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71)
너희들이 막 대해도 된다는 건 아니거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나니 허벅지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희고도 검은 머리카락.
랑에이는 내 허벅지에 엎드려서는 자고 있었다.
정갈한 호흡.
정말 푹 잠든 모양이다.
“…….”
외모는 정말 강력한 설득력이다.
전쟁터에서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포효하면서 아군을 이끌던 늠름한 여신이 내 허벅지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당연히 귀엽고 사랑스럽지.
거기다가 날 사랑하고, 또 내 애까지 낳았다.
보고 있으면 무뎌진다.
미워하려고 해도 못 미워하게.
“이래서 내가…….”
“……으응.”
쫑긋.
랑에이의 호랑이 귀가 움찔거리더니 몸 여기저기가 꿈틀거린다.
선잠에서 막 깨어나듯이.
내 무릎에서 살짝 턱을 뗀 그녀는 그대로 양팔을 앞으로 쭉 뻗어서는 기지개를 켰다.
“이제 세수하셔야지?”
“으응.”
랑에이는 눈 감고 잠에 취한 그대로 머리만 움직였다.
내 손바닥을 용케도 찾아내서는 자기 턱을 얹는다.
비비적.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내 손바닥에 턱을 문지르는 아내는…… 110년이 지났어도 사랑스러웠다.
귀엽게도 쫑긋거리는 호랑이 귀, 살살 흔들리는 호랑이 꼬리.
나는 결국 손가락을 움직여서 랑에이의 턱을 문질러 주었다.
“으으응…….”
랑에이가 기뻐하는 소리를 내며 양팔을 앞으로 쭉 뻗으면서 기지개를 켰다.
한껏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가, 몸을 이완시키면서 내 팔을 꼭 잡는다.
이게 나와 랑에이가 함께 잔 다음 날, 아침에 깨우는 의식이다.
정신을 차린 랑에이의 금색 동공이 나를 본다.
“……어. 으.”
놀라면서도 불안해하는 얼굴.
새삼스럽게 겁을 내자 나는 말없이 턱을 다시금 문질러 주었다.
“…….”
그제야 랑에이는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그래도 눈가에 감도는 불안.
내 눈치를 심하게 보고 있다.
“랑에이, 아침이다. 일어나야지.”
“……응.”
내가 손을 떼자 그녀는 몹시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나는 이마를 누르면서 말했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지만 혹시 남들이 보면 오해할지도 모르겠군.”
“……오해?”
“…….”
아, 거야, 이거 상황 모르고 보면 황후가 딴 놈이랑 잤나 싶잖아.
하지만 랑에이는 이미 리젠=시릭이라고 완전히 믿었고, 남들이 어떻게 보든 신경을 안 쓰지.
내가 알아서 처리해야지.
“랑에이, 다시 말하지만 나를 시릭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정 리젠이라는 이름이 입에 안 붙으면 특관이라고 불러.”
“으응.”
“내가 누구라고?”
“시…… 특관.”
“…….”
랑에이에 비하면 아르센은 연기 대상감이로군.
“다른 황후들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한다. 안 만난다.”
“……아니, 용공주에게는 연락하라니까. 편지로 해.”
“음, 알겠다.”
랑에이는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계속 쭈뼛거리는 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
나는 짐짓 웃어 보였다.
“뭔데?”
“……둘만 있을 때는 시릭이라고 불러도 돼?”
“둘만 있는 일이 별로 없을 거다만.”
앞으로도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
남들이 보면 오해할 수 있다.
내가 시릭이라는 건 보통 상상을 못 하지만, 불륜은 사람들이 상상하기 좋아하는 가십거리다.
거기다 리젠은 임자 있는 여자들만 건드린다고 고향에서 악명이 높지 않았나.
추우욱.
랑에이의 턱이 내려가고 귀, 꼬리, 어깨까지 수그러진다.
실망하고 낙담한 기색.
나는 적당히 말했다.
“그래도 그때는 편하게 해도 돼.”
“……응!”
랑에이는 몹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내 팔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했다.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이.
“……시릭, 다른 애들에게도 계속 비밀을 지켜야 해?”
“아니, 말했지만 제국을 수리하면서 하나하나 확인 과정을 거칠 거다. 그리고 다들 모이면 정리할 거고.”
제국의 내부를 정돈하면서 황실, 내 가정사도 마무리하자.
랑에이는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셀렌이 알면 엄청 기뻐할 거다.”
“나 죽이려고 들던데?”
붕, 부웅.
랑에이는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해하는 걸 거다. 그러니까…….”
“알았다. 선처하마.”
나는 간결하게 말했다.
정보를 쥔 암살여왕은 가능한 한 회유하고 싶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바짝!
랑에이의 꼬리가 일어나는가 싶더니만 순식간에 소파를 타 넘고는 뒤에 숨었다.
감 하나는 좋아서 알아서 몸을 숨기네.
“아르센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내 말에 아르센이 들어왔다.
호위도 없이 혼자 들어온 아르센은 좌우를 둘러보고는 말했다.
“폐하, 혼자십니…… 후악!”
나를 보며 호탕하게 말하던 아르센이 기겁했다.
“2, 2황후 전하!”
“…….”
갑자기 내 뒤에서 랑에이가 불쑥 일어난 것이다.
사색이 되어서는 입을 가로막는 아르센.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랑에이도 알아. 하지만 입조심 좀 해라.”
“헉, 허어억. 허어억…….”
아르센이 안도하는데 랑에이가 목을 울렸다.
으르렁거리는 위협.
왜 그러나 해서 보니 랑에이는 아르센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넌 이미 알고 있었나?”
“음? 아, 폐하가 돌아오셨다는 거 말입니까?”
아르센이 씩 웃었다.
자기 장난감 자랑하면서 약 오르지? 약 오르지 하는 어린애 같네.
“하하하하! 물론이죠! 제가 가장 먼저 알았습니다!”
“…….”
랑에이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아르센은 하나도 겁이 안 난다는 투로 호탕하게 말했다.
“하하하, 뭐 그렇게 노려보십니까? 황후 전하께서 제게 뭐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폐하가 저를 가장 믿고 먼저 찾아 주신 것에 대해서 뭐 억하심정이라도 있으십니까?”
“있다.”
“하하하, 그러십니까? 그러니 평소에 잘하셨어야죠! 폐하가 얼마나 못 믿…….”
“아르센, 아침부터 왜 왔냐?”
아르센이야 반장난, 약 올리는 거지만 좀 민감한 부분이 나올 수도 있다.
아르센은 바로 매무새를 고치고는 내 앞에 앉았다.
“실은 오늘 새벽에 제국군 쪽에서 이야기가 들어왔습니다. 저희가 전달한 비요른의 변고를 들었고 힘을 하나로 합치자고요. 대테러 합동수사본부를 만들고자 한답니다.”
“제국군의 조건은?”
“서로 만나서 이야기하잡니다. 그쪽에서 사전 조율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보내겠답니다.”
내 시선에 아르센이 턱을 문질렀다.
“우리들이 정보를 먼저 주니 제국군 내부 여론도 바뀐 것 같습니다. 전보다는 협조적으로 나올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나는 잠깐 생각했다.
테러범들이 군부 쿠데타를 유도할 거라면 제국군 내부에도 협력자를 심어 놨겠지?
문제는 그걸 색출할 방법이다.
“제국군의 대장군은 레릭이지. 지금 어디 있지?”
“그 친구야 지금 동부 시찰 중일 겁니다. 사태가 이렇게 벌어졌으니 귀환이야 하겠죠.”
“그래. 그러면 일단은…….”
제국군과 조율하고 수사본부를 꾸릴까?
아르센이 목소리를 낮췄다.
“한데 제국군 쪽에서 사전 조율을 위해서 보내는 사람이 좀 애매합니다.”
“누군데?”
“칼비나, 그러니까 폐하의 누님 되시는 분입니다.”
“뭐?”
뭔 소리야.
나는 천애 고아로 스승님을 만나서…….
“아, 칼비나 리브라타?”
시릭이 아니라 환생한 나, 리젠 리브라타의 누나 되는 사람이다.
아르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폐하의 의중을 헤아리고자, 혹은 혈통을 앞세워서 우선권을 가지려는 거 아닐까요?”
“흐음…….”
생각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봐야 알겠지만, 내 쪽에서도 나쁘지 않아. 말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나도 제국군 내부 사정을 좀 알고 싶으니까.”
“그럼 수락할까요?”
“그래, 내가 만나겠다고 전해.”
아르센은 기운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랑에이를 보고는 씩 웃었다.
“…….”
발끈.
랑에이가 이를 드러내며 위협하자 아르센은 팔짱을 끼고는 코웃음을 쳐 보였다.
“폐하, 밀회하시더라도 주변의 눈은 신경 쓰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누가 보기라도 하면 잘못하다가는…….”
“너, 지금 나 가르치려고 하냐?”
아르센이 움찔했다.
나는 정색하고는 말했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 일을 굳이 랑에이 앞에서 말하는 저의가 뭔데? 네가 정말로 그걸 걱정했다면 나하고만 있는 자리에서 하면 되는 이야기잖아? 너 지금 내 여자 쪽 주냐?”
“……아, 아닙니다.”
“장난치는 것까지는 뭐라고 안 하겠는데 내 선이 어디까지인지 재지 마라. 내가 아내들을 멀리했다고 해서 너희들이 막 대해도 된다는 건 아니거든?”
아르센은 부동자세로 식은땀을 흘렸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쉬어.”
“……죄송합니다, 폐하. 죄송합니다.”
“쉬고 들어. 내가 니 아내 함부로 대하면 좋겠냐?”
내가 좀 목소리를 풀고 말하자 아르센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근데 아는 놈이 굳이 그래?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해?”
“죄, 죄송합니다.”
“황후에 대한 감정이 이래저래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나를 존중한다면 내 아내와 자식도 존중해라. 선 넘지 마라. 알겠냐?”
“……명심하겠습니다!”
아르센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도 아르센은 거듭 말했다.
“죄송, 죄송합니다, 폐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황후 전하.”
아르센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면서 랑에이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내 심기가 상했다는 걸 알고는 좌불안석이었다.
다소 놀랐던 랑에이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다. 풀었다.”
“감사합니다!”
아르센은 쩔쩔매면서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으니까 이제 가 봐. 일정 확인되면 연락 주고.”
“……예.”
“아르센.”
“예?”
“다음에 시간 내라. 너희 집에 가서 술이나 마시자.”
아르센이 겨우 표정을 풀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각별히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
아르센이 나갔다.
확 조였다가 풀어 준 나는 턱을 괴고는 한숨을 쉬었다.
“뭐…….”
사실 아르센만 무작정 탓할 게 아니지.
결국 난 황후들을 10년간 멀리했다.
그 이유를 궁금해하던 신하들은 멋대로 이유들을 추리했고…… 아무튼 황후들이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단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황제인 내가 노골적으로 냉대하는 황후들을 쉽게 존중할까?
나를 숭배하던 만큼, 내가 냉대하는 이들을 좋게 보진 않으리라.
내가 있을 적에야 큰일은 없었지만…… 내가 덜컥 죽은 게 황후들의 음모라는 의심까지 퍼지면서 상황이 더 나빠졌다.
황실, 황후들의 권위 추락으로 이어진 거다.
실제로 내가 환생하고서, 내 아내와 자식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았다.
황실의 역사도 짧은 것, 여러 종족이 섞인 국가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내 말년의 태도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러니 비요른 같은 놈이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지.
“이것도 바로잡아야지.”
혼잣말을 하던 나는 어깨를 간질이는 머리카락에 위를 올려다보았다.
랑에이가 소파 등받이를 짚고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자처럼 하얀 뺨을 붉게 물들이고서.
“왜 그래?”
“……우리 밀회했어?”
“…….”
생물학적으로는 불륜 초기 아닐까?
하지만 이게 분위기 왕창 깨는 말인 걸 알아서 입을 다물었다.
랑에이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를 쭉 바라보았다.
“……일단 중앙경찰 1차 정리부터 하자. 그리고 나는 오후에 웰링 저택으로 돌아간다.”
“알았다.”
“뭘 알아. 넌 여기에 계속 있어야 하는데.”
“…….”
심하게 충격 먹은 얼굴.
나는 딱 잘라 일렀다.
“중앙경찰청장이 불귀의 객이 되었으면 네가 여기 떡하니 자리 지키면서 민심을 수습해야지. 원래 경찰들은 수인 비율이 높고, 또 네 무력은 익히 알려졌으니까 범죄율 감소 효과도 있고.”
“……나는 안 데리고 가?”
“여기서 무게나 잡고 있어. 좀.”
“…….”
랑에이가 몹시 슬퍼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진짜 사람 마음 켕기게 하네.
“아, 조만간 데리러 올 테니까 그냥 일이나 잘하고 있어.”
“……응!”
랑에이는 겨우 표정을 풀고는 환하게도 웃었다.
생긴 건 호랑인데 나한테는 덩치 큰 개냥이야.
* * *
어두운 방.
벽에 기대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가 말했다.
다크엘프, 알베르트였다.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그러하니 리브라타를 적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여자, 암살여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크엘프 수장의 결정은 절대적, 그걸 정면에서 반박하다니.
보통 즉결처형이다.
암살여왕은 다른 수하들의 반응을 살폈다.
말을 안 해도 수긍하는 눈치다.
알베르트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암살여왕에게 큰 그림이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 리젠 리브라타를 죽여 버리는 건 실책 아니냐고.
“물러가라.”
“…….”
알베르트는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직언을 하고도 살아 돌아가는 건, 암살여왕이 뜻을 고쳤다는 건가?
방 안의 다크엘프들이 눈치를 보자 암살여왕은 딱 잘랐다.
“다들 물러가라.”
“예.”
모두 빠져나가고 혼자 남은 방.
암살여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알베르트의 말이 맞다.
사실 이성적인 판단이라면…… 리젠 리브라타를 앞세워서 지금의 혼란을 평정하려고 해야 한다.
번번이 해내고 있지 않은가?
다크엘프만의 존속을 꾀하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
하다못해 병행해야 한다.
“……용서 못 해.”
하지만 가슴을 태우는 불길.
그 빗속의 분노가 식지 않는다.
그딴 놈에게 흔들렸다는 사실이 너무나 수치스럽고, 황제에 대한 부정을 저지른 것 같으니까.
여자로서 동요해 버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으니…… 상대를 죽여 버려야 한다.
“하지만…….”
알베르트가 다들 보는 앞에서 항명했다.
다른 다크엘프들도 은연중에 동조하고.
이 마당에 무턱대고 리젠 리브라타의 암살을 강행하면 그녀에 대한 신망 자체가 흔들린다.
그래서는 안 된다.
리젠 리브라타를 죽이면서도, 다크엘프라는 종족은 존속시켜야 한다.
그게 여왕으로서 책무니까.
애당초 랑에이가 리브라타에게 붙은 순간,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암살은 무리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하나.
그녀가 직접 리젠 리브라타에게 접근해서 처리한다.
다른 누구의 도움도 얻지 않고.
오로지 그녀 혼자만의 힘으로.
암살여왕은 자기 양어깨를 끌어안고는 속삭였다.
“……지켜봐 줘, 시릭.”
그놈을 죽여서.
당신만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더럽혀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