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78)
셋 중 하나
황도의 중심가.
사지타리 가문의 저택.
도시 한복판에 풀장과 정원이 딸린 저택, 호화롭다.
내 옆에서 걷던 미레이가 풀장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관님! 저기 보세요, 저기!”
“익사하고 싶어?”
“수영하고 싶은데요! 아, 수영복을 안 가져왔네요! 아깝!”
수영복은 내가 개발한 거다.
카라카스에서는 원래 다 벗고 수영을 했는데, 내가 용공주와 뜻을 맞춰서 수영복이라는 문화를 만들었다.
왜냐고?
병사들이 물놀이를 해야지.
인류가 집결한 제국군에는 여자 비율도 높았다.
여자들은 노출 문제도 있어서 수영을 섣불리 안 하니…… 장려하는 의미로 수영복이라는 의복, 문화를 창출했다.
전투에 지치고 힘든 와중에도 물놀이 한번 시켜 주면 병사들 활력도 돌고, 이래저래 좋았다.
그래서 수영은 카라카스의 인기 스포츠가 되었다.
“…….”
나는 미레이를 따라서 풀장을 바라보았다.
황궁에도 풀장이 있다.
그리고 이 저택의 풀장 디자인은 황궁의 것과 흡사했다.
내 허락을 받고 몇몇 귀족이 비슷하게 지었고, 여기도 비슷했다.
그 시절.
나와 황후들, 자식들이 모두 수영복을 입고 모여서 놀았다.
리세라와 미리엘이 서로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다니고.
오르카와 장남이 누가 빠르나 수영으로 경쟁하고.
장녀는 배영 한답시고, 자기 몸을 물수제비 삼아서는 퉁퉁 수면을 날아다니는 바람에 한바탕 뒤집어졌지.
황후들은 나에게 보이고자, 대담하거나 어울리는 수영복을 골라 입었고.
오늘 밤에 이거 입고 있을 테니까 찾아오라는 눈짓을 보내면.
나도 모른 척, 아는 척 받아 주었다.
행복했었다.
“…….”
다른 사람들도 다들 멈춰 섰다.
하나가 아니라 둘씩이나 멈춰 버리니 무슨 일이 났나 싶어서.
이셀렌.
그녀도 우두커니 멈춰 서서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암살여왕이라고 불리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그녀지만 지금 옆모습에는 씁쓸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특관님?”
“…….”
나와 이셀렌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 같은 시간을 떠올렸던 것일까.
홱.
이셀렌이 몸을 돌려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미련을 떨쳐 내듯이 빠른 보폭으로.
나도 다시 걷자 미레이가 옆에서 쫑알거렸다.
“……그런데 저분이 암살여왕이라고요? 히이익. 무서워요.”
“넌 찍혔으니까 조심해라, 미레이.”
“거, 겁주지 마세요! 그리고 레이라고 불러 주시라니까요.”
“알았어, 엑스레이.”
나는 적당히 대답하고 앞을 보았다.
거대한 3층 저택.
디에르크가 도사리는 적진이었다.
저택.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남자가 벌떡 일어났다.
우렌 사지타리였다.
“본부장님! 이런 누추한 곳에 귀한 분이 오셔서 환영입니다!”
“나보다 이분을 반겨야지.”
내가 턱짓으로 이셀렌을 가리켰다.
하지만 우렌은 담백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적으로는 본부장님이 더 위 아니십니까! 하하, 그렇다고 황후 전하를 박대한다는 건 아닙니다! 하하하, 그저 두 번째라 이거죠!”
“…….”
너무 스트레이트하잖아?
다들 어이없어하고, 우렌 뒤에 있던 다르갈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다르갈 옆에 있던 인간 여성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작은 체구의 미인이었다.
“여러분, 죄송합니다. 이 사람이 워낙 말실수가 잦아서…….”
“하하하, 부인! 그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실수를 해도 부인과 다르갈이 잘 받쳐 주잖습니까!”
“……음, 어떤 분이시지?”
“아, 제 안사람인 메즈린입니다! 하하하, 몸이 너무 약해서 바깥 활동을 잘 못 하는데 오늘은 괜찮은가 봅니다!”
메즈린이 우리들을 향해 인사를 올려 보였다.
“환영합니다. 이셀렌 황후 전하, 그리고 리브라타의 여러분.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주말에 머무시는 동안 부디 편하게 지내 주셨으면 합니다.”
“하하하, 어서 짐부터 푸시죠! 제가 본부장님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하인들이 우리 짐을 들고는 좌우로 갈라졌다.
내가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손님들을 떨어져서 묵게 하는 건가?”
“아, 예. 황후 전하에게는 서관의 큰 방을! 본부장님에게는 동관의 큰 방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그게 두 분의 격에 맞다고 하더군요!”
나는 이셀렌의 옆, 다크엘프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는 얼굴, 알베르트였다.
객실.
하인들이 짐을 놓고 돌아가자 나는 방 안을 살폈다.
오늘 방문에 나는 미레이와 칼비나만 데려왔다.
비공식적인 친선 화합이라서 많이 데려올 수가 없었다.
병력을 준비시켜 두긴 했지만…… 일이 벌어져도 바로 돌입할 순 없겠지.
“흐음.”
일단 방은 겉보기에는 별 이상이 없어 보인다만.
똑똑.
노크 소리.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크엘프, 알베르트였다.
빠르게 다가온 알베르트가 나를 향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찾으셨습니까?”
“그래, 솔직한 사정을 좀 듣고 싶어서.”
알베르트는 눈짓만으로도 알아차리고는 찾아왔다.
보통 수완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크엘프의 고위직이지.
알베르트는 손짓으로 내게 의자를 권했다.
긴 이야기니 편하게 앉아서 들으라는 의미.
내가 앉자 알베르트가 말했다.
“여왕님은 제 간언을 받아들이시고 리브라타와 화합할 생각이십니다.”
“그거 믿냐?”
“……죄송하지만 외부의 분에게 여왕님에게 불경한 언사를 보일 순 없습니다.”
완곡한 표현.
하지만 알베르트도 이셀렌을 곧이곧대로 믿진 않는 거다.
나는 무릎을 치고는 말했다.
“그냥 좀 더 솔직하게 말해 봐. 나도 그렇게 여유 있는 입장은 아니다. 너희들도 여왕이 죽어서는 절대로 안 될 텐데?”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
그 네트워크의 핵심이 바로 암살여왕, 이셀렌이니까.
만에 하나 아들인 오르카가 있다고 해도…….
“사실 암살여왕은 너무 모습을 많이 드러내고 있어. 원래도 혼란스러운 정국, 그런데 이런 자리에 직접 뛰어든다? 무모해.”
이셀렌은 나름 강하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다크엘프는 전투 능력이 떨어지니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물론 무모해서 얻을 이점도 있지. 이셀렌을 노리고 적들이 이빨을 드러낼 테니까. 그래도 너무 위험하잖아?”
“……예, 다들 은연중에 그리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현장도 직접 오시는 건 너무 무모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베르트가 간곡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여왕님께서는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유달리 이해하실 수 없는 판단을 내리고 계십니다. 저희들도 큰 뜻이 있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
다크엘프들도 슬슬 암살여왕의 행보를 이해 못 하고 있었다.
여기서 끝장을 보자고 제안한 건 나고 이셀렌이 받아들였지.
나는 잠시 생각하고 말했다.
“디에르크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냐?”
“디에르크의 피를 마신 타입과 디에르크가 물어 버린 타입이 있습니다. 전자는 단말이지만, 후자는 보다 강력하고 중계기 역할을 합니다. 보다 원활한 진두지휘가 가능하죠.”
“마신 놈은 단말, 물린 놈이 중계기라면…….”
나는 잠깐 생각하곤 말했다.
“디에르크는 피를 많이 뿌려서 감염시키고 싶겠지. 하지만 피가 무한정 솟아 나오는 것도 아니겠지?”
“예,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린 걸로 파악됩니다.”
“디에르크의 본체만 치면 끝나나? 녀석의 구속에서 다 풀려나?”
알베르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
알베르트가 각별히 단어를 고르는 이유.
이셀렌이 디에르크를 실험작이라고 단정한 이유.
칠죄신의 수법까지 생각해 보면…….
내 짐작이 맞으리라.
나는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디에르크의 후보는 누구지?”
“이미 아실 겁니다만. 우렌 사지타리, 다르갈 사지타리, 그리고 우렌 사지타리의 부인인 메즈린 사지타리입니다. 셋 중 하나가 본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섣불리 손을 못 대겠군.”
루크 케드릭이야 먼저 자기가 마각을 드러내고 민간인 학살까지 저질렀다.
하지만 우렌과 다르갈은 엄연히 제국군의 간부이자 12가문의 일원이다.
푹 찔러 보고는 아, 이놈이 아니었네~ 처리할 수 없다.
부인인 메즈린 역시도 마찬가지고.
“그래도 너희들이 따로 준비한 게 있을 거 아냐? 설마 셋 중 하나 찍어 맞힐 생각으로 온 건 아닐 텐데.”
“그게 저…….”
“내가 생각하는 그 계획은 아니겠지? 가짜 증거라도 만들어서 몰아가 보겠다는 거?”
움찔.
알베르트가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내가 이셀렌, 다크엘프의 일 처리 방식을 잘 알아서 추리한 거다.
나는 게슴츠레 바라보았다.
“제국군에서 사지타리와 반목하는 파벌에게 협력받았냐?”
“……으음.”
똑똑.
다시 노크 소리.
“리젠, 안에 있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칼비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다가온 그녀는 나와 알베르트를 보고는 말했다.
“남자 둘이 사이좋아 보이는데 방해해서 미안해. 남매끼리 좀 긴하게 할 말이 있는데?”
“다크엘프들이 제국군 쪽에서 폭탄을 받아 냈다고?”
“…….”
칼비나가 보자 알베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비나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응,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래. 나도 건너 들은 이야기라서 확신은 못 했는데. 사지타리 가문을 좋지 않게 보는 군 내부 시선도 존재하니까.”
“그래서 사지타리를 박살 내겠다고 또 폭탄을 유출해? 아오.”
“초법적인 수사라는 거지. 증거가 애매하면 만들어서라도 추궁하겠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뭔지는 알겠는데 이 경우에는 너무 위험해. 그리고 괜한 희생자까지 나올 수도 있잖아.”
“뭐?”
“사도의 본체는 하나고, 나머지 둘은 그저 희생자야. 하나만 죽이면 될 일을 셋 다 싸그리 죽이는 셈이잖아.”
알베르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잖습니까?”
“뒷수습이 안 돼. 루크 케드릭이야 보는 증인이 많았고 악행이 명백하니까 넘어간 거야. 그런데 사지타리 공작 가문의 장자와 그 부인, 그리고 사촌 동생까지 죽여 버린다고? 명백한 증거가 있다고 해도 너무 혼란스러워져. 거기다가 제국군이 반발한다.”
“…….”
“군 내부의 협조를 받았다고는 하나 결국 그놈들도 언제든지 등을 돌릴 수 있잖아? 좋은 일 처리가 아니야.”
자칫하면 디에르크 정리하려다가 제국군의 쿠데타를 부추기게 된다.
나는 혀를 찼다.
“무턱대고 셋 다 처리하려고 들면 뒷수습이 난감해. 상황이 혼란스러워지면 진짜 디에르크를 놓쳐 버릴 수 있어. 거기다가 무턱대고 심증으로 찍어 맞히면 안 돼.”
“왜 안 돼?”
“논리와 증거를 내세워야 다른 두 사람이 납득하고 사후 처리에 협력할 테니까.”
칼비나가 머리를 긁었다.
“네 말이 옳긴 해. 그럼 너는 어떻게 하려고? 디에르크가 누군지 애매하고, 지목해 봐야 발뺌할 거 아냐?”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면 이제 다 마련했어. 알베르트.”
“예.”
“나를 믿고 다크엘프 병력들을 대기시킬 수 있겠냐? 만약의 소란이 일어났을 경우에, 사지타리 가문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다크엘프의 요원들이 12가문의 저택을 급습하다니.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가 되겠군요.”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여왕님에게 간언을 올렸을 때부터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믿고 따르겠습니다.”
“그래, 믿어 줘서 고맙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낚아 보자.”
셋 중 누가 본체인지.
알아서 튀어나오게 할 방법.
막 생각을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