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61)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암살여왕 이셀렌.
100, 아니 110년 만에 만나는 그녀는 어딘가 낯설고 멀게 보였다.
적막 속.
리세라가 문득 입을 열었다.
“방금 하신 말씀은 셋째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하셨던 말씀이에요. 죽은 자를 위해서 울어 봐야 의미 없고 굳이 운다면 살아 있는 자를 위해서 울어야 한다고.”
“황제의 대답은 담백했지. 그냥 두 번 울면 된다고.”
이셀렌의 대답.
두 사람은 잘 아는 이야기인가 본데 정작 나는 어리둥절했다.
저런 이야기를 했었나?
나는 나와 함께 싸운 이들, 나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던 이들은 기억한다.
하지만 저런 시시콜콜한 대화는 일일이 기억 못 하지.
이셀렌은 내 묘비를 보면서 말했다.
“난 그 대답이 너무 어리석고 멍청해 보였다. 비웃었다. 그렇게 울면 몸이 남아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대로 하더군. 처음에는 기만이라고 여겼는데, 여겼는데…….”
쏴아아.
빗속에서 이셀렌이 독백한다.
“아니었다. 그저 내가 황제는 거짓말쟁이라고, 작은 남자라고 치부하고 싶었을 뿐이었지. 그런 사람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종족을 뛰어넘어 모든 이들을 이끌어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겠다는 허풍 따위 가능할 리가 없다고.”
술회.
이셀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에는 그저 불가능하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그는 온갖 고난에서도 해냈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황제가 실패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
“황제가 성공할 때마다 두려워졌으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래, 어느 순간 나는 그가 실패하고 멈추기를 바랐다. 더는 하지 말았으면 했다. 해낼수록 위험해질 테니까. 성공을 거듭하면 칠죄신이 직접 나서게 될 테니까.”
이셀렌의 목소리는 작지만 빗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실패하고 적당히 멈추기를, 그냥 다 놓아 버리고 내 옆에만 있어 줬으면 했다. 그랬으면,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이셀렌은 하염없이 묘비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여기 다시 오고 싶지 않았다.”
“…….”
이게 암살여왕인가?
나는 적잖이 속으로 놀랐다.
지금 나를 안중에도 없이 이야기하는 여자는, 수많은 이들이 두려워하는 암살여왕은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단둘이 있을 때만 보여 주던 모습.
냉혹하고 요염한 겉과 다르게 부드럽고 섬세한 면이 있다는 걸.
내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달콤하게 속삭이던 시절도.
그리고 그때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았다는 것도.
이셀렌은 리세라를 보았다.
“눈은 좀 어떻지?”
“회복 중입니다. 명암은 구별되고 있어요.”
“같이 가자. 앞으로 네가 필요하다.”
갑자기 나온 본론.
나도 감상에서 빠져나왔다.
이셀렌, 암살여왕이 정말로 내게 꽃만 바치려고 올 리는 없었다.
암살여왕은 일방적으로 말했다.
“정국은 매우 불안정하게 요동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방향은 하나가 되어야…….”
“거짓말하는군.”
나는 나서서 딱 잘랐다.
암살여왕은 그제야 나를 보았다.
사람을 얼려 버릴 정도로 차가운 시선.
하지만 상대하는 내 입장에선 이게 더 편하다.
“리브라타의 막내아들, 네 공은 안다. 머지않아 상을 내릴 테니 물러나라.”
“지랄한다. 지랄해.”
“…….”
암살여왕은 기막힌 얼굴이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그녀에게 이런 쌍욕을 퍼부은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
아, 시릭일 때 내가 좀 험하게 말하긴 했었나?
하지만 멈출 생각은 없다.
“애들이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인 줄 아냐? 뗐다 붙였다 놀이하게? 필요하면 붙여 두고, 불필요하면 버리고?”
“만용을 부리는군.”
“옳은 지적이라서 듣기 싫은 거겠지. 결국 너는 오르카와 리세라, 그리고 다른 애들을 입맛대로 굴리려고 할 뿐이야. 리세라가 시력을 잃었다는 거, 인체 실험을 당하고 있었다는 거…….”
아, 끓어오른다.
“알고 있었지?”
“…….”
“다른 황후들은 모를 수 있어. 하지만 넌 알고 있었을 거야. 그렇지?”
제국의 정보를 관장하니까.
하인켈도 면사를 쓴 리세라가 활동하는 걸 보고 어림짐작했을 정도다.
암살여왕은 진즉에, 내가 환생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 놓고 방치했지. 그런 인간에게 어떻게 애를 맡기냐?”
“난 인간이 아니다.”
“좋겠네. 쓰레기라서.”
“…….”
아, 방금은 종족 차별 발언이었나?
하지만 나도 쌓인 게 많아서 참을 이유가 전혀 없다.
나와 아내들이 갈라선 것, 그건 일단 둘째 치자.
하지만 애들을 함부로 대한 건 못 참는다.
나는 암살여왕을 노려보았다.
“수작 집어치우고 물러나. 어차피 네가 하려는 일이라고는 다크엘프의 생존, 그거 하나밖에 없잖아? 여차하면 제국은 멸망해도 상관없단 거겠지.”
“그래.”
“…….”
즉답.
너무 기가 막혔지만 정작 암살여왕은 냉정한 얼굴이었다.
“천년제국은 이제 쪼개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
“……너 지금 그게 위정자가 할 소리냐?”
자기 나라가 망한다고 정치가, 그것도 최고 책임자가 말하냐?
비록 여기가 공식 석상은 아니지만 용서받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하지만 암살여왕은 냉정하게 말했다.
“어린 인간이라서 모르나 보군. 정확하게 말하지, 천년제국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건…… 황제가 너무 위대했기 때문이야.”
“…….”
“그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던 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미 알고 있다고? 칠죄신과의 싸움을 거론하는 게 아니다. 황제가 이룬 가장 기가 막힌 업적은 모든 종족을 하나로 묶었다는 거야.”
암살여왕은 단호하게 말했다.
“칠죄신을 쓰러트리는 것만이었다면 힘이 센 누군가가 언젠가 해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여덟 종족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건 오로지 황제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어.”
“…….”
“모두들 그를 사랑하고 그의 꿈에 목숨을 걸었다. 그는 그런 남자였다. 그래, 죽은 자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산 자를 위해 울어서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다.”
이셀렌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나조차도 사랑에 빠져 버렸지.”
너무나 아릿한 목소리.
빗소리의 침묵.
하지만 암살여왕은 방금 한 말을 부정하듯이 딱 잘랐다.
“하지만 그는 이제 없다. 황제는 없어. 다들 그를 향한 그리움으로, 황제가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환상에 젖어서 천년제국이라는 기틀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린 인간인 너 따위가 뭘 알까? 우리들에게 천년제국이란 황제가 남긴 유산, 그 자체인 것을.”
“…….”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제국의 종말을 말할까? 사랑하는 남자가 남긴 것조차도 지키지 못한다는 게 어떤 마음인지 아나?”
벼락처럼 쏘아붙이는 감정.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자기에 더 파괴력이 있었다.
암살여왕은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여기 오기 싫었다.”
“…….”
“인간, 다시 말하지만 천년제국은 멸망한다. 그게 현실이다. 황제를 기리고자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끝이다. 뿔뿔이 흩어져서는 각자 알아서 살아가게 되겠지.”
“국민들은?”
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
“어떤 주장을 펼치는지는 알겠는데, 국민들은?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온갖 소란이 일어날 테고, 수많은 사람이 죽을 텐데?”
“어차피 사람은 다 죽는다.”
“그딴 식으로 말할 거라면 당장 사표 써.”
노여움.
이제는 다른 의미의 실망감이 몰려왔다.
암살여왕의 주장, 뭔 말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단연코 헛소리다!
“국민의 목숨을 포기하고 시작하는 정치가 세상에 어디 있냐? 그게 뭐 자랑이라고 길게 말해?”
“현실을 무작정 부정하는 건 의미가 없다.”
“개소리 집어치우랬지. 포기할 이유를 대지 마. 애당초 사람 목숨을 포기할 거라면 왜 칠죄신과 싸웠지?”
암살여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12가문의 일원이라서 특별한 줄 아나 보군. 인간 사이에서 황제의 뒤를 이을 만한 자가 나올 거라는 기대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제 그 기대도 끊어졌다.”
“아, 불평 좀 그만해. 그냥 간단하잖아. 제국이 안 쪼개지게 휘어잡으면 그만인 거 아냐.”
“어떻게?”
암살여왕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한다.”
“어린 인간이 아까부터 허튼소리로군. 내가 널 가만히 놔두는 것은 여기서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기도 하지만…… 오르카와 리세라, 미리엘을 도운 공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얼굴을 봐서 무례한 언동을 참아 주고는 있다만.”
암살여왕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능멸은 용서하지 않는다. 네깟 놈이 어떻게 한다는 거냐?”
“그야…….”
내가 시릭이니까?
하지만 암살여왕에게 밝혀 봐야 좋게 흘러갈 것 같진 않은데.
그럼 교섭이다.
“지금까지 한 것처럼 해 주지. 대신에 앞으로 정보를 내놔라.”
“……뭐라고?”
“일하려면 정보가 필요해. 그리고 그쪽도 내가 해내면 별 불만은 없을 텐데?”
결국 지금 시대에서 제국의 통치자들은 황후들이다.
앞으로 일을 풀어 나가려면 협조를 받는 게 낫다.
모두와 협력하면 일이 번잡해지니 하나 정도하고만 손을 잡는 게 낫고.
그중에서 내가 점찍은 게 암살여왕.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까.
물론 나 개인은 황후들에 대한 감정이 이래저래 나쁘다만.
공무를 위해서라면, 또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타협할 수 있었다.
“필요한 정보는 최대한 제공하고 거짓 정보는 섞지 마라. 그냥 정보를 주지 않는 건 용인한다. 자, 이 정도면 됐지?”
“널 어떻게 믿지?”
“지금까지 한 걸 봐서. 그리고 앞으로 할 걸 지켜보면 되잖아?”
“…….”
암살여왕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소 혼란스러운 기색.
오늘 그냥 리세라만 데리고 가고, 또 향후에도 다크엘프의 존속만을 노릴 생각이었나 본데.
내가 뜻밖의 카드를 꺼낸 것이다.
지금 믿어 볼까, 말까 고민 중이겠지.
한참을 숙고하던 암살여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다. 비켜라.”
“아, 거…….”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싶다. 살려서 돌려보내 주마.”
말하는 암살여왕의 뒤쪽.
어느새 인영들이 나타나 있었다.
다크엘프들.
당연하지만 암살여왕이 혼자서 다닐 리가 없다.
이미 이 국립묘지를 요원들이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물샐틈없는 포위망.
“…….”
나는 잠깐 리세라를 돌아보았다.
뭐가 됐건 애가 있는데 위험한 일은 안 되지.
원래는 감추려고 했지만 알려 주자.
내가 누군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라. 라그리즈.”
“……뭐?”
이셀렌의 신음 소리.
휘리릭.
그녀의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우산이 바람을 타고 옆으로 날아갔다.
쏟아지는 비.
우두커니 선 은발의 다크엘프가 멍하니 나를 본다.
오직 한 사람만이 아는, 그녀의 성을 부른 나를.
이셀렌은 그리움과 간절함, 안타까움이 어린 눈망울로 나를 보다가…….
“감히 어디서…….”
이내 분노.
격렬한 살의가 떠오른다.
“…….”
왜 저래.
난 내 정체를 알리려고 던진 말인데 암살여왕은 확 돌아 버렸다.
“셋째 어머니.”
리세라도 이변을 느끼고 불렀지만 암살여왕은 나만 쏘아보고 있었다.
아.
저거, 날 오늘 죽이려고 작심했네?
여왕의 결심을 읽었는지, 그녀의 뒤로 다크엘프 요원들이 다가온다.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장소를 옮기지.”
내 무덤이라서가 아니다.
제국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용사들의 평안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제안에도 암살여왕은 묵묵부답이었다.
그저 나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을 따름이다.
“아, 거.”
상황은 일촉즉발이다.
일단 리세라를 데리고 빠진다.
그때.
쏴아아아아.
빗소리 사이로 들리는 기묘한 소리.
부우우웅.
이상한 공기의 흐름.
나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크엘프들도 느꼈는지…… 하나둘 올려다본다.
먹구름이 어린 밤하늘에서.
하얀 것이 날아오고 있었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거리를 날아온 그것이 나와 다크엘프 사이에서 대각선으로 떨어졌다.
끼기기긱!
착지한 다음에도 관성을 이기지 못해서 미끄러지는 몸, 하지만 떨어진 것은 부드럽게 선회하면서 내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검은색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 백발이 빗방울 사이로 휘날린다.
쏟아지는 비마저 증발시킬 정도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몸.
내게 등을 보이고 선 여자.
“이 남자에게 칼을 겨눈다면 내가 막겠다, 이셀렌.”
호선랑 랑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