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83)
말리지 마. 재밌네
사지타리 저택의 화재.
하지만 사도 디에르크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다.
내가 막았다.
디에르크에게 조종당했던 인간은 기억이 없다.
조종당해서 저지른 죄를 처벌할 수는 없다.
거기다가 감염된 이들은 얼추 헤아려도 수백 명이 넘고, 각계의 유명 인사들도 있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너무 혼란스러워진다.
그래서 디에르크의 죽음은 세간에 감춰졌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우렌 사지타리와 다르갈 사지타리의 처분.
제국군은 자기들이 넘겨받아서 재판하겠다고 우겼지만 헌병대와 경찰은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무력 단체의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나는 병원에 있었다.
“아, 맛있다.”
황도의 중앙병원 침대에 앉아서 사식(私食)을 먹는 중이다.
침대 옆에 앉은 다크엘프, 이셀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1인실, 우리 둘뿐이다.
“정말 괜찮은 거야?”
“난 칼 맞은 데도 없어. 그냥 쉬겠다고 엄살 부리는 거지.”
나는 귤을 씹으면서 말했다.
“그래서 다크엘프 정보망은?”
“……내가 좀 쉬니까 기동하기는 하는데, 많이 약해졌어. 종종 전달이 안 되고 시간이 제한적이야.”
이셀렌이 한숨을 쉬었다.
디에르크는 죽기 직전에 다크엘프 정보망에 혼선을 일으키고 간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아무래도 칠죄신이 너희들을 노리고 일부러 제작한 것 같군.”
“정보를 주고받는 게 흡사하니까?”
“디에르크처럼 본체가 숨어 다니는 놈을 잡으려면 다크엘프의 정보망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디에르크가 그 본체 상태로 아무 다크엘프나 물면 너희들 정보망이 오염되는 구조일 거야. 노렸을걸.”
“……설마?”
이셀렌이 미심쩍어했지만 내가 설명했다.
“칠죄신 취미가 서로 찌르고 죽이는 걸 구경하는 거잖아? 디에르크와 다크엘프는 서로 어감이 비슷하지?”
“…….”
나에게 주기 전에 귤의 하얀 부분을 일일이 떼어 내던 이셀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도 칠죄신의 악랄한 취미를 아니까.
나는 그 틈에 그녀의 손에서 귤을 뺏어서 씹었다.
뭘 이렇게 일일이 골라낸대.
“본래라면 더 문제가 커졌겠지. 여왕인 네가 물려서 그나마 회복 중이고.”
그냥 내 추측이지, 증거는 없다.
하지만 이셀렌은 이게 마음이 편하겠지.
방심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자책하는 것보다 건설적이다.
이셀렌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응, 위로해 줘서 고마워.”
“그냥 사실을 말한 건데 뭐. 아무튼 넌 앞으로 전망을 어떻게 보냐, 라그리즈?”
내가 성으로 부르자 이셀렌의 뺨이 살짝 물들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행복해하는 반응.
남들 앞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가 내 부름 하나에 행복해한다.
익숙한 나도 두근거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셀렌은 기쁨을 누르고는 말했다.
“……칠죄신이 돌아오려고 하는 것 같아.”
“그래, 그거겠지.”
나는 제국군을 이끌고 칠죄신을 쓰러트렸으나 죽이지 못했다.
그저 이 카라카스에서 추방했을 뿐이다.
“사도들은 제국의 기반을 흔든 다음에 칠죄신을 다시 불러올 작정이겠지. 그러면 그걸 어떻게 하지?”
“나도 여러모로 알아봤지만 그걸 모르겠어. 테러범들도 보통 칠죄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 같아. 사도쯤은 돼야 정보가 나올 것 같고.”
“가능하면 그 전에 싹 때려잡는 게 제일인데, 될지 모르겠네.”
내가 말하자 이셀렌이 의아하게 말했다.
“왜? 아직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되겠지만 곧…….”
“내가 많이 약해졌거든.”
나는 솔직하게 밝혔다.
이건 랑에이나 아르센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이셀렌은 알아야 했다.
정보 담당이니까.
이셀렌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환생하면서 다 잃어버렸어?”
“계속 싸우면서 회복 중이야. 그러니까 현장에서 빠지란 말 하지 마라.”
이셀렌이 걱정스럽게 보았다.
하지만 내가 약해졌다고 피해 다닐 수 없다.
마력을 강화하려면 실전을 넘어야 한다.
다행히도 이 리젠의 몸은 성장률이 엄청 빠르고.
디에르크를 잡은 직후, 5계위의 중반을 확 넘었다는 감이 왔다.
대충 60% 정도?
앞으로 격전을 한두 번만 더 겪으면 6계위가 어른거리리라.
얼른 7계위까지 올리고, 또 그 이상을 바라봐야 했다.
싸우면서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고 칠죄신의 재림을 막는다.
그게 당면 목표다.
이셀렌은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해했어.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문제는 제국군이다. 제국군 내부에서 쿠데타 조짐이 있냐?”
이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국군은 다크엘프도 정보를 얻기 힘들어. 알겠지만…….”
“그래, 제국군에 복무하는 다크엘프들은 죄다 자기 성을 밝히니까.”
자기 종족을 우선하는 다크엘프지만 제국군을 비롯한 국가 단체에 소속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크엘프가 아니라 제국의 일원, 황제의 수족으로서 행동한다.
국가 성립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낌새, 조짐은 있을 텐데?”
“……제국군 내부에 이런저런 갈등이 있는 건 사실이야. 사지타리 가문의 문제로 그게 더 드러났을 테고. 곧 정리해서 알려 줄게.”
이셀렌은 말하면서 내 손을 꼭 잡았다.
앞으로 내 몸을 걱정해서.
“몸조심해, 시릭. 당신이 또 그렇게 사라져 버리면 나는 도저히 버틸 수 없으니까…….”
“병원에서 쉬는데 뭐 얼마나 더 조심하라고.”
웃으면서 말해도 이셀렌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계속 내 손등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재차 말했다.
“상대가 칠죄신도 아니고 그 종복들이면 별거 아냐. 꼬리 잡히는 대로 얼른 정리하고 나는 편하게 놀고먹어야지.”
“응, 내가 평생 먹여 살려 줄게.”
“…….”
이셀렌은 자기가 말해 놓고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아, 아니. 옆에 있겠다는 건 아니야. 그, 그냥 돈만 보낼게.”
“여왕님이 아니라 호구님이시네.”
“괜찮아.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난 기쁘니까.”
이셀렌이 부드럽게 웃는 걸 보니 가슴이 아릿해졌다.
“아.”
내가 이셀렌의 손을 잡자 그녀는 나직한 신음을 흘리면서 몸을 틀었다.
“……여긴 병원이야. 시릭.”
“…….”
아니, 서로 힘내자고 손을 잡은 건데.
하지만 이셀렌은 곁눈질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침대를 살피고 있었다.
주로 내구도와 탄력을.
“여긴 병원이야, 호구님.”
“……아, 알지.”
똑똑.
노크 소리.
이셀렌은 확 손을 빼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홱 돌아서서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는데 얼굴에 찬바람이 쌩쌩 몰아친다.
따뜻한 봄 날씨 같던 여자가 순식간에 시베리아 기단이 되었다.
“루온입니다.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온 건 중앙경찰, 루온이었다.
인사한 루온은 벽에 기댄 암살여왕을 보고는 흠칫했다.
“아, 계, 계셨습니까?”
“말해라. 무슨 일이지?”
이셀렌이 쏘아붙이자 루온은 움츠러들어서는 눈치를 보았다.
나에게 말하는 게 낫겠다 싶어 고개를 돌리고는 말한다.
“좀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데?”
“우렌과 다르갈을 데려가겠다고 제국군이 왔습니다.”
“또? 아르센이 있잖아?”
몸이 멀쩡한 내가 꾀병을 부리면서 병원에 입원한 이유.
바로 아래층에 우렌과 다르갈이 있기 때문이다.
둘에게 확인할 것도 있고, 또 제국군의 반응을 유도하는 것도 있고.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별 단 놈이 왔어?”
“예, 그게…….”
루온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장군 레릭이 직접 왔습니다.”
“아, 그래?”
“……안 놀라십니까?”
중앙대장군 레릭이라면 중앙군의 톱, 오대장군 중에서도 으뜸이다.
황제 바로 아래의 군 지휘관.
아르센도 쉽게 상대할 급이 아니다.
이셀렌에게 눈짓을 보낸 나는 루온에게 말했다.
“아니, 오히려 일이 더 쉬워지겠는데. 안내해.”
계단을 내려가면서 나는 생각에 잠겼다.
중앙대장군, 늑대 수인 레릭.
나와 함께 숱한 전선을 헤쳐 나온 놈이다.
충성심이 강하니 믿을 수 있다.
내가 던진 신발을 보물처럼 품에 안고 있던 모습이 선한데.
놈에게 내 정체를 알리고 설득하면 일이 한결 잘 풀릴 거다.
“슬슬 때가 됐지.”
한데 복도는 분위기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군복을 입은 제국군 서른 명, 그리고 비슷한 수의 헌병대와 경찰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이러면 사람이 못 다니지.
다른 환자들, 의사들도 불안하게 바라보는 중이고.
“야, 좀 비켜 봐.”
“아, 본부장님.”
헌병대원들, 경찰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얼른 좌우로 물러났다.
나를 보는 시선에 호의가 가득했다.
사지타리 가문의 문제까지 해결한 나는 이제 두 단체의 일원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그리고 복도 중앙.
거구의 아르센과 맞먹는 늑대 수인 남자가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정 못 물러나겠나, 아르센?”
대장군 레릭.
움찔.
아르센의 뒤에 서 있던 헌병대원들이 몸을 움츠렸다.
본능적으로 레릭이 강하다는 걸 알아차린 것이다.
병원이라서 양자 다 비무장 상태.
하지만 레릭은 맨손으로도 이 복도에 구멍을 뻥뻥 뚫을 수 있다.
그래도 맞서는 아르센은 단호했다.
“물러가라, 중앙대장군 레릭. 네가 군권을 쥐고 있다고 하여 안 되는 일을 되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
“이치를 따지자면 황도 안에서 군사 활동을 자행하는 너희들이 정신이 나간 거지. 수사본부? 나는 그딴 거 허가한 적 없다.”
“그건 3황후 전하께서 재가하셨다.”
“숨어서 암살과 협잡만 꾸미는 년의 속셈을 어떻게 믿으라고?”
레릭의 무례한 어조.
다들 침을 꼴깍 삼켰다.
대장군씩이나 되는 인물이 황후에 대해서 저리도 불경한 언사라니?
사석도 아니고 다 듣는 자리에서?
“대, 대장군님.”
“말씀이 좀…….”
심지어 부하인 제국군들도 레릭이 너무 과했다고 보고 전전긍긍했다.
황후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존중받지 못하지만 레릭은 그냥 막 나가는 거다.
아르센이 혀를 찼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레릭? 대장군이라는 자가 이리도 가볍게 행동하다니!”
“나는 내 부하들이 사고를 쳤다기에 그냥 군 병원에서 쉬라고 한 거야! 그리고 사정 좀 들어 보겠다는 거고! 그런데 만나지도 못하게 하니 속셈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레릭이 으르렁거렸다.
일촉즉발.
금방이라도 한판 붙을 분위기여서 내가 다가가며 말했다.
“군 병원에 가면 나을 것도 안 낫지.”
“뭐?”
레릭이 포악한 시선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앞을 가로막는 건 무조건 물어뜯고 보겠다는 시선이다.
이놈은 100년 사이에 왜 이렇게 됐지?
아르센은 내게 얼른 고개를 숙이려다가 멈칫했다.
연기력이 부족한 아르센도 다들 보는 복도에서 내 정체를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것쯤은 이제 안다.
내가 말했다.
“일단 데려온 애들부터 치워. 여긴 병원이고 다른 환자들도 있는데 민폐잖아. 경우가 아니다.”
“이 인간은 또 뭐야? 아르센, 네 부하냐?”
레릭이 코웃음을 치고는 아르센을 돌아보았다.
아르센은 기겁하고는 레릭에게 모종의 눈빛을 보냈다.
필사적인 윙크.
레릭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그새 눈병 걸렸냐? 뭘 그리 깜빡거려? 미쳤냐?”
“아, 거. 헛짓하지 말고 애들 빼. 다 설명할 테니까.”
“아, 네가 혹시 그 리젠 리브라타라는 놈이냐?”
레릭이 나를 향해서 위협적인 미소를 띠었다.
“제국군이 내 부하들에게 면담 요청을 한 걸 모조리 다 물리쳤다며? 그게 네 판단이냐? 아니면 암살 년의 판단이냐?”
“……야, 야. 야. 레릭! 레릭? 마, 말 좀.”
아르센은 사색이 되어서는 레릭을 뜯어말렸다.
랑에이에게 함부로 말했다가 혼쭐이 난 아르센은 황후들에 대해서 불경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레릭은 귀찮아하면서 아르센을 밀쳐 냈다.
“뭐야? 한판 뜨자고?”
“아냐, 아르센. 말리지 마. 재밌네. 계속 말하게 해.”
나는 웃으면서 손을 털었다.
“명색이 중앙군을 지휘하는 대장군이라는 자가 공공장소, 다 듣는 앞에서 제국군과 황후들 사이에 불화가 있다고 완전히 광고하고 다니시네?”
“몰랐으면 알아 둬라.”
“그래, 알아 모셔주지. 아르센?”
내가 부르자 얼어 있던 아르센이 얼른 부동자세를 취했다.
“예, 옙!”
“애들 다 빼고 방 하나 비워라.”
늑대가 주인을 몰라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