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62)
빗속의 웃음처럼, 눈물처럼
랑에이.
내 둘째 부인이자 호랑이 수인, 그것도 각별히 강력한 백호다.
수인의 고유 능력은 육체 강화.
물론 마력을 쓰면 어떤 종족이건 육체가 강화되지만 수인은 그 효율이 특히 뛰어나다.
육탄전으로 한정하면 수인은 카라카스의 종족들 사이에서 1, 2위를 다툴 정도다.
그 수인들 중에서도 랑에이는 최강으로 군림했다.
반면 다크엘프는 약하다.
무력만 따지면 인간과 더불어서 최하위로 논의될 정도였다.
그 랑에이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암살여왕을 가로막았다.
“여왕님.”
다른 다크엘프들이 긴장해서는 불렀다.
전후 사정은 몰라도 지금 병력으로 랑에이와 싸우면 이길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암살여왕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얼굴이었다.
“랑에이, 방해하면 너도 죽인다.”
“……왜 이렇게 화가 났지?”
랑에이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지켜보던 나는 더 기가 막혀서 물었다.
“아니, 넌 어디서 튀어나왔어?”
사실 암살여왕이 접촉해 올 거야 예상했다.
알베르트에게 보자고 말을 전하기도 했고.
하지만 랑에이는 진짜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랑에이는 잠깐 틈을 두고는 말했다.
“파티장에서는 너무 늦었다. 가면을 잘 몰라서.”
“엉뚱한 답을 하시는……. 잠깐, 계속 날 따라다녔다는 이야기냐?”
파티장이라면 케드릭 사건 이야기다.
말하는 걸 보니 쭉 스토킹 했다는 거잖아.
랑에이는 흘끗 나를 돌아보았다.
남자도, 여자도 반하게 만들 정도로 늠름한 미모는 무표정했지만…….
“지금 혹시 양심에 찔려 하는 중?”
“……으음.”
말끝을 흐린 랑에이는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셀렌, 병력을 물려라. 여기는 전우들이 잠든 땅, 여기서 피를 보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 자리가 아니더라도, 리브라타의 아들을 상하게 만드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
“비키라고 했을 텐데.”
“못 비킨다.”
팽팽한 대치.
하지만 이 병력으로 무력 충돌이면 암살여왕이 불리하다.
“…….”
암살여왕이 나를 쏘아보는 시선.
확 타오르는 불이 가라앉고, 차가운 얼음이 된다.
그 눈은 기회가 오면 반드시 나를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너답지 않아, 이셀렌. 이성을 찾고 대화로 풀지.”
정작 랑에이는 눈치도 없는 제안이나 하고 있었다.
암살여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랑에이, 너는 전에 오르카를 구해 줬지. 이 자리는 내가 물러갈 테니 빚은 없던 걸로 하지.”
“오르카를 구한 건 내가 아니라 리젠 리브라타다만.”
“…….”
암살여왕은 무시하고는 몸을 돌렸다.
당연하지만 암살여왕도 오르카를 구한 게 나라는 거야 이미 알고 있겠지.
그저 지금 랑에이에게 한 수 접어주는 이유,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물러갈 명분이 필요해서 거론한 거다.
하지만 랑에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거에 여전히 약하네.
암살여왕과 다크엘프들이 떠나간다.
그래도 랑에이는 딱딱하게 서서 긴장을 풀지 않았다.
주변의 위험을 살피는 맹수처럼 좌우를 둘러보고, 머리 위의 호랑이 귀를 쫑긋거린다.
“비가 와서 후각도 무딜 텐데 그만하지.”
“…….”
내 말에 랑에이는 묵묵하게 돌아보았다.
빗속에 우두커니 선 아름다운 백호.
금색 눈동자로 나를 빤히 보던 그녀가 불쑥 말했다.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다. 따라다니지 않았다.”
“……시간 걸려서 짜낸 거짓말이라는 게 그거?”
“설사 따라다녔어도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원래도 담백한 랑에이는 긴장하거나 전투 상황이 되면 더욱 단순해진다.
뇌 내 처리를 최대한 신속하고 빨리, 대신 직감과 야성을 극도로 발달시키는 거다.
즉,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못 한다.
“…….”
하지만 랑에이의 태도는 여전했다.
빗속에서 쫄딱 젖은 호랑이가 내 눈치를 쭈뼛쭈뼛 살핀다.
객관적으로 불쌍하다.
“……아, 뭔데.”
갑자기 와서 왜 그렇게 청승맞게 보는데.
그때 리세라가 말했다.
“랑에이 어머니,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이 위험할지도 모르겠네요.”
“이셀렌은 물러갔을 텐데…….”
“집까지 같이 돌아가실래요?”
리세라는 랑에이의 말을 끊고는 빠르게 말했다.
랑에이는 머뭇거리면서 내 눈치를 보았다.
“……아, 거. 보기 좀 그러니까 어디 가서 우산부터 사요.”
황후나 되는 여자가 혼자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빗속에 우산도 없어.
원래도 주변머리가 부족해서 내가 챙겨 주긴 해야 했는데.
리세라는 빠르게 말했다.
“일단 우산부터 사 오세요. 그리고 밖에서 조금 기다려 주실래요? 같이 돌아가게요.”
“알겠다.”
탁, 탁, 타아악!
랑에이의 달음박질, 세 걸음 만에 이미 기와집도 훌쩍 뛰어넘는 도약이 되었다.
순식간에 멀어진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왜 저런데?”
리세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버지를 뵙는 게 부끄러우신가 봐요.”
“……어.”
아, 깜빡했다.
나는 웃으면서 리세라를 돌아보았다.
“지금 무슨 소리신지?”
“…….”
부정해 버렸다!
이미 리세라는 다 눈치챘는데 부정해 버렸어!
하지만 왠지 양심에 찔리고, 마음이 켕겨서 나도 모르게 해 버렸다!
300만 원짜리 그래픽 카드를 사 놓고 와이프에게 15만 원짜리 중고로 샀다고 거짓말했는데, 아내가 인터넷에 검색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기분이야!
“아버지.”
“……아, 아니. 그게 아까부터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저 진짜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거든요?”
리세라는 나를 빤히 보았다.
아주 빤히.
“물망초예요.”
“어?”
“오늘 가져온 꽃,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걸로 골라 달라고 부탁드렸죠? 그런데 당신은 물망초를 골라 왔어요.”
나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아니, 그야……. 전에 리브라타 저택에서 물망초를 꺾었잖아. 그래서…….”
“쉘터.”
“예?”
“로열 클래스에 특수 쉘터가 숨겨져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나요? 그건 황후분들도 잘 모르는 거라고 하던데요. 하지만 당신은 어딘지 딱 알고 저에게 피해 있으라고 했어요.”
리세라가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들어 보니 만약의 경우에 전복 사고가 나도 그 쉘터 안은 안전하더군요.”
“……아, 그거야 뭐. 로열 클래스라면 당연히 비상 통로, 세이프 존쯤은 어련히 있겠지?”
딸아이는 자기가 어떻게 알았는지 풀어내고 있었다.
나는 다 들통났는데도 변명하고 있고.
리세라의 목소리가 매섭다.
“그럼 방금은요?”
“……뭐가?”
“비가 오는데 왜 저는 한 방울도 안 젖었나요? 방금 당신은 두 번이나 양손으로 저를 부축해 주셨어요. 우산은 어떻게 처리하셨죠?”
“어, 목과 어깨 사이에 껴서 들고 있었지.”
“아버지는 예전에 저한테 신기한 걸 보여 주시겠다고 하면서 물건을 띄워 보이셨죠. 비밀이라면서요.”
리세라가 한숨을 쉬었다.
“이래도 계속 부정하시면 저 화내요?”
“그래요, 염동력 썼어요.”
항복이다.
내가 두 손을 들었는데도 리세라는 차분하게 따졌다.
“무엇보다 아버지, 말씀하시는 게 그냥 아버지잖아요. 저나 어머니에게 이리 편히 대하고 반말하는 사람이 많은 줄 아세요?”
“거, 말 좀 편하게 할 수도 있지. 인간이라고 존댓말만 해?”
나이 따져서 예의 차리면 인간은 모든 종족에게 존대해야 한다.
그래서 카라카스의 이런 어법은 대충 눈치대로였다.
물론 그걸 감안해도 내가 좀 막 나가긴 한다만…….
리세라는 계속 말했다.
“방금 이셀렌 어머니를 몰아붙이는 게 보통 담력으로 가능한 줄 아세요? 처음 보는 사람은 긴장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해요.”
“아, 아니. 생각해 보니 나도 가끔 존댓말 했잖아.”
“아버지의 존댓말은 그냥저냥 적당히 대충 하시는 게 너무 티가 나요. 혹은 지금처럼 가슴에 찔리실 때 하시죠.”
“그래요. 따님이 그러시면 그런 거겠죠.”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가 시릭입니다. 시릭 카라카스가 100년 뒤에 리젠 리브라타로 환생했어요. 왜 이렇게 됐는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묻지 마세요.”
“왜 자꾸 어려워하세요?”
“그야…….”
나는 새삼 마른침을 삼켰다.
리세라는 앞이 안 보이니까.
아버지란 놈이 대체 뭘 했냐, 막 그런 생각이 든다.
“……미안해서 그렇지.”
“제 눈이요?”
나는 한숨으로 대답했다.
리세라의 눈이 나아지고 있다지만 그 전에 긴 암흑 속에 있었다.
그것만 생각하면 안쓰럽다.
고개를 가로젓던 내 눈에 저 멀리 떨어진 안개꽃이 들어왔다.
이셀렌이 가져온 꽃다발.
“잠깐만.”
꽃에는 죄가 없지.
나는 염동력으로 꽃다발을 끌어오고는 묘비 앞에 놓았다.
내 무덤에 내가 꽃을 놓다니, 참 이상한 기분이다만.
정리한 나는 두서없이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진짜 할 말이 없다. 그냥 뭐…… 어디부터 말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으응, 아니에요. 제 눈은 아버지 탓이 절대 아닌걸요. 제가 한 거예요.”
“그래도 내가 오래 살았으면 이런 일은…….”
“아빠.”
리세라가 어린 시절처럼 불렀다.
내가 쭈뼛거리면서 고개를 들자 리세라는 부드럽게 말했다.
“시력을 잃은 게 당연히 좋은 일은 아니죠. 괴로워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고마워하고 있어요.”
“응?”
비가 내리는 어둠 속에서.
리세라는 활짝 웃었다.
“앞이 안 보여서…… 누구보다 빨리 아빠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까.”
“…….”
사람은 눈으로 보는 정보에 의존한다.
내가 시릭처럼 말하고 행동해도 그냥 이상한 놈이라 여길 뿐 시릭의 환생이라고는 상상하지 않는다.
하지만 리세라는.
리세라는 눈이 멀었기에 그 시력의 선입견을 떼고 나를 보았다.
오로지 내 목소리와 행동만으로.
그래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돌아왔다는 걸.
“아빠.”
날 부르는 리세라는 웃고 있었다.
내 딸은 웃으면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그래, 세라야.”
나는 염동력으로 우산을 띄우고는, 양팔로 리세라를 끌어안았다.
“나다. 내가 돌아왔다, 세라야.”
“아빠.”
리세라는 나직하게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는 꿈인 줄로만 알았어요.”
내가 리브라타 저택에서 리세라를 재웠을 때 일이다.
나는 이미 다 큰 딸의 머리를 만져 주면서 속삭였다.
아이를 다루듯이.
“놀랍게도 꿈이 아니란다. 지은 죄가 많아서인지, 또 이런저런 일을 하게 생겼구나.”
“예. 하지만 지금은…….”
리세라는 울음을 터트렸다.
“돌아와 주신 것만으로 기뻐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웃을래요.”
빗소리 사이의 눈물 소리.
나는 리세라를 끌어안고는 생각에 잠겼다.
암살여왕을 포섭하려던 계획은 실패했고 외려 적이 되었다.
테러범들은 칠죄신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는 게 명백하고.
앞으로의 정국은 더 험난하고 복잡해지겠지.
하지만 지금은.
“환영해 줘서 고맙다.”
그저 딸아이가 반겨 주는 게 기쁘고.
행복했다.
* * *
비 사이로 요염한 여자가 정신없이 걷는다.
쫓기듯이.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다는 듯이.
“여왕님.”
옆에서 부하들이 우산을 씌우려는 것도 무시하고.
정신없이 걷던 여자, 이셀렌은 큰 나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리젠 리브라타를 죽여야겠다.”
“예?”
다들 당황했다.
방금 상황은 리세라를 확보하기 위한 위협 아니었나?
리젠 리브라타는 지금 화제의 인물이었다.
철도헌병대의 특관이자 이번 사태 해결의 주역, 제국군과 중앙경찰은 물론, 귀족원에서도 어떻게든 접촉해 보려고 온갖 수를 다 쓰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 근처에는 3황녀, 4황녀까지 있고 이제는 2황후 랑에이까지 비호했다.
섣부른 이들은 2대 황제 후보 아니냐는 소리까지 하고 있는데.
그런 신성(新星)을 다크엘프들이 죽인다고?
그게 무슨 이득이 되어서?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크엘프들은 주저 없이 받들었다.
암살여왕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모두를 위한 모두의, 암살여왕은 늘 바른 판단을 내린다.
리젠 리브라타를 죽이는 게 다크엘프에게 이득인 게 틀림없다.
나무를 짚은 이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죽이되 내가 직접 죽이겠다. 산 채로 끌고 와라.”
“……예?”
4계위를 쓰는 인간을 생포하라고?
죽이는 것보다 곱절은 어려운 요구다.
빗소리 속에서 이셀렌은 띄엄띄엄 말했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는 안 된다. 12가문 중에서 리브라타가 눈엣가시인 이들이야 얼마든지 있을 거다. 찾아내서 의사를 확인해라. 조용히 진행해.”
“……아, 알겠습니다. 일단 알아보겠습니다.”
“오르카의 정보망은 차단하고.”
“예. 그러면 이제…….”
이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겠다. 물러나라.”
“…….”
나무 아래라지만 비가 세차게 떨어진다.
여왕은 우산은 쓰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명령은 절대적, 다크엘프들은 물러났다.
혼자가 된 이셀렌은 나무를 짚고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떨어지는 비, 어지러운 마음.
그리고 몸을 불태우는 분노가 치솟아 오른다.
종족 모두를 위해서 사는 다크엘프, 그들이 남에게 성을 밝힌다는 건 매우 각별한 의미다.
그게 다른 종족을 상대로 한 것이라면 정말 드문 일이고.
거기다가 여왕의 성이라면 더더욱 비밀스럽다.
라그리즈.
그렇게 부를 수 있는 남자는 단 한 명뿐.
그리고 이제는 없다.
그런데 그놈이 어떻게 입에 담은 거지?
“…….”
오르카, 그 어린 아들이 홀딱 넘어가서는 입을 턴 거겠지.
아들의 무책임, 질책하고 싶지만 그보다 참을 수가 없다.
수치스럽다.
리젠 리브라타가 라그리즈라고 부른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제의 무릎 위에 앉아서 속삭이던 시간이.
그가 뒤에서 끌어안고는 뺨에 입 맞춰 주던.
행복한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찌르르 울리면서…… 숨결이 가빠져 버렸다.
“……용서 못 해.”
그가 아닌 남자에게 두근거린 게 너무 부끄러워서 혀를 깨물고 싶다.
하지만 종족의 수장이 자살할 수 없잖은가?
그럼 상대를 죽여 버려야지.
이 수치, 부끄러움을 씻는 길은 그것뿐이다.
“반드시, 반드시…….”
잡아 놓고 온갖 고문을 다 맛보여 주고 죽이리라.
이제까지 암살여왕은 다크엘프 전체를 헤아리고 지령을 내렸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오로지 사감.
개인감정으로 리젠을 죽여 버리기로 결정했다.
다짐한 이셀렌은 나무를 짚고는 몸을 수그렸다.
눈을 꼭 감고.
쏟아지는 빗소리를 믿고 빌어 본다.
“시릭, 난 다시는…….”
빗소리가 그녀의 목소리를.
울음소리를 감춰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