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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67화 (67/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67)

오늘이 무슨 날인지

중앙경찰청.

지하 1층, 체력 단련실.

스파링용 링이 있다.

이미 각계의 관객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일행들과 함께 들어가자 시선들이 확 쏠린다.

“ㅍ…….”

나를 돌아보고 반색하던 아르센은 얼른 입을 손으로 가렸다.

사람들 앞에서 잘~한다.

나는 아르센의 팔을 잡고는 벽 쪽으로 끌고 갔다.

“너 방금 왜 ㅍ 발음이 튀어나오냐? 폐릭이라고 부를 생각이었냐? 정신 안 차릴래!”

“시, 시정하겠습니다.”

“그냥 가능한 한 남들 앞에서는 나한테 말 걸지 마라.”

원래 아르센은 연기 소질이 없다.

나는 상황을 물었다.

“애들은 좀 데려왔냐?”

“예, 말씀대로 수뇌부와 간부, 일반 대원 중에서 입 가벼운 애들로 뽑았습니다.”

“분위기는?”

“당황하면서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케드릭 사건을 수사하고 해결해야 하는데 서로 손발이 안 맞고 진행이 전혀 안 되니까요.”

헌병대장과 경찰청장이 서로 자리를 건 캐삭빵.

일견 어이없지만 알기는 쉽다.

결국에는 힘이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아르센이 목소리를 낮췄다.

“다만…… 랑에이 황후에 대한 평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엥?”

“그녀가 철도헌병대를 겁박하기 위해서 판을 벌였다, 뭐 그렇게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하긴 랑에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

제국을 지배하는 황후, 이 황당한 결투도 그녀의 정치적 의중이라고 넘겨짚겠지.

“치안, 경찰은 랑에이의 관할이니까…….”

“물론 저야 폐…….”

“너, 빠졌다?”

“……리젠 님의 뜻이라는 걸 알긴 합니다만. 일반 대원들은 모르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없다. 내가 이길 거고, 본 놈들이 돌아가서 신나게 떠들겠지. 특관인 내가 청장인 비요른을 탈탈 털어 버렸다고.”

그러면 헌병대원들은 보다 내 말을 잘 따를 테고.

비요른은? 그냥 잘라 버리고 새로운 후임을 임명하면 된다.

랑에이에게 말해서 좀 제대로 된 놈으로 뽑으면 되지.

그러면 중앙경찰도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남은 건 제국군, 거기까지 해결하면 황도의 군사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갑자기 아르센이 물었다.

“……그런데 황후께서 왜 저러십니까?”

“왜?”

“아니, 그냥…… 주인 따라다니는 강아지 같아서요.”

“…….”

아르센도 알 정도라면 엄청 티 난다는 건데.

내가 돌아보니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랑에이가 흠칫했다.

빳빳하게 치솟아 오른 꼬리.

2초 뒤, 홱 직각으로 돌아선다.

자긴 나를 본 적이 없다는 듯이.

“…….”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라는 걸 아는 게 아니야. 넘겨짚고 착각하고 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내가 시선을 주자 아르센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저야 사정을 다 알지만 남들은 모릅니다. 그리고 랑에이 황후 전하는 도도하게 전장에 군림하는 호랑이라는 평판 아닙니까?”

“그냥 싸우는 거 말고는 주변머리 없는 여자야. 워낙 생긴 게 잘나서 다들 환상을 품는 거지.”

“아니, 그거야…… 어르신 관점이고요.”

“하다 하다 희한한 호칭을 꺼내네. 너 진짜 이럴래?”

“아, 아무튼 자칫하면 오해 사게 생겼습니다.”

아르센의 말에 내가 다시 돌아보니 랑에이는 또 나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뒤늦게 내 시선을 알고는 안 봤다는 듯이 180도 몸을 돌리고.

랑에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미녀다.

모자로 얼굴을 감춰도 다들 랑에이를 알아보고, 몰라도 정신없이 본다.

정작 그 본인은 나만 보다가 안 본 척하기를 반복하고.

결국 사람들이 나와 랑에이를 번갈아서 본다.

내가 대체 누구인지, 랑에이와 어떤 관계인지.

“아, 역시 좀 그러냐?”

“예, 사랑에 빠진 소녀로만 보입니다.”

“…….”

그래, 객관적으로 그러네.

아르센이 더 말했다.

“오해가 퍼지기라도 하면 앞일이 복잡해지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알았다. 내가 알아서 처리하마.”

저대로 계속 놔두면 안 되겠다.

이번 싸움을 정리한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자.

내가 결심하고 돌아서는데 다크엘프 하나가 다가왔다.

낯익은 얼굴.

전에 케드릭 사건 때 난입했지만 내가 돌려보내 준 놈, 알베르트였다.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아르센은 알아서 빠져 주었다.

알베르트가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이번 시합의 심판을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암살여왕의 명령이냐?”

다크엘프들 알라고 일부러 흘린 거긴 하지만.

알베르트가 고위직이라서 바쁠 텐데 바로 왔네?

알베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가 오고 싶어서 왔습니다.”

“…….”

“여왕님과 좀 불화가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잘 보고하면 여왕님도 생각을 달리하실 겁니다.”

암살여왕의 마음을 돌려 보겠다.

알베르트는 이번 시합을 직관한 다음에, 내가 만만하지 않으니 차라리 끌어들여야 한다고 보고를 올리겠다는 것이다.

전에 받은 은혜를 갚으려고.

“고맙다.”

나는 알베르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알베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닙니다. 고작 이런 것밖에 못 해서 죄송합니다.”

“그럼 혹시 뭐, 정보 더 있냐?”

나는 별 기대를 않고 물었다.

알베르트는 잠깐 생각하고는 말했다.

“저기 구석에 있는 천족 둘이 2급 치료약을 가져왔습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다 말하지만, 5황후의 명을 받아서 탐색 나온 것 같습니다.”

“…….”

천족, 5황후는 본래 암살여왕과 손을 잡고 미리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한데 내가 해결해 버렸으니 잠시 관망 중이겠지.

내가 치료약의 비밀을 아는지, 안다면 어떻게 교섭할지.

“그리고 30분 전에 비요른 청장이 증거품 보관실에 들어갔었다는군요.”

“…….”

나와 비요른의 결투가 벌어진다는 정보를 입수한 순간, 바로 정보망을 가동한 거겠지.

새삼스럽지만 다크엘프의 정보 전달 속도는 기가 막힌다.

알베르트는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뭘 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시합을 앞두고 머리 식히러 들어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 알겠다. 주의하지.”

알베르트는 머리를 숙여 보이고는 다크엘프들 쪽으로 물러났다.

마음을 정리한 나는 인파들을 살폈다.

비공개 시합이니 사람은 스무 명 남짓.

하지만 면면들이 남다르다.

헌병대장 아르센과 대원들, 그리고 다크엘프의 고위직, 재정부에서 5황후의 명령을 받고 나온 천족들.

그리고 중앙경찰의 수뇌들과 대원들이 지켜보는 자리다.

이들 앞에서 비요른도 감히 두말은 못 할 것이다.

“그럼 정리할까.”

나는 가볍게 링 위로 올랐다.

사각 링의 로프에 등을 기대고 있으니 다들 나를 지켜본다.

랑에이도 모자를 벗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

나는 랑에이를 똑바로 보았다.

랑에이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뭐라도 알았다는 것처럼.

끄덕.

나는 고개만 한 번 끄덕여 보이고는 눈을 거뒀다.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굳은 얼굴의 강아지 수인 남자.

비요른이었다.

“…….”

링 근처까지 온 비요른이 텅, 발을 굴렀다.

그러자 몸이 치솟고는 3단 로프를 넘어서 링 안으로 들어온다.

마력을 쓴 것도 아니다.

수인의 육체 능력이었다.

“우와아…….”

대원들의 탄성, 비요른도 한가락 하는 놈이다.

애당초 청장까지 꿰찼으면 기본은 되겠지.

링 로프에 몸을 기댄 나는 불량하게 쳐다보았다.

정작 비요른은 내가 아니라 군중들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내 일그러지는 얼굴.

안 봐도 뻔하다.

랑에이를 찾았고, 그녀가 나를 쭉 바라본다는 사실을 확인한 거겠지.

“…….”

비요른은 눈에 불을 켜고는 혀를 날름거리면서 입을 핥았다.

척 봐도 랑에이를 보고 매우 추잡한 상상을 한 거다.

“저 새끼, 안 되겠네.”

조직의 위신과 앞날을 건 결투에서도 발정하다니, 수장을 맡을 자격이 없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매우 불쾌했다.

오늘 비요른을 완전히 박살 낸다.

정적.

미리 이야기가 되었는지 아래에 있던 알베르트가 입을 열었다.

“다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나마 제가 중재를 맡게 되었습니다.”

다크엘프는 공증인으로서 다들 신뢰한다.

또 헌병대와 중앙경찰, 누구 편도 아니니 양쪽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알베르트가 관객들을 돌아보았다.

“이 시합이 왜 열리게 되었는지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간략하게 설명하고 넘어가겠습니다. 헌병대와 중앙경찰의 자존심을 건 단판 승부이며, 패배한 단체의 수장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즉…….”

“리젠이 지면 나는 바로 물러난다.”

아르센이 말했다.

헌병대장의 공언.

단체의 수장으로 한 말, 천금의 무게다.

알베르트와 사람들이 비요른을 바라보았다.

링에 오른 비요른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진다면 나도 중앙경찰의 청장에서 물러나겠다.”

“좋습니다. 시합 방식은 간단합니다. 한쪽이 항복을 말하거나, 링 밖으로 튕겨 나갔는데 10초 안에 올라오지 못할 경우, 혹은 사망했을 경우 승패가 가려집니다. 그리고 제 판단으로 한쪽의 목숨이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시합을 끝내겠습니다. 또 큰 부상을 입더라도 2급 치료약을 마련해 뒀으니 목숨은 건질 수 있습니다.”

“이의 없다.”

내가 수락하고, 비요른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와 여왕님이 지켜보겠습니다. 시작하시죠.”

……정말 대담하네?

암살여왕이 이 상황에서 내 편을 들어 줄 리가 없다.

하지만 알베르트는 여왕을 거론해서, 은근슬쩍 그녀의 의중이 개입하고 있다는 걸 관중들에게 호도했다.

암살여왕도 다 아는 일이니 결과에 무조건 승복하라고.

알베르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정말 아슬아슬한 선까지, 날 도와준 것이다.

땡!

공이 울리고 시합이 시작되었다.

비요른이 몸을 딱 낮추고는 노려보자 나는 씩 웃어 주었다.

“아, 근데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

공은 울렸고 이미 시합은 시작되었다.

뭔 말이 더 필요하냐고?

간을 쳐야지.

“랑에이 전하에 대해서인데…….”

관중들이 귀를 기울이고, 비요른의 몸도 딱 굳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중앙경찰의 편을 든다고 생각하나 본데, 아니야. 반대야.”

“……!”

헌병대원들이 깜짝 놀라고, 경찰들도 놀란 얼굴을 했다.

이 시합을 듣고 생각했을 때와 영 반대니까.

나는 비요른을 보면서 말했다.

“비요른이라는 놈이 매번 너무 징그럽게 본다고, 좀 만나자고 치근거린다고 하던데.”

랑에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아니, 비요른의 시선도 눈치를 못 챘을걸.

“뭐, 뭐, 뭐…….”

하지만 정작 비요른은 말까지 더듬으면서 얼굴이 새빨개졌다.

설마 내가 다들 보는 앞에서 폭로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모함이다! 모함!”

비요른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만 누가 봐도 제 발이 저린 거다.

그리고 사람들이 랑에이를 보았지만.

그녀는 약속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술렁거리는 분위기.

이제 다들 이 시합을 다르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중앙경찰과 헌병대의 자존심 대결이 아니라.

황후에게 감히 무례하게 군 비요른에 대한 단죄, 처형장으로.

“이 개새끼가!”

폭발한 비요른은 엄청나게 낮은 자세로 내게 덤벼들어 왔다.

하지만 나는 몸을 무너트리면서 확 누워 버렸다.

침대축구 하는 것처럼.

“……뭐.”

뻐어어억!

그리고 손으로 1단 로프를 잡고는 수직으로 올려 찼다.

낮게 돌격해 들어왔던 비요른이 턱을 얻어맞고는 비틀비틀 물러났다.

어질어질한 얼굴.

설마 이렇게 반격당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을 것이다.

그나마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려서는 정통으로 얻어맞은 건 피했지만.

처어억.

나는 공중제비를 휙 넘어서 3단 로프 위에 앉았다.

위아래로 심하게 출렁거리는 로프.

나는 쪼그려 앉아 웃었다.

“너 개새끼라고? 자기소개 안 해도 다들 알아. 오늘이 무슨 날인지 다들 알고.”

비요른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로프를 뛰어넘는 거야 도약력, 신체 능력만 뛰어나면 된다.

하지만 흔들리는 3단 로프를 밟고 쪼그려 앉는 거?

이건 무게 감각, 균형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

압도적으로.

“오늘 개 잡는 날이야.”

초능력, 염동력을 사용하는 난 실내에서 더 강해진다.

그런데 좁은 링 안이고 써먹을 로프까지 있다?

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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