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79)
결과는 유죄다
초저녁.
다크엘프 이셀렌은 침대에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자문자답.
그녀는 다크엘프들의 여왕.
다크엘프의 정보 통신, 네트워크의 중핵(中核).
절대 죽어서는 안 된다.
한데 여기가 적, 디에르크의 소굴이라는 걸 알면서도 왔다.
물론 디에르크는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 능력은 사회적으로 너무 위험하다. 그래서 오래 추적해 왔고.
하지만 이셀렌이 직접 처리할 필요는 없다.
“내기했으니까?”
리젠 리브라타를 죽이려고 온 건가?
아니다.
카지노에서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우고.
저도 모르게 웃어 버리고는 이셀렌은 인정했다.
그냥 리젠에게 화풀이하고 싶었던 거라고.
제국을 위한 길이 아닌데도.
“그래, 그냥…… 그래.”
라그리즈라고 불린 걸 수치스러워하고 분노했던 건, 결국 반사적인 기쁨을 느낀 걸 인정할 수 없어서였다.
아, 하지만 덕분에 기억났다.
시릭과 갈라져 버린 괴로웠던 시간이 아니라, 그 이전.
행복한 시절들이.
풀장을 보고 추억을 떠올리게 될 정도로.
생각해 보니 리젠은 시릭과 많이 닮았다.
거침없는 말과 행동이.
곁에서 보면 시릭이 계속 떠오르고 새삼 사무치지만…….
“하지만 시릭은 아니야. 그래.”
이 마음이 시릭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 흔들렸던 것이 결코 아니다.
그저 갑자기 떠오른 그리운 추억에 젖어서 방황하고 어지러워졌을 뿐.
그런 스스로를 인정할 수가 없어서 불타올랐지만…… 시국이 갈수록 어지럽다.
개인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그럼 다시 꾹 눌러 담자.
백 년을 참았는데 천 년을 못 참겠는가.
마음을 정리한 이셀렌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감정적인 돌출은 오늘까지, 이셀렌은 다시 냉정한 암살여왕으로 돌아가리라.
다크엘프들을 지휘하면서 투쟁해야지.
“그래.”
결국 다크엘프는 몰락하겠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
* * *
식당.
저녁 식사 자리.
한껏 차린 음식과 술이 내 앞에 놓였다.
우렌이 크게 외쳤다.
“자, 특관님. 어서 드시지요!”
“음, 먼저들 먹어. 난 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럼 건배라도 하시죠!”
우렌의 권유에 다들 잔을 부딪쳤다.
나도 레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면서 염동력을 사용했다.
그러고는 지금 자리에 있는 이들을 살핀다.
사지타리 공작 가문의 장자인 우렌과 그 부인인 메즈린, 사촌인 다르갈 사지타리.
그리고 암살여왕과 알베르트를 비롯한 다크엘프 호위들. 나와 미레이.
칼비나는 밖에서 대기 중이다.
자, 이제 시작이다.
“다들 식사 중에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수사 결과를 발표하겠다.”
“음? 아, 본부장님은 저희 사지타리를 조사하려고 오셨죠! 하하하, 어떻습니까? 저는 황제 폐하의 이름 앞에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
“유죄다.”
적막.
내 말에 다르갈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대체 무슨 증거로…….”
“닥쳐라! 다르갈!”
갑자기 우렌이 고함을 쳤다.
……뭔 사자 수인도 아닌데 귀가 먹먹해질 정도였다.
나야 포효를 쓰는데, 우렌은 그냥 성량이 크다.
우렌이 다르갈에게 일갈했다.
“상관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다니! 일단 자세를 바르게 하고 경청하는 것이 제국군의 바른 자세 아니냐!”
“아, 우렌 형!”
“지금은 조용히 하고 들어라!”
우렌은 꾸짖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본부장님, 실례가 많았습니다. 우리들이 잘못을 저지르고 죄를 지은 게 있다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겠죠. 부디 깨달으신 바를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
좀 감탄했다.
우렌이 목소리가 크고 단순해 보이지만 본성은 대쪽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 수사본부는 1차적으로 테러범, 그중에서도 핵심 역할을 하는 사도들을 검거하려고 했다. 그중에서 용의 선상에 오른 게 바로 디에르크였다.”
“예, 그렇습니다.”
“디에르크는 뱀파이어다. 혈액을 먹이거나 상대를 물어서 감염시킬 수 있다는군. 이미 알겠지만 비요른도 거기에 당한 거다. 여기까진 알지?”
다들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포크로 식탁을 두드리면서 일렀다.
“디에르크는 상대를 조종하는 데 거리 제약이 있다. 지금 황도에 있다. 그리고…… 제국군의 폭탄 유출과 겹쳐 보면 일이 간단해진다.”
“……예?”
“디에르크는 사지타리 가문 안에 잠입했다. 그리고 사지타리 가문 사람들을 조종해서 제국군의 폭탄을 빼돌려서, 루크 케드릭에게 넘겼다.”
“……우리가 조종당했다는 겁니까?”
다르갈이 절대 인정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비요른의 사건이나 테오도라 카지노를 보면 일목요연하다. 일단 조종당하면 당사자의 의식은 사라진다. 너희 둘 다 조종당하고 있다. 범인은 메즈린이다.”
적막.
내가 너무 지나가는 투로 이야기했나?
다들 멍하니 듣다가 메즈린을 돌아보았다.
메즈린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뭐라고요?”
“네가 바로 본체다. 메즈린.”
“……지금 그 말에 책임을 지셔야 할 겁니다.”
다르갈이 나를 향해 덤벼들 기세로 으르렁거렸다.
그야 잘나가는 공작 가문의 장남, 그 아내를 모욕했으니 바로 결투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렌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보다,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본부장님의 말씀을 무작정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저는 아내를 사랑합니다. 제 아내가…… 그런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 여보.”
메즈린이 우렌의 팔에 매달려서는 고개를 필사적으로 가로저었다.
자긴 아니라고.
우렌은 아내를 향해 애써 웃어 보이고는 나를 돌아보았다.
“제발 납득이 가게 설명해 주십시오.”
“듣는 게 괴로울 텐데 괜찮겠나?”
“……만약 본부장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저도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입니다.”
“알았다. 목 좀 축이고.”
나는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또 염동력을 사용했다.
대화하는 중에 계속 사용하고 있지만 내 정신력도 많이 늘어서 괜찮았다.
나는 식탁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시점을 돌려서 생각해 봤다. 내가 디에르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일단 디에르크는 사지타리 공작 가문에 잠입했다. 12가문 중에서도 5위는 되는 강력한 가문, 여기서 제국을 무너트리기로 작정을 했지. 일단 사지타리 가문의 사람들을 조종해서 폭탄을 유출했다.”
“……그거라면 나나 우렌 형이 본체일 수도 있잖습니까? 또 집안의 하인일 수도 있고요. 대체 왜 형수님이 디에르크라는 말씀입니까?”
다르갈이 성난 목소리로 따졌다.
당연한 질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폭탄을 빼돌린 건 디에르크가 제국을 무너트리려는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다. 디에르크가 더 중요하게 여긴 목적은 따로 있다.”
“무슨…….”
“디에르크는 약하다. 보통 사람은 자기 약점을 보강하려고 한다. 그러니 디에르크는 생각했다. 피를 먹이거나 물어서 자기 수하들을 늘리자. 또 믿음직한 강력한 육체를 찾자.”
“…….”
나는 침묵하는 메즈린을 보며 웃었다.
“하지만 디에르크 입장에서는 둘 다 쉽지 않다. 상대를 무는 거? 일단 단둘이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셀렌에게 내 정체를 밝힐 방법을 찾다 보니 깨달았다.
낯선 사이에 밀담이 쉽지 않다는 거.
“그러면 여자, 미녀인 게 좋지. 미녀가 단둘이 있고 싶어 한다면 대부분의 남자는 혹한다. 같은 여자여도 무작정 거절하진 않을 거고.”
“……그건 그냥 추측입니다.”
다르갈이 애써 말했지만 목소리가 동요하고 있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그렇다고 자기 피를 먹여? 여기서 아주 단순한 사실이 있는데…… 사람은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다. 헌혈도 무작정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디에르크가 피를 뽑을 수 있는 양은 한정된다.”
“…….”
“그 마력약 퍼포먼스를 다들 보는 앞에서 일부러 펼친 이유가 그거겠지. 자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이셀렌이 알아들은 눈치인지 흠칫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디에르크는 나름 머리를 써서 자기 힘을 늘릴 판을 벌였다.”
“그게 뭡니까?”
“루크 케드릭의 파티, 그건 디에르크가 자기 수하들을 늘리기 위한 연회장이었다.”
나는 차분하게 짚었다.
“디에르크는 수하를 잘 고르고 싶었어. 재차 말하지만 디에르크도 상당한 리스크를 안고 있으니까. 또 자칫하다가는 꼬리를 밟힐지도 모르고. 다크엘프들이 자기를 추격하는 것도 압박이 상당했겠지.”
“…….”
“그러니까 제국의 고위층을 자유롭게 만나서 은밀하게 수하로 만들 장소, 그게 바로 루크 케드릭이 연일 개최하는 파티였던 거다. 테러범들이 괜히 돈을 낭비한 게 아니었다고.”
다들 내 말에 입을 떡 벌렸다.
나는 메즈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테러범들이 일제히 들고일어나는 그날을 위해서,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수하로 만들려고 했겠지. 그렇지?”
“…….”
메즈린은 그저 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픽 웃었다.
“조심하겠다고, 피를 먹이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또 중계기로 삼을 인간도 필요하니 무는 게 훨씬 나아. 그래서 파티장에 종종 얼굴을 비쳤다.”
“억지입니다. 결국 케드릭의 파티장에 많이 갔다고 형수님이 범인이라는 거잖아요. 형수님은 몸이 약하셔서…….”
반박하던 다르갈이 모순을 깨닫고는 멈칫했다.
나는 준비해 온 서류를 식탁 위로 던졌다.
우렌과 메즈린 앞으로.
“몸이 약하시다는 분이 너무 많이 가셨더군.”
“…….”
“케드릭 가문이 최근 3개월 사이에 연 파티가 71회인데…… 그중 34회 출연자시다. 케드릭 가문의 자제나 시종들을 제외하고 최다 출연자시지.”
“그걸 일일이 세셨어요?”
미레이의 놀란 목소리.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중앙경찰의 수사원들이 날밤 새우면서 수작업으로 집계했다. 가장 많이 나온 이름이 바로 메즈린 사지타리다.”
“…….”
메즈린은 침묵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애당초 우렌과 다르갈은 케드릭의 파티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어. 우렌의 성품으로 보아서는 제이드하고 어울리지 않으니 당연하지. 그리고 메즈린, 너도 귀족 부인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혼자서 참석했다는 변명을 준비했겠지만 그래도 너무 많아.”
“…….”
“너도, 다크엘프도 경찰의 수사력을 얕봤다.”
이셀렌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가볍게 말했다.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은 카라카스에서 제일이다. 하지만 분석하는 능력까지 일류일까? 정보를 모은 다음에 제대로 분석해야 쓸모가 있지.”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내가 이긴 것 같다고. 그리고 우렌과 다르갈은 가능하면 죽이지 말고. 둘 다 피해자고, 또 살려 놔야 정치적 수습이 원활해지니까.”
나와 이셀렌의 대화.
이셀렌이 턱을 미미하게 끄덕였다.
메즈린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우렌의 팔을 붙들었다.
“여, 여보!”
“…….”
우렌은 앞에 놓인 서류를 내려다보고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내가 케드릭의 파티에 자주 나갔다는 건 압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이 나갔을 줄은 몰랐군요.”
“우렌.”
나는 진지하게 불렀다.
설마 자기 아내가 테러범이라고, 아니, 그걸 넘어서 조종당했다고 누가 생각할까.
우렌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가 조종당한 겁니까? 기억에는 없지만 조종당해서 제국군의 폭탄을 빼돌리고 넘겨줬다는 겁니까?”
“조사하면 나올 거다. 협력해라.”
나는 간결하게 권했다.
우렌은 한숨을 푹 쉬었다.
“저는 아내를 믿습니다. 그러니…… 조사에 협조하겠습니다.”
“여, 여보!”
우렌이 메즈린을 돌아보았다.
“미안하지만 메즈린. 모든 오해가 다 풀릴…….”
―리가 없지?
갑자기 우렌의 성대에서 간드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르갈이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그 역시도 눈이 뒤집어지더니만 뒷걸음질을 쳤다.
도망가는 게 아니라.
식당의 출구를 막는 것이다.
“……후후후.”
그리고 메즈린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용케도 정답을 맞히셨네요. 리젠 리브라타. 과연 유부녀만 노린다는 남자다워요. 저를 만나자마자 샅샅이 파헤쳐 버리는군요.”
“보자마자 홀딱 벗고 있는데 뭐 어쩌라고 싶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메즈린이 뺨에 손을 대고는 웃었다.
“이런, 어쩌죠? 추리는 좋았지만 내가 진짜 본체라는 보장은 없잖아요? 이 저택 아닌 다른 곳에 숨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후유증이 있다.”
이셀렌이 술을 마시며 말했다.
“네 수하들이 죽을 경우, 너도 타격을 입는다. 중계기가 당하면 기절하기도 한다는군. 그래서 평소에 병약한 행세를 했겠지.”
“…….”
“테오도라의 싸움 당시에, 네가 어쩌는지 확인했다. 쓰러졌었더군.”
그 카지노의 싸움은 이셀렌이 확신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셀렌에게 물었다.
“이미 알아 놓고 제국군에게 폭탄을 받아 낸 이유는 뭔데?”
“……나도 파티 참가 횟수까지는 생각을 못 했으니까.”
이셀렌은 폭탄을 보여 주고는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서 자백을 받아 낼 심산이었다.
메즈린, 아니 디에르크가 나를 보며 말했다.
“우후후, 계속 여유를 부리는데…….”
나는 계속 쓰고 있던 염동력으로 식도의 내용물을 뱉어냈다.
내가 마셨던 술.
붉은 와인을 토해 내자 디에르크가 멈칫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뱀파이어가 레드 와인을 주는데 그걸 그냥 받아 마시겠냐?”
“아, 아니! 한참 전에 마셨는데 대체 어떻게…….”
디에르크가 낭패했다.
나는 내 체내를 염동력으로 상당히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다.
각성하기 전에 마력도 붙들어 뒀지.
자신만만한 메즈린도 내가 식도 안에서 염동력으로 와인을 붙들어 두고 있다고는 상상 못 했을 것이다.
“나한테 이미 피를 먹였다고 득의양양해서 정체를 인정하셨지? 그러라고 마신 거야.”
입가를 닦은 냅킨을 식탁 위로 던져 버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맞춰서 이셀렌도 술잔을 내려놓고는 일어났다.
“자, 그럼 암살여왕. 약속은 기억하지?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오래 찾아다녔다. 직접 죽여야지.”
모처럼 뜻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