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60)
물망초와 안개꽃
케드릭 후작 가문 사건.
내가 제이드 케드릭, 루크 케드릭을 처단하면서 일단락이 되었다.
하지만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다.
사건 해결을 주도한 건 철도헌병대였다.
철도에서는 절대 권력을 자랑하지만 외부 활동은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황도에서 보란 듯이 군사행동을 벌이다니.
본래 황도 치안을 담당하던 중앙경찰청, 그리고 제국군이 동시에 빡쳤다.
무력 단체들의 첨예한 대립과 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한편 민심은 흉흉해졌고.
사방이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목욕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후우우우.”
정신을 집중하고는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노랑, 3계위.
초록, 4계위.
이어서 손끝에 일어나는 파란 마력.
5계위였다.
“이거 뭐, 경험치 배율 300%냐?”
리젠의 성장 속도는 진짜 사기다.
물론 이번에는 좀 많이 싸웠지만 그래도 5계위라니.
수백 번을 굴러다녀야 다다를 경지다.
물론 마력전승을 받거나, 참전용사라면 5계위 이상도 많다.
하지만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3계위였잖아?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그다음에는 정신력…….”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는 욕조 속에서 내 몸을 띄워 올렸다.
염동력으로 내 몸을 띄우고 가만히 유지하는 것이다.
찰랑거리는 물속에서 고도를 가만히 유지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훈련이었다.
하지만 나는 3분이 넘게 해냈다.
“예전에는 1분도 못 버텼는데 정신력도 많이 좋아졌군. 그리고 세 번째 초능력.”
이젠 쓸 수 있다.
나는 벽걸이에 걸린 타월을 향해서 손을 뻗었다.
“으음.”
슈유융.
정신을 집중하자 내 손이 타월을 잡고 있었다.
염동력으로 끌어온 게 아니다.
타월은 벽에 걸린 그대로다.
내 몸은 여전히 욕조 안에 앉아 있고.
내 오른손, 손목 윗부분은 새카만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손만 뚝 떼어져서 벽 쪽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세 번째 초능력, 텔레포트였다.
“스승님은 텔레포트를 잘했는데. 난 영 아니라니까.”
나는 텔레포트를 제대로 못 쓴다.
카라카스 출신이 아니라 넘어온 영혼이라서 그런가?
그래서 이렇게, 신체 일부분만 이동시켜서 변칙적으로 써먹었다.
“자아…….”
나는 물에 뜬 채로, 손목에 쥔 타월을 살그머니 가져왔다.
슈우웅.
손목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타월도 잡고 있고.
“좋아, 이렇게 계속…….”
나는 다시 벽걸이를 노려보면서 정신을 집중했다.
텔레포트로 손만 이동해서 다시 타월을 걸어 놓는 훈련.
단순해 보이지만 쉬운 게 아니다.
일단 염동력을 계속 쓰는 상태, 여기다가 다른 초능력을 쓰면 정신력 소모가 빨라진다.
또 이동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손만, 눈으로 보고 조작해야 하니 거리감 문제도 있다.
뜻대로 되지 않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하지만 이런다고 정신력을 많이 부으면…….
빠가아악!
“아, 실수했네.”
타월을 빼려다가 벽걸이를 통째로 벽에서 잡아 뜯어 버렸다.
염동력까지 같이 써 버린 거다.
나는 욕조에서 일어나면서 벽이 박살 난 걸 살폈다.
“이것도 정신력이 좀 늘어나면 괜찮…….”
“무슨 일이세요! 특관님!”
갑자기 미레이가 뛰어 들어왔다.
목욕 중이던 나는 알몸.
미레이는 헌병대원복이다.
“…….”
내가 어이없어하고 있자 미레이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꺅!”
뒤늦은 비명을 지른 미레이는 180도 홱 돌아서는가 싶었는데…… 어째 계속 돈다?
1회전 해서 원래 자리로 돌아온 미레이는 더 얼굴이 빨개져서는 이번에는 우로 돌았다.
“회전, 멈춰!”
딱!
미레이는 벽을 보고 차렷 자세로 멈춰 버렸다.
“죄, 죄송합니다. 이관 미레이! 큰 소리가 들리기에 불상사가 있다는 착오로 무례를 범했습니다!”
“알았다. 나가라.”
“봐, 봤지만 괜찮습니다! 멋지십니다!”
“멋지게 좀 나가 줘라. 제발.”
내가 혀를 차자 그제야 미레이는 딱딱한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상태가 왜 저래?”
뭐 알몸을 보인 거야 사실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천년제국의 황제였다.
설마 내가 혼자서 때 밀고 머리 감았을까?
경호 문제 때문에라도 절대 안 되지.
수십 명의 미녀들이 나를 만지고 씻기고 그러다 보면…….
“어차피 볼 거면 남자 알몸보다는 여자 알몸이 낫지.”
뭐 그랬지.
내가 욕실 밖으로 나가자 미레이는 벽에 기대어 있었다.
내가 나온 것도 모르고 멍한 얼굴.
뺨이 발그스름하다.
“…….”
얜 입 다물고 있으면 미녀인데.
내가 가만히 보고 있자 미레이는 갑자기 뺨을 양손에 대더니 도리질을 쳤다.
몰라~ 몰라~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좀 알아라.”
“끼햐악!”
미레이는 깜짝 놀라서는 옆으로 뛰었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고 했다.
보다 못한 내가 손목을 낚아채서는 제자리로 돌려 주었다.
“하, 하아, 하아. 감, 감사합니다! 특관님!”
“벌써 여름이냐, 맛이 가게? 왜 이래?”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하면서 경례.
먹을 거 앞에 두고 군침 흘리던 엘프가 갑자기 FM처럼 구는데?
내가 의심스럽게 살펴보자 경례한 미레이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아르센 대장님에게 특별한 명 같은 거 받은 적은 없습니다!”
“뭐라디?”
“특관님은 아주 존귀하신 분이니 절대 거역지 말 것이며 원하시는 건 뭐든 들어 드리라고 했습니다!”
“…….”
그냥 내가 시릭이라고 광고해라, 광고해.
아르센이 대체 뭐라고 했는지 미레이는 완전히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아이고, 이 화상아.”
“저 안 뜨거운데요?”
“…….”
농담이면 좋겠는데 본인은 진지했다.
요즘 애들 어휘력이 문제야…….
“아, 됐고. 평소처럼 케이크나 처묵처묵해. 넌 그게 보기 좋아.”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미레이 이관, 지금 명령 불복종인가?”
“그럴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아, 짜증 나. 경례 그만 안 해?”
아르센이 대체 어떻게 갈궜지?
나는 투덜거렸다.
“아, 집에서 불편해. 평소대로 굴어.”
“…….”
“얼른 안 해? 비 오는 밖에서 굴러 볼래?”
양손을 허리 뒤로 모은 미레이는 쭈뼛거리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게, 저번에 특관님이 다 정리하신 걸 보고는 왜 아르센 대장님이 공들여서 초빙했는지 알 것 같아서요. 막, 그…… 존경하게 됐어요.”
“케이크랑 나랑 누가 좋아?”
“케이크요!”
“그래, 계속 그렇게 해.”
미레이는 고개를 크게 위아래로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아, 트, 특관님이 싫다는 건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케이크가 막, 너무 맛있는 거라서.”
“알았어. 저리 가.”
“그래! 맞아요! 친근하게 저도 레이라고 불러 주세요! 친구들이 부르는 애칭이거든요!”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미레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그래요, 뜨거운 여자야. 저리 가.”
“꼭 그렇게 불러 주셔야 해요?”
“밖에 나가서 남두수조권이나 수련해.”
미레이, 아니 레이로 개명한 아가씨를 밀어낸 나는 응접실로 향했다.
아, 생각해 보니 방금 알몸을 보인 남녀치고는 진짜 신경을 안 쓰네?
“뭐 편하면 좋지.”
응접실에 들어간 내게 보인 광경.
리세라와 미리엘이었다.
미리엘이 케이크를 포크로 잘라서 리세라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리세라는 눈이 잘 안 보이니까.
몸이 불편한 큰 동생을 열심히 도와주려는 작은 언니다.
내가 흐뭇하게 보는데 리세라가 발소리로 알았는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
미리엘도 내 쪽을 돌아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막 수줍은지 눈을 내리깔고는 아무 말도 안 한다.
갑자기 어색한 분위기.
하지만 그냥 나가기도 뭣해서 나는 일단 자리에 앉았다.
리세라가 조용하게 말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시나요?”
“당분간 쉴 생각입니다. 헌병대와 경찰, 제국군이 서로 기싸움 하는데, 좀 두고 보려고요.”
“그럼 오후에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나요?”
“남는 게 시간뿐이라서 곤란하던 상태였습니다.”
리세라가 부탁했다.
“아버지 무덤에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비가 와서 사람이 적을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아, 물론입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리엘이 나에게 수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도, 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
아, 너무 기특해!
하지만 티를 내면 그냥 이상한 아저씨가 돼 버리잖아.
나는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눌러 참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미리엘이 리세라에게 말했다.
“그럼 조심히 다녀와, 세라야.”
리세라만 가기로 미리 이야기한 모양이다.
내 무덤이라.
궁금하긴 하다.
오후.
하늘은 흐리고 비가 내렸다.
제국 국립묘지.
눈이 불편한 리세라는 보통 시녀를 대동한다.
하지만 이 자리는 나와 둘이서만 가고 싶다고 청했다.
그래서 나는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리세라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
전사자 구역.
쭉 늘어선 묘비들.
여기에 묻힌 이들, 내가 아는 이들이 많았고 모르는 이들은 더욱 많았다.
하지만 하나같이, 나를 믿고 칠죄신과 맞선 용사들이다.
세상을 지배하던 신에게 맞서는 사람의 용기.
진짜 영웅들.
하지만 황송하게도…… 내 묘지는 가장 안쪽에 세워져 있었다.
“저쪽입니다. 발 조심하세요.”
나는 리세라를 이끌고 천천히 나아갔다.
비가 와서 사람은 우리 둘뿐이었다.
하지만 내 묘지 앞에는 꽃들이 가득했다.
하얀 백합, 붉은 장미, 푸른 작약…….
“…….”
하나같이 생생한 게 바쳐진 지 얼마 안 됐다.
내가 죽은 지 100년인데도 제국민들을 나를 기려 주고 있었다.
“좀 도와주시겠어요?”
“아, 예.”
나는 리세라가 몸을 숙이고 꽃을 바칠 수 있게, 손을 잡고는 허리를 끌어안아서 부축했다.
넘어지지 않게.
아, 그런데 이러면 우산을 들 수가 없잖아?
나는 염동력으로 우산을 띄워서는 조심스럽게 조절했다.
나야 비와 눈 정도는 숱하게 맞고 잠들었지만 내 딸은 한 방울도 젖으면 안 되지!
“…….”
리세라는 가져온 물망초를 내 묘지 앞에 놓았다.
내가 고른 꽃을 내 무덤에 바치다니.
전생의 내 몸이 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다니 참 묘했다.
쓰으윽.
꽃을 바친 리세라는 조심스럽게 석판을 쓰다듬었다.
처연한 몸짓으로.
눈을 돌린 나는 내 묘비를 보았다.
「천년제국을 세운 남자. 초대 황제 시릭 카라카스.
세상을 억압하던 신을 물리치고자 자유를 부르짖은 소년.
생명의 존귀함을 노래하여 우리가 가축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깨우쳐 준 청년.
나라를 세우고 문명을 꽃피우던 중년.
모든 제국민의 아버지이자 아들이자 형제였던 남자.
함께한 벗들의 옆에 거룩하게 잠들다.
우리는 그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아빠, 저 왔어요.”
나직한 목소리.
리세라는 막막하게 묘비를 쓰다듬었다.
“하나만 대답해 주세요. 우리들이 미웠나요?”
“…….”
갑자기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리세라는 처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땅에 잠든 나를 향해서.
“모두들 아빠를 잊지 못하고 있어요. 다들 저를 아빠의 딸이라고, 아빠의 피를 이은 자식을 낳아야 한다고 했어요.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러고 싶었어요.”
목이 콱 막힌다.
부끄러워서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고 동시에 얼른 리세라를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
못 박혀 버린 내 귀에 리세라의 말이 들려온다.
“……그래요, 아빠가 저를 사랑해 주셨던 건 알아요. 하지만 어머니들은 달랐죠.”
조용한 술회.
리세라는 대답 없을 질문을 던졌다.
“아빠는…… 제 어머니가, 다른 어머니가 싫었어요? 얼굴도 보기 싫을 정도로?”
“…….”
“10년간 어머니들에게 얼굴 한번 보여 주시지 않았어요. 어떤 행사건, 공식 석상에서도 단 한 번도 같이 하지 않으셨죠.”
당시에 나는 도저히 아내들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쇼윈도 부부 하라고?
개소리 마라. 내가 황제인데 뭐가 아쉬워서 남들 눈치를 보냐?
뭐라 하면 바로 유리창 밖으로 던져 버릴 것이다.
신하들도 간언을 올렸지만 나는 딱 선을 그었다.
그걸로 입 여는 놈은 누구라도 용서 안 한다.
선 넘은 놈들 몇 번 유리창 밖으로 던져 주니 다들 조용해졌다.
빗소리만 들리는 시간이 흐른다.
리세라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얼른 리세라의 팔, 허리를 잡고는 부축해 주었다.
그동안 우산은 염동력으로 띄우고.
리세라가 바로 서자, 나는 다시 우산을 손으로 잡고는 리세라의 매무새를 고쳐 주었다.
“…….”
리세라는 가만히 나를 보았다.
투명한 눈동자로.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순간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답변이 동시에 떠올랐다.
무슨 소리냐는 시치미.
잘못 알았다는 부정.
지금은 말할 때가 좋지 않다는 회피.
침묵…….
아, 하지만 리세라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내가 바로 시릭이라고.
“나는…….”
순간 갑자기 리세라가 검지로 내 입술을 눌렀다.
체온이 내려가서 차가워진 손가락.
내 입을 잠근 리세라는 굳은 표정으로 내 등 뒤를 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서 나도 천천히 돌아보았다.
우산을 쓴 여자가 다가오고 있다.
손에는 하얀 안개꽃 꽃다발.
종아리 아래는 전부 가렸지만 반대로 허벅지 안쪽을 요염하게 노출한 검은 슈트.
연갈색 허벅지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다.
“…….”
그 위로 시선을 올리면 기막힐 정도로 가는 허리.
유혹적으로 솟아오른 젖가슴.
숨이 막힐 정도로 요염한 몸.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우산에 가려졌던 얼굴까지 보인다.
몸을 보고 기대한 마음을 만족시키고 남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
요염한 미색이건만 자수정 빛 눈동자는 가라앉아 있었다.
냉혹하게.
우리 두 사람을 향해서 일직선으로 다가온 여자가 10m 앞에서 멈춰 섰다.
그녀는 시릭 카라카스의 묘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 두 사람은 안중에도 두지 않고.
비에 젖은 묘비를 한참 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죽은 자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가치가 없지.”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없는 여자.
다크엘프의 수장.
3황후 암살여왕 이셀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