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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77화 (76/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77)

교차점

황성.

황도의 중앙에 위치한 성.

제국의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가 머무르던 곳이었다.

그 황성의 후궁.

황후마다 각 건물을 나눠 받고는 자기 색으로 꾸미었다.

밤에 황제, 시릭이 찾아오길 기다리면서.

낮에 격무를 마친 황제가 찾아오면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던 시절이 있었으나.

황성의 주인이 사라지면서 그 후궁도 조용해졌다.

황후들은 하나둘 자리를 비웠고 황도에 와서도 후궁에서 머무르는 일은 드물어졌다.

유일하게 사람이 기거하는 곳은 하나.

5황후의 후궁이었다.

찰방.

커다란 욕조에 백금발의 여성이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이마부터 뺨으로, 턱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너무나도 우아한 미녀였다.

천박한 농담이 장기인 광대도 감히 입을 떼지 못할 정도의 기품.

하지만 지금 그녀는 피곤했다.

“후우우…….”

여성이 한숨을 쉬자, 시녀 하나가 얼른 어깨를 주무른다.

다른 시녀 다섯이 그녀의 날개를 비단 수건으로 다듬고 고른다.

천족의 날개는 스스로 닦기 어렵다.

또 자존심이기도 하니 날개를 잘 고르는 건 하루의 일과였다.

남은 시녀 하나는 물의 온도를 확인하고는 급히 더운물을 더 부었다.

여성이 차분하게 물었다.

“미리엘의 소식은 있습니까?”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리세라 황녀와 함께 계시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돌아오라고 답장은 하였지요? 아니, 제가 했던가요?”

“……아니 하셨습니다.”

여성이 신음을 흘리면서 이마를 눌렀다.

격무에 지쳐서 머릿속이 번잡하다.

시녀장이 걱정스럽게 불렀다.

“황후 전하, 오늘은 이만 쉬시지요. 미리엘 전하는 저희들이 조만간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안 됩니다. 그 아이는 제가 직접 데려와야 합니다.”

“황후 전하, 그건 아니 될 말씀입니다. 이미 때가 늦었습니다.”

“…….”

여성이 물끄러미 보자 시녀장이 다시 말했다.

“이미 거듭된 소란으로 민심이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한데 황후 전하께서 궁을 비우시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거기다가 황후 전하께서 직접 찾아가시면…….”

“미리엘이 억류되었다고 세간이 의심한단 말입니까?”

“……예, 크게 우려되옵니다. 가뜩이나 세상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중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

여성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 리세라에게 말을…… 아니, 그래서도 아니 되겠군요.”

“예, 리세라 황녀 전하께서도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사옵니다. 6황후 전하의 곁을 떠나서 리브라타와 행동하시지 않습니까?”

“……6황후에게서는 연락이 없고요?”

“……송구하옵니다.”

“2황후 랑에이는?”

“……문전 박대하셨사옵니다.”

“3황후 이셀렌은? 분명 서로 오고 간 게 있을 텐데요?”

“……없던 일로 하시자고 하셨습니다.”

찰박!

여성이 분노에 차서 수면을 내리쳤다.

물이 튀고 시녀들은 놀라서 찔끔했다.

“그만, 그만! 대체 어쩌라는 겁니까? 내가 가서도 안 된다! 오라고 할 수도 없다! 다른 황후들은 하나같이 나 몰라라 하고!”

“……전하.”

“압니다! 알아요! 미리엘의 문제, 우리가 약점을 잡힌 순간 아주 조심해야 한다는 것! 누구에게도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이미 리브라타가 우리 비밀까지 알았으니 각오해야 한다는 것! 그들과 조만간 협상해야 한다는 것까지!”

“…….”

시녀장이 고개를 숙였다.

여성은 파르르 떨면서 이마를 눌렀다.

심장은 크게 뛰는데 손끝이 차가워진다.

고혈압?

심화(心火), 화병이 날 것 같다.

“……그냥 다 관둘까요?”

“전하.”

“그 사람이 왜 황제를 관두려고 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그 기분이에요. 아니, 저는 더 못났지요. 아무것도 못 하고 속수무책, 그저 제국이 멀쩡한 척 가만히 있어야 하니까. 황후들도 하나같이 국정을 팽개치고! 신하란 자들은 자기 종족과 단체의 잇속만 챙기고! 도처에서 산발적인 테러들이 일어나고 있고!”

여성이 히스테릭하게 외치자 시녀장은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도 전하가 있으셔서 지금 제국이 유지되고 있사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놈의 통촉은 무슨! 내 아이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데 무슨 통촉입니까!”

여자가 쩌렁쩌렁하게 고함을 치자 시녀들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파르르 떨던 여성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미안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화내고 소리칠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들이 모자라서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고 있사옵니다.”

여성은 한숨을 크게 쉬다가 말했다.

“내일은 뭐였지요?”

“일단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1황녀 전하, 2황녀 전하가 황도로 올라오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냥 오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1황녀가?”

또 무슨 복잡한 사정이 있나?

헤아리던 여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녀장이 계속 말했다.

“내일은 헌병대장 아르센과 면담, 또 빈민가 아이들을 만나셔서 전하의 성덕을 베푸시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 방문하셔서 학업을 격려하시고, 그다음에는 농무부장과의 면담, 그리고 귀족원장과 만남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까마득한 스케줄.

서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더 내놓으라는 아귀다툼뿐이겠지.

여성이 한숨을 쉬는데 시종장이 말했다.

“그리고 테러 수사본부장, 리젠 리브라타를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단 연락을…….”

“그중에서 제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은 없습니까?”

“……전하.”

“미안합니다. 내가 짓궂었습니다.”

여성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래요, 다 떠나라지요. 2황후는 혼자 돌아다니고, 3황후는 무슨 생각인지 돌출하고 있고. 막내는 얼굴도 안 비치고. 나만 남겨 두고 다 가 버리는군요. 미우나 고우나 우리는 한 식구였다고 생각했는데 다 뿔뿔이 흩어져 버렸군요. 저는 제국은커녕 제 자식 하나 챙기지 못하는 어미이고요.”

“……전하.”

“……3황후, 이셀렌이 이상합니다. 나뉜 것이 있고 깨진 것이 있으면 정갈히 마무리하는 이였습니다.”

여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치고 피곤해서 성질을 부렸지만 가라앉고 나니 걱정된다.

“이셀렌은 나 이상으로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다들 그녀를 두려워할 따름이지, 그 속을 보지 못해요. 지금 가장 힘든 건 바로 이셀렌입니다. 그녀는…….”

오르카를 낳았으니까.

그래서는 안 됐다. 아니, 그것만으로 끝나서는 안 됐다.

다크엘프를 위해서라면…….

여성은 생각을 접었다.

그 사람이 가 버리고, 넋이 나가서 물도 입에 대지 않던 이셀렌이 털어놓은 비밀, 입에 담을 게 아니다.

시녀장이 말했다.

“다시 연락해 보겠습니다.”

“예, 제가 보자고 한다고 전하세요. 따지려는 게 아니고, 그저 차나 한 잔 하자고 말입니다.”

여성은 탄식했다.

“이셀렌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해요. 그때의 문제는 자기 책임이 가장 크다고 생각하지요. 우리 모두가 잘못했는데.”

“예?”

“우리들만이 아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들과 그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요.”

여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이 우리를 용서하지 않았을지언정, 그렇게 가 버리다니. 그냥 있어 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을 텐데…….”

“…….”

“……아니, 다시 볼 일이 없는 사람을 원망해도 소용이 없겠죠. 이만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여러분들에게 화내서.”

“전하, 소신들이야말로 송구할 따름입니다.”

“…….”

여성은 이마를 짚고는 한참 눈을 감았다가 말했다.

“이셀렌이 테러 수사본부에 합류했다고 했고, 그 수사본부장은 리젠 리브라타죠? 그리고 미리엘과 리세라는 리브라타 가문과 함께하고 있고요.”

“예.”

“그러면 이셀렌과 리젠 리브라타를 어떻게든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제가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군요. 최대한 빨리 일정을 잡아 주세요.”

“예, 그러면 최대한 빨리 해 보겠습니다.”

여성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만 나가겠습니다. 술이나 준비해 주세요.”

“전하. 또 약주가 과하십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못 잡니다. 아시잖습니까.”

5황후, 천리정후(天理正后)는 서글프게 웃었다.

“그 사람이 그리워서 못 자는걸.”

* * *

수사본부.

본부장실.

나, 리젠 리브라타가 최근 업무를 보는 곳이다.

물론 일이야 아래 애들이 열심히 수사하고 있고…….

“……37.”

나는 단련을 하고 있었다.

방 한복판에서 물구나무서서 세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 중이다.

설사 마력을 써도 무너지겠지만 나에게는 염동력이 있다.

무너지려는 몸의 균형을 끝없이 염동력으로 유지하고, 마력을 손가락에만 계속 집중한다.

정신력과 마력을 전부 끝까지 쓰는 수련법이었다.

“후우우. 그리고…….”

오십 개를 채운 나는 자리에 앉아서 숨을 골랐다.

“이제 5계위 마력의 경지는 대충 30% 정도인가. 갈수록 놀랍네.”

고개를 저은 나는 다음 훈련에 나섰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상태에서 양손으로 검을 잡고 휘두른다.

5m 너머의 벽을 딱 쳤다.

“으음, 그럭저럭 되나?”

텔레포트로 양 손목만 5m 이동시켜서 쳐 본 건데…… 타점이 빗나갔다.

아, 아직 실전에서 못 쓰겠네.

급하면 쓰겠지만 내 뜻대로 될 거라는 자신이 없다.

“이셀렌은 별로 안 강하긴 할 텐데…….”

원래 다크엘프가 무력은 약한 편이다.

또 나는 이셀렌의 전투를 잘 아니 여차하면 제압할 자신이야 있지만.

“랑에이하고는 다르지…….”

랑에이야 직감이 워낙 뛰어나서 은연중에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이셀렌은 정보를 다루는 자, 의심하는 게 기본이다.

내가 시릭이라는 걸 믿게 만들려면 더 생각해야 한다.

머릿속으로 가늠한 나는 땀을 식히면서 바닥에 앉아서 서류를 살폈다.

중앙경찰이 밤을 새워 가면서 정리한 서류였다.

“케드릭 파티의 참가 횟수가 가장 많은 사람…….”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디에르크의 정체, 대충 감은 잡았다.

이제 사지타리 저택에 가서 마무리하면 되겠는데.

“공권력을 앞세워서 들어가는 건 무리고. 그러면 말을 꺼낼 타이밍인데…….”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건 미레이였다.

“트, 특관님. 얼른 와 보셔야겠어요!”

“뭔데 그래?”

“싸워요!”

아주 간단한 말.

나는 설명 듣기를 포기하고 미레이를 따라 내려갔다.

2층.

수사원들이 모여서 업무를 보는 곳인데 험악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제국군인 다르갈 사지타리와 중앙경찰 루온이었다.

내가 들어온 걸 안 칼비나가 다가와서는 귀띔했다.

“중앙경찰이 사지타리 공작 가문이 의심스럽다는 투로 이야기하는 바람에 서로 언성이 높아졌어.”

“그래? 그러면…….”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내 등 뒤에서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

우렌 사지타리가 눈을 부릅뜨고는 말했다.

“황도의 안전을 위해서 일분일초를 정진해야 하는 마당에 왜 서로를 노려보고 있나! 다르갈! 너는 무슨 일인데 그러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냐! 그럼 앉아라!”

우렌이 딱 자르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럼 안 되지.”

“음? 안 됩니까?”

우렌이 의아하게 나를 보았다.

나 대신에 나섰다기보다는 그냥 현장을 보고 반사적으로 나온 소리 같았다.

나는 수사대원들을 쭉 둘러보고는 말했다.

“다들 하고 싶은 말 있잖아? 허심탄회하게 해 보자. 제국군 폭탄 유출에 사지타리 공작 가문이 관여되었다는 의문 말이야.”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겁니까?”

막 앉으려던 다르갈 사지타리가 발끈했다.

하지만 우렌이 크게 부르짖었다.

“다르갈! 너는 조용히 하고 있어! 본부장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디서 끼어드느냐! 네가 그러고도 제국군이라고 할 수 있느냐!”

“……고마운데, 옆에서 소리 좀 그만 지르면 안 될까?”

진짜로 귀가 아프다.

내가 귀를 누르자 우렌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실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경청하겠습니다!”

“……그래. 아무튼 사지타리 가문에 의혹이 있다는 건 사실이다. 사실 제국군이 건네준 자료도 분석하면 그렇게 되잖아?”

“…….”

다르갈은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자기 집안이 테러범과 결탁했단 의심을 받으면 누구라도 펄쩍 뛰겠지.

하지만 디에르크가 사지타리 가문에 있다.

그 외의 정보를 교차 검증 해 볼수록, 사지타리 가문이 수상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장을 받아서 수색할 수는 없지.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해지니까.”

“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라는 바입니다!”

“……옆에서 소리치지 좀 말라니까.”

나는 게걸음으로 우렌에게서 떨어졌다.

하여튼 사지타리가 수상하다는 걸 알아도 공권력은 섣불리 메스를 들이대지 못했다.

만약 했다가 아무것도 안 나오면 후폭풍이 감당 안 되니까.

그러니까 따로 방법을 마련했지.

지금이 말을 꺼낼 타이밍이다.

“서로 의심만 하면 일이 진행이 안 된다. 그러니 내가 이번 주말에 직접 사지타리 가문을 방문해서 둘러보고자 한다.”

“으음…….”

중앙경찰들은 좀 수긍하는 빛이었다.

일전에 카지노 건을 해결하면서, 중앙경찰들은 완전히 나를 신뢰하게 되었다.

한편 제국군들도 나쁘지 않다는 눈치였다.

그들도 사지타리 가문에 대한 의심을 계속 안고 가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니까.

발끈하던 다르갈도 지금 상황에서는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여기는 모양새다.

“나는 수사본부장으로서 감시하러 가는 게 아니라 그저 사지타리 가문의 초대를 받아서 가는 거지. 이러면 대외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고, 또 내 조사 결과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면 그걸로 족해.”

“아, 그럼 나도 같이 갈게. 그렇게 해 주시겠어요, 백검장님?”

칼비나가 눈치 좋게도 손을 들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찡긋, 윙크를 날린다.

동생이 위험할 수도 있으니까 같이 가 주겠다는 거다.

우렌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하하, 얼마든지 환영하지! 와서, 한두 달 푹 쉬다 가도 돼!”

“우렌 백검장, 너 파티 좋아하냐?”

“파티 말입니까? 결혼한 뒤로 간 적 없습니다!”

“그래, 결혼했냐? 네가 사지타리 가문의 장남이라면 반대가 심했을 텐데?”

12가문의 장자는 약혼과 결혼을 가능한 한 뒤로 미룬다.

혹시나 2대 황제로 선출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로데릭도 지금 미혼인데, 우렌이 기혼자라니.

우렌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도 제가 아내를 사랑하게 된 걸 어쩝니까!”

“그래, 알겠다. 주말에 보자.”

자, 사지타리 가문에 숨어 있다는 사도 디에르크를 찾아내고.

암살여왕과 결판을 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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