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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82화 (81/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82)

우리는 수면 위의 달처럼

나는 아르센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제국군이 천검장까지 보내서 우렌과 다르갈을 원하는 이유? 뻔하지. 당장 군사재판 열고 우렌과 다르갈에게 책임을 몰아 버릴걸? 이제까지 모든 사태가 사지타리 가문 때문이라고 뒤집어씌우고 나머지 제국군은 결백하다고 마무리하려는 거지.”

다크엘프들에게 폭탄을 넘겨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겠지.

아르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싸우실 겁니까?”

“이걸 참겠냐? 왜, 제국군하고 한바탕하기 싫어?”

내가 웃자 아르센도 이빨을 드러내면서 씩 웃었다.

“제국군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마누라 빼고 다 팝니다.”

“우렌하고 다르갈은 병원으로 보내고 헌병대원하고 경찰들 붙여. 제국군에서 강제로 데려가려고 하면 그냥 박살 내라. 내가 허락한다.”

“명을 받듭니다!”

아르센이 호쾌하게 외쳤다.

천검장이 와도 아르센과 정면충돌할 순 없다.

개인 무력 이전에 체급 문제다.

아르센과 말이라도 섞어 보려면 상대도 별 달아야 한다.

아르센도 물리칠 자신이 없는 게 아니라, 뒷일을 생각해서 내게 물어본 거고.

아르센이 말했다.

“그럼 여긴 제가 남아서 지휘할 테니 돌아가서 쉬시죠.”

“사적인 볼일이 좀 남았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우두커니 선 은발의 다크엘프.

이셀렌이 나만을 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현장을 떠난 우리 둘.

황제와 여왕이 소란을 피해 멈춘 곳은 풀장 앞이었다.

낮에 같이 걸었던 장소.

조용한 밤에도 나란히 섰다.

수면 위에 뜬 달을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일단 내 자기 정체성부터 다시 말하지. 나는 전생에 시릭 카라카스였고 지금은 리젠 리브라타로 환생했다. 이미 알겠지만 초능력을 쓰고 있고, 또 너희들과 관련된 각종 기억, 지식을 갖고 있다.”

“…….”

말한 나는 가볍게 수면에 발을 디뎠다.

염동력을 발휘.

수면 위에 살짝 뜬다.

수면에 파문이 번지는 가운데 오롯하게 서 있는 모습, 보통 사람이 보면 놀라 자빠지리라.

하지만 이셀렌은 내가 이렇게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이셀렌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시릭이 맞아?”

“맞긴 한데 네가 그걸 믿어 주느냐는 별개지. 새파란 어린놈이 지가 좀 세다고 황제의 환생이라는데 믿는 게 더 이상하니.”

실제로 이셀렌도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환생이라고 해도 육체, 생긴 게 완전히 다르니까.

“……변신이나 그런 건 아니지? 환생이라고?”

“칠죄신에게 타락한 거 아냐. 순수한 인간으로 환생했다.”

카라카스에서 환생 개념은 좀 낯선 편이다.

환생, 내세라는 건 믿음이 기반이다.

신, 혹은 부처. 극락과 지옥, 육도윤회 같은 것.

하지만 카라카스에는 칠죄신이 실존했다.

그 칠죄신에게 굴복하면 회생이라는 방식으로, 완전히 다른 종족으로 두 번째 삶을 사는 것도 가능했다.

제국 쪽에서는 타락이라고 불렀지만.

여하튼 죽으면 신이 예비한 천국, 환생이 기다린다는 발상은 일반적이지 않다.

“물론 그래도 칠죄신이 아닌 어떤 존재, 혹은 시스템이 있어서 환생한다는 믿음은 꽤 있지만. 반신반의지.”

“…….”

이셀렌도 곤혹스러운 얼굴이었다.

“나 말고 누가 더 알지?”

“랑에이와 아르센, 리세라.”

“……아르센은 대체 왜 알아?”

이셀렌은 순간 분노했다.

나는 손을 저었다.

“내가 판단하고 알린 거다.”

“먼저 나에게…….”

“너를 대체 어떻게 믿고 알리냐?”

“…….”

이셀렌은 멈칫했다.

상처받은 얼굴이었지만 내내 참았던 말이라서 안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옛날이야기를 새삼 하는 게 아니야. 여차하면 제국을 포기하겠다고 하지. 또 오르카를 사도 앞에 내던지는데?”

“……제국을 포기하겠다고 한 적 없어.”

“했잖아. 내 묘비 앞에서.”

“그건 그냥 해 본 말이었어!”

이셀렌은 억울하다고 항의했다.

“그 상황에서 약하게 보일 순 없잖아. 그땐 네가 시릭이라는 것도 몰랐고, 그냥 머리 이상한 인간 애송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니까.”

“으음.”

생각해 보니 맞다.

정말 무작정 제국을 포기했다면 디에르크를 이리 길게 쫓지도 않았겠지.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럼 오르카는?”

“…….”

나는 굉장히 끔찍한 추측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르카는 아들, 이셀렌이 차대에 전해 줘야 할 왕권을 물려받지 못한다.

그래서 함부로…….

이셀렌은 안타깝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

“지금 생각하는 그건 절대 아니야.”

“나도 믿고 싶다. 제대로 설명해 줘.”

내 요청에 이셀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이젠 알겠지만 내 뒤를 이을 오르카는 다크엘프의 정보망을 기동하지 못해.”

“그래서?”

“언젠가 그 사실이 드러나면, 오르카는 안팎의 위협을 마주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위험한 고비를 넘겨서라도 강해져야 해.”

마력은 실전, 사투를 벌이고 살아남으면 빨리 늘어난다.

이셀렌은 숨겨 온 속내를 토로했다.

“혹시 몰라서 랑에이까지 보냈고. 타이밍이 좀 어긋난 것 같았지만…….”

“오르카가 정보망을 유지 못 한다는 사실을 또 누가 알아?”

“우리 둘, 그리고 5황후만 알아.”

“…….”

다크엘프들, 심지어 오르카 본인도 모른다는 소리 아닌가?

이건 정말 극비다.

식견 있는 자들은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을 보고 특유의 비법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왕이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하지만 여자가 아니면 발휘할 수 없다, 여기까진 생각 못 한다.

나는 머리를 긁었다.

“……좋아, 오르카도 교육 방침의 차이였다고 치자.”

아내의 자식 교육에 남편이 무작정 간섭하기는 힘들지.

하지만 남은 문제가 또 있다.

“왕권은 여자에게만 이어진다는 걸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

“이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야. 단순히 다크엘프의 문제도 아니고. 제국도 다크엘프의 통신망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어. 당장 제국군의 연락 체계부터가 그런데…….”

“말할 수가 없었어.”

이셀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너도, 오르카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어. 세상 누구도 모르게 하고 싶었어. 만약 알려지면…… 그 아이가 자긴 내 뒤를 이을 수 없다고 생각할까 봐, 결핍되었다고 생각할까 봐.”

“…….”

“다크엘프의 여왕은 굉장히 높은 확률로 딸을 낳아. 아들을 낳는 경우가 드물어.”

이셀렌이 조용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실, 다크엘프들 사이에서 나와 당신의 결혼을 반대하는 여론이 상당했어. 여왕인 내가 할 필요는 없다. 다른 다크엘프 여자로 인척 관계를 맺어 두는 게 낫다는 말들이 있었지만…….”

난 금시초문이었다.

이셀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밀어붙였어. 당신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러면…….”

“……인간하고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리 따위 듣게 하고 싶지 않았어. 당신에게도, 내 아들에게도.”

이셀렌이 젖은 눈으로 보았다.

“당신은 좋아했잖아. 아들이라고.”

“…….”

말문이 막혔다.

막 태어난 오르카를 품에 안은 순간, 나는 그저 기뻐했다.

딸이어도 똑같이 예뻐했을 거다.

하지만 그때, 아들을 안으면서 웃는 나를 보고, 침대에 누워 있던 이셀렌은 남몰래 각오한 것이다.

오르카의 결점은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자고.

내 아들이자, 이셀렌의 아들이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게.

내가 물었다.

“……다크엘프 다음 대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또 당신 아이를 낳으면 될 테니까…….”

이셀렌이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때가 와 버렸다.

내가 스승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아 버리고, 아내들과 갈라서는 순간이.

“그래도 말했어야지. 이건 중요한 문제잖아.”

온갖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착잡했다.

이셀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당신을 괴롭게 만든 게 나니까.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어. 서로 시간을 갖자고 했으니까 그저 기다리기로 했는데…….”

내가 덜컥 죽었다.

나는 고개를 젓고는 확인했다.

“제국을 세우고 나서도, 내가 스승님의 죽음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몰랐던 건 네가 그렇게 만든 거지?”

“……맞아.”

“그래, 칠죄신과의 전쟁은 혼란을 거듭했고, 그 와중에 진실을 아는 이들은 다수가 전사했겠지. 그리고 제국을 세운 이후로는 내가 그쪽을 전혀 모르게 은폐했겠지.”

나는 건조하게 말했지만 이셀렌은 고개를 수그렸다.

“그래, 됐다.”

“…….”

“그냥 알고 싶었을 뿐이야.”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사실 이셀렌은 재혼을 했어야 했다.

아니, 황후니까 무리지?

그러면 극비리에 자식을 봤어야 했다.

다크엘프의 정보망을 동원해서 최대한 은폐하고 몰래 딸을 낳았어야 했다.

정말로 다크엘프의 존속만을 원했다면 그래야 했고, 그게 또 가능했다.

하지만 안 했다.

다시 돌아온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도 이셀렌은 나만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가련하게도.

100년이나.

“……말해야 하는 게 하나 더 있는데.”

이셀렌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다크엘프 정보망이 멈췄어.”

“디에르크에게 물려서?”

“디에르크의 감염이 우리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을 흉내 내는 방식이었으니까. 내부 혼선이라고 추정 중이야.”

디에르크는 물고, 자기 피를 먹인 단말들로 정보를 획득했지.

다크엘프들하고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다더니만.

이셀렌이 추가로 말했다.

“그냥 단순한 컨디션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 자고 일어나면 호전될지도 몰라. 여차하면 5황후와 교섭해서 1급 치료약을 받아 볼 생각이야.”

“알았다.”

“……미안해, 도움이 못 돼서.”

이셀렌이 고개를 푹 수그렸다.

요염하고 도도하신 여왕님이 기운이 하나도 없다.

나는 적당히 말했다.

“싸우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있는 거지. 언제나 풀 컨디션으로 싸우는 게 더 이상하고.”

“……겨우 다시 만났는데 당신에게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이셀렌은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목소리였다.

나는 짐짓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겼지, 소원 들어주기로 했는데 뭐냐?”

“……응?”

“디에르크 잡았잖아.”

사실 내가 잡았지만.

그냥 기운 나라고 한 소리인데 이셀렌은 한참 망설였다.

아, 실수했나?

뭔가 터무니없는 걸 요구하는 거 아닌가?

“……손잡아도 돼?”

“…….”

이셀렌이 부끄러워하면서 던진 말은 많이 예상 밖이었다.

이제 와 이런 걸로 뭘……이란 생각이 들지만.

반대로 아내들이 그만큼 나를 어려워한다는 이야기도 된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셀렌이 말했다.

“그럼 잡아 줘.”

“응?”

나는 지금 수면 위에 떠 있고, 이셀렌은 풀장 앞에 있는데?

하지만 이셀렌은 그냥 바로 나를 향해서 뛰었다.

조금도 기다리지 않고.

“으아…….”

촤자자자작!

나는 갑자기 온몸으로 안겨 오는 이셀렌을 받아 내면서 뒤쪽으로 쭉 미끄러졌다.

풀장 한복판까지 쭈욱.

멈춘 나는 이셀렌의 손을 잡고는 다른 손으로는 허리를 감쌌다.

물 위라서 이렇게 안 하면 빠진다.

“야, 놀랐잖아.”

“…….”

이셀렌은 그냥 내 가슴에 고개를 묻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하기가 두렵다는 것처럼.

정적만이 한참 이어진다.

나는 적당히 말했다.

“랑에이에게도 말했지만 공적인 일을 끝내면서 내 사적인 일도 마무리할 거다. 110년이면 오래 생각했으니까. 너희들하고도 결론 낼 거다.”

“……마무리가 늦어지면 좋겠다.”

이해가 안 되는 말.

이셀렌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동안은 당신을 좋아해도 될 테니까.”

“저 보실 때마다 눈에 불길이 일어나서 진짜 무서웠는데요. 지릴 뻔했음.”

“그, 그건…….”

이셀렌이 당황하면서 몸을 돌리는 바람에 나는 얼른 손을 고쳤다.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

이셀렌은 나한테 이렇게 안겨서 어리광 부리는 걸 대단히 좋아했다.

냉철하게 피를 뿌리는 암살여왕도 내 무릎 위에서만큼은 그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

이셀렌도 새삼 생각이 나는지 풀어진 분위기였다.

갑자기 그녀가 말했다.

“달이다.”

“보름달이네.”

수면 위에 달이 환하게도 떠 있었다.

이셀렌이 내 손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했다.

“당신이 해 줬던 말, 기억나?”

……당연하지만 기억 안 나.

남자들은 원래 기념일도 까먹고, 했던 말도 종종 까먹습니다.

이셀렌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나는 다크엘프의 여왕, 어둠 속에서 피 튀기면서 살아가야 하니까 당신하고는 전혀 안 어울린다고 했지.”

“…….”

“하지만 당신은 칠죄신이 지배하는 세상은 어딜 가나 어두컴컴한 밤이라고. 그러니 나보고 밤하늘의 달이 되어달라고 했어.”

이셀렌이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당신이야말로 내 인생의 달이었…….”

풍덩!

그 순간, 우리 둘 다 물에 빠졌다.

정신력이 바닥났다.

디에르크와의 전투, 또 염동력으로 계속 물에 떠서 대화했으니 바닥날 만하지.

물이 깊진 않았지만 우리 둘 다 흠뻑 젖어 버렸다.

하지만 이셀렌은 살짝 돌아보며 나만 걱정했다.

“많이 피곤해?”

“환생하고 늘 그렇지.”

말한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수면 위에 고즈넉하게 떠올랐던 달은 우리가 일으킨 파문에 사라져 버렸다.

이셀렌은 나직하게 말했다.

“달은 차면 기운다는데…… 기울어 버린 달은 기다리면 다시 차게 될까?”

“…….”

“그건 모르겠지만…….”

이셀렌은 내 손을 잡아서는 자기 가슴 위에 올렸다.

“이렇게 당신을 만나고 다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새삼스럽게 뛰어. 그래, 당신이 맞아. 당신이 아니라면…… 이럴 수가 없으니까.”

손바닥에 전해지는 따뜻한 울림 소리.

남들이 차갑고 냉정한 여자라고 두려워하지만 내게 안긴 그녀의 심장 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셀렌은 내 손을 누르면서 속삭였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시릭.”

“그래, 라그리즈.”

“……정말로 행복해.”

이셀렌은 내 손을 들어 올려서는 입을 맞췄다.

그리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안겨 있기만 한 걸로도 족하다고.

“…….”

여왕의 눈물이 내 손등에 떨어지고, 다시 아래로 미끄러진다.

물속으로 떨어진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

그러니 누구도 모를 것이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늘 도도하고 요염하게 군림하는 여왕이 이리 섧게도 운다는 걸.

잔잔해진 수면 위로 다시 선명하게 떠오른 달과.

나만이 아는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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