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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53화 (53/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53)

벼르고 있는데 와 주시네

다음 날 정오.

웰링 저택의 라운지.

다들 알아본 정보를 교환하는 중이다.

가장 먼저 로데릭이 말했다.

“칼비나와 접선은 못 했지만 제국군 주변의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다. 내부 단속에 대단히 철저한 게, 아무래도 진짜 폭탄이 유출된 것 같다.”

“그럼 보통 일이 아니잖습니까?”

한국군에서는 탄피 하나만 잃어버려도 난리 나지?

폭탄은 수십 배는 더 심각하다.

하인켈이 말했다.

“지금 제국군 관련자, 가문들을 조사해서 정보를 맞춰 보고 있는 중입니다. 추측이지만 몇 년 전부터 조금씩 빼돌린 것 같습니다. 제국군 안에서도 크게 당황하는 모양새입니다.”

“얼마쯤 나갔는데?”

“그거까진 모르겠습니다만. 굉장히 치밀하게 진행된 것 같습니다.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서울 불바다, 아니 황도 불바다?”

술렁.

다들 바짝 긴장했다.

황도에서 연이어서 폭탄 테러가 일어나면 어찌 될 것인가 상상하고 움츠러든 거지.

하지만 나는 내가 말해 놓고는 바로 부정했다.

“겁먹지 마라. 테러는 결국 정치적인 행위야. 무차별 학살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명분은 있어야 하고…… 그 폭탄은 테러범 놈들에게도 생명줄이야. 그거 다 쓰면 뒤가 없으니까.”

“예, 그러니까 아껴 가면서 쓰겠죠.”

“그럼 테러범이 다음에 어디를 노릴지 알아보는 게 가장 급선무겠군.”

멜리우스가 갸웃거렸다.

“그냥 귀족원이나 제국군 사령부를 노리는 게 빠르지 않나?”

“그게 뒤가 없다는 거야. 극단적으로 정부청사를 불태우건, 황성을 폭발시키건…… 혼란이 일겠지만, 결국 다음 타자가 자리를 채울 거다. 역설적이게도 지금 제국에는 황제가 없으니까.”

다들 깨달은 얼굴이었다.

만약 천년제국에 황제가 있다면?

테러범들은 그 황제를 쓰러트리는 데 집중할 것이다.

성공만 하면 국정을 마비시킬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100년이나 황제가 없는 덕분에 타격 지점이 오히려 모호하다.

내가 이야기를 정리했다.

“테러범들은 철도 테러로 오르카를 꾀어내서 노렸지만 실패했지. 하지만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다른 황자와 황녀들을 노릴 가능성이 커.”

“황후들은요?”

“황후들은 호위도 충분하고 폭탄으로는 못 잡아. 또 상징성도 떨어져.”

내 아이들은 황제의 자식, 시릭 카라카스의 정통성을 잇고 있다.

“제국해방군은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을 짜 놨어. 내가 막긴 했지만 놈들의 다음 계획을 유추해 본다면…….”

나는 잠시 생각하고는 말했다.

“테러 성공 직후에 가짜 범인을 내세우고, 선동해서 정국을 입맛대로 풀어 나간다. 그게 놈들의 계획이었을 거다. 즉, 제국해방군에는 정부 직원과 군대, 귀족, 심지어 이종족들이 있다고 봐야 한다.”

“……어마어마한 세력이로군요.”

다들 말한 사람을 돌아보았다.

손에 접시를 들고 케이크를 베어 먹던 엘프, 헌병대원 미레이는 멈칫했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먹으면 안 되는 거였나요?”

“미레이 이관님, 일단 다들 사정을 모르니 합류하시게 된 경위를 좀 말씀해 주시죠.”

로데릭이 점잖게 말했다.

미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경례해 보였다.

“폐하 만세! 저는 헌병대에서 지원 나온 이관 미레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리브라타 가문에 전폭적으로 협력하게 되었으니 선배님들의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디 부족이지?”

멜리우스가 묻자 미레이는 정색했다.

“저는 황제 폐하의 헌병대원, 종족과 출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케이크는 중요하지.”

미레이는 인사하는 내내 케이크 접시를 손에 들고 있었다.

내 지적에 미레이는 멈칫했다.

“이, 이렇게 맛있는 것에서 손을 떼면 예의가 아닙니닷!”

“더 있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아멜리아가 사람들의 찻잔을 채워 주면서 일렀다.

미레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여긴 정말 행복한 직장이로군요.”

“어, 아무튼 헌병대의 협조를 이끌어 내셨군요. 대단합니다, 주군.”

하인켈이 추켜세웠다.

내가 고개만 끄덕이자 하인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계속 언짢아 보이십니다만.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뭐가?”

“아니, 진짜 무슨 일이냐, 리젠. 나도 알겠는데.”

로데릭까지 거들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알리시아는 귀족원 쪽을 알아봤지? 3황녀가 결혼한다는 소문은 뭐야?”

“……음, 그게, 12가문의 하나인 케드릭의 장남과 천족의 3황녀가 서로 사랑에 빠졌다고 하던데요.”

“하하하하, 그래? 하하하하.”

내가 웃고 있자 어째 다들 내 눈치를 본다.

알리시아도 주저하면서 말했다.

“사교계의 소문이라는 걸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케드릭의 장남이 사흘에 한 번씩 파티를 열고 미리엘 황녀를 초대한다는 건 사실이에요. 3황녀도 번번이 얼굴을 비치는 걸로 보아서는 다들 두 남녀가 금방이라도 결혼하리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이유는 설명드리겠습니다.”

묵묵히 듣던 리세라가 정색했다.

“케드릭 가문이 천족의 지원을 받는다고는 하나 결혼은 완전히 별개의 일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족들이 모여서 상의한 적이 있습니다만 암묵적인 협약이 맺어졌습니다.”

“…….”

이건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

다들 마찬가지인지 귀를 기울였다.

황제의 서거 직후, 남은 황후와 자식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지금 시국에 우리들이 결혼한다면 굉장히 정치적인 문제가 됩니다. 가족 사이에, 또 나라 전체에 큰 갈등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만약 결혼하게 된다면 가족 모두의 동의를 얻기로 했습니다.”

지금 말한 게 인간 중에서 2대 황제가 나오면 내 자식과 결혼시킨다는 이종족의 계획이었다.

알리시아는 곤혹스럽게 말했다.

“말씀은 알겠지만 사교계에서는 지금 꽤 뜨거운 감자예요. 만약…….”

“만약 미리엘 황녀가 케드릭의 장남과 결혼한다면, 그놈이 유력한 2대 황제 후보다.”

내 말에 다들 흠칫했다.

나는 발로 바닥을 두드리면서 말을 이었다.

“거기다가 시국이 수상한데 제국 내부의 권력들은 갈라져서는 제대로 대응을 못 하고 있어. 당장 제국군과 철도헌병대가 서로 책임을 미루고 있지. 그걸 아는 사람들은, 황제가 있었더라면 추상같은 호령을 내려서 사건을 조사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황제만 있었더라면…….”

“이깟 테러 따위는 바로 해결됐을 것이다.”

멜리우스의 대답.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민이 가져 본 황제는 나 하나, 그리고 나는 꽤 유능했다.

“민심이 불안정해지고 황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데 황녀와 12가문 장남의 열애설, 너무 타이밍이 좋지 않냐?”

“설마…….”

“……케드릭의 장남도 제국해방군의 일원이라고요?”

다들 깜짝 놀랐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어. 거기다 미리엘, 아니 미리엘 황녀 전하는…….”

“언니는 가족과 한 약속을 저버릴 분이 아닙니다.”

내가 애써 말을 고치는데 리세라가 딱 잘라 말했다.

그래, 저게 내 마음이야.

미레이가 케이크를 냠냠 먹으면서 말했다.

“하지만 여자 마음은 모르는 거랍니다.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니까요.”

“걔 아직 애야.”

“에이, 백 살 넘었으면 다 컸…… 트, 특관님. 뭐 그렇게 무섭게 보세요?”

나는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넌 그냥 케이크랑 결혼해 버려라.”

“그래도 되나요! 야호!”

하인켈이 웃음을 참으면서 손을 들었다.

“듣고 보니 하나 걸리는 게 있습니다.”

“뭔데?”

“3일에 한 번씩 파티를 연다고 했잖습니까? 그 돈은 어디서 납니까? 케드릭이 12가문의 일원이라고는 하나 유달리 유복하지는 않습니다. 아니, 유복하더라도…… 상대는 황녀입니다. 체면도 있으니까 파티를 열 거라면 무조건 크고 성대할 수밖에 없어요. 가문의 재정이 버텨 내지 못할 겁니다.”

나는 턱을 긁으면서 대답했다.

“그래, 케드릭 가문의 회계장부를 보고 싶어지는 소리인데?”

“물론 정말로 황녀와 결혼한다면 손실을 메울 수 있을지도요. 하지만 자칫하면 파산합니다. 너무 위험한 도박이에요.”

“3황녀의 어머니, 5황후 전하께서는 지금 황도에 계시잖습니까? 그분에게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요?”

로데릭이 말하고는 리세라에게 기대의 시선을 보냈다.

리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5황후께서는 나서지 않으실 겁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아마 천족 내부 문제겠지.”

“……예. 그냥 제가 언니를 만나 뵙고 설득해 보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아요.”

리세라는 묘하게 말끝을 흐렸다.

뭐 가뜩이나 상황이 어지러운데 3황녀가 결혼하는 건 평지풍파다.

아버지인 나로서도 날벼락이고.

아니, 그냥 내가 날벼락이 되고 싶다. 어디 내 딸에게 눈독을 들이냐고 놈의 멱살을 잡고 탈탈 영혼까지 털고 싶은데…….

나는 일단 손뼉을 쳐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정리한다. 다들 하던 일을 미루고 일단 3황녀와 케드릭의 주변 정보를 파 본다. 그리고 하인켈, 너는 다크엘프 정보망을 통해서 케드릭의 재정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봐. 그렇게 정보를 다 모으고…… 나와 리세라가 케드릭의 파티에 참석한다.”

“예? 직접 가시겠다고요?”

“이런 건 직접 보고 파악해야 해.”

다들 눈치를 보면서 말하려고 하자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 거. 나 화장실 갈 때도 따라올 거야? 그냥 파티 참석하겠다는데 뭘 그렇게 염려해. 가서 술도 마시고 여자도 꼬시고 그럴 거야!”

“……아니, 그냥 싸우러 가는 얼굴인데.”

“특관님, 누구 죽일 것 같아요.”

미레이가 겁먹어서 덜덜 떨었다.

“그냥 졸려서 이래. 다들 가서 일해!”

나는 냉큼 눈을 감아 버렸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나가는 발소리들.

나는 미리엘을 생각했다.

천족.

머리 위에는 빛의 고리, 등에 하얀 날개가 달려 있는 종족.

말 그대로 천사 같은 외모.

하지만 그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무기질하고 엄숙한 삶, 감정 없고 표정 없는 인형 행세 하는 종족들.

하지만 미리엘은 정말 천사 같은 아이였다.

리세라가 밝고 친근하게 내게 다가왔다면 미리엘은 수줍어서 나한테 말도 잘 못 하는 애였다.

늘 자기 어머니나 리세라 뒤에서 나를 훔쳐보던 아이.

나와 눈이 마주치면 깜짝 놀라고, 내가 웃어 주면 얼굴을 붉히면서 얼른 뒤로 숨던 아이.

그래도 계속 보고 있으면 빼꼼 고개를 내밀고는 나를 보았지.

“…….”

그런 애와 결혼하겠다고 설치는 놈이 있다고?

나보다 강한 놈이 아니라면 인정 못 한다!

하지만 상대도 12가문이란 이름을 달고 있으면 보통 세력은 아닐 거다.

“정보를 모으고…….”

내가 들어가서 철저하게 박살을 내 준다.

꾸욱. 꾸우욱.

어깨가 눌렸다.

눈을 떠서 돌아보니 리세라가 안마해 주고 있었다.

다들 나가고 우리 둘뿐이었다.

“오르카가 이렇게 했었죠?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아, 아니, 누가 보면 어쩌려고.”

엄청 기쁘긴 하지만…… 누가 보면 큰일이잖아?

아니, 나도 일단 리세라에게 정체를 감춘 상태고.

하지만 만류해도 리세라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저를 도와주시고, 제 동생을 구해 주시고, 또 제 언니를 도와주시려는 분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니, 음, 황송합니다.”

“아까는 편하게 말씀하시면서 지금은 또 높이시네요. 보통 반대 아닌가요?”

리세라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나도 마음이 풀려서는 웃어 버렸다.

상황은 복잡하지만 리세라의 이 고운 마음을 대하니 그냥 기분이 좋다.

리세라는 내 어깨를 주무르면서 말했다.

“이번 일은 제가 도와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저와 미리엘 언니는 사이가 좋으니까요.”

“그야…….”

리세라와 미리엘은 어린 시절부터 잘 붙어 다녔지.

갑자기 손이 멈췄다.

리세라가 작게 말했다.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예? 물론입니다.”

“전에…….”

발소리.

아멜리아가 들어와서는 말했다.

“리젠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어디서?”

“12가문 케드릭의 차남, 루크 케드릭 님이십니다.”

조지려고 작정하니 알아서 와 주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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