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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81화 (80/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81)

지금은 안 해도 된다

나와 이셀렌의 대화.

듣던 디에르크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진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그분에게 빌기만 하면 네가 원하는 시릭…….”

더는 들을 필요 없다.

나와 이셀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달려들었다.

이셀렌은 정보 담당, 본래 최전선에 나서면 안 되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 제국군은 늘 열세였고, 그녀와 나도 이런 전장에서 수없이 합을 맞춰 보았다.

눈빛만 봐도 통한다!

“합!”

파바바박!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마력질주를 사용하면서, 검을 휘두르고 기사들을 베어 넘겼다.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팔다리가 날아가고, 피가 튀어 오른다.

위에서 내려오는 나,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이셀렌.

번갈아 보던 디에르크는 얼른 계단 아래로 뛰어내렸다.

“안 놓친다!”

우리 두 사람도 바로 디에르크를 노리고 뛰어내렸다.

먼저 내리치는 이셀렌의 검.

디에르크가 막 바닥에 착지하고는 얼른 데굴데굴 굴렀다.

하지만…… 약간 늦게 떨어진 내가 한 템포 늦게 검을 던졌다.

5계위, 푸른 마력이 실린 투검!

푸우우욱!

“커억!”

내 검이 디에르크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비틀거리는 몸뚱어리.

그리고 이셀렌이 몸을 돌려 일어나면서 크게 올려 베었다.

뎅겅!

목이 날아간 몸뚱어리가 비틀거리다가 쓰러진다.

이셀렌은 디에르크의 시체를 한참 물끄러미 보다가 숨을 깊이 쉬었다.

털썩! 털썩!

여기저기 쓰러지는 소리들.

디에르크가 끝나면서 조종당했던 기사들도 끝난 것이리라.

적막.

피와 칼이 부딪치던 열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저택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마주 보고 선 우리 두 사람.

거리는 10여 미터.

이셀렌은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끝.

“……거, 손톱으로 손가락 찍지 마.”

“…….”

“표정 관리하겠다고 그러는 거 알아. 뭘 새삼스럽게 해.”

나는 이마를 누르면서 손을 털었다.

이셀렌은 망연하게 물었다.

“리, 리젠. 아니, 시, 릭?”

“일단 지금 이름은 리젠이 맞아. 하지만 전생은 시릭 카라카스였다. 담백하게 설명하면 그래.”

“……그걸 어떻게 믿지?”

“그러게다? 나도 못 믿겠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자 이셀렌이 애타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렇게 말하지 마. 시, 심술부리지도 말고.”

“야, 방금 전까지 죽이네 살리네 했던 여왕님이 그러시면 어째.”

“…….”

이셀렌은 그저 몇 번이고 고개만 가로젓고 있었다.

믿긴 믿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내가 차분하게 말했다.

“너무 놀랍고 정신없는 소리인 거 안다. 일단 정리하고 차분하게 좀 더…… 뒤!”

푸아아악!

갑자기 새빨간 핏덩어리가 튀어 올라서는 이셀렌을 뒤에서 휘감았다.

시뻘건 혈체(血體)!

“큭!”

이셀렌은 얼른 뒤로 칼을 박았지만, 그 순간 혈체의 머리 부분이 이셀렌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었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이 여자를 죽인다!”

“…….”

아니, 목을 분명히 날렸는데?

메즈린의 목에서 줄줄 흘러나온 피가 뭉치더니만 사람 크기로 변모한 것이다.

복잡하게 퍼진 혈관들만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끔찍한 형태였다.

사람이라면 눈, 코, 입이 있을 부분에 시커먼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저게 바로 디에르크의 본체이리라.

나는 냉정하게 정신을 집중했다.

디에르크는 거칠게 말했다.

“길을 열고 나를 보내라. 그러면 이 계집을 풀어 주지!”

“……이셀렌, 독단 깨물지 마라.”

“뭐!”

내가 이르자 디에르크가 흠칫했다.

내가 투시해 본 결과, 이셀렌에게는 독단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암살여왕이라 불리는 이셀렌은 그런 걸 갖고 다녀도 이상하지 않았다.

선입견, 일단 흔들어 본다.

디에르크는 당황해서는 말했다.

“아, 암살여왕이 죽으면 다크엘프들의 네트워크를 복구할 수 없어!”

“……그리고 나를 물어 봐야 너는 깃들 수 없어. 너는 오로지 인간을 통해서만 전염되니까.”

이셀렌이 나직하게 말했다.

디에르크는 이셀렌의 목을 문 채로 말했다.

“너는 이미 물렸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혈액이 굳어서 금방 죽는다! 그래도 좋으냐?”

“시릭을 다시 봤으니까 됐다.”

차디찬 말.

허세가 아니다.

나도 느꼈고 디에르크도 느꼈다.

이셀렌이 나를 바라보았다.

여기서 디에르크를 살려 보내면 피해가 너무 크다.

우리가 지금까지 적들의 농간에 넘어가지 않았듯이 이번에도 그러라고.

“…….”

발소리.

거친 발소리가 달려 들어온다.

턱에 찬 숨결.

우렌 사지타리였다.

나는 곁눈질했고, 디에르크가 돌아보았다.

우렌과 디에르크의 눈이 마주친 순간.

“메즈린!”

우렌은 다짜고짜 고함을 쳤다.

그 순간 디에르크가 굳었다.

“아, 아아아…….”

빈틈.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상황이 상황이니 써야 한다.

텔레포트.

아까 내가 날린 검, 아직도 메즈린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나는 오른손을 슬쩍 등 뒤로 돌려서는 디에르크의 시선에서 감췄다.

그리고 투시력을 동원해서…… 메즈린의 시체에 박힌 검을 보고.

텔레포트로 이동시켰다.

손에 잡히는 감촉.

칼을 잡았다.

호흡이 거친 우렌이 앞뒤 가리지 않고 디에르크에게 다가갔다.

“메즈린!”

“보, 보지 마!”

디에르크는 팔을 팍 휘둘렀다.

꽉 뭉쳐서 팔을 이루던 혈관이 얇아지면서 쭉 늘어나더니만 채찍이 된다.

피로 만들어진 채찍.

사아악!

“크악!”

우렌의 비명이 울리면서 살덩어리가 튀어 올랐다.

비명과 절규 속, 나는 시체 쪽으로 이동시켰던 오른손을 휘둘러서 검을 집어 던졌다.

후방에서 디에르크의 머리를 노리고.

그리고 단숨에 마력질주로 돌격!

“뭐…….”

디에르크가 막 나를 보고 대응하려는 순간, 놈의 뒷목덜미부터 이마까지 검이 뚫고 빠져나왔다.

“케이이익!”

놈이 비틀거린다 싶은 순간, 이셀렌이 팔꿈치로 놈의 명치를 치고는 빠져나왔다.

파아앙!

그리고 나는 놈의 머리에 박힌 검을 염동력으로 뽑아 회수하면서 앞으로 걷어찼다.

이어서 수직으로 내리긋기!

푸우우욱.

“어, 어어어…….”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쫙 갈라진 혈체는 비틀거리다가 풀썩 쓰러졌다.

바닥에 천천히 번져 흐르는 피.

끝난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다.

나는 염동력으로 바닥의 핏덩어리를 한곳으로 끌어모아서 압축했다.

우드드득. 끄드득.

“그으으으으.”

죽었는지, 산 건지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염동력으로 계속 줄이고 줄여서 주먹 크기까지 줄여 버렸다.

공중에 둥둥 뜬 기괴한 핏덩어리.

파아악!

내가 다시 검으로 베어 버리자 혈체가 반 토막이 나서는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리고 파스스 소리를 내면서 녹아서 사라진다.

더는 반응이 없다.

“……후우.”

끈질긴 적이었지만 정말 끝난 모양이다.

나는 한숨을 쉬면서 돌아보았다.

우렌이 넋 나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디에르크에게 당한 오른팔, 아래가 없다.

하지만 우렌은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팔도 신경 쓰지 않고 메즈린의 시체만 바라보고 있었다.

“우렌.”

내 부름에 우렌이 입술을 꽉 깨물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단히 감사합니다!”

나에게 경례를 바쳤다.

습관적으로 오른손으로 하려다가 없다는 걸 알고 왼손으로.

목이 터져라 힘껏 외친다.

“흉악한 적의 칼날이 턱밑까지 쳐들어왔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참으로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본부장님의 용맹한 분투와 혜안 덕분에 우리 사지타리 가문은…….”

“우렌 사지타리.”

“…….”

“지금은 안 해도 된다.”

내 말에 우렌이 입을 벌린 채로 굳어 버렸다.

나는 그저 고개만 가로저었다.

“미안하다. 방법이 없었다.”

“아, 아, 아닙니다. 보, 본부장님.”

“……일단 몸부터 돌봐라.”

내가 착잡하게 말하자 우렌은 고개를 떨어트렸다.

나직한 소리.

“으, 으으윽.”

그리 목소리가 크던 남자의 울음소리는 너무나 작았다.

속아 넘어갔다고는 하나 함께했던 아내였다.

정리해 버린 내가 더는 말할 순 없으리라.

내가 이셀렌을 돌아보는데…….

콰앙!

갑자기 멀리서 폭음이 들려왔다.

“뭐야, 이거.”

“아, 기억났습니다! 제가 저택 지하에 작렬탄을 매설해 놨습니다!”

우렌이 울음을 삼키고는 얼른 말했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넌 팔부터 챙기고, 이셀렌, 애들 다 챙겨라. 빠져나가자.”

심야.

사지타리 저택이 불탄다.

대기하고 있었던 다크엘프 요원들, 중앙경찰에 이어서 소방관들까지 출동했지만 불길이 잡히지 않았다.

작렬탄으로 붙은 불은 마력현상, 보통 방식으로는 못 잡는다.

대신 일정 구역 이상으로는 안 번지고.

나는 일부 소방관만 남기고 돌려보내라 하고는 상황을 돌아보았다.

정원 여기저기에 쓰러진 환자들의 신음 소리들.

싸우면서 사상자가 나왔다.

또 디에르크의 감염에서 풀려난 이들은 대다수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아야야야…….”

내 옆에 양반다리로 앉은 칼비나는 팔에 붕대를 감으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상처는 좀 어때요. 괜찮아요?”

“운에 맡긴 건데 운 좋게 됐네. 3개월 정도면 회복할걸?”

칼비나는 쾌활하게 말했지만 가벼운 일이 아니다.

검사에게 팔은 생명이다.

급이 높은 치료약은 돈만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자칫하면 영원히 팔을 못 쓴다면? 그런 생각에 보통은 못 한다.

하지만 칼비나는 했다.

여차하면 조종당해서 나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바로 자기 팔에 칼을 박았다.

나는 칼비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마워요, 누나. 내가 반드시 치료약 구해 올게요.”

“후후후, 아냐. 안 해도 돼. 후후후, 팔이 불편하니까…… 이걸 핑계로 아멜리아에게 잔뜩 어리광 부려야지!”

“……농담이 아니라 진짜 엄청 야단칠 텐데요? 나 다칠 때도 난리였는데.”

“헉! 망했다! 혼나나?”

칼비나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 쾌활한 누님도 아멜리아에게는 사족을 못 쓰는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마요. 내가 잘 말해 줄게요.”

“……믿습니다, 동생님.”

나는 웃어 버리고는 돌아가는 정황을 살폈다.

철도헌병대장, 아르센이 직접 나와서 현장을 살피고 있었다.

의료진들에게 우렌과 다르갈이 치료받고 있고.

내 시선을 알아차린 다르갈이 일어나더니만 머리를 깊이 숙여 보였다.

이제까지와 다르게 정중한 인사.

자기 가문에 도사렸던 어둠을 제거해 준 것에 고마워하는 것이다.

“저 둘이 치료받고 나면 디에르크의 정보를 좀 알아보고…….”

나는 시선을 돌렸다.

다크엘프의 요원들 사이.

담요를 두르고 선 이셀렌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다크엘프들, 다른 정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다가가면서 말했다.

“이제 남은 이야기를 정리합시다. 암살여왕.”

“…….”

이셀렌은 주변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눌 테니 다들 물러가라. 명령이다.”

다크엘프들은 다들 뒤로 물러났다.

이셀렌이 누구에게 들릴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곤거렸다.

“……조용한 데서 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어.”

부끄러움이 섞인 부드러운 목소리.

“특관님.”

그때 아르센이 다가오면서 나를 불렀다.

이셀렌은 순식간에 냉정한 표정을 하더니만 차디찬 냉기를 내뿜었다.

원래 내 앞에서만 풀어지는 여자다.

내가 돌아보자 아르센은 멈칫하고는 손짓했다.

단둘이서만 나눌 중요한 이야기라고.

나는 일단 이셀렌에게 기다리라 눈짓하고는 아르센을 향해 다가갔다.

아르센은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말했다.

“좀 곤란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뭔데?”

“……제국군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우렌 사지타리와 다르갈 사지타리를 자기들 쪽으로 인도해 달라고 합니다.”

“얼씨구? 지금 장난하냐?”

아르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국군 쪽에서는 진지합니다. 천검장(千劍將) 카나릭이 직접 병사들을 데리고 왔는데, 우렌의 상관이라고 합니다.”

천검장이라면 영관급의 최고봉이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직속상관을 보냈으니 자기들 원하는 대로 해 달라? 우렌과 다르갈을 순순히 넘겨주면 유혈 사태는 없을 것이다?”

“……어쩌시겠습니까?”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해.”

막판에 숟가락 얹으려고 들면 부러트려 줘야지.

손가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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