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47)
이제부터 난 나대로
제국 철도 폭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차량은 가까운 플랫폼에서 정차했고.
사건 수습을 위해서 각지에서 온갖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난 휴식 중이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책이나 보고 과일이나 까먹는 중이다.
최고급 독실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면서.
다른 승객들과는 격이 다른 사후 대접.
오르카가 사재를 털어서 마련한 것이다.
병문안을 온 오르카가 지친 목소리로 물었다.
“너무 늦게 찾아왔군. 상태는 좀 어떻지?”
“간호사가 예쁘더라. 하루 세 번씩 와서 수액 갈아 주는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게 왜 이리 섹시한지 모르겠다.”
“잘 지냈다니 다행이다.”
“부럽냐? 저기 옆에 침대 하나 깔아 줄 테니까 너도 누울래?”
내가 계속 농을 치자 오르카는 그제야 좀 얼굴을 풀었다.
척 봐도 사후 수습에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일단 철도 운행은 재개되었다. 헌병대도 바짝 정신을 차린 모양이고. 2차, 3차 테러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다.”
“아마 철도 테러는 더는 없을 거다. 다른 쪽을 찌르겠지.”
나는 오르카를 가리켰다.
“일단 표면적으로 사건을 해결한 너.”
그리고 내 가슴을 가리켰다.
“크로셀부터 시작해서 계속 훼방을 놓은 나. 우리 둘을 점찍을 거다.”
“그 오크의 종적을 찾아봤지만 핏자국만 남았더군. 죽었거나 혹은 테러범들이 시체를 치웠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점을 돌렸다.
“너도 알았겠지만 황후들은 사건이 이 정도로 커질 거라는 걸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병력을 추가 투입하지 않은 건 승객이 싹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지. 이미 그 시점에서 위정자 실격이다.”
오르카마저도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오르카는 조심스럽게 변호했다.
“랑에이 어머니는 그냥 내 어머니에게 급히 이야기를 듣고 오셨다던데. 자객에 대해서도 자세히는 모르셨고.”
“그 말을 못 믿겠는데? 또 그게 정말이라고 해도 암살여왕은 다 알았을걸?”
나는 딱 잘랐다.
“이 상황에서 황후들끼리도 정보 공유가 안 되고 엇박자가 나고 있단 거잖아. 객관적으로 신뢰를 못 하겠다.”
“…….”
“아, 미안하다. 방금은 네가 좀 난감했겠군. 잊어버려라.”
오르카가 곤혹스러워하자 나는 얼른 덧붙였다.
부부 싸움 한바탕한 다음에 아들이 화해 주선하겠다고 찾아오면 이런가.
나도 지금 황후들의 일 처리에 화났지, 오르카에게는 전혀 마음이 상하지 않았다.
우리 아들이 이리도 기특한데 뭘 어쩔까?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조언을 구하고 싶다, 리젠.”
“뭔가?”
“너는 이미 크로셀의 일, 누님의 일을 해결했다. 또 이번에도 나를 훌륭하게 도와주었지. 만약 네가 없었더라면 제국해방군은 자기 마음대로 테러를 저질렀을 테고, 지금 상황은 더 끔찍해졌을 거다.”
오르카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될까?”
“암살여왕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 너도 의심해서군?”
나는 대뜸 파고들었다.
랑에이를 급파한 건 내 셋째 아내이자 다크엘프의 수장인 암살여왕.
즉, 암살여왕은 자기 친아들을 작전에 투입하는데도 계산했다.
오르카도 수긍했다.
“오크들은 칠죄신과의 최종 결전에서 모두 죽었다는 게 정설이다. 서쪽 사막 너머에서 오크들을 봤다는 목격담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풍문이었고…….”
“오크가 제국 내에서 활동하려면 거점이 있어야지. 그 거점을 제공한 건 당연히 제국해방군이겠지?”
“그럼 제국해방군을 파 보면…….”
“아니, 그건 시간이 걸리고 바로 결과가 안 나올 거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너는 신뢰해도 암살여왕은 믿을 수가 없어.”
결국 오르카가 얻는 정보도 다크엘프의 수장, 암살여왕이 선별해서 내려 주는 정보다.
이번 열차 테러 사건처럼 일의 규모를 모르고 당할 수도 있었다.
오르카도 복잡한 얼굴이지만 수긍했다.
내가 말했다.
“지금부터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할 수 있겠냐? 아니, 해야 한다. 제국 각지에 흩어진 네 형제자매를 황도로 싹 다 불러 모아라.”
“왜?”
“제국해방군은 또 황자, 황녀들을 노릴 확률이 크다. 너희들은 상징성은 큰데 무력은 약하니까.”
이종족 전사들은 오래 살수록 강해진다.
하지만 내 자식들은 아직 이백 살도 안 됐다.
나는 다시 말했다.
“모여서 의논 좀 하고 대책도 세우고 그래야지. 애들 모이는 동안 네가 제국해방군에 대해서 많이 파 보고. 암살여왕과는 별도로 정보망을 구축하고 나한테 전달해라.”
“…….”
“이게 형제자매들을 지키는 길이다. 알겠냐?”
암살여왕은 자기 친아들도 위험한 곳에 던져 놓았다.
다른 애들이라고 안 그럴까?
리세라를 떠올렸는지 오르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알겠다. 적어도 이 사안과 관련해서는 나도 어머니와 거리를 두겠다.”
“암살여왕만이 아니다. 다른 황후들도 믿지 말고 거리를 둬라.”
“그건 왜?”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인간들이 벌이는 12가문의 레이스, 그건 인간들 사이에서 2대 황제가 나오고, 그 가문을 지지했던 종족의 황실의 핏줄과 혼인으로 맺어진다는 계획이지?”
“그렇지.”
“역발상이 가능하지. 황자와 황녀가 다 죽고 딱 한 사람만 살아남으면 2대 황제 후보는 확 좁아진다. 어느 종족이 패권을 잡을지 결정된다.”
“…….”
오르카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은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비일비재한 일이다.
태종 이방원은 왕이 되고자 어린 이복형제들을 죽였다.
그게 내 가족은 아니었으면 했다만…….
오르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제국해방군은 지금 12가문의 레이스를 부수려고 한다고?”
“그건 모르겠다. 앞서가지 마라. 아무튼 애들끼리 뭉치고…… 엄마 믿지 마라.”
나는 선을 딱 그었다.
오르카는 복잡한 얼굴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하지만 황후분들을 믿지 말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군. 내 어머니가 나를 위험한 현장에 투입하셨다고 해도, 그건 제국을 위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을 거야. 나는 황자 이전에 다크엘프의 요원이고 부장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내 목숨을 구해 준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네가 말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나도 주의하겠지만, 황후분들을 너무 꺼리지 마. 그분들도 많이 힘들어하셨으니까.”
오르카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다들 혼란스러워했지. 형제, 자매들은 물론 황후분들도 넋을 잃으셨어. 세상이 암살여왕이라면서 꺼려하는 내 어머니는 사흘 동안 물도 입에 안 대셨지.”
“…….”
상상이 안 가는데.
오르카는 단언했다.
“네 지적은 이치에 맞다. 하지만 아버지의 관을 앞에 두고 통곡하던 분들, 나는 그분들이 황제 자리를 탐내서 끔찍한 일을 벌이실 거라고는 생각 못 하겠다.”
“그럼 제국해방군, 오크에 대한 정보는 왜 감췄는데?”
“모르지. 그러니까 다음에 여쭤봐야지.”
오르카는 담담했다.
“무턱대고 의심할 거라면 차라리 무턱대고 믿어라, 그래야 그나마 일이 진행된다는 게 아버지 말씀이셨다.”
“……하하하.”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갑자기 웃자 오르카는 의아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는 마냥 흐뭇했다.
진짜 애가 잘 컸다.
이제 아버지에게 충고도 할 줄 알아!
한참 웃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좀 지나쳤던 모양이다, 오르카. 그래. 상황을 알려면 정보를 모아야지.”
“……으음, 아무튼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도 연락을 넣어서 다들 황도로 오라고 하지. 그리고 정보를 모으고 대책을 논의해 보마. 이후에 정보 들어오는 게 있으면 하인켈에게 연락하지.”
오르카가 덧붙였다.
“아, 하인켈에 대해서는 이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리브라타 가문을 섬기기로 한 이유야 충분히 알았으니까. 훌륭한 선택이다. 내가 선처하마.”
“그래, 나도 모레면 황도로 출발할 계획이다.”
“그럼 황도까지 같이 가지. 혹시 또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르카가 말을 돌렸다.
“철도헌병대 쪽에는 어느 정도 사정을 밝혔다. 네가 헌병대를 쫓아낸 일도 있으니까.”
“괜찮아, 그쪽은 내가 정리할 거다.”
“…….”
내 눈치를 살피던 오르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랑에이 어머니가 널 따로 뵙고 싶다는데…….”
“면회 사절이다. 황후마마를 볼 면목이 없어서 긴급수술에 들어갔다고 해.”
나는 딱 잘랐다.
사실 내 둘째 부인, 호랑이 수인 랑에이는 계책을 부리는 타입이 아니다.
아마도 전후 사정을 모른 상황에서 달려온 것이리라.
하지만 전생의 아내를 대하는 내 방침은 확실해졌다.
어지간해서는 얼굴 보고 싶지 않다.
오르카가 돌아가고 나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정신력과 마력이 훌쩍 늘어나 있었다.
“마력도 4계위 중후반인가. 진짜 엄청 빠르게 성장하네. 세 번째 초능력도 머지않을 것 같고.”
똑똑.
노크 소리.
“아멜리아?”
문은 연 건 낯선 여성이었다.
회색 제복, 철도헌병대다.
여자는 방에 들어오지 않고 복도에 선 채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무례하다는 건 알지만 부디 잠시라도 이야기를 들어 주실 수 없을까요? 그게 내키지 않으시다면 부디 이것만이라도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양손으로 내미는 꾸러미.
과일 바구니였다.
과한 예절,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뾰족한 귀.
상대는 엘프였다.
“일단 들어오세요. 사람들 눈은 피하는 게 나을 테니까.”
“문턱을 넘는 걸 허락해 주시니 은혜가 이루 말할 데가 없습니다.”
여자는 병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바구니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양손을 가지런히 앞에 모으고 내 말을 기다린다.
나는 여자의 가슴께를 보고 확인했다.
“종족은 엘프시고 소속은 철도헌병대, 관리직이네요?”
“……예, 철도헌병대 이관(二官)인 미레이입니다.”
“헌병대로서의 소속감을 앞세워서 온 게 맞죠?”
혹시 내가 알던 것과 다른지 확인차 물어봤다.
그러자 미레이는 정색하며 말했다.
“저는 황제 폐하에게 신명을 바친 몸, 종족은 관계없습니다.”
제국군을 비롯한 정부 단체에는 다양한 종족이 있다.
나는 그들에게서 종족적 소속감을 지우고 나와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우선시켰다.
즉, 이 엘프 여자는 뼛속까지 철도헌병대다.
“그냥 병문안은 아닐 테고. 용건을 말씀하세요.”
“이번의 일로 아주 큰 실례를 저질렀는데 어찌 감히 함부로 말씀드리겠습니까? 그저 이번 환란에서 승객들을 구해 주시고 또 큰일이 벌어지지 않게 미연에 방지해 준 것만으로도 큰 은혜이기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따름입니다.”
“이러다가 내 전신에서 기름이 좔좔 흐르겠네요. 미끄러우니까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나는 짚었다.
“철도헌병대로서는 이번 일로 아주 코가 납작해졌을 텐데요? 더욱이 승무원이 저지른 테러니까.”
“…….”
미레이의 얼굴이 흐려졌다.
정직한 여자로군.
“승무원은 철도청 소속이지만 관리 감독은 철도헌병대가 하죠? 즉 철도헌병대의 관리 태만으로 테러를 허용했다는 게 될 텐데요.”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헌병대의 모두가 마음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럼 행동으로 보여 주셔야지. 콜레트라는 놈을 파직하고 헌병대장 옷 벗을 생각 하라고 하세요.”
“……예?”
“아, 나한테 이래저래 지시할 권한은 없죠? 하지만 아쉬운 게 있으니까 나한테 와서 딜을 걸려는 것 같은데?”
“…….”
미레이는 찔끔했다.
역시 교섭에 어울리는 여자가 아닌데?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계속 짚어 나갔다.
“하지만 헌병대장이 옷 벗는 정도가 아니라면 사방이 시끄러울 텐데? 다크엘프들이 사전에 경고까지 해 줬는데 사상자가 나왔어요. 이거 대체 어떻게 책임질 겁니까?”
“그건…….”
“나한테 온 건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하기 위해서겠죠? 하지만 오르카 황자나 다크엘프들의 입은 어떻게 막으려고요?”
“오르카 황자님께서는 리젠 님의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공을 나한테 돌렸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은 못 끝내요. 하지만 헌병대가 피해를 최소화할 방법은 있죠.”
“부디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연하지만 공짜로는 안 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내가 하는 일에 철도헌병대가 전면적으로 협조하세요. 나를 민간 협력자로 삼고 철도헌병대 특관(特官)의 권한을 부여할 것.”
특관은 각지의 지부장들 바로 아래다.
인사권도 가지고 있어서 해임도 가능하고, 군사 동원도 가능하다.
미레이가 멍한 얼굴이 되었다.
“특, 특관이라고요?”
“아, 그거! 권한이 너무 강력해서 폐지되었죠? 실무와 관리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으니까. 각 지역에 얽매이는 지부장 이상이란 이야기도 있어서요. 이번 기회에 부활시켜야겠습니다.”
“그게…….”
“너무 비상식적인 제안이라고요? 그럼 돌아가서 헌병대장에게 독대하고 보고하세요. 이관이라면 되던가? 불가능해도 무조건 하세요.”
“……저보고 아르센 대장님을 만나라고요?”
“아르센에게 이렇게 전하세요. 서재의 세 번째 서랍, 내가 열 수 있다고.”
헌병대를 움켜쥐는 제어장치다.
테러는 벌어지고 자식들은 위험한데, 옛 아내들은 믿을 수가 없다.
이제부터는 난 나대로 세력을 꾸린다.
여차하면 싹 밀어 버릴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