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72)
그러자고 나한테 온 거 아닙니까?
중앙경찰청장 비요른의 사망.
나는 랑에이를 통해 중앙경찰청을 통제했다.
일단 청장 대행을 내세우면서, 인사를 혁신했다.
부패한 놈들은 적발해서 쫓아내고 젊고 의욕 있는 이들을 진급시켰다.
갑작스러운 조직 개편에 안팎에서 이야기가 많았지만, 비요른의 사망 원인은 암암리에 내부에서 퍼졌다.
증거물을 멋대로 빼돌리려다가 화를 입은 거라고.
공개적인 불만이 나올 수가 없었다.
개혁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이제 남은 건 황도의 제국군, 중앙군이었다.
중앙군까지 접수하면 쿠데타의 위협은 확 줄어든다.
또 황도에서 군사 관련은 완전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이런 일련의 움직임에 황도의 각종 세력들이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북부에서 내려온 망나니 도련님이라고.
그리고 나는 낮잠 자는 중이었다.
웰링 저택의 테라스, 흔들의자에 앉아서 햇볕을 쬐면서 꾸벅꾸벅 조는 중이다.
남들이 신나게 일하는 평일 오후의 낮잠!
로데릭과 알리시아가 나를 대신해서 귀족 쪽의 업무를 처리하고, 그 외 애들도 쉴 새 없이 일한다.
하지만 나는 놀아!
야호~!
“또 주무시고 계시네…….”
들려오는 목소리.
사실 발소리를 들은 순간부터 반쯤은 깼다.
전장 생활이 긴 나는 금방 잠들고, 기척에 바로 깨어난다.
하지만 이 조신한 기척은 아멜리아, 굳이 일어날 필요가 없다.
“으음.”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멜리아가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양손을 앞에서 모은 아멜리아가 다소곳하게 말했다.
“리젠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기다리라고 해, 엄마.”
잠에 취한 나는 아멜리아를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멜리아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으니 햇볕에 따뜻하게 말린 이불에 뺨을 문지르는 기분이다.
아늑하다.
아멜리아는 내 등을 토닥였다.
“이미 기다리고 계세요. 일어나셔야죠. 계속 주무시면 밤에 고생하세요.”
“누군데 그래?”
자는 나를 굳이 깨울 정도의 사람인가?
“칼비나 아가씨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아.”
제국군의 사자, 그리고 리젠의 누나.
일어나긴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아멜리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지치셨어요?”
“……응, 그러네.”
자식들은 내 인생의 빛이다. 그저 한껏 사랑해 주면 된다.
반대로 아내들은 인생의 그늘이었다.
마주하면 온갖 감정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좀 더 쉬세요.”
아멜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양팔로 안아 주었다.
나는 잠에 취해서 물었다.
“누가 보면 어쩌냐고 안 해?”
“저는 누가 보는 것보다 도련님이 중요해요.”
아멜리아는 웃으면서 말했다.
짧은 말이지만 심금을 울린다.
잠이 완전히 깨 버릴 정도로.
“그래, 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웰링 저택.
아멜리아의 안내를 받아서 응접실로 들어가니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온다.
흑발의 여자가 소파에 옆으로 누워서 잠들어 있었다.
어깨에는 제국군 장교의 하얀 재킷.
이 낯선 여자가 칼비나인가 본데…….
아멜리아가 난처해하자 나는 시선으로 물러나라고 전했다.
덥석.
한데 갑자기 잠들어 있던 여자가 잽싸게 아멜리아의 손을 낚아채더니만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진공청소기처럼 끌어당기는 솜씨가 날래다.
“꺄악!”
깜짝 놀란 아멜리아가 부지불식간에 팔꿈치를 휘둘렀다.
아멜리아가 그냥 메이드로 보이지만 본바탕은 수인, 날래고 강하다.
하지만 여자는 팔꿈치를 손바닥으로 막고 뒤로 몸을 기울여서 완전히 흘려 버렸다.
덕분에 아멜리아는 자기 공격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아멜리아아아아아.”
소파에 앉은 여자는 아멜리아를 뒤에서 끌어안고는 머리를 비볐다.
아멜리아가 발끈 화를 냈다.
“아가씨! 사람 놀라게 그러지 말라고 하셨죠! 왜 자꾸 이렇게 절 놀리세요?”
“그치만! 이래야만! 아멜리아가 나한테 관심을 가지잖아? 오늘 가터벨트는 무슨 색이야?”
“무……. 하, 하지 마세요!”
여자가 진짜로 스커트를 들추자 아멜리아는 기겁하고는 허벅지를 꼭 붙였다.
그러자 여자는 쓱, 쓱 아멜리아의 허벅지를 문질렀다.
“아멜리아 허벅지는 너~무 보들보들해. 어떻게 사람이 20년 넘게 이렇게 탱탱할 수가 있지?”
“칼비나 아가씨! 도련님도 보시잖아요!”
“흥, 부러워하라고 해! 같은 여자니까 용서된다고!”
여자, 칼비나가 나를 향해서 혀를 내밀어 보였다.
나는 어이없어서 말했다.
“아니, 동성 간에도 성희롱은 성립해. 거기다 지금 아멜리아가 메이드라는 점을 악용하는 거고.”
“후후후,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몸은 솔직하지 못한 동생이구나. 부럽구나? 부럽지? 여자라는 점을 악용해서 아멜리아와 마구 스킨십을 하는 내가 부럽지!”
“방금 자기 입으로 악용이라고 하셨네요.”
아멜리아가 칼비나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쳤다.
“꺄하앙.”
“아가씨, 놔주세요.”
칼비나가 순순히 풀어 주자 아멜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무새를 가다듬은 아멜리아는 엄하게 일렀다.
“군에 복무하시는 분이 아무런 용건도 없이 오실 리가 없잖아요. 또 리젠 도련님은 지금 나라를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계시는 상황, 용건이 있다면 제대로 말씀하세요.”
“음, 그래야 하나?”
칼비나는 일어나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네, 리젠. 몇 년 안 봤다고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는데?”
“나도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악수를 맞받는데…… 갑자기 칼비나가 짓궂게 웃더니 손에 힘을 꽉 주었다.
나 역시도 손에 힘을 주자 칼비나는 태연하게 내 발끝을 밟으려고 했다.
그러자 나는 손을 뒤로 휙 빼며 칼비나를 내 쪽으로 확 끌어당기면서 공격을 무효화했다.
바짝 다가온 칼비나, 나는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가 놓아주었다.
처음부터 포옹하려고 했단 것처럼.
“오호라?”
칼비나는 빙긋 웃더니만 대뜸 허리춤의 칼을 뽑지도 않고 휘둘렀다.
예리한 공격.
나는 내 무릎을 밀어서 칼비나의 무릎을 치는 걸로 받아쳤다.
뜻밖의 충격에 칼비나의 손끝이 흔들렸고 나는 쉽게 피하면서 가볍게 낚아챘다.
“흐으음…….”
칼비나는 뒤로 쓰러질 것처럼 몸을 기울이고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서로 탱고라도 추는 것처럼.
붉은 눈으로 나를 빤히 보던 칼비나는 빙긋 웃었다.
“합격! 엄청난데?”
“누님이야말로요.”
가볍게 손을 섞어 본 것만으로도 알겠다.
칼비나의 검술, 몸놀림은 범상치가 않았다.
“하하하.”
칼비나는 시원하게 웃더니 자리에 앉았다.
나도 맞은편에 앉았고.
우리 두 사람이 한바탕하는 동안 꽃병을 들고 물러나 있던 아멜리아가 차를 가져왔다.
나는 일단 주변 이야기부터 꺼냈다.
“로데릭 형님은 만나 보셨어요?”
“아니, 오빠는 마침 없더라. 잘됐지, 뭐. 만나면 너는 옷차림이 그게 뭐냐, 귀는 왜 뚫었냐, 셔츠 구기고 다니지 마라, 잔소리나 할 텐데.”
입술을 삐죽거리고 있지만 정말 사이가 나쁜 건 아니리라.
칼비나는 갑자기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런데 아멜리아는 왜 이렇게 귀여울까. 제국의 미스터리야.”
“그렇죠. 저도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멜리아 같은 여자가 되고 싶었다고. 로데릭 오빠는 넌 절대 무리라는 소리나 했지만 아멜리아처럼 메이드복도 입고, 정숙하고 단아하게 걸으면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사슴이랑 토끼도 거뜬하게 사냥해 오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고.”
“사냥만 성공하셨네요.”
“……두 분 다, 지금 저 놀리시는 거죠?”
아멜리아가 화냈다.
동시에 돌아본 우리 둘은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아멜리아를 안 놀리고 어떻게 버텨! 미안해, 나도 이런 나를 멈출 수 없어, 엄마!”
“아멜리아를 엄마라고 부르지 마요.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좀 늦게 태어났다고 내 엄마를 뺏어 가려고 하네? 장녀로서 용서할 수 없다!”
“원래 엄마는 막냇동생의 몫이라고 헌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엄마가 아닙니닷!”
아멜리아가 화내자 우리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아, 즐겁네?
칼비나는 장난스러우면서도 행동거지가 시원시원했다.
또 본 순간, 가슴속에서 뭔지 모를 친밀감이 드는 게…… 상당히 호감형이었다.
농담도 잘 받아 주고.
칼비나는 싱긋 웃었다.
“싸움도 잘하고 성격도 많이 밝아졌네. 매우 마음에 드니까 그냥 물어볼게. 황제 될래?”
“아뇨.”
갑자기 나온 말에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음, 아니, 제국을 수습할 생각이야 있다만.
“작금의 환란을 수습하고 제 사적인 문제를 해결할 생각입니다. 그 결과가 황제의 자리일지언정 황제가 되겠다고 이러는 건 아닙니다.”
“정치적인 수사야?”
“지금의 솔직한 진심인데요.”
칼비나는 붉은 눈으로 나를 보다가 어깨를 떨며 웃었다.
“리젠 리브라타는 미치광이 야심가라는 소문이 돌아서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왜 그런 모함을 한답니까?”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마다 네가 있잖아? 이번에는 랑에이 황후 전하와 손을 잡고 중앙경찰청장을 숙청해 버렸다면서?”
“……그에 대해서는 이미 정보를 주지 않았나요?”
칼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미 듣고 왔어. 하지만 너는 지금까지 제국의 온갖 문제와 충돌해 왔어. 크로셀 후작으로 귀족원을 꼽주고, 제국 철도 테러로 철도헌병대를 흔들고, 그리고 루크 케드릭을 꺾어서 12가문의 하나를 박살 냈고, 이젠 중앙경찰까지 손봐 줬어. 이게 2개월도 안 된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 게 믿어져?”
“남동생이 타락했을까 봐 걱정했어요?”
“본 지 오래됐으니까 불안하긴 했지. 로데릭 오빠도 한때 크게 변해 버렸으니까.”
칼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으니까 다행이네. 무엇보다 우리들에게 아멜리아가 있잖아.”
“그렇죠. 아멜리아가 있죠.”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멜리아는 우리 남매에게 말없이 눈을 흘겼다.
칼비나는 무시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 아멜리아가 저렇게 귀엽게 우리를 꾸중하는데 사람이 어떻게 삐뚤어지겠어. 말하다 보니까 나, 아멜리아랑 결혼하고 싶어!”
“나도 참는 중이니까 자제 좀 하세요. 그래서 제국군 내부는 어떻게 돌아갑니까?”
“아주 안 좋아.”
칼비나는 단언했다.
“뭐, 돌아가는 정황은 대충 알지? 폭탄이 유출된 걸 파악했는데…… 지금까지 확인한 것만 해도 양이 어마어마해.”
“어느 정도인데요?”
“폭렬탄만 오십 개 이상. 작렬탄은 현황 파악 중이지만 폭렬탄 이상.”
“…….”
폭렬탄 하나에 철도 차량 하나가 박살 났다.
나는 턱을 만지면서 셈해 보았다.
“그 정도나 빠져나가는데 몰랐다고요?”
“나도 그게 황당하다니까. 당연히 난리가 났지. 거기다 더 당황스러운 건, 지금 그걸 추궁할 수 없게 됐어.”
“왭니까?”
“사지타리 공작 가문이 얽혀 있어. 당시 중앙군의 비품을 총 관리하던 백검장(百劍將)이 사지타리 공작 가문 사람이니까.”
사지타리, 12가문의 하나다.
칼비나가 설명했다.
“너도 알겠지만 사지타리는 12가문 중에서도 5위는 돼. 귀족원을 비롯해서 사회적 영향력이 어마어마해. 무엇보다 친인척들이 제국군 안에 많이 포진해 있지.”
“그래서 사지타리의 실책이라는 걸 확신하면서도 함부로 들추지 못한다는 겁니까?”
“뭐 케드릭하고는 덩치가 다르니까. 거기다가 원탁회의가 코앞이잖아?”
칼비나가 턱을 긁었다.
“조사해도 원탁회의가 끝난 다음에 하자, 지금 들어가면 제국군이 괜한 정치 행사로 오해를 살 수 있다. 뭐 그런 의견이 주류야.”
“누님의 생각은요?”
“개 짖는 소리지. 폭렬탄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몰라. 제국군의 체면 따위를 생각할 때가 절대 아니라고. 결국 군의 높은 분들은 자기들 체면을 중시하고 있다니까.”
칼비나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지만 나 같은 의견은 어디까지나 소수야. 대부분은 덮고 관망하자는 쪽. 설마 사지타리가 일부러 그랬겠냐고 두둔하는 이들도 많아.”
“그러면 어디부터 파고들까요?”
“……사지타리랑 해보겠다고?”
“그러자고 나한테 온 거 아닙니까?”
내가 웃자 칼비나도 만족스럽게 웃었다.
시원시원하다.
“일단 합동수사본부부터 만들고 장악해야지. 방금 말한 사지타리의 백검장도 참가할 거야.”
“도둑을 잡는 자리에 용의자가 끼어든다고요?”
“……뭐 수사에 참가해서 결백을 증명하겠다고 하더라. 또 원탁회의가 코앞인데 자기 가문이 누명을 쓰고 있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상식적으로 통할 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사지타리는 위세가 좋은 가문이었다.
내가 황제이던 시절에도, 전쟁 중의 공이 있어서 우대해 주었고.
배경이 든든한 인간이 밀어붙이면 어지간한 무리수도 그냥 먹힌다.
“그럼 참가하는 건 막을 수가 없겠군요. 그냥 받아들이죠.”
“그래도 괜찮겠어?”
“예.”
지금까지 정황을 살펴보면 제국군 내부에도 테러범 세력이 있다.
루크 케드릭에게 폭탄을 넘겨준 내부자들.
“그게 사지타리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수사본부에 참가시켜서 옆에서 감시하면 되겠죠.”
“옆의 동료를 의심하라 이거네.”
“이미 그런 상황이잖습니까? 12가문 안에서 테러범이 나왔으니 말 다 했죠.”
칼비나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래, 그러면 나는 바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전달할게. 내일 당장이라도 각 단체의 수뇌부들이 모이게 하면 되겠지?”
“아가씨, 바로 돌아가시게요?”
“아멜리아가 만든 저녁을 먹고 싶은데, 미안해.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알고 있습니다.”
“엄마, 나도 사랑하는 거 알죠?”
내가 농으로 끼어들자 아멜리아는 짐짓 뾰로통한 얼굴이 되었다.
그래도 결국 웃어 주었다.
“그럼요.”
자, 그럼 헌병대와 경찰, 군이 모이는 합동수사본부를 만들고.
내가 꽉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