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69)
잊어버렸느냐?
리젠 리브라타의 싸움.
랑에이는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사람은 전투에도 족적이 남고 성격이 드러난다.
지금 리젠이 싸우는 방법.
시선 처리, 호흡, 동세, 발놀림.
칼을 뽑진 않았지만 어떻게 잡고 휘두를지 랑에이는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리젠 리브라타가 시릭의 전인이라고?
틀렸다.
지금 링 위에서 싸우는 리젠이 바로 시릭이었다.
얼굴, 몸이 달라졌지만 확실했다.
초능력자라서 비슷하게 싸운다고?
랑에이는 이미 초능력자 두 사람을 알고 있었다.
같은 능력도 싸우는 법은 다르다.
보고, 다시 봐도 시릭이다.
“어떻게…….”
하지만 시릭은 분명히 죽었는데?
모르겠다.
그저 이 시간이 계속되었으면.
시릭이 돌아왔고 그걸 계속 지켜볼 수만 있으면 된다.
감히 말을 걸 용기도, 차마 불러 볼 수도 없으니까.
아……. 싸움이 끝난다.
끝나 버렸다.
“…….”
랑에이는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본 게 착각이었나, 꿈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링에서 손을 터는 남자, 리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새삼 등줄기에 전율이 타고 흘렀다.
그저 직감이었지만…….
“랑에이!”
그리고 부름.
꿈에 젖어 있던 호랑이를 깨우는 소리.
* * *
날아가려는 유리병.
나는 있는 대로 염동력을 퍼부었다.
그그그그그!
랑에이를 향해 날아가려던 유리병을 내 쪽으로 잡아당긴다.
허리에 타이어를 매달고 달리는 고통.
팽팽한 백중세다.
쩌적!
아, 하지만 유리병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저게 깨지면 더 난리 날 거다!
일촉즉발의 순간.
“아아아!”
랑에이가 땅을 차면서 포효했다.
쩌렁쩌렁한 함성이 지하 공간을 떨쳐 울린다.
사자후.
사자 수인이나 쓸 수 있는 절기지만 랑에이는 따로 배웠다.
내 염동력에 맞서던 유리병이 반대쪽으로 휙 날아갔다.
쨍그랑!
그리고 깨지는 소리.
나는 얼른 유리병에 담겨 있던 약체를 염동력으로 뭉치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허공에 뿌려진 붉은 액체는 아래로, 주르륵 흘러내리면서 들어갔다.
기절해 버린 비요른의 입속으로.
“뭐, 뭐야!”
비요른을 살피던 경찰대원들이 깜짝 놀라서 물러난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저 액체의 움직임.
자기 의지를 갖고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벌떡!
그리고 비요른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괘, 괜찮습니까? 청장님?”
놀란 경찰대원이 손을 뻗는 순간…… 비요른이 손을 휘둘렀다.
서걱.
경찰대원의 팔이 끊어져서 날아오른다.
“끄아아악!”
비요른이 수도를 휘두르자 단숨에 끊어진 것이다.
신체 능력이 남다른 수인이라지만 손날로 사람 육체를 자른다고?
이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뭐, 뭐야!”
“모두 피해!”
그나마 경찰들이라서 상황 판단력이 되는지 얼른 옆으로 굴러서 링 아래로 빠져나왔다.
비요른은 뒤쫓지 않고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나를 향해서.
―처음 뵙겠습니다. 리젠 리브라타.
비요른의 성대에서 아주 간드러진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당신을 숙주로 삼으려고 했는데 실패했군요. 매우 아쉬운 일입니다. 그 육체, 엄청난 재능이 엿보이는데요. 특히 그 심장은…….
“누구냐?”
―우후후, 너무 성급하시네요.
비요른, 아니 괴인이 손으로 자기 뺨을 가리고는 간드러지게 웃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너무 안 어울린다.
―저는 곧 돌아오실 신을 섬기는 자입니다.
“칠죄신의 종복이냐?”
나는 인간과 일곱 이종족과 함께 칠죄신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오크처럼, 칠죄신의 지배에 굴복하고 우리들을 막아서는 자들이 있었다.
―바로 아시는군요.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예, 저는 사도 디에르크라고 합니다.
“…….”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활약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너희들 계획을 내가 많이 박살 내 주긴 했지. 앞으로도 싹 박살 내 줄 예정이고.”
나는 대화를 하면서 비요른의 몸을 살폈다.
투시력을 발휘.
지금 비요른은 심장이 멈췄다.
뇌도 활동하지 않고.
그냥 죽은 것이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했는데 혈액만 순환하고 있었다.
―해서 말인데,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제정신이냐? 그럴 생각은 없고, 있더라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수긍하겠어?”
나는 보란 듯이 링 아래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비요른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지배당했다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다.
나는 내친김에 말했다.
“무엇보다 너희들의 편을 들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 난 이미 잘나가는 도련님에다가 돈도 많고 여자도 많단 말이지. 이미 몰락한 신의 잔당들이 대체 나한테 뭘 줄 수 있지?”
―신이 몰락했다니, 그 얼마나 어리석은 넘겨짚기인가요? 그저 신께서는 훗날의 즐거움을 위해서 잠시 기다리시는 것뿐인데…….
“방구석 백수도 다들 취직을 기다려. 그리고 백수가 너희들보다 훨씬 가능성이 컸을 거다.”
―기가 센 남자는 매력적이죠. 대화할수록 기대감이 솟는군요.
디에르크가 자기 입술을 날름 핥았다.
미녀가 했다면 선정적인 유혹이겠지만…….
비요른이 하니 그냥 음침한 게이다.
“이야기 끝났냐?”
―어리석군요. 제가 괜…….
팟!
그 순간 랑에이가 링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야말로 빛살 같은 속도, 도약 한 번에 디에르크에게 날아들면서 주먹을 날린다!
―윽!
순식간에 쏟아지는 5연타!
디에르크는 팔을 휘둘러 쳐 내려 했지만…….
뻐억!
그 순간 팔꿈치 아래가 날아가 버렸다.
디에르크처럼 자른 게 아니라 그냥 힘과 속도로 뚝 끊어 버린 것이다.
―커억?
이어서 상박을 박살 내고 어깨, 옆구리 순으로 치는데 그때마다 육신이 종이처럼 구겨진다.
디에르크는 필사적으로, 마력질주까지 쓰면서 몸을 빼냈지만 소용없다.
그다음은 나니까.
―뭐…….
디에르크가 기겁했다.
몸을 뺀 곳에서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걷어차고 있으니까.
랑에이가 얼마나 강한지는 내가 안다.
이깟 놈이 랑에이의 공격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옆으로 달아날 거라고 생각했고 내 예상대로였다.
마무리한다!
빠각!
내 발차기에 비요른의 턱이 날아가 버렸다.
얼굴 반이 박살 난 상황, 비요른의 몸이 움직임을 멈췄다.
끝이다.
퍼어억!
한데 랑에이는 달려들면서 또 주먹을 내질렀다.
가슴에 꽂힌 주먹에 비요른의 몸이 링 밖으로 나가떨어진다.
“…….”
랑에이는 잔뜩 굳은 얼굴로 비요른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야, 이미 끝났는데 뭘 또 해.”
그래도 일단 몸뚱이는 비요른이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랑에이의 마무리에 꺼림칙한 얼굴이었다.
보통 사람은 시체 훼손은 과하다고 생각…….
―……이, 이 몸은 성능이 벼, 별로군요. 다, 다, 다음에 뵙죠.
그런데 비요른의 시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턱이 날아가고 심장이 파괴당했는데도 아직 붙어 있었던 것이다.
질색하던 모두는 깜짝 놀랐다.
랑에이의 처리가 옳았다는 걸 알고.
“……음, 잘했다.”
나도 얼른 말을 바꿨다.
랑에이는 한참 비요른의 시체만 노려보다가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호랑이의 감으로도 이제 정리된 모양이다.
나는 링 아래를 돌아보고는 말했다.
“아르센, 알베르트, 이 상황이 지금 널리 알려져서는 안 된다.”
“예?”
“그게…….”
알베르트는 난감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철도헌병대원이나 다크엘프들은 그렇다 치고, 천족들과 중앙경찰들도 있었다.
이들의 입을 다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천족 둘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 너희들이 본 사실을 5황후에게 보고하는 건 상관없다. 단, 너희 둘은 입을 다물어라.”
“그리하겠습니다.”
천족 둘도 잔뜩 굳은 얼굴이었다.
이 일의 무게를 알고.
나는 이어서 중앙경찰을 돌아보았다.
“자, 일단 시체 수습하자. 다만 아직 뭐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좀 더 두고 보고…….”
“다 알고 했다.”
내가 말하는 중에 갑자기 랑에이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나를 똑바로 보다가 중앙경찰을 쓱 돌아보았다.
“사전에 다 알고 한 것이다.”
“……예?”
중앙경찰들은 황후의 말뜻을 이해했다.
랑에이는 내가, 비요른이 사전에 이런 수작을 부린다는 걸 이미 알고 처단하려고 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잔뜩 굳은 얼굴로.
……보통은 위엄 있다고 여기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엄청 서투르게 거짓말하는 건데.
나는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네. 일단 뒷정리부터 하자.”
밤이 깊었다.
나는 중앙경찰의 청장실에 있었다.
창가에 서서 야경을 내려다보는 중이다.
마력램프가 뿜어내는 황도의 빛을.
비요른의 시체는 더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격리했다.
이변을 일으켰던 마력약, 증거품 보관실에서 나왔다는 것도 확인했다.
“아르센, 철도헌병대와 중앙경찰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파악한 사실을 제국군에 전달해. 우리가 여기까지 알아냈다고.”
“예? 그래도 되겠습니까?”
“청장이 죽었는데 숨겨 봐야 의심만 늘어난다. 또 우리가 먼저 정보를 주면 제국군에서도 좀 믿어 줄 거다.”
서로 다른 단체끼리 상호 신뢰를 구축하려면 오고 감이 있어야 한다.
이 경우에는 정보의 오고 감이다.
내가 황도의 무력 단체를 한데 묶는 중간 과정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아르센이 몸을 돌리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다크엘프, 알베르트였다.
둘만 남자 알베르트가 품에서 편지 봉투를 꺼냈다.
“비요른은 결투 직전에 이 긴급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긴급 편지라면 황실에서 발송하는 기밀문서인데?”
“예. 하지만 인장이 교묘한 가짜였습니다. 비요른이 보기 전에 다른 사람이 뜯어 버리는 걸 피하기 위한 술책이겠죠.”
알베르트가 설명했다.
“안에는 문서가 있었습니다. 증거품 보관실의 마력약을 거론하는 문서, 이번 사달을 일으킨 칠죄신의 주구, 디에르크가 보낸 것 같습니다. 필적을 감정해 보겠지만 꼬리를 잡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설명해 줘서 고맙긴 한데…… 왜 나한테 다 말해 주지?”
다크엘프를 위해서 충성하는 알베르트가 이리 상세하게 알려 줄 이유가 없다.
물론 나도 찬찬히 조사해 보면 알게 될 정보였지만.
알베르트가 차분하게 말했다.
“천년제국은 모든 종족들을 아울러서 비바람을 피하게 해 주는 커다란 지붕이었습니다. 그 지붕이 폭삭 무너진다면 어찌 다크엘프들만 무사하겠습니까?”
“암살여왕은 그럴 거라고 생각해.”
“여왕님은 제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알베르트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루크 케드릭이 갖고 있던 위험한 약물이 증거품 보관실로 들어갔는데, 적은 그 사실마저도 이용했습니다. 한데 어떻게 이런 재빠른 움직임이 가능했겠습니까?”
“……다크엘프의 정보망도 오염됐다. 다크엘프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왔다?”
나와 비요른의 결투는 즉석에서 결정된 것이다.
한데 디에르크는 그 사실을 바로 포착하고는 비요른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런 번개 같은 정보 전달, 다크엘프의 특기다.
알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과 아군이 분간되지 않는 상황입니다만 당신은 확실하게 테러범들과 맞서고 있습니다. 또 생명을 경시하지 않으니 믿고 함께할 분입니다.”
“그래, 네 뜻을 알겠다. 여왕에게 간언하고 다시 연락해라.”
“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알베르트가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나갔다.
나는 야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다크엘프들에게 여왕의 지시는 절대적이다.
한데 알베르트는 반대 의견을 피력하려고 한다.
제국의 평화를 위해서 정말 목숨을 건 거다.
“그래, 아직 제국에는 저런 영웅들이 있는데…… 나도 제대로 해야지.”
지금까지의 전황을 셈하고 앞일을 따지다 보니 각오가 굳어졌다.
달칵.
그때 문이 열리고는 사람이 들어왔다.
등을 펴고 걷는 모습도 늠름하고 용맹한 호랑이.
랑에이였다.
창가에 서 있던 나를 향해서 직선으로 다가온다.
“이제 막 정리는 끝났다. 중앙경찰은 당분간 청장 대행 체제로 이행할 거다.”
“아니, 일은 이제 시작이다.”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7황후, 용공주에게 연락해라. 마력약 유통 쪽이 위험해졌다. 유통 중단하고 상품 모조리 다 확인하라고.”
굴러다녔던 유리병.
그건 누가 봐도 마력약처럼 보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랑에이는 당황했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염된 마력약, 제국민들에게 이 사실이 알려지면 파장이 커진다. 마력약은 정말 중요해. 우리가 어떻게 총력전을 치렀는지 기억해라.”
“지금 무슨…….”
“펄헤븐 황야에서 너와 나는 지원병들의 기나긴 줄을 보았다. 마력이 없어서 싸울 수 없는 자들이, 칠죄신의 압제에 굶어 죽느니 함께 싸우다 죽겠다고 전국에서 달려온 것을 봤던 걸 잊어버렸느냐?”
창에 비친 랑에이의 눈망울이 커졌다.
믿을 수 없어 하는 얼굴.
흘러나오는 부름.
“시……릭?”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