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42)
아들아 잘 좀 주물러 봐라
제국 철도 로열 클래스.
황제였던 나를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차량이다.
내 아내와 자식들도 이용하게 되었고.
“우와아.”
“저거 바네요.”
“천장 보세요. 샹들리에입니다. 저거 얼마쯤 할까요?”
“스스로 빛을 뿜는 기능이 있으면 가격이 확 올라갈걸요?”
다들 시골 촌놈이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량 전체를 라운지와 침실,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개조했으니까.
일행들과 떨어져서 돌아보던 나는 벽에 걸린 그림 앞에서 멈췄다.
옥좌에 앉아 있는 나, 시릭 카라카스.
그리고 나를 둘러싸듯이 주변에 서 있는 일곱 여자.
각기 다른 종족인데 하나같이 아름다운 미녀들이었다.
내 아내들.
“…….”
새삼 회한에 잠겨 있는데 아멜리아가 다가왔다.
“이게 황제 폐하와 아내들을 그렸다는 그림이네요.”
“아, 이거 일부러 많이 찍어 냈을 텐데?”
“그래도 도시에나 걸려 있으니까요.”
“저기 바닥에 혼자서 엉덩이 깔고 앉은 수인 여자가 호선랑(虎仙郞)이지. 누군지 알지?”
백발에 금색 눈.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졸리고 지루한 표정이었다.
그리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지루하다고 불평했지.
“예, 아름다운 분이네요.”
정작 아멜리아는 나만 신경 쓰고 있었다.
내가 몸을 돌리자 바로 뒤따라온다.
“리세라는 이미 침실에 짐 풀었지? 시녀가 돕고 있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한번 들여다봐 줘.”
“예.”
아멜리아는 잠깐 나를 걱정스럽게 보았지만 물러났다.
혹시 아내들 그림 앞에서 뭔가 티 났나?
내가 표정을 정돈하는데 오르카가 다가왔다.
“기다렸나? 이제 시작하지.”
“오냐.”
“……새삼스럽지만 좀 무례하군.”
“황제모욕죄는 있어도 황족모욕죄는 없을 텐데?”
나, 시릭 카라카스를 모욕하는 이는 즉각 처벌해도 된다는 게 제국의 법이다.
그게 내 아내와 자식에게도 적용되느냐?
해당 사항이 없다.
이게 상당히 정치적인 문제인데…… 내 아내와 자식들은 각자 종족이 다르다.
각 종족들은 은원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내 신하들은 황제모욕죄는 원했지만, 황족모욕죄는 반대했다.
여차하면 자기 종족에게 칼날이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황실의 권위라는 게 사실 황제 집약적이었지. 가령 엘프나 천족이 너를 황자로서 우대해 주냐면…… 꽤 아리까리하지?”
“그렇다고 계속 기어오르는 걸 봐줄 마음은 없다만?”
인간이야 나이와 신분을 따져서 예의범절을 정한다.
하지만 오래 사는 이종족이 상대면 예의범절이 복잡해진다.
나이만 치면 인간은 이종족 할아버지 앞에서 양반다리도 못 하지.
또 각 종족의 규범들도 판이하고.
나는 픽 웃었다.
“하인켈이나 군터가 내가 인간이고 귀족이라서 알아 모시겠냐? 여차하면 내 목 따려고 존대하는 거지. 그게 요원 커리큘럼이잖아?”
다크엘프들은 기본이 존대다.
듣는 상대방 기분 좋게 해 주고 방심하라고.
또 여차하면 상대를 제거하는 다크엘프 입장에서도 괜한 정이 붙는 걸 방지할 수 있고.
“…….”
오르카가 눈살을 찌푸리자 나는 씩 웃었다.
사실 이놈이 정말 까다롭게 예의범절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리세라가 나에 대해 좋게 말하니까 기분 나쁘고 부쩍 경계심을 품는 거지.
“이제 와서 구차하게 따지지 말자. 어차피 한판 뜨기로 했잖아? 날 이기면 얼마든지 형님으로 모시고 어깨도 주물러 드리지.”
나는 테이블에 앉아서 팔을 걷어붙였다.
“리세라가 걱정하는 거 봤지? 마력 없이 완력만으, 팔씨름으로 결판내자. 황자님.”
“황자가 아니라 부장이다. 네놈 팔모가지를 분질러 주지.”
오르카는 호언장담을 하고는 마주 앉았다.
내가 덧붙였다.
“아, 근데 그냥 하면 재미없잖아. 넌 이기면 뭘 내놓을 거냐? 리세라를 포기하는 거야 당연하고.”
“불경하긴! 누님의 거취를 내기에 걸려고 하다니!”
“그건 네 이야기고. 지갑 올려 봐.”
오르카는 의아해하면서도 지갑을 꺼내서는 테이블에 올렸다.
나는 가볍게 열어 보고는 말했다.
“그래, 돈 좀 있네. 내가 이기면 여기서 뭐 하나 시켜 먹는다?”
명색이 로열 클래스지만 공짜가 아니다.
가령 저 냉장고 안의 음료수나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도 따로 지불해야 한다.
황제였던 내가 직접 정한 법이고, 실제로도 돈 내고 먹고 마셨다.
이 철도는 국민들이 피땀 흘려서 건설한 것인데, 어찌 호의호식하겠나?
로열 클래스를 만든 건 보안상의 이유지, 사치 부리려고 만든 게 아니다.
오르카가 으름장을 피웠다.
“좋아, 내가 이기면 바로 다음 역에서 내리고 두 번 다시 누님에게 접근하지 마라.”
“이상한 오해를 하시는데, 그냥 몸으로 가르쳐 주마.”
가룰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쪼르르 달려와서는 심판을 자처했다.
“황자님, 리젠 도련님. 두 분 다 제가 셋을 세면 시작하는 겁니다.”
오르카는 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면서 잔뜩 힘을 넣었다.
그리고 나는…… 하품을 하면서 초능력을 발휘했다.
투시력.
오르카의 팔근육이 생생하게 눈에 보인다.
팔씨름은 악력, 완력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힘의 배분도 중요하다.
상대가 어느 타이밍에 힘을 주는지 보기만 해도…….
승부 시작.
20초 뒤.
“리젠 도련님, 승리!”
……투시력을 쓸 필요도 없었네?
오르카는 시작부터 잔뜩 힘을 주었고, 나는 적당히 버텨 주다가 힘이 빠진 타이밍에 반격했다.
그냥 이 리젠의 몸이 오르카보다 힘이 세다.
“헉, 허어억. 헉…….”
테이블에 쓰러진 오르카가 몸을 부들부들 떤다.
나는 머리를 긁으면서 말했다.
“야, 끝났지?”
“하, 한 판 더 해!”
“아니, 그냥 완력으로는 뭘 해도 뻔하겠는데? 넌 나보다 체구가 작은 데다가 근육량도 적거든.”
나는 환생 이후 꾸준한 트레이닝을 해 왔다.
나는 오르카의 몸을 살피면서 말했다.
“너, 운동 제대로 안 하지? 마력으로 보강한다고 해도 결국 막판에는 맨몸 싸움이 되는데, 단련 안 하냐?”
“하고 있다. 그래도 근육이 잘 안 붙어.”
“…….”
음, 하긴 다크엘프는 육체적으로 약하지?
나는 가룰에게 오르카의 지갑을 던져 주었다.
“야, 냉장고에서 뭐 먹고 싶은 거 하나 사 먹어.”
“예? 저만요?”
“걱정 마라. 다들 돌아가면서 먹고 마실 테니까.”
내 도발에 오르카가 울컥한 얼굴을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완력으로는 안 되지? 그럼 당구 한 게임 치자.”
오르카는 완력으로는 날 못 이긴다.
그래서 종목을 계속 바꿨는데…….
“포카드, 끝.”
“……마, 말도 안 돼.”
오르카는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지갑은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내 뒤에는 음료수를 빨고 있는 가룰, 조각 케이크를 먹고 있는 하인켈.
아멜리아는 손바닥만 한 인형 하나를 신기하게 보고 있었다.
배낭에는 비상 용품, 구급약 세트, 기념품.
전부 내가 이겨서 오르카의 돈으로 산 거다.
“슬슬 그만할까?”
“…….”
내가 카드를 다시 섞자 오르카는 불신의 눈으로 보았다.
의심의 시선, 나는 픽 웃었다.
“내가 속임수라도 쓰는 것 같아?”
팔씨름, 내기 당구, 도둑잡기, 다트, 포커…….
나는 이런 내기에서 초능력을 쓰면 백전백승이었다.
여차하면 염동력으로 조작하고 투시력으로 꿰뚫으면 되니까.
하지만 그럴 것도 없었다.
오르카는 성격이 너무 정직하고 직선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기 경험이 월등히 많았고.
“오르카. 리브라타의 도련님이 섞을 때도 딱히 다른 소리는 없었어요.”
리세라의 조언.
오르카가 연전연패하자 어느 순간부터 등 뒤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나는 으쓱거렸다.
“어느새 그쪽에 붙었네요?”
“죄송합니다. ……좀 안쓰러워서요.”
“으으음.”
오르카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누님을 되찾겠다고 나섰는데 오히려 걱정을 사고 있으니까.
카드를 내려놓은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자, 그러면 이제 내가 상품을 받아 볼까?”
“기다려 봐. 돈을 더 가져올 테니까…….”
“아니, 됐으니까 안마나 해 봐라.”
“뭐?”
“너 계속 상대해 주니까 어깨가 아프다. 와서 팍팍 좀 주물러 봐.”
가룰이 기겁했다.
“도,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황자님이신데…….”
“뭐? 여기에 황자가 어딨어? 난 방금 전까지 다크엘프 부장님하고 내기 당구도 치고, 사우나도 가고 그랬는데?”
“…….”
오르카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놈이 자기가 유독 다크엘프 부장이라고 강조하는 건 내기하면서 다 파악했다.
나는 능청을 떨었다.
“어, 우리 부장님은 자기가 이기면 부장이고, 지면 황자로 막 변신하시나 봐요? 아이고, 내가 몰라뵈었네. 황자님을 몰라뵈었어! 무서워서 지금부터 존대해 드려야지.”
“으으으…….”
부들부들.
오르카가 몸을 떨자 리세라가 거들었다.
“제가 안마해 드릴까요?”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
벌떡 일어난 오르카가 내 등으로 다가왔다.
싫어 죽겠지만 누님을 수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정작 리세라는 웃음을 애써 참고 있었지만.
“각오해라, 이놈.”
“마력은 쓰지 말고. 알지?”
꾸우우욱.
꾸우우욱.
오르카는 있는 대로 힘을 넣어서 내 어깨를 주물렀다.
그래 봐야 힘이 약해서 별로 아프지도 않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눈을 감았다.
아들이랑 놀고 이렇게 안마도 받는 게 참 즐겁다만.
“계속 안마하면서 들어라. 왜 직접 왔냐, 오르카?”
멈칫.
오르카의 손이 멈추자 나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알아들은 오르카가 다시금 어깨를 주무른다.
나는 리세라를 보며 말했다.
“리세라를 데리러 왔단 걸 의심하는 게 아니야. 누나를 걱정해서 동생이 마중 나왔다, 보통 가족이라면 몰라도 너희 둘은 황자와 황녀, 정치적으로 볼 수밖에 없지.”
리세라는 사실상 엘프의 약점, 치부다.
“리세라가 다크엘프의 보호를 받는다? 엘프는 마피아 새끼들이니 여차하면 다크엘프와 전면전을 택하지. 물론 그래도 다크엘프들이 리세라를 보호라는 이름으로 확보하고 싶어 할 거야. 하지만 네가 이렇게 전면에 나서는 건 너무 위험해.”
“…….”
“가령 엘프의 눈을 속이려면 나나 다른 인간을 내세워서 눈가림을 하는 게 정석이지. 한데 너는 이렇게 직접 접촉했고, 자칫하면 엘프―다크엘프 전쟁의 도화선이 된다. 이걸 암살여왕이 허락할 리가 없거든?”
나는 계속 말했다.
“가능성은 두 가지다. 네가 엄마가 하지 말란 짓만 골라서 하는 불꽃효자거나. 아니면…….”
“아니면?”
“암살여왕이 리세라를 데려오는 걸 허락할 정도로 상황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
덜컹덜컹!
순간 찾아온 정적, 차량 흔들리는 소리만 들린다.
“……후우우.”
오르카는 한숨을 쉬고는 다시 내 맞은편으로 돌아가서 앉았다.
그 어깨에 리세라가 손을 얹고.
오르카는 리세라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오르카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냥 시골 촌뜨기인 줄 알았는데 절대 보통 놈이 아니군. 누님이 괜히 믿고 곁에 둔 게 아니었어.”
“여기 사람들은 다 믿어도 되니까 빙빙 돌리지 말고 그냥 말해.”
오르카는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어머니에게, 조건부로 리세라 누님을 데려오는 걸 허락받았다.”
“그 조건은?”
“네가 크로셀 후작의 사건을 해결했다니, 놈에게 배후가 있단 것도 알겠지?”
이게 내가 알려고 했던 정보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르카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 조직의 다음 목표가 뭔지 알아냈다. 그래서 그걸 막으려는 중이고.”
“잠깐.”
“조직의 이름은 제국해방군.”
오르카가 말했다.
“놈들이 제국 철도를 폭파시키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