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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70화 (70/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70)

그래도 이 정도는

인류는 칠죄신과의 싸움에서 총력전을 펼쳐야 했다.

성별? 전사자의 40%가 여성이었다. 나이? 제국 국립묘지의 15%가 각 종족의 미성년자들이다.

마력을 쓸 수 있는 이라면 누구건 싸우다가 죽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병력이 갈려 나간다.

명예로운 전사들의 목숨들이 섬뜩한 속도로 사라진다.

그러자 이제는 마력 없는 자들이 지원해 왔다.

5계위의 기사, 6계위의 전사들도 이슬처럼 사라지는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의기는 알겠지만 아무리 병력이 부족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력이 없다면 그저 방패막이가 될 테니까.

그때 드래곤, 용족들이 지원을 시작했다.

마력약.

마력이 없는 자를 각성하게 만드는 약.

용족만이 만들 수 있는 이 비약이 입대 지원자들에게 전폭적으로 지원되었다.

마력 있던 자들이 숱하게 죽어 나간 공백, 마력 없는 자들이 마력약을 마시고는 채웠다.

힘으로 명예롭게 산 자가 먼저 산화하고. 그 뒤를 명예로운 자가 힘을 쥐어짜 내면서 뒤따른다.

신에게 사육당하는 짐승으로 살 수 없다는 인류 전체의 오기.

처절한 혈투 끝에 제국은…… 신에게 승리했다.

나는 랑에이에게 설명했다.

“만약 마력약이 없었다면 우리가 졌다. 칠죄신의 종복들도 그걸 알고는 미리 끊어 두려는 거다.”

“아, 아니. 지금…….”

“내가 누군지 증명은 나중에 한다. 일단 설명을 들어. 우린 이제 마력약을 믿을 수는 없지만 무작정 두려워할 것도 아니다. 오늘 디에르크가 보여 준 건 임기응변일 가능성이 크니까.”

나는 사무적으로 말했다.

“왜냐고? 이런 걸 터트릴 거라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데서 터트리는 게 낫다. 본래 그러라고 루크에게 준 거였는데, 일이 어긋나서 경찰청으로 들어갔지. 그러니 우리에게 마력약의 오염 가능성을 두려워하라고 낚시한 거다.”

“…….”

“우리가 무시해도 상관없고. 지금처럼 부랴부랴 전수 점검에 나서면 개꿀이겠지. 즉, 디에르크도 오늘 보여 준 퍼포먼스를 남발할 순 없다.”

나는 짚고는 말했다.

“여기까지 용공주에게 전달해. 알아들을 거다.”

“…….”

“단, 내가 시릭이라는 정체를 밝혀서는 안 된다. 껄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냥 말하마. 나는 너희들이 협력했을 가능성도 의심하고 있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후가 테러범과 결탁해?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사람 속은 정말 모르는 법이다.

“……그럴 리가 없다.”

랑에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내가 시릭이라는 걸 믿지 못하는 건지.

내가 황후들을 의심하는 걸 부정하는 건지.

하지만 나는 가차 없이 말했다.

“일이 들통나기 전에는 다들 아니라고 해. 그때 너희들도 그랬잖아?”

“…….”

“네가 그 짓거리에 동참했을 줄은 몰랐다. 우리 둘을 가장 길게 봤던 너까지 그랬을 줄은 몰랐어.”

랑에이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가련할 정도로.

나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아내들과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내들을 상처 입히는 게 나한테도 즐거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애들 엄마고, 한때는 내가 사랑한 여자들이었잖은가.

“…….”

아니, 아직도 사랑할지도 모른다.

랑에이가 위험하다고 판단한 순간, 오르카나 리세라를 봤을 때처럼 끓어올랐으니까.

나는 유리창을 짚고는 말했다.

“일이 급하다고는 하나 내가 너무 일방적이었다. 미안하다, 랑에이. 자, 이제 검증해라.”

“뭐, 뭐를.”

랑에이가 목에 걸린 소리를 냈다.

“내가 시릭 카라카스라는 걸 못 믿을 거 아냐. 칠죄신의 종복 놈이 어디서 주워듣고 요망한 술수를 쓰는 걸지도 모르지. 애당초 이렇게 얼굴 예쁘장한 놈이 시릭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웃기네.”

“……염동력을 썼다.”

“능력이 증명이 되진 못해. 어느 날 어떤 얼간이가 자기가 황제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면 미친놈이니 태워 죽여야지.”

유리창에 비친 랑에이는 나를 멍하니 보았다.

목까지 차오른 말과 감정을 억누르는 얼굴.

외면하려고 시선을 돌려도, 눈을 감아 버려도 랑에이는 계속 그대로였다.

저 주변머리 없는 호랑이는 언제까지고 기다릴 것이다.

내가 돌아봐 주기를.

“……시릭.”

결국 버티지 못한 나는 천천히 돌아섰다.

정면으로.

랑에이는 잠긴 목소리를 냈다.

“……아직 우릴 사랑해?”

“그게 내가 시릭이냐는 확인이냐?”

“대답해 줘.”

랑에이는 빌다시피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로 대답할 순 없었다.

“너희들과는 시간을 갖자고 약속했지.”

“……응.”

“그게 10년, 거기서 100년이 지났군.”

“……으응.”

랑에이는 조마조마해하며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랑에이는 내 사랑이자 아내이기 이전에 전우였다.

내 명령이라면 3만 대군에게도 달려들어서 피를 뒤집어쓰던 여자였다.

그 전우가 이토록 가련하고 간절하게 내게 빌고 있었다.

잘못했다고.

그걸 없던 일로 해 줬으면 한다고.

“10년을 생각하고 100년이 지났는데도 모르겠다.”

“…….”

랑에이가 굳어 버렸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호흡도 멈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말했다.

“들어, 너희들이 소중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너희들은 내 아이의 어머니이고, 또 내 전우기도 했다. 그리고 난 전우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칠 수 있다.”

“그, 그런 말이 듣고 싶은 게 아닌…….”

랑에이가 몸을 떨었다.

나는 계속 말했다.

“하지만 환생하고 이런저런 일을 겪고, 또 이번 일을 겪으면서 하나 확실해졌다. 나와 너희들은 결국 정리가 안 됐다. 그냥 그 와중에 내가 덜컥 죽었을 뿐이지.”

“…….”

서로 떨어져서 시간을 갖자고 하고.

얼굴도 안 보고 10년.

내가 죽어 버리고 다시 100년.

오래 끌었다.

“다 정리해야 해. 그러니까 지금 이 어지러운 제국의 일들을 정리하면서 너희들하고도 어떤 식으로건 결론을 내겠다.”

“…….”

“지금은 딱 이 정도다.”

랑에이는 조마조마한 얼굴이었다.

불안하게 내 안색을 살피자 나는 짐짓 웃어 보였다.

“할 말 끝났어. 어깨 힘 빼.”

“……화내야 하지 않나?”

“새삼 화내고 얼굴 붉힌다고 정리되는 일도 아니야. 사적인 일은 덮어 두고 뒤로 미룬다. 나랏일부터 처리하자.”

나는 정리하고는 걸어서 소파에 앉았다.

랑에이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자 나는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라고.

뚜벅, 뚜벅.

랑에이는 앉았다.

내 옆에.

“…….”

내가 모른 척 옆으로 엉덩이를 밀자 자기도 그만큼 따라온다.

주인님이 화났는지 눈치 보던 호랑이가 이젠 좀 더 옆에 붙어도 괜찮은 건지, 눈치를 보고 있다.

어색한 분위기다.

화제를 돌리자.

“……니들, 나라 신나게 말아먹었더라?”

“나, 나는 모르는 일이다.”

“좀 아세요. 아니, 아는 척이라도 하세요. 애당초 비요른을 왜 청장으로 만들었어? 임명권은 너한테 있다며? 결국 네가 앉혔네? 너, 인사 평가 제대로 했냐?”

“…….”

랑에이는 시선을 회피했다.

보나 마나 아래에서 올라오는 서류, 쓱 읽어 보고 결재한 거겠지.

부하들이 다들 좋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면서.

“아니, 딴 애들이 안 말려? 너 엉뚱한 짓 하면 옆에서 말리라고 했는데?”

“……안 말렸다.”

“그럼 연대책임이네. ……뭘 그리 기뻐해?”

랑에이는 고개는 숙였는데 호랑이 꼬리는 좌우로 정신없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기쁘고 설렐 때의 반응이다.

……나한테 야단맞으니까 좋아하네?

랑에이는 더듬거렸다.

“시, 시릭이 맞다 싶어서…….”

“이걸로 확인하지 마. 좀 더 의심해. 아오, 그리고 사람 좀 데리고 다녀. 너 하는 거 보면 내가 다 속이 탄다.”

“다들 날 못 따라오는데…….”

“그냥 달리지를 마. 너 달리면 누가 따라가?”

“……?”

뛸 수 있는데 왜 걸어야 하냐는 얼굴이네.

옆 사람 속 터지게 하는 재주는 기막히셔.

“전쟁터에서 내가 그렇게도…… 아. 됐다. 내가 계속 잔소리만 하는 것 같다. 관두자.”

“…….”

내가 입을 다물자 랑에이는 내 옷소매를 살짝 잡았다.

흔들리는 꼬리.

간절한 시선.

“……왜 그렇게 보는데?”

“좀 더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이 목소리로 과거 회상 모드 들어가지 마. 가녀려서 마음에 안 들어.”

“시릭.”

랑에이는 멍하니 부르면서 내 옷소매에 뺨을 비볐다.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본능적으로 나오는 몸짓.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서 난감하게 있자 이제는 양손으로 팔을 끌어안고는 위아래로 쓱쓱 문지른다.

이러면서도 살짝살짝 내 눈치를 보고 있다.

……못 떼어 내겠다.

아내들에 대한 감정은 나도 한마디로 결정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고, 정이 남았다는 걸 확인했다.

내 아내가 죽거나 다치는 걸 원하는 건 아니다.

“그저 도장을 찍을지 말지…….”

“뭘?”

이혼 도장 생각하는데, 갑자기 랑에이가 내 팔에 얼굴을 문지르던 걸 멈추고는 물었다.

어느새 내 어깨에 턱을 올리고 있다.

얼굴이 가깝다.

“뭘?”

“야, 좀 떨어…….”

내가 밀려는데, 랑에이가 내 손목을 잡아 눌렀다.

……손목이 안 움직이네?

“…….”

순간 동요했다.

아, 지금은 랑에이가 나보다 강하다.

힘겨루기에 들어가면 그 사실을 랑에이도 눈치챌 거다.

나는 그냥 무덤덤하게 말했다.

“떨어져.”

“…….”

“가깝다. 부담스러워.”

하지만 랑에이는 또렷하게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랑에이.”

더 고집부리면 나도 화낸다고.

과거는 일단 묻자고 했는데 이렇게 나올 거냐고.

하지만 랑에이는 도리질을 쳤다.

“……싫다.”

고개를 흔들 때마다 흑과 백의 머리카락이 현란하게도 나부낀다.

“싫다. 이제는 떨어지기 싫다. 계속, 계속 후회했는데. 얼마나 후회하고 빌고 싶었는데…….”

흐느끼는 소리.

지금 나를 향해서 우는 게 아니다.

지난 세월.

내가 죽은 다음의 100년의 세월을 떠올리면서 이러는 것이다.

“…….”

랑에이는 내가 시릭의 전인이라고 넘겨짚고는, 말만 걸어도 움찔하고 눈치를 보지 않았던가.

어지간히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이리라.

애당초 랑에이는 속을 숨기고 간계를 부릴 위인도 못 된다.

……그래서 내 실망과 충격도 컸지만 아무튼.

“그만, 알았다. 도망 안 간다니까.”

내가 달래도 랑에이는 펑펑 울면서 흐느꼈다.

어깨를 떨 때마다 소파에 눈물이 툭, 툭 떨어지면서 젖어 든다.

그토록 용맹하고 올곧던 호랑이가 이리도 괴로워하니 보기 괴롭다.

“자, 그만 울어라.”

나는 남는 손으로 랑에이의 턱을 받치고는 가볍게 간질였다.

고양이의 턱을 간질여 주는 것처럼.

과거에 자주 쳤던 장난이다.

몇 번 그렇게 반복하자 랑에이는 눈물에 젖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시릭.”

“남들 앞에서 리젠이라고 불러. 정 입에 안 붙으면 특관이라고 부르고. 다시 말하지만 다른 황후들에게 내 정체를 밝히지 마라.”

랑에이는 그나마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황후들은?

당장 3황후, 암살여왕 이셀렌은 제국의 존속을 포기하고 있었다.

통치자로서 책무 방기, 큰 죄다.

다른 황후들도 100년 사이에 뭔 생각일지, 딴 속셈이 됐을지 모르지.

극단적인 경우에는…… 7황후 용공주도 디에르크와 한통속일 수 있다.

“응, 으응, 알겠다. 절대로 말 안 한다…….”

랑에이는 몇 번이고 말하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겁먹어서 주저하는 얼굴, 나는 슬쩍 랑에이의 어깨를 눌렀다.

몸을 웅크린 랑에이가 내 허벅지에 고개를 파묻는다.

애교 부리는 고양이처럼.

예전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했던 시절처럼.

“시릭, 정말…… 시릭이 맞구나.”

랑에이가 울먹거리자 나는 말했다.

“미안하다고 하지 마. 지금은 어떤 대답도 해 줄 수 없으니까.”

“…….”

“그냥 조용히 가자.”

랑에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느끼는 소리.

허벅지가 젖어 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후회하고 괴로워서 떠는 랑에이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다.

나에게 초능력을 전수해 주고 그 이상을 가르쳐 줬던 그 사람을.

스승을 죽게 만든 걸 용서한다고는 못 하겠지만.

전우로서 달래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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