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41)
아버지는 아들의 장벽인 법
제국 철도.
로열 클래스.
푹신한 의자에 앉은 다크엘프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거너가 당했다고? 내가 분명히 조용히 모셔 오라고 했을 텐데?”
“좀 흥분하다가 갑자기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리브라타의 막내라. 성깔 더럽고 여자 밝히는 놈이라고는 들었지만 어처구니없군.”
“아니, 평판대로 생각하실 일이 아닙니다.”
군터는 정색하고는 말했다.
“전에 교섭 자리에서 멍청한 척을 하면서도 다 빼먹은 것도 그렇고. 방금도 거너가 뭘 해 보지도 못하고 당했습니다.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네가 실패했다고 상대를 후하게 평가하는 건 아니고?”
“……으음.”
군터는 말문이 막혔다.
앉아 있던 청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미친 망나니 놈에게 누님을 맡겨 둘 순 없지. 내가 직접 가겠다.”
“황자님, 굳이 직접 나서지 않으셔도…….”
“황자라고 부르지 마라. 현장에 나온 이상 나는 제국 북부 총괄부장이야!”
청년의 일갈에 다들 조용해졌다.
청년은 사납게 일렀다.
“이 일은 가능한 한 조용히 처리해야 해. 거기다 지금 누님은 몸이 약해지신 분, 각별히 예의를 다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해. 행여나 그 망나니 놈이 미친 짓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말도 안 됩니다. 설마 4황녀님의 옥체에 손을 대겠습니까?”
“보고서에 따르면 그럴 만한 놈이야. 자기 영지의 여자란 여자에게 치근덕거리다가 맞고 다니다니. 대체 뭐 하는 미친놈인지.”
청년은 품에서 빗을 꺼내더니 앞머리를 빗어 넘겼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다크엘프가 얼른 거울을 들어서 비춰 주었다.
은발 머리를 정돈한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단정해졌군. 가지.”
“포위할까요?”
“됐어. 내가 직접 담판을 지을 테니 둘만 따라와라. 뒤쪽 차량 애들 갖고 허튼수작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다크엘프들은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단지 상관이라서 이리 복종하는 게 아니다.
시릭 카라카스와 암살여왕 사이에서 나온 핏줄.
제국의 2황자 오르카였으니까.
* * *
나는 일단 객실로 들어가서 설명했다.
“오르카가 왔나요?”
리세라는 놀란 눈치였다.
하인켈도 심각한 얼굴이고
“그래, 다크엘프가 일 처리는 빠르다지만 설마 2황자가 직접 올 줄 몰랐다. 진짜 만사 제쳐 두고 왔나 본데?”
“만나 보고 싶어요.”
리세라는 담백하게 결정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어렵지 않지만 널 다크엘프들 손에 넘겨줄 순 없어. 그건…….”
“흠.”
갑자기 시녀가 헛기침했다.
뭔가 했는데 내가 아주 자연스럽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오르카 이야기가 나와서 나도 좀 경황이 없었다.
한데 리세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리브라타의 아들, 앞으로도 말씀을 편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신분의 차이가 너무 나는데?”
“당신이 지금 제게 상황을 알려 주시고 동의를 구하는 건, 절 걱정하면서도 선택권을 주려고 하시는 거죠. 넘치는 존중과 감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들 앞에서 반말하면 귀찮아져.”
“정 그러시면 사석에서는 말을 편하게 하셔도 되고요.”
리세라는 생긋 웃어 보였다.
“오르카는 어린 시절부터 절 따르던 동생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래, 알겠다.”
나는 하인켈에게 눈짓을 하고는 다시 복도로 나왔다.
문에 기댄 나는 새삼 둘째 아들을 떠올렸다.
“음…….”
다크엘프 오르카.
나와 암살여왕 사이에서 나온 아들.
내 기억으로는 꽤 얌전하고 내성적인 애였다.
책 읽는 거 좋아하고.
“아들이라.”
리세라를 볼 때와는 좀 다른 의미로 기대되는걸.
그런 내 시야에 복도에 아직도 쓰러져 있는 거너가 들어왔다.
“헉, 허어억…….”
“혹시 깨졌냐?”
드르르륵.
그때 바퀴 미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량을 순회하면서 먹을 걸 판매하는 차량 판매원이었다.
카트를 밀고 오던 그는 복도에 쓰러진 거너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니, 괜찮으십니까?”
“아, 저 친구가 좀 발작을 일으켜서 그렇지, 괜찮습니다.”
“끄으으윽.”
거너도 턱짓으로 대답했다.
일을 키우면 안 된다는 생각은 있나 보다.
차량 판매원이 머뭇거리자 나는 쓰러진 거너를 발로 쓱 밀어 버렸다.
“아이고, 이거 업무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거기 복숭아라도 하나 주시죠.”
내가 지갑을 꺼내려는데 판매원이 복숭아를 꺼내서는 던져 주었다.
“돈은 됐습니다. 곤란하신 일인 것 같은데 잘 푸시죠.”
“오, 감사합니다.”
공짜라니.
철도헌병대는 엉망이었는데 승무원들은 괜찮네.
판매원이 빠르게 지나가자 나는 복숭아를 콱 깨물었다.
“오, 이거 괜찮네.”
“이 무슨…….”
불쾌해하는 목소리.
성큼성큼 다가오는 다크엘프 청년.
짧게 친 은발, 귀티 나는 얼굴이었다.
청년은 따라온 다른 다크엘프 둘에게 턱짓했다.
“거너 과장을 데리고 돌아가 있어라.”
“예, 황자님!”
“부장이라고 불러라.”
엄하게 이른 청년이 나를 돌아보았다.
차갑게 식은 보라색 눈동자.
“네놈이…….”
“오르카냐?”
나는 신기하게 보았다.
내가 기억하던 내성적인 꼬마는 어디 가고 당당한 헌헌장부가 되어 있었다.
몸에 딱 붙는 요원복, 당당하고 절도 있는 자세기는 하나.
“키가 작네?”
“…….”
오르카는 지금 리젠의 어깨, 아니 가슴까지 오는 키였다.
어린 시절에도 작았는데 커서도 작네.
“……지금 뭐라고?”
“아니, 그냥 좀 놀라서 그렇다. 인상 쓰지 마.”
내가 손을 흔들어도 오르카는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음.
화내 봤자 귀여워 보인다!
다섯 살짜리 아들이 아빠 이겨 보겠다고 발 구르는 걸 보는 기분이 이런가?
오르카 딴에는 험악한 표정이겠지만 난 녀석의 어린 시절만 떠올랐다.
자기가 읽은 책을 들고 와서는 감상을 말하던 모습.
물론 감상과 별개로, 나는 언제라도 마력과 초능력을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르카는 어엿하게 성장했고, 다크엘프의 부장까지 올랐다.
지금 내가 가벼이 볼 상대가 아니었다.
“후우우우.”
한데 오르카는 긴 한숨을 쉬더니 표정을 고쳤다.
“무례한 놈,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 그 안에 누님이 계신가?”
“리세라야 잘 있지.”
“……말조심해라. 그녀는 아버지의 피를 이은 4녀. 네까짓 놈이 가볍게 이를 분이 결코 아니다!”
정색해 봐야 귀엽게만 보이는데.
와, 애가 크더니 자기 누나를 이렇게 챙기네!
내가 싱글벙글 웃자 오르카는 욱하면서도…… 정작 덤비지는 않았다.
“네 처우는 나중에 따질 테니 물러나라.”
“그건 무리지.”
“뭐? 지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고?”
“네가 하는 짓이 마음에 들긴 하는데…….”
오르카는 내 자식이다.
동시에 암살여왕의 아들이자 다크엘프의 요원이다.
애가 100년 사이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고, 속셈도 알 수 없다.
“네가 리세라를 암살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냐?”
“뭐……?”
오르카는 입을 떡 벌렸다.
상상도 못 한 소리라는 얼굴.
덜컥.
그때 문이 열리더니 아멜리아가 고개를 내밀었다.
“황녀님이 두 분 다 들어오시랍니다.”
“…….”
오르카는 순식간에 얼굴을 정돈하더니만 안으로 쌩하니 들어가 버렸다.
아니, 내가 뒤에서 기습이라도 하면 어쩌려고?
“잘 큰 건지, 아닌지 모르겠네.”
내가 혀를 차면서 안으로 들어가자…… 더 가관이었다.
앉아 있는 리세라 앞에 무릎을 꿇은 오르카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리세라 누님, 다시 뵙게 되어서 다행입니다.”
“오르카.”
황녀와 황자의 대화.
다들 물러나서는 동화 속의 풍경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경하고 있었다.
……가룰은 무척이나 감동한 얼굴이었다.
“누님, 눈도 안 보이시는데 이렇게 더럽고 비좁…….”
뻑!
물러나서 삐딱하게 보던 나는 오르카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무방비였던 오르카가 더러운 바닥을 뒹굴었다.
다들 입을 떡 벌리는데 나는 쏘아붙였다.
“말 안 고르지?”
“이 미친놈이. 보자 보자 하니까 아주…….”
“너보고 키 작은 난쟁이라서 불편하겠다고 하면 좋겠냐? 다들 아는 걸 꼭 언급해야겠어?”
“…….”
오르카는 화내다 말고는 멈칫했다.
그러더니 다시 리세라 앞에서 자세를 잡는다.
“죄송합니다, 누님. 제가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습니다.”
“괜찮습니다, 오르카. 하지만 공사가 다망할 텐데 이렇게 찾아오게 만들어서 미안할 따름입니다.”
“아닙니다, 누님. 제가 모시러 왔습니다. 이제부터 안심하시고…….”
“오르카, 다크엘프들에게 의탁하진 않겠습니다.”
리세라는 딱 잘라서 말했다.
오르카는 크게 당황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간악한 엘프들에게 벗어나셨다고는 하나 누님을 노리는 이들이 도처에 많을 겁니다. 저희들이 최선을 다해서…….”
“너희들이 리세라를 노리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 있는데?”
홱!
오르카가 돌아서서 노려보았지만 나는 딱 잘랐다.
“다크엘프들이 리세라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 있지?”
“말조심해라, 인간. 계속 참아 줄 수 없는 말을 골라서 하는데…….”
“너는 정말로 리세라를 위해서 달려온 건지도 모르지. 하지만…….”
오르카가 하는 것만 봐도 리세라를 위한다는 게 느껴졌다.
“암살여왕도 그런다는 보장은 없는데?”
“…….”
나를 위협하던 오르카는 입을 다물었다.
반박할 수 없으니까.
나는 딱 잘라 일렀다.
“전후 사정은 이미 알지? 엘프들로서는 리세라에 대해서 가급적 감추고 싶어 해. 근데 리세라가 다크엘프에게 보호를 받으면 문제가 너무 커져. 엘프들도 죽자 사자 나올 수도 있다고. 그리고 암살여왕이 정치적 선전 도구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리세라는 난감해했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영특하니 이런 가능성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다크엘프보다 인간인 리브라타 가문의 보호를 받는 게 정치적인 파장이 덜할 것도.
오르카는 신음을 흘렸다.
“……일단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여긴 너무 좁고 더럽습니다. 방을 따로 잡아 뒀으니 거기로 옮기시죠.”
“얘들아, 황자님이 좋은 방 주신단다. 짐 싸라.”
“뭐?”
오르카가 날 어이없이 보았지만 정말로 다들 가방을 메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고 짐을 안 풀고 있었지.
리세라가 웃으면서 말했다.
“모두 함께 지내게 해 준다니, 배려에 감사합니다, 오르카.”
“……예.”
오르카는 대답하면서도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나로서는 100년 만에 보는 아들이 좀 부족하다 싶어서 불만인 차였다.
“불만 있냐? 그냥 서로 붙어서 해결 볼까?”
“오냐. 안 그래도…….”
“오르카, 리브라타의 아들은 제게 많은 도움을 주시고 또 베푸신 분입니다. 힘과 권위를 앞세우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리세라가 타이르자 으르렁거리던 오르카는 딱 굳었다.
당장 날 손봐 주고 싶은데 누나는 말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얼굴.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아, 거 원래 남자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그리고 남자끼리는 주먹이 아니더라도 승부 내는 방법이 많이 있지.”
“……좋다, 이 인간 놈.”
오르카는 리세라의 손을 놓고는 벌떡 일어났다.
“네놈 같은 불결한 녀석이 누님의 곁을 맴도는 건 절대 용납 못 하겠다. 당장 쫓아내 주마.”
“그거, 기대되게 해 주시네.”
오랜만에 본 아들놈이 자기 다 컸다고 승질 부리네.
아버지의 마음으로 받아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