야! 그리고 다들 알아!”

“……저도 소문은 들었지만 여덟 번이나 차인 줄은 몰랐습니다. 한 세 번이라고 들었는데.”

아르센이 머리 박은 채로 덧붙였다.

“몇몇 아가씨가 부끄럽다고 익명을 원했다. 아, 진짜. 황제가 소개팅을 주선했는데 실패를 해? 그것도 재능이다, 재능.”

내가 한숨을 푹 쉬자 레릭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도 마력을 끄긴 껐다.

“뭐, 더 말해 줘? 물어봐.”

“폐, 폐하의 취미는?”

“도색 서적 탐독. 야, 100년이 지났는데 엘프 마제스틱&다크엘프 판타스틱은 신간이 한 권 나왔더라? 뭔 책을 80년에 한 권씩 쓰고 있어. 내가 그 작가 찾아내서 황제 명령으로 쓰게 하려다가 참았다.”

내 이 취미는 일단은 비밀이다.

나야 그냥 애들만 모르면 되겠거니 했는데 신하들 생각은 달랐다.

다들 기겁하고는 제국민들이 모르게 필사적으로 막더라고.

레릭은 깜짝 놀란 얼굴이다가 애써 부인했다.

“그, 그것도 아는 사람은 알아.”

“그럼 뭐 더 말해 줘? 네가 나중에 결혼하고 애 낳으면 자식 이름에 릭 붙여도 되냐고 물어본 거? 난 딸이면 붙이지 말라고 했잖아.”

제국민, 남자 이름 중에서 릭 자 돌림은 흔했다.

나, 시릭을 존경한다는 의미로 자식 이름에 그리 붙이거나 혹은 자기가 개명하기도 했다.

리브라타의 장남, 로데릭도 그렇지.

“너 옛날 이름은 레오나르잖아. 난 그게 더 멋진 이름이라고 했는데 네가 박박 우겨서 레릭으로 이름 바꿨고.”

“어? 어? 어?”

레릭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이건 보통 모르는 이야기니까.

나는 다리를 꼬고는 말했다.

“그래, 그냥 레릭 관두고 다시 레오나르로 돌아갈래?”

“……어, 으? 새, 생긴 게 다르잖아! 네놈은 폐하가 아니라니까!”

“아오, 환생하셨다니까? 환생 몰라? 환생?”

아르센이 애간장이 타는지 머리를 박은 채로 속삭였다.

이쯤 하고 얼른 머리 박으라고.

레릭은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붕붕 저었다.

“폐, 폐하는 폐하만이 쓸 수 있는 특별한…….”

“특별한 뭐? 능력?”

“어, 그…….”

“내가 그거 남들에게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지금 말하려고? 잘 한다. 이젠 비밀도 깨고 그러네.”

초능력.

레릭도 어렴풋하게 알고 있지만 함구시켰다.

내가 이것까지 맞혀 버리자 레릭은 기겁했다.

“어? ……폐, 폐하!”

“그래. 이 베드로 놈아. 나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니까 정신 좀 들어?”

휙!

내가 발을 날려서 신발을 던졌다.

레릭은 반사적으로 받아 들고는 멈칫했다.

“……어.”

우물쭈물.

내가 노려보자 조심조심하면서 가져온다.

의심과 의혹,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아직도 내 신발이 보물이냐? 아주 소중하게 모셔 오네.”

“……진짜 폐하십니까?”

“뭐 얼마나 더 해 줘? 아르센보다 덜 똑똑한 놈아. 내가 뭘 더 해 주면 믿을래?”

“…….”

레릭이 입을 떡 벌렸다.

툭.

품에 안고 있던 신발이 구른다.

“……폐, 폐하? 시릭 카라카스 황제 폐하?”

“그래.”

“폐하!”

와락!

레릭이 양팔을 벌리면서 나를 안으려고 들자, 나는 염동결계로 막아 버렸다.

보이지 않는 막에 막힌 레릭은 멈칫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이놈도 염동결계는 대충 안다.

“지, 진짜 폐하의 능력!”

“그럼 가짜 폐하의 능력이겠냐?”

레릭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나를 보았다.

“폐하! 뵈, 뵙고 싶었습니…….”

“지금 아르센이 뭐 하고 있냐?”

“…….”

레릭은 새삼 아르센을 돌아보았다.

아르센은 여전히 머리를 박고는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마족도 체력이 좋긴 하지만 혈액이 몰리는 건 상당히 고통스럽다.

물론 인간보다 훨씬 튼튼해서 오래 버티지만.

레릭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네가 뭘 잘못했는데?”

“…….”

레릭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아르센 옆자리 비었네. 가서 박아.”

“…….”

레릭은 주저하면서 아르센의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선뜻 머리를 박지는 않는다.

순간적으로 내가 시릭이라고 믿었지만, 막상 좀 생각하니 의심도 들고.

또 자존심도 있으니까.

“아, 그냥 박지 마. 너 더 설득하기 귀찮다. 그냥 아르센하고만 일하련다.”

“박겠습니다!”

레릭은 얼른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무튼 제국군은 철도헌병대와 라이벌 의식이 있었다.

아르센이 하는데 질 수 없단 심리가 레릭에게 우선한 것이다.

철도헌병대의 톱, 그리고 대장군이 나란히 머리를 박고 있는 광경.

제국의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풍경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니들 진짜 징하다, 징해.”

“……저, 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폐하.”

한참 전부터 머리를 박고 있던 아르센이 억울하다고 읍소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잘못한 게 없네? 그럼 싹 내 잘못이네? 와! 다 내가 잘못했어! 그래, 뭘 하건 황제인 내 부덕이지?”

“……아닙니다. 제가 다 잘못한 것 같습니다.”

“저, 저도 잘못했습니다. 폐하.”

레릭이 얼떨떨해하면서 말했다.

일단 아르센이 사과하니 따라 하고 보는 거다.

내가 혀를 차며 물었다.

“그래? 뭘 잘못했는데?”

“……아, 아르센하고 싸웠습니다.”

“야, 초딩이냐? 내가 지금 열 살짜리 애들 싸움한 거 반성하라고 하는 거야?”

내가 으르렁거리자 레릭은 침묵했다.

여기선 안 보이지만 그냥 눈알 데굴데굴 굴리고 있겠지.

아르센이 괴로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 다들 보는 앞에서…… 철도헌병대와 제국군의 톱이 서로 다, 다투었습니다. 병원 관계자들도 봤으니 곧 소문이 퍼질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뭐?”

“…….”

레릭이 진짜 몰라서 물어본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르센, 그냥 쟤 자르면 안 될까? 우리 그냥 레릭 자르고 딴 놈 대장군 앉히고 진행하는 게 어떨까?”

“애, 애가 좀 모자라지만 그래도 폐하를 향한 충성심 하나는 죽, 죽여주지 않습니까?”

“그래, 너무 죽여줘서 콱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강직하고 충직하고 통솔력 좋고 짬까지 차서 앉혀 놨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정치적인 안목이 전혀 없는 게 오히려 낫다고 생각했고. 그런데 지금 이 모양이네.”

“……죄, 죄송합니다. 그, 그, 폐하?”

“아, 뭐가 죄송하냐고.”

“다 보는 데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그게 뭐가 문제인데?”

내가 진지하게 물어보자 레릭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아르센이 소곤거렸다.

“……미, 민심이 동요한다고 말씀 올려.”

“민심이? 왜?”

“…….”

커닝을 모르는 척해 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네.

사실 레릭의 장점은, 자기가 정치적 식견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수용한다는 건데.

철도헌병대와 제국군이 서로 화합하는 역사적인 광경이 이런 거라니.

내가 장탄식을 하고 있자 레릭이 말했다.

“다, 다음부터는 안 보이게 싸우겠습니다.”

“그래……. 그나마 좀 근사치다.”

인간은 계속 머리 박고 있으면 그로기지만 한 놈은 수인, 한 놈은 마족이다.

둘 다 육체가 강건하니 제대로 하려면 한참 남았다.

나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 레릭. 제국군 내부 사정은 어떠냐?”

“아, 쿠데타가 일어날 것 같습니다.”

“…….”

이놈 자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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