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54)
내 칼을 빌리겠다면
응접실.
나는 눈앞의 인간 남자를 쏘아보았다.
루크 케드릭.
3황녀 미리엘에게 치근거린다는 케드릭 가문, 그 둘째 아들이다.
상당히 곱상한 외모, 나이는 스물한두 살쯤 되었나?
“안녕하세요, 루크 케드릭입니다. 당신이 리젠 리브라타인가요?”
“그래, 용건이 뭡니까?”
“아, 이걸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하려나…….”
루크는 붙임성 있게 웃었다.
“요즘 소문은 아십니까? 제 형님, 제이드 케드릭이 매번 파티를 열고 3황녀 미리엘 전하를 초대한다는 거 말입니다.”
“…….”
“그걸 좀 말려 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나는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케드릭의 장남을 박살 낼 거다.
일단 육체적 고난을 안겨 준 다음에 이력서와 인간됨을 촘촘히 검증하고 최종적으로 불합격 판정을 내릴 생각이다.
하지만 그 동생이 왜 나한테 이런 의뢰를 하지?
루크가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일단 시국이 영 안 좋잖아요? 제국 철도가 테러당한 초유의 사태,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는데 흥청망청 파티를 벌이고 있으면 여러 가지로 아니죠.”
“만에 하나 제이드가 미리엘과 결혼하면 케드릭 가문의 앞날이 쫙 펼쳐질 텐데?”
“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동생인 제가 봐도 미리엘 황녀는 싫어하는 티가 역력하니까. 제가 여자라도 제 형은 질색할걸요?”
“그거야 그렇다 치고, 왜 우리에게 해 달라는 겁니까?”
“마침 여기에 리세라 4황녀가 계시잖아요?”
루크는 온화하게 웃었다.
“저희 파티에 한 번 와 주셔서 상황을 정리해 주셨으면 해서요. 4황녀 전하가 와서 말씀하신다면 형님도 마음을 고쳐먹지 않을까요?”
“너무 애매한데요?”
“시도는 해 봐야죠. 형님이 주제도 모르는 짓을 할수록 가문의 사정은 어려워지니까.”
루크는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저나 다른 사람들도 말려 봤지만 영 소용이 없어요. 그래서 외부에서 힘을 빌리려는 겁니다.”
나는 잠깐 생각하고는 말했다.
“케드릭가에서도 그렇다니 이 상황을 마무리는 하겠습니다. 단, 방식은 내가 고릅니다. 결투로 그쪽 형님 대가리를 깨 드리죠.”
루크는 좀 놀란 얼굴이었다.
“쉽지 않으실 텐데요? 제 형님은 이미 가문의 마력전승을 받으셨습니다. 충분히 강력한 분입니다.”
“결과는 이쪽에서 준비할 테니 그쪽은 사후 처리나 준비하세요.”
나는 루크에게 확인차 물었다.
“공개적으로 당신 형이 박살 나면 가문의 체면이 왕창 구겨질 텐데요. 그래도 괜찮다는 겁니까?”
“저로서는 별로 나쁠 게 없어서요. 깨져도 형이 깨지지 제가 깨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
뭐지, 이거?
내가 수상쩍게 보자 루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게 보지 마세요. 나는 사실 리젠 리브라타, 당신을 꽤 동경하고 있습니다.”
“…….”
“손위 형제인 로데릭, 칼비나를 제치고 가문의 선두에 서서 이름을 높인다는 평판이 자자합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습니다. 즉, 제 형님이 당신에게 깨지면…… 제게는 기회가 오는 셈이죠.”
루크가 빙긋 웃었다.
형이 고꾸라지는 걸 기회로 삼으려는 놈.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내놓으시죠.”
“예? 갑자기 무슨…….”
“내가 그쪽 좋은 일을 해 주는데 공짜로 할 순 없잖아요?”
루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리브라타가 원하는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철도 테러에 사용되었던 폭탄, 그건 제 형님과 관련이 있습니다.”
“…….”
나는 정색했다.
루크는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이 계속 파티를 연다는 건 아시죠? 그것도 황녀의 환심을 사려는 파티입니다. 당연히 열 때마다 적자가 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형님은 자기가 투자했던 사업이 크게 흥했다고, 그래서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한데 그게 아니다?”
“예. 저도 못 믿어서 형님의 뒷조사를 좀 은밀하게 해 봤거든요.”
“…….”
처음부터 자기 형의 약점을 잡으려고 했단 이야기네?
루크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털어놓았다.
“형님이 말하던 사업이라는 게 제국군 내부에서 폭탄을 빼돌리고…… 그걸 누군가에게 넘겨준 거 아닐까 싶더군요.”
제국해방군과 거래했다는 이야기.
루크가 덧붙였다.
“형은 사관학교 출신, 잠깐 제국군에 몸을 담았었거든요. 그때 인맥들이 제법 있던 걸로 압니다.”
“그럼 증거는?”
“심증은 있습니다. 철도 테러 직후에 제가 슬쩍 떠보니 형은 눈에 띄게 당황하더군요. 바보가 아니라면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이제야 깨달은 거겠죠.”
루크는 가볍게 말했다.
“아직 제국군의 내부 조사에서 형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온다면 그때는 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케드릭 가문 전체의 문제가 될 겁니다. 저로서는 그건 막아야 하거든요.”
“내부에서 정리를 못 하니까 외부의 힘을 빌리러 오셨다?”
루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라타가 철도 테러 사건을 오르카 황자와 함께 해결했단 이야기도 들었으니까요. 당연히 폭탄의 출처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네 형을 죽여 준다면 너는 폭탄 관련 정보를 모두 다 긁어모아서 넘겨주겠다. 결국 거래 신청이군요?”
“예. 형이 위험한 다리를 건너면서 받은 돈까지 찾아서 싹 다 드리겠습니다. 그런 돈은 있어 봐야 제국군에게 꼬투리나 잡힐 테고요.”
이놈,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능구렁이다.
자기 형을 차도살인을 하고자 온 건데…….
루크가 말했다.
“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한다면 파티장에서 해 주세요. 제가 초대장을 보내면 리세라 황녀와 당신, 단둘이서만 와 주시고요. 만에 하나 당신이 형님과의 대결에서 패배했을 때, 저로선 변명이 필요하거든요.”
“받아들이죠. 계약서 씁시다.”
“……이런 건 계약서가 오갈 이야기가 아닐 텐데요?”
루크가 난색을 표했다.
자기 형을 처리해 달라는 걸 문서로 남기기는 뭣하겠지.
하지만 나는 정색했다.
“케드릭 후작가는 12가문 안에서도 9위 정도는 하잖습니까? 12위인 우리로서는 구두 약속은 불안하죠.”
“으음.”
“리브라타로서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데 계약서 하나 못 쓰겠다는 겁니까? 이러면 나도 좀 생각이 달라지는데요.”
내가 세게 나가자 루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정 그러시다면 쓰도록 하죠. 단, 이 계약서는 앞으로 1년 이후에 개봉되어야 합니다. 그걸 특약으로 넣어 주세요.”
“그렇게 하죠.”
나는 순식간에 계약서를 작성했다.
내가 케드릭의 장남과 결투하면 루크가 제국군의 폭탄 관련 자료들을 싹 넘겨주겠다고.
루크는 여유롭게 말했다.
“뭣하면 다크엘프 공증인까지 세우셔도 됩니다만.”
“그건 다음 기회로 미루죠.”
서로 사인하고 계약서 교환 완료.
용무를 마친 루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배웅하는 척, 일어나면서 일부러 무릎을 테이블에 부딪쳤다.
타아악!
테이블이 요동치면서 내 앞의 포크가 루크의 얼굴을 향해서 휙 날아갔다.
보통 이 각도로는 안 되지만 염동력까지 써서 날린 것이다.
탁.
루크는 포크를 손으로 공중에서 잡아챘다.
“이런, 위험했군요.”
“아이쿠, 나의 실수.”
루크는 웃으면서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조만간 연락드리겠습니다. 늦어도 사흘 안에.”
“기다리죠.”
나는 테이블을 짚고 생각에 잠겼다.
루크가 저택에서 나갔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자, 그러면…….”
나는 테이블의 종을 울렸다.
아멜리아가 들어와서 물었다.
“리젠 도련님, 차를 더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하인켈에게 내가 급히 찾는다고 해.”
“예, 전달하겠습니다.”
잠시 뒤.
하인켈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는 루크 케드릭의 제안을 들려주었다.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보기에는 좋은 기회인데요. 실례지만 리브라타와 케드릭은 정치력에서 차이가 많이 납니다. 결투로 상황을 매듭짓고, 또 그쪽 내부에서 우리를 지원해 준다면 상황은 술술 풀릴 겁니다.”
“너무 빈틈이 없다. 그래서 역으로 막판에 틈이 드러났지만.”
“예?”
하인켈이 어리둥절해하는데 나는 식탁 위의 포크를 던졌다.
하인켈은 깜짝 놀라서는 고개를 젖혀 피했다.
“봐, 요원인 너도 피하잖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그냥 맞겠습니다.”
“그게 아니라 보통 피하는 게 정상이라고. 혹은 손으로 막으려 하고.”
하지만 루크는 손으로 잡았다.
하인켈이 의아하게 말했다.
“……꼬투리를 잡는 것 같아서 송구합니다만 저도 잡으려면 잡을 수 있습니다.”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문제다. 대화가 끝나고, 자리가 파하고 서로 인사하는데 이러면 바로 반응을 못 해.”
나는 설명했다.
“원래 교섭, 협상 테이블에 나온 놈들은 자기 목적이 이루어지면 마음을 푸는 게 정상이야. 하지만 루크 케드릭은 웃는 얼굴이면서도 끝까지 나를 경계하고 마음을 풀지 않았다는 거다.”
“……말씀이 맞긴 합니다만. 그냥 상대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 수도 있잖습니까? 아무튼 자기 형을 제거해 달라는 교섭을 하러 온 거니까요.”
“그런 놈이라면 이런 계약서를 안 쓰겠지?”
내가 계약서를 덜렁거려 보이자 하인켈의 얼굴도 굳어졌다.
“……앞뒤가 안 맞는군요. 차도살인은 대놓고 밝힐 일은 아니고 나중에 정치적인 약점이 될 수도 있는데요.”
“그래, 원래라면 루크도 계약서를 쓸 생각이 없었어. 내가 안 하겠다고 하니까 결국 한 거지. 물론 특약 조항이 있긴 하다만.”
나는 정리했다.
“루크의 속내는 아직 몰라. 하지만 형의 등에 칼을 꽂으려는 놈이 나한테는 못 꽂을까? 여차하면 배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진행한다.”
“그럼…… 좀 더 숙고하고 결정하시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이 제안은 받을 거다. 그러면 적에게 내가 경솔하다는 인식을 심어 두는 게 편하지.”
그리고 미리엘도 하루라도 빨리 도와주고 싶고.
나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미리엘 황녀는 케드릭 가문의 초대를 왜 거절하지 않을까?”
“그야…….”
“물론 입장상 12가문과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하긴 해야겠지만 정도 이상이야. 아니, 리세라가 했던 말에 따르면 오히려 거리를 둬야지.”
결혼할 거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니까.
거기다 5황후, 내 다섯 번째 아내는 이런 걸 두고 볼 성격이 아니다.
미리엘이 상대 남자에게 반했을 리가 없고, 만에 하나 그랬다고 해도 떼어 놨을 거다.
황후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거라면…….
“약점이 잡혔군.”
“예?”
하인켈이 깜짝 놀랐다.
나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너는 내가 요구한 정보들을 바로바로 알아 오지. 모르는 건 있지만 정보 전달 속도가 대단히 빨라. 그게 다크엘프의 정보망의 핵심이고.”
“…….”
“하지만 나는 그게 왜 가능한지 안 물어보지.”
하인켈이 굳었다.
이미 나를 주군이라고 부르면서 목숨까지 걸고 있지만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할 필요 없다. 안 궁금해.”
이미 알고 있고.
천년제국, 인간과 일곱 이종족들은 각각 고유 특성이 있다.
인간은 마력전승.
엘프는 정령마술.
다크엘프는 정보 전달.
그리고 천족은 치료약 제조.
천족이 어떻게 치료약을 만드는지는 특급 비밀이었다.
하지만…… 제국이 세워지고 서로 밀접하게 부대끼고 100년이 지났다.
각 종족의 비밀들이 누설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인켈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주군, 그게 송구합니다만. 케드릭 가문에 대해서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왕이 정보 차단했냐?”
“……예. 오르카 부장님의 말씀으로는 황도 쪽의 정보는 일절 들어오지 않게 변경되었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네가 크로셀 후작 사건에서 나를 감춰 주고, 오르카도 철도 테러에서 날 감춰 줬지. 하지만 암살여왕은 바보가 아니지.”
애당초 오르카의 정보망 자체가, 암살여왕의 손바닥 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수백 년을 정보 수집에만 매달린 여자가 오르카가 일부러 보고를 누락하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하인켈이 어둡게 말했다.
“……예. 오르카 님은 원래 철도 테러에서 아주 위험하셨을 겁니다. 그리고 여왕님도 처음부터 아셨을 거고요.”
그래서 한 박자 늦게 랑에이를 보냈지.
하지만 내가 먼저 상황을 정리했고.
“거기다가 여왕님의 종적까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원래 그렇지 않나?”
다크엘프들의 수장, 암살여왕.
온갖 정보를 꿰뚫고 있는 그녀는 굉장히 위험한 존재였고, 그만큼 적이 많았다.
하인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르카 부장님이 말씀하시기를 원래는 늘 연락이 됐다고 합니다. 만에 하나, 여왕님이 위기에 처하셔서 지시를 내릴 수 없을 때를 대비해서요.”
듣고 보니 그게 맞다.
만에 하나 습격이라도 당하면 지원을 받아야 하니까.
암살여왕은 예전에는 나한테만큼은 자기 상황과 위치를 알려 주었다.
“반대로…….”
내가 어디서 뭘 하건, 설사 다른 여자와 함께 있어도 자기는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고 했지.
남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 같은 여자라고 여겼지만 사실 둘만 있을 때는…….
나는 생각을 털어 내고는 말했다.
“다크엘프의 정보망은 이제 못 쓴다는 거네. 오르카를 통해서 정보가 들어온다고 해도 진위를 의심해야 하고.”
“……송구합니다.”
“아니, 괜찮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철도헌병대의 정보망을 써 보자. 한번 들러서 상황도 알아봐야겠군.”
내 예상대로라면 이번 일에는 지원 병력도 필요하니 헌병대를 쓴다.
아르센에게 칼도 받고.
그래도 하인켈의 얼굴은 어두웠다.
요원이니 정보의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테니까.
나는 짐짓 웃었다.
“걱정하지 마, 인마. 어차피 슬슬 때가 됐다.”
“예?”
부하 격려도 해 줘야지.
나는 테이블을 짚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제까지 애들 집어 던지고 다니면서도 세상에 크게 드러나지 않았지. 너나 오르카가 감춰 준 덕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파티장이고, 거기서 내가 케드릭을 잡아 버리면 세상이 나를 알게 된다.”
“그러면…….”
“그래, 내 실력을 감추는 건 이제 끝이다.”
암살여왕도 슬슬 나를 주목하고 있을 거고.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저쪽도 지금 준비하고 있겠지. 그럼 나도 준비 끝내고 가서 싹 밟아 버린다.”
철도헌병대로 가서 검을 받아 오고, 병력을 준비하고.
다들 보는 앞에서 12가문의 하나인 케드릭을 끝장낸다.
어떤 무대건 칼자루를 쥔 건 나.
어디까지 쓸어버릴지 결정하는 것도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