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39)
아버지는 아들이 되고
리브라타 저택의 저녁 식사.
상좌에는 리브라타 백작.
그 아래에 장남 로데릭.
막내인 나.
“보통 남자 셋으로 끝나지만 너무 심심해서 많은 게스트들을 모셔 봤습니다.”
“……저 여기 있어도 됩니까?”
내 옆에 앉은 가룰이 안절부절못했다.
귀족 가문의 저녁 식사에 호위 기사인 자기가 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상대가 리세라였으니까.
나는 턱짓으로 가리켰다.
“야, 저기 멜리우스 봐라. 턱 괴고 양반다리로 앉아 있잖아. 완전 자기 집 안방이야. 조금 있으면 양말까지 벗고 드러눕겠어.”
“여기 신발장은 어디지?”
리세라 옆에 앉은 멜리우스가 진지하게 물었다.
멜리우스 맞은편에 앉은 하인켈이 백작에게 말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리브라타 백작님.”
“아닙니다. 근래에 많은 고비들이 있었고,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들이 물심양면으로 내 아들들과 우리 가문을 위해서 고락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보답을 조금이나마 하고 싶어서 마련한 자리니 다들 편하게 있어 주셨으면 합니다.”
백작은 능란하게 분위기를 풀어 주었다.
사실 이 저녁 식사 자리는 내가 편성한 거다.
가룰과 로데릭, 하인켈과 나야 크로셀 후작의 사건을 거치면서 서로 친해졌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합류한 새로운 이들, 한 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의 일을 정리하기 위해서.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리브라타 백작님. 제 안전을 보장해 주신 것도 모자라서, 이리 베풀어 주시다니. 반드시 은혜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멜리우스 옆에 앉은 알리시아가 말했다.
그러더니 나를 본다.
“리젠 도련님에게도 감사합니다. 크로셀 후작의 일과 이번 사태를 성공적으로 정리해 주셨습니다. 자칫하면…….”
나는 고개를 가로저어 말을 끊었다.
알리시아는 의미를 이해하고 침묵했다.
이번 엘프 사건에서 리세라의 입장이 미묘하니까.
나는 적당히 분위기를 풀었다.
“아, 부끄럽게도 방금 한 말이 사실이야! 그러니까 다들 얼른 날 찬양해! 리젠 님 만세 삼창하고는 돈과 여자를 있는 대로 바쳐!”
“리젠 님 만세! 으악!”
가룰이 양손을 번쩍 들자 내가 다리를 걷어찼다.
하란다고 진짜 하냐!
다들 웃음이 터지자 내가 말했다.
“서로 잘 모르는 사이지만 근래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좀 불편할 수도 있고 어색할 수도 있지만 같이 밥이나 먹자고 모셔 봤습니다. 물론 밥값은 저 아닌 누군가가 낼 겁니다.”
갑자기 멜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내지.”
“부자였네, 저놈.”
“리젠, 너에게는 몇 번이고 감사해도 모자라다. 리브라타가 4황녀 전하를 보호하는 이상, 나는 항상 너희들과 뜻을 함께하겠다.”
멜리우스는 시종일관 진지하게 말했다.
“정령수에 맹세코.”
“…….”
순간 나는 멈칫하고 하인켈도 깜짝 놀랐다.
엘프의 예법에 따르면 저건 강력한 맹세다.
맹세를 어긴 순간, 멜리우스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
리세라가 조용히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리세라라고 합니다. 저로 하여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만…….”
“잠깐, 이거 끝도 없어지니까 사과나 칭찬은 개별적으로 나중에들 합시다.”
나는 단호하게 끊어 버렸다.
“다들 일단 먹고 합시다.”
저녁 메인 메뉴는 잘 구운 양고기.
소금을 살짝 발라서 입에 넣으면 고소한 맛이 끝내준다.
고기를 실컷 먹고 레몬주스로 입가심을 한다.
로데릭, 가룰, 아멜리아, 하인켈, 멜리우스, 알리시아, 그리고 리세라.
다들 입장과 종족이 다르지만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이제 황도로 가서, 내 지시에 따라서 활동할 것이다.
하지만 다들 나를 중심으로 모인 관계, 정작 서로 서먹서먹한 경우도 있었다.
오늘 저녁 식사는 서로 좀 친해지라고 마련한 것이다.
식사도 정치의 일환.
황제 시절의 습관이다.
고기를 마구 먹던 가룰이 멜리우스에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멜리우스 님은 부자입니까?”
“오래 살았으니까 그만큼 저축이 많지. 하지만 그만큼 세금을 많이 내야 해.”
“그렇습니까?”
대화에 하인켈이 거들었다.
“어떤 종족이건 쉰 살이 넘으면 따로 추가 세금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거 아버지가…… 아니, 아바마마께서 각별히 신경 쓰셨더군요.”
주스를 마시던 리세라가 가볍게 말하자 다들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선뜻 캐묻지는 못한다.
이럴 때는 눈치 없는 놈을 내세워야지.
내가 가룰의 어깨를 툭 밀자, 굳어 있던 놈이 곧바로 말했다.
“황제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제국은 구조상 다들 오래 사는데, 자칫하다가는 돈이 묶이기 십상이라고요. 돈은 피와 같은 것이라서 계속 돌아야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백 년, 천 년 동안 계속 돈을 움켜쥐고만 있으면 화폐를 많이 발행하게 되고 경제적 악순환이 벌어진다고요. 그러니 반강제적으로라도 돈을 돌게 하되, 반감을 줄이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어요.”
“역시 황제 폐하!”
갑자기 알리시아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외쳤다.
멀쩡하던 아가씨가 크게 소리치자 다들 깜짝 놀라서 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리시아는 리세라를 보며 빠르게 말했다.
“역시 우리 폐하시라니까! 세금을 기분 좋게 내게 한다! 말이 안 되는 소리지만 그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폐하께서는 해내셔야 했죠. 거기다가 제국은 초기부터 온갖 국책 사업을 벌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카지노 설립을 밀어붙인 것도 그래서였죠?”
“아…… 아마 그럴 거예요. 생각해 보니 황도의 카지노 관련 추진도 그쯤이었으니까요.”
“……음, 실례합니다. 제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네요.”
눈을 반짝거리던 알리시아가 정신을 차리고는 사과했다.
하지만 리세라는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카지노 설립 때가 기억나네요. 아버님은 카지노 설립에 비도덕적이라고 반대하는 재상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오셨죠.”
“……엉덩이를 차요?”
“이름이 알려진 신하들은 다들 아버님에게 한 번 정도는 엉덩이 맞았을걸요. 좀 지나서 누가 더 맞았는지 경쟁까지 붙었는데요.”
리세라의 말에 다들 얼빠진 얼굴이었다.
뭐, 내 이런 세세한 일화는 알려지지 않았겠지.
아니, 알려졌어도 이런 산골까지 퍼지진 않았을 거다.
“……저기, 폐하의 이야기를 좀 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도 듣고 싶군.”
하인켈과 멜리우스가 리세라에게 말을 걸면서 분위기가 더 풀어졌다.
사실 다들 리세라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황녀라는 신분도 있고,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하지만 나를 화제로 삼은 덕분에 자연스럽게 간격들이 좁혀졌다.
이젠 서로 농담까지 주고받게 되었다.
“…….”
정말 흐뭇하다.
이런 식으로나마, 자식에게 도움이 되는구나.
내가 황제로 열심히 일한 게 맹탕은 아니었구나.
“도련님은 괜찮으세요?”
갑자기 내 어깨를 누르는 작은 손.
고개를 올려 보니 아멜리아가 의자 뒤에 서서 내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묘한 얼굴이었다.
“왜? 뭐가?”
“다들 즐거워하시는데 도련님은 뒤로 빠져 있으니까요.”
“내가 좀 아싸야.”
“거짓말하지 마세요. 식사 전에…….”
나는 입술 위에 검지를 올려 보였다.
리세라도 귀가 좋으니까.
아멜리아도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식사 전에 아멜리아에게 부탁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리세라가 이래저래 실수할 수 있으니까, 신경 써 달라고.
그걸 또 너무 티 나게 배려하진 말아 달라고.
까다로운 주문이었는데 아멜리아는 빈틈없이 해냈다.
하긴 겉보기에는 아름다운 소녀지만 메이드를 20년 이상 했으니까.
아멜리아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련님, 정말 많이 달라지셨네요.”
“엄마, 나 예뻐?”
“예뻐요.”
“…….”
갑자기 간질간질하네.
아멜리아는 다 안다는 듯이, 살짝 웃으면서 내 어깨를 꾹꾹 눌렀다.
“힘들면 언제라도 말씀해 주세요. 기운 날 때까지 꼭 안아 드릴게요.”
“응애, 응애.”
“정말, 장난 그만치시고요.”
“지금 안아 주라는 건데? 엄마 안아 줘!”
나는 아멜리아의 손등을 간질이면서 농을 쳤다.
아멜리아는 한숨을 쉬면서 내 어깨를 찰싹 때렸다.
“도련님, 자꾸 저한테 그런 장난 치시면 다른 여자 분들이 섭섭하게 생각해요.”
“그러라고 해. 난 아멜리아만 있으면 되니까.”
“도련님, 정말 그만 놀리세요. 저 화낼 거예요?”
아멜리아는 뾰로통해져서는 나무랐다.
내가 웃으면서 아멜리아의 손등을 간질이는데 백작이 다가왔다.
“두 사람이 좋은 때지만 잠깐 이야기 좀 하자꾸나, 리젠.”
“백작님, 저 진짜 화내요?”
아멜리아는 이제 백작에게 쏘아붙였다.
발코니.
나와 백작은 나란히 밤바람을 쐬었다.
백작이 말했다.
“짧은 시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구나.”
“앞으로 리브라타 저택은 안전할 겁니다. 다크엘프들과 고용계약을 맺었으니까요.”
리세라는 나와 함께 황도로 올라갈 것이다.
엘프들이 움직인다면 나를 노리겠지.
그래도 만에 하나, 리브라타 백작을 인질로 잡으려 할 수도 있으니 취한 조치였다.
엘프들이 아무리 막 나가도, 다크엘프 요원이 지키는데 대놓고 피는 못 뿌린다.
“그래, 황도로 바로 갈 거냐?”
“예, 지금 모은 사람들 다 끌고 올라갈 겁니다. 다음 달에 원탁회의가 열린다는데, 그 전에 미리 올라가서 정세 탐색도 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려고요.”
황도, 천년제국의 수도.
온갖 종족들이 모이고 돈과 정치가 오가는 곳.
“백작님도 아시겠지만 지금 제국의 정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크로셀 후작, 엘프만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도 문제가 있을 공산이 큽니다.”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한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사라지고 100년, 아직 제국은 건재하지만 사실 겉만 멀쩡하지 안에는 자잘하게 금이 가고 있는 것 아닐까. 난 때때로 그런 걱정이 든다.”
“예, 그래서 가려는 겁니다.”
내 자식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내가 세운 나라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하나 살펴보고 2대 황제의 문제를 생각해 봐야지.
나는 당장의 계획을 설명했다.
“다크엘프들에게 가볍게 한 방을 먹였지만, 이걸로 끝날 리가 없습니다. 제가 올라가는 걸 알면 접근해 오겠죠. 다크엘프의 정보망을 이용하면 일이 한결 쉬워질 겁니다.”
“철도로 올라갈 예정이냐?”
“예, 그게 가장 빠르니까요.”
“……그렇다면 헌병대를 조심하여라. 어지간해서는 그냥 참고 못 본 척해라.”
백작의 걱정스러운 어조.
철도헌병대 이야기인가?
나는 의아해하면서 일단 말했다.
“제가 사고 치려고 해도 지금 같이 밥 먹는 사람들이 뜯어말릴걸요? 이제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그래.”
백작이 내 어깨를 탁탁 두드리더니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받아 보니 수표다.
1천만 원, 리브라타 백작 가문이 발행한 것이다.
“큰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할 거다.”
“……아니, 괜찮습니다. 집안 살림 어려운 걸 아는데, 뭘 이런 걸.”
나는 깜짝 놀라서 사양했다.
리브라타는 백작가라지만 재정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다.
그것도 리젠 때문에.
“이 녀석아,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다. 받으래도.”
“…….”
백작은 억지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수표를 내려다본 내 가슴이 먹먹해졌다.
나는 황제이자 제국군 총수로서 어마어마한 돈을 굴렸다.
또 어제는 40억짜리 계약을 해치워서 곧 10억이 들어올 예정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수표 한 장이 왜 이리 가슴이 아픈지.
백작은 내 옆에 서서 밤하늘을 보았다.
“처음에 네가 엘프어를 읽을 줄 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날 놀리는가 싶었다. 한데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들을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걸 보니 네가 이때를 대비해서 많은 노력을 해 왔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백작이 말했다.
“황도에 올라가면 칼비나가 기다리고 있을 거다. 어떤 곤경이 있더라도 너희 셋은 형제고 남매다. 셋이 무사히 돌아오너라. 그렇게만 하면 나는 더 바랄 게 없구나.”
“반드시 그러겠습니다.”
“리젠.”
백작이 갑자기 진지하게 불렀다.
“고맙구나. 그래도 무리는 하지 마라. 몸조심하고. 다치지 말고.”
“…….”
목이 콱 메었다.
나에 대한 숱한 칭송은 지겹도록 들었는데.
이 한마디가 왜 이리 가슴을 치고 들어올까.
12가문의 명예가 아니라 그저 자식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고맙고 미안했다.
전생에도 아버지라는 존재가 없었기에 더욱.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더는 말하지 않고 그저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내일부터 힘껏 달리겠다고 결심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