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63)
일할 맛 난다
정오.
웰링 저택.
랑에이는 응접실 입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베란다 의자에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리젠 리브라타.
춘곤증이라도 왔는지 낮잠 중이다.
그리고 랑에이는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만 1시간.
“……으음.”
내가 왜 이러지?
랑에이는 자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리젠의 뒤를 멀리서 계속 따라다녔다.
리젠 리브라타가 파티장에서 한 활약,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거리의 소문은 들었다.
유추해 보면 초능력자인 게 거의 확실하다.
이제 그냥 물어보면 된다.
시릭 카라카스의 전인이냐고.
하지만 왠지 말도 못 걸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다.
리젠과 시선만 마주치면 찔끔하고, 겁이 나서 달아나고 싶을 정도다.
산중의 호랑이처럼 전쟁터를 종횡하던 랑에이가 겁먹거나 움츠러드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대체 왜?”
물론 리젠 리브라타와 첫 만남은 별로 좋지 않았다.
철도 테러 사건에서 마주한 리젠은 랑에이에게 분노와 실망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그녀가 이렇게까지 전전긍긍할 이유가 없는데?
“……혹시 시릭에게 무슨 이야기라도 들었을까 봐?”
전인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그래도 뭔가 석연치가 않은데…….
자기 행동이 이해가 안 가서 혼란스러운 호랑이.
“랑에이 어머니, 거기서 뭐 하세요?”
“으음.”
제풀에 놀란 랑에이는 얼른 돌아보았다.
메이드 아멜리아의 손을 잡은 리세라가 다가오고 있었다.
랑에이는 반사적으로 턱을 세우고는 벽에 기댔다.
자기는 원래 이 자리의 붙박이 석상이었다는 것처럼.
“거기 계속 서 계시면 사람들이 신경 써요.”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다.”
“2시간 동안 제자리라고 사람들이 곤란해해요. 어머니는 높으신 분이라고요.”
리세라는 조곤조곤 말했다.
웰링 저택에서 머무르는 리젠 일행들, 황녀 리세라에게 익숙해져서 미리엘도 어렵지 않게 대했다.
하지만 황후는 지금 제국의 최고 통치자 중 하나다.
제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
그런 분이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말을 걸어도 무시하고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다들 신경 쓸 수밖에.
“……2시간은 아닐 텐데?”
“곧 2시간 채우실 것 같은데요?”
“송구하지만 도련님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리세라의 말, 이어지는 메이드의 목소리에 랑에이는 멈칫했다.
아멜리아가 수인, 희귀한 은회색 늑대 수인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그대는…….”
“월람과 그라에스의 딸인 아멜리아가 위대하신 호선랑을 뵙습니다.”
아멜리아는 치마 끝자락을 잡으면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다른 종족들은 수인이라고 통틀어서 말하지만, 사실 그 안에서도 복잡하다.
강아지 수인과 고양이 수인이 서로 사이가 좋겠는가?
하지만 랑에이는 그 모든 수인들을 하나로 모았고, 존경받고 있었다.
“호선랑님을 모시는데 변변찮은 대접이라서 무척이나 부끄럽고 당황스러울 따름입니다.”
“비를 피할 수 있고 덮고 잘 것이 있고 먹을 것이 있다면 충분히 훌륭하다. 또 오늘 아침의 식사는 굉장히 만족스러웠고. 갑자기 찾아온 객인데 이런 환대를 받았으니 그저 감읍하다.”
랑에이는 부드럽게 말했다.
정중하게 고개를 든 아멜리아가 올려다보았다.
“송구하지만 제 도련님이 호선랑님에게 어떤 실례라도 저질렀나요?”
“…….”
여기서 도련님이란…… 리젠이지?
당당하던 랑에이의 머릿속이 확 헝클어졌다.
“어, 음, 그게…….”
또 정리가 안 된다.
랑에이가 머뭇거리자 아멜리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혹시 도, 도련님이 부, 불경한 일이라도 한 건가요? 서, 설마…….”
요즘에는 전혀 안 그러지만 원래 리젠은 임자 있는 여자에게만 치근거리지 않았나?
그리고 랑에이는 결혼했던 여자, 리젠의 사정권(?)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연결해 본 아멜리아는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아, 아니…….”
“랑에이 어머니는 좀 긴장하신 거예요.”
창백해진 아멜리아, 말을 제대로 못 하는 랑에이 사이를 리세라가 중재했다.
“리브라타의 도련님이 저희 남매들을 계속 도와주셨으니까요.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좀 서투르신 거예요.”
“그, 그런가요.”
아멜리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제가 도련님에게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호선랑님의 말을 새겨듣게요. 지금 당장이라도…….”
“아, 아니…….”
랑에이는 깜짝 놀라서 팔을 들어서 가로막았다.
아멜리아가 의아해하며 멈추는데 랑에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고 있으니까.”
“아, 도련님. 저러면 또 밤에 못 주무시고 밤 새우실 텐데.”
아멜리아는 걱정하더니 랑에이에게 다시 권했다.
“조금 있다가 차 마시는 자리에 도련님을 부를까요? 그때 이야기를 나누세요.”
“…….”
절레절레.
랑에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각오가 안 됐다.
왜 각오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
아멜리아가 더욱 의아해했다.
리세라가 정리했다.
“제가 잠깐 어머니와 말씀을 나눠 볼게요.”
“알겠습니다. 저는 저택을 정리하고 있을 테니 필요한 일 있으면 찾아 주세요, 호선랑님.”
아멜리아는 깍듯하게 인사하고는 랑에이를 떠나갔다.
그제야 랑에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리세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많이 혼란스러우세요?”
“……으음. 그래.”
랑에이는 전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자기가 왜 이렇게 긴장하는지.
하지만 리젠이 시릭이라는 걸 확인한 리세라로서는 이해가 가고 또 놀라울 뿐이었다.
랑에이는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어떤 근거도 없을 텐데 그저 직감만으로.
이런 게 부부의 연이라는 건가?
리세라는 그 사실이 몹시 기뻤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멀리하시게 된 이유, 아직 모른다.
그걸 함부로 물을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이제 그녀도 다 컸고, 모른 척하고 싶지 않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이좋아질 수 있다면.
다시 가족이 하나가 될 수 있을 테니까.
“이야기를 나누실 거라면 제가 옆에 있어 드릴까요?”
“……그래 줬으면 하구나.”
랑에이도 자기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계속 전전긍긍할 순 없으니까.
리세라는 주변을 돌아보는 시늉을 했다.
“주무시면 뭐라도 덮어 드려야죠.”
* * *
기척.
다가오는 발소리에 나는 몸을 뒤척거렸다.
전장 생활이 길었던 나는 잠들었어도 예민하여 금방 깨어난다.
하지만 이제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
“으음.”
아멜리아인가.
아니, 그것치고는 너무 조심…….
내가 눈을 번쩍 뜬 순간.
“…….”
딱 굳어 버린 랑에이가 보였다.
머리 위의 호랑이 귀가 긴장으로 바짝 솟아 있다.
꼬리도 곤두선 게 보이고.
“……뭐 하냐?”
나를 향해 상반신을 숙인 랑에이는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우아한 목덜미, 움푹 파인 쇄골.
가슴 계곡까지 선명하게 보인다만…….
불쾌하다.
일어나자마자 미녀를 보면 보통 기분이 좋겠지만, 이건 영 아니었다.
그제 랑에이가 비를 맞고 있는 게 딱하기도 하고, 또 리세라의 경호 문제도 있어서 집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계속 있네?
로데릭이나 하인켈, 알리시아 같은 애들은 황후 전하가 함께 지낸다는 사실에 새삼 긴장하는 눈치고.
“여기 언제까지…….”
“일어나셨어요?”
리세라의 밝은 목소리.
슬슬 나가라고 하려던 나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살펴보니 랑에이의 옆에 리세라가 서 있었다.
이제 리세라는 내가 시릭이라는 걸 알잖아?
애 앞에서 아내랑 목소리 높이면 안 되지.
“피곤해서 좀 잤다. 그런데…….”
“랑에이 어머니가 담요를 덮어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아, 그래.”
다시 보니 랑에이의 손에 갈색 담요가 있었다.
나는 눈인사를 대충 하고는 담요를 잡았다.
찌이익.
하지만 랑에이는 담요를 놔주지 않았고, 내가 잡아당기는 바람에 좀 찢어졌다.
“아, 고맙습니다. 줘요.”
“…….”
랑에이는 천천히 몸을 펴더니 뒤로 물러났다.
뻣뻣한 동작, 호랑이가 아니라 로봇이네.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리세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좀 더 주무실래요?”
“아니, 늘어지게 잤으니까…… 슬슬 다음을 생각해야지.”
일단 사후 처리다.
내가 케드릭 가문을 박살 낸 일로, 헌병대와 제국군 그리고 중앙경찰이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내가 그걸 정리해서 셋 다 싹 휘어잡을 예정이다.
원래는 암살여왕을 회유하고, 정보 제공을 받으려고 했는데…….
암살여왕은 빡이 돌았고, 반대로 랑에이가 이쪽으로 왔다.
“어쩐다…….”
나는 랑에이를 마뜩잖게 보았다.
쟤를 방패 삼아서 다시 암살여왕을 교섭 자리로 끌어내 봐?
하지만 암살여왕은 감정적으로 굴고 있다.
선뜻 설득될 상황이 아니다.
그러면 일단 랑에이를 써먹어야 하나?
“…….”
내 시선에 랑에이는 우물쭈물했다.
늠름한 미녀가 내 시선에 공황장애라도 걸렸는지, 고개를 돌리면서 쩔쩔맨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고, 호랑이 꼬리가 곤두섰다.
최종 면접을 봐도 이 정도로 긴장하진 않을 텐데.
“……왜 저래?”
“좀 긴장하셨어요.”
리세라의 설명, 나는 순간 흠칫했다.
혹시 리세라가 내가 시릭이라는 걸 알려 줬나?
하지만 리세라는 내 속을 헤아렸는지 살짝 도리질을 쳤다.
하긴, 내가 정체를 괜히 감추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애다.
……그럼 대체 왜 저리 긴장하는 거지?
“뭐 할 말이라도 있어요?”
“으으음.”
“나중에 말씀하신대요.”
리세라가 거들자 랑에이는 턱만 살짝 끄덕였다.
리세라가 랑에이를 대변하는 기묘한 상황이다.
묘한 분위기.
나는 이야기를 돌렸다.
“그럼 나중에 말해요. 나는 좀 바쁘니까. 일단 중앙경찰에…….”
“중앙경찰청장이라면 내가 안다.”
불쑥.
갑자기 랑에이가 내 말을 끊고 들어왔다.
“중앙경찰청장은 강아지 수인 비요른이다. 연회 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다.”
“……어, 그러니까. 전하 한마디면 다 해결될 정도입니까?”
“…….”
랑에이는 자기 가슴에 손을 얹더니 한숨을 길게 쉬었다.
긴장을 떨치듯이.
“바로 해결될 정도는 아니겠지만 내 의견을 무시하지는 않을 거다.”
황후들은 각자 제국의 영토, 분야를 맡아서 통치하고 있다.
암살여왕이 정보라면 랑에이는 경찰, 치안 쪽이다.
칠죄신이 지배하던 시절, 수인들은 자경대를 꾸려서 자기 가족과 마을을 보호했다.
제국 건국 이후로, 수인들은 그 경험을 살려서 경찰 조직에 많이 들어갔고.
일단 한번 맡겨 볼까?
“그러면 중앙경찰과 접촉해 보세요.”
“두 분이서 같이 다녀오시는 게 어때요?”
리세라의 제안.
쫑긋.
랑에이의 호랑이 귀가 파닥거렸다.
산책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리세라가 빠르게 말했다.
“같이 가시는 게 더 확실하잖아요. 랑에이 어머니, 외출 준비 하세요. 옷은 아멜리아가 골라 줄 거예요.”
“으음.”
“예쁘게 입으세요.”
리세라가 등을 떠밀자 랑에이는 머뭇거리다가 나가 버렸다.
좌우로 흔들리는 호랑이 꼬리가 멀어진다.
안도, 기분 좋을 때 보이는 현상이다.
“…….”
나는 난감한 눈으로 리세라를 보았다.
리세라는 생글 웃었다.
“안 돼요?”
“아니, 그냥 좀 당황스럽네.”
부모가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는 딸에게 어떻게 싫은 소리를 하냐.
나는 자식에게 부부 문제를 끌고 들어갈 생각이 없다.
뭐, 리세라의 주장도 맞기도 하고.
왠지 행동거지가 딱딱한 랑에이에게 맡겨 두면 일이 제대로 진행이 안 될 것 같다.
“두 분이서만 함께 외출하신다니 저도 좀 질투가 나네요.”
“같이 갈래?”
“농담이에요. 전 언니랑 같이 놀고 있을 테니 잘 다녀오세요.”
리세라는 내 의자 등받이를 잡고는 느릿하게 몸을 숙였다.
“……속상하셨으면 죄송해요.”
“괜찮아.”
리세라는 밀어붙여 놓고는 또 내가 마음이 상했을까, 우려하고 있었다.
이런 딸에게 어떻게 화를 내냐.
내가 웃어 버리자 리세라는 안도하면서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아빠.”
이게 바로 일할 맛 난다는 거지.
나는 나와서 바로 하인켈을 찾았다.
랑에이와 둘만 움직이면 분위기 어색해질 것 같다.
사전 정보도 필요하고.
그래서 완충재로 데려갈 생각이었다.
“주군께서 중앙경찰청에 직접 가시겠다고요?”
“아, 랑에이랑.”
“……어, 음. 경찰청창을 만나시려고요?”
하인켈이 난감하게 머리를 긁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사전 약속을 잡아야겠지만 명색이 황후니까 잠깐은 시간 나겠지. 왜?”
“주군께서는 수인에 대해서 잘 모르실 것 같은데, 음……. 이걸 어떻게 설명드려야 하나. 안 그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뭔데?”
“극비 정보라서 보통 사람은 모릅니다. 하지만 랑에이 전하와 중앙경찰 사이에…….”
하인켈은 계속 난감해하면서 머뭇거렸다.
내가 시선으로 재촉하자 하인켈이 일어나면서 말했다.
“자세한 건 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주군께서 들어 보시고 결정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