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80)
canta per me
나와 이셀렌.
그리고 미레이와 알베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비무장 상태다.
초대받은 식탁에 칼을 차고 앉을 순 없으니까.
“후후후후……. 하하하하하!”
디에르크가 크게 웃더니만 벌떡 식탁을 걷어차 버렸다.
부우우웅!
길이 10m가 넘는 철제 식탁이 단번에 뒤집어지면서 그 위에 놓여 있던 칠면조와 음식, 접시, 음료수가 비산한다.
어마어마한 무게일 텐데 단숨에 엎어 버렸다.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옆으로 피하는데, 디에르크는 훌쩍 벽을 차는가 싶더니만 내달렸다.
마력질주의 응용, 벽 달리기.
쉬운 일이 아닌데 디에르크는 바로 해내면서 출구로 향했다.
“달아난다!”
나도 바로 따라잡았지만, 조종당하는 다르갈이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나는 가볍게 흘리고는 팔을 잡고 콱 메쳐 버렸다.
디에르크의 단말은 본인이 어느 정도 의식을 집중해야 한다.
지금은 자기가 빠져나가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엉성한 것이리라.
알베르트와 미레이는 달려드는 우렌을 상대하면서 외쳤다.
“여왕님! 피하시죠!”
“특관님! 잘 모르겠지만 잡아 주세요!”
나와 이셀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디에르크를 쫓았다.
한데 갑자기 발소리가 사라졌다.
“리젠!”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미리 대기하던 칼비나가 내 칼, 다른 사람의 검을 품에 안고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뒤!”
그늘에서 갑자기 디에르크가 뛰쳐나왔다.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칼비나를 덮친다.
“큭!”
칼비나는 품의 검들을 싹 다 떨어트리더니만 우리 쪽을 향해서 발로 걷어찼다.
이미 품에 짐이 가득한 상황에서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으니 내린 대응!
기막히긴 했지만 디에르크는 순식간에 칼비나의 목덜미에 이빨을 꽂아 버렸다.
“하아압!”
하지만…… 그 순간 내가 내달린다.
나는 내 쪽으로 쭉 미끄러져서 온 칼을 발끝으로 걷어 올리면서 가속했다.
마력질주!
동시에 염동력을 사용, 걷어 올린 검을 내 쪽으로 끌어당겨 잡으면서 앞쪽으로 쭉 뻗는다.
“뭐!”
막 칼비나의 피를 빨던 디에르크의 안면으로.
“키아악!”
디에르크는 바로 뒤로 뛰어서 달아났지만 이마가 찢겨 나갔다.
너무나 빠른 퇴각, 나는 일단 멈추면서 검을 휙 내던졌다.
마력을 휘감은 투검!
“카아악!”
어깨가 찢긴 디에르크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재빠르게 계단 위로 후다닥 올라갔다.
나는 일단 검을 회수하면서 칼비나의 상처를 살폈다.
칼비나는 몽롱한 얼굴로 목덜미를 더듬었다.
“하아, 하아아……. 으음, 확실히 물리고 피도 빨렸는데?”
“아직 의식은 있나 보네요.”
“기다려 봐. 조종당하기 전에…….”
칼비나는 떨어져 있던 장검을 뽑고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더니 자기 오른팔에 푹 찔러 넣었다.
내가 깜짝 놀라는데 칼비나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으아아아. 진, 진짜 아프다. 하아, 하아아…….”
“……다 끝나면 치료약 준비할게요.”
“설명 안 해도 아네. 동생이 똑똑해서 다행이다.”
칼비나는 혹시나 자기가 조종당해서 적이 될까 봐, 자해한 것이다.
뛰어난 검사도 팔이 엉망이면 여력을 발휘하지 못하니까.
동맥을 안 건드리면 죽진 않고, 또 나중에 치료약을 먹으면 후유증도 없다.
당장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수.
하지만 그걸 주저 없이 판단하고 행동하는 게 놀라웠다.
얼굴에 진땀을 흘리는 칼비나는 호흡을 고르면서 말했다.
“어서 가 봐. 누나 이렇게 만든 놈에게 제대로 갚아 주는 거 잊지 말고.”
“물론이죠. 자, 그럼…….”
나는 이셀렌에게 눈짓하고는 뛰어갔다.
달리는 가운데 우리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울린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군. 그러면…….”
이셀렌이 말끝을 흐렸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여긴 디에르크의 본거지…….”
내가 말한 순간 걸음을 멈췄다.
1층 라운지에 갑옷을 입은 기사 열두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그리고 2층에서는 우리들을 내려다보는 디에르크가 있고.
“하하하하, 설마 내 정체를 알아냈다고 해서 끝인 줄 알았어? 너희들이 살아 나갈 거라고 생각했어? 여긴 이미 전부 다 내 피를 마셨어!”
“이야기에 나오는 3류 악당 같군.”
“용케도 그런 걸 아네?”
이셀렌이 독서를 하던가?
내가 의아해서 물어보니 이셀렌이 부드럽게 말했다.
“황제가 남긴 책은 다 읽었으니까.”
“……좀 놀라운데.”
우리 둘이 한가롭게 잡담을 하자 디에르크가 인상을 팍 썼다.
“지금 둘 다 나를 아주 무시하는데…….”
“트릭이 들통난 마술사가 존중받겠냐? 알아서 무대에서 내려오셔야지.”
나는 이셀렌을 돌아보았다.
“위, 아래?”
“네가 올라가라.”
나는 바로 이셀렌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이셀렌은 깍지를 끼고는 내 발의 디딤대가 되어 주었다.
그걸 밟고는…… 2층으로 단숨에 뛴다!
“뭐!”
여유롭게 내려다보던 디에르크가 기겁했다.
거리가 약간 모자란 나는, 염동력으로 관성을 더해서는 2층 복도로 올라갔다.
“공격해! 공격!”
디에르크가 얼른 1층 계단 쪽으로 피하면서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자길 보호하라고.
하지만 1층에 있는 기사들이 2층을 향해서 몸을 돌리는 순간, 이셀렌이 마력검을 발휘하면서 목을 날려 버렸다.
그래도 절반 이상은 2층으로 올라간다.
“으으으!”
계단을 구르듯이 내려가는 디에르크, 그 뒤를 쫓는 나를 기사들이 가로막는다.
하지만 나는 막 계단을 다 올라온 기사의 복부를 향해서 일장을 내질렀다.
염동장!
퍼어엉!
가죽 터지는 소리가 나면서 기사가 뒤로 떠밀리고, 두 번째 기사가 몸을 거칠게 떨면서 뒤로 물러난다.
내 정신력이 보다 강해져서 이제 염동장이 위력 전달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우당당탕!
기사들은 뭘 해 보지도 못하고 한 덩어리가 되어서 계단을 굴러떨어졌다.
“꺄아아악!”
디에르크는 갑옷 입은 기사들과 한 뭉치가 되었다가 마력을 써서 간신히 뿌리치고 나왔다.
“헉, 허어억.”
계단 중턱에 선 디에르크는 2층에서 천천히 내려오는 나, 1층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이셀렌을 번갈아서 보았다.
위와 아래의 포위망.
“으으윽!”
디에르크는 일단 나가떨어진 기사들을 일으켜 세웠지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제 확실해졌다.
일단 디에르크의 조종은 완벽하지도 않고, 제대로 하려면 정신에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체를 몰아쳐서 동요시키면 조종할 여력도 없는 것이다.
이셀렌이 차게 말했다.
“이제 끝이다, 뱀파이어.”
“잠깐! 협상하자! 암살여왕!”
디에르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이셀렌이 무시하고 계단 턱을 밟자 디에르크가 외쳤다.
“다크엘프의 멸망을 막아야 할 텐데!”
“…….”
멈칫.
내려가던 나도 멈췄다.
보통 이런 식으로 나오면 대뜸 검을 꽂아 버리면 그만이지만, 지금 기사들이 바디벙커 노릇을 하고 있었다.
칼을 날려서 디에르크를 끝장낼 각도가 안 나온다.
그리고…… 이셀렌이 동요하고 있었다.
1층에서 일렁거리는 마력램프의 불빛에, 은발의 다크엘프는 굳은 채로 서 있었다.
디에르크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하하하……. 아, 놀라라. 하지만 역시 그분의 말씀이 맞았네. 너 다음은 이제 없는 거지. 하지만 나는 그걸 바꿔 줄 수 있어!”
“…….”
“자, 암살여왕. 네가 원하는 건 그 남자 하나잖아? 시릭 카라카스를 돌려받길 원하는 거지? 그분에게 기도해! 그러면 가능해! 그분은 신이시니까!”
“웃기는 소리 하지 마.”
나는 끼어들어서 딱 잘랐다.
내가 시릭 카라카스 본인이기도 하거니와…….
“설사 신이라고 해도 사람의 영혼은 마음대로 다룰 수 없다. 그건 이미 지긋지긋하게 아는 이야기다!”
“아, 하지만 당사자의 동의가 있다면 가능하지. 시릭 카라카스가 그분에게 잘못했다고 엉엉 울면서 빌었다니까? 그땐 제가 잘못했으니까 지상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그러면 뭐든지 하겠다고…….”
질 낮은 속임수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지만…… 이셀렌은 움직이지 않았다.
장승처럼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아니, 지금 저런 3류 속임수에 낚인다고?
내가 이해를 못 하자 디에르크가 비웃었다.
“하하하, 늘 자신만만하던 리젠 리브라타도 이해를 못 하고 있네. 하지만 암살여왕의 입장도 이해해 줘야지. 이대로라면 다크엘프가 끝장나게 생겼는데.”
“무슨 소리야?”
내 말에 디에르크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만만하게.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 속도에는 다들 놀라 자빠지지. 안 그래? 하지만 그게 하루아침에 사라지면 끝장나겠지?”
“…….”
그래.
카라카스에서는 정상적으로 빠른우편이라고 해 봐야 파발마, 전서구다.
하지만 다크엘프는 다르다.
그들은 메신저를 쓴다.
다크엘프 사이에서만 통하는 정보 전달.
남들 다 손으로 편지 쓰는 시대인데 자기들은 카톡 하고 라인 한다.
그러니 다른 종족들은 정보 전달로는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
이게 바로 다크엘프의 고유 능력, 정보 전달.
그게 가능한 건…….
“…….”
지금 침묵하고 있는 이셀렌이 있기 때문이다.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은 여왕이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이다.
여왕이 메신저 서버니까.
만약에 여왕이 불귀의 객이라도 된다면 다크엘프들은 더는 정보 전달을 쓰지 못한다.
약한 종족인 다크엘프에게는 이는 종족 존속의 문제고.
그러니 여왕은 자식을 낳고 서버로서의 힘, 왕권(王權)을 대대로 물려준다.
나도 이미 다 아는 사실이다.
“저기 암살여왕이 사라지면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도 다 끝나지.”
“그건 자식에게 물려주면 되잖아? 오르카가…….”
아들이 있잖아?
내가 무심코 말하는데 디에르크가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오르카아? 그 아들? 불가능해!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을 총괄하는 건 오로지 여자만이 가능하니까!”
“…….”
“즉, 지금 저 여왕이 죽어 버리면 다크엘프들은 끝나!”
……무슨 소리야?
상상도 못 한 이야기에 나는 굳어 버렸다.
난 다크엘프의 능력, 그리고 그게 여왕이 있어서 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까지.
하지만 그게 여자만 가능하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왜, 왜 말을 안 했지?”
“…….”
나는 이셀렌에게 물었다.
시릭이 아닌 나에게 대답해 줄 리가 없지만, 이건 넘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안 되잖아? 그러면…….”
다크엘프들의 정보 전달 능력은 정말 중요하다.
종족 전체의 문제, 아니 이제는 제국 전체의 문제가 된다.
이 사안의 심각성은 이셀렌이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디에르크가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리젠 리브라타는 여자 마음을 하나도 모르네? 자기 종족의 운명이고 뭐고 그냥 그 사람 아니면 안기기 싫다는 거잖아?”
“…….”
“저렇게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사람 목을 거침없이 쳐 날리는 여자지만 침대에서는 오로지 한 남자만을 알고 싶다, 그 사람이 아니면 싫다! 그 귀여운 암고양이 고집 하나로 일이 여기까지 온 거…….”
“넌 닥쳐.”
나는 포효로 디에르크의 말을 잘랐다.
디에르크는 죽인다.
하지만 그보다 지금 이셀렌의 대답을 더 듣고 싶었다.
“이셀렌.”
“…….”
침묵.
“17대 여왕 이셀렌 라그리즈.”
움찔.
이셀렌이 천천히 고개를 올렸다.
손과 몸이 적의 피로 더러워진 여왕.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둑한 달빛을 받고 선 은발의 다크엘프가 계단 위의 나를 하염없이 올려다본다.
“……왜 이야기 안 했냐?”
“…….”
“우리가 멀어졌다고 해도 그래도 이건 이야기를 해야 했어. 그러면…….”
내 백성, 다크엘프 전체의 명맥, 제국의 운명이 달린 이야기였다.
아들인 오르카는 왕권을 물려받을 수 없다고 고백했어야 했다.
아내들 얼굴을 안 보기로 작심했던 나도 이 사실을 알았다면 생각을 고쳤으리라.
이셀렌은 멍하니, 믿어지지 않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대체 무슨…….”
“내가 라그리즈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었다고 생각하나?”
“오르카가…….”
“오르카가 경망스럽게 그럴 것 같더냐. 나에게 네 허물은 하나도 말 안 하려던 아이였다. 다 떠안고 네 잘못은 없다고 할 아이라는 걸 너도 알 거다.”
“…….”
“네가 직접 나에게 알려 주었다. 다 싸우고 돌담 벽에 나란히 기대서, 해 지는 걸 보다가 불쑥 말해 줬었지. 세상에서 오로지 나에게만 허락하는 거라고.”
“아.”
외마디 비명.
이 순간 이셀렌에게는 오로지 나만 보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다. 정보를 담당하는 네가 지금 벌어지는 일을 바로 믿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
“하지만 저딴 헛소리에 흔들리지 마라. 네가 아는 시릭 카라카스가 죽었다고 칠죄신에게 굴종할 남자더냐? 내가 그러기에는 잃어버린 벗과 동료들이 너무나 많다, 너무도.”
이셀렌이 나를 멍하니 바라본다.
지금 말하는 내가 누구인지, 직감하면서도 부정하고 다시 믿고 싶어서 흔들리는 눈망울.
나는 거침없이 말했다.
“시간은 흘렀고 내 모습도 크게 달라졌다. 그래, 아무리 설명해도 믿을 수 없겠지. 하지만 나를 다시 만난 순간, 크게 뛰었던 네 심장이 거짓 같더냐? 암살여왕이라고 다들 두려워하는 너에게 감히 대들던 내가 이상해 보이지 않더냐.”
“…….”
“내가 유독 오르카의 일로 화내지 않았더냐?”
이셀렌이 가늘게 떨었다.
보다 확실해지는 예감에.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네가 말했지? 우리가 무작정 멀리하기에는…….”
“잃어버린 것이 너무나도 많다.”
이셀렌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 시릭 카라카스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이셀렌과 나눴던 대화.
우리 말고는 누구도 모를 소리.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내 대답은 이랬지. 잃어버린 게 너무 많아서 멈출 수는 없다. 하지만 같이 갈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응.”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쌓인 이야기가 많다. 몇 번을 말해도 다 믿을 수는 없을 테고. 그러니까 일단 저놈부터 잡자.”
“아니, 믿어.”
이셀렌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이내 다시 한 번 젓고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활짝 웃으면서 부른다.
“시릭.”
“그래, 라그리즈.”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