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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37화 (37/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37)

황제가 돈이 필요하면?

이틀 뒤.

리브라타 본가.

집무실에서 나는 백작, 로데릭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간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입니다.”

크로셀 후작의 일에 엘프들이 어떻게 연결이 되었는지.

그리고 엘프들이 리브라타 백작 가문까지 몰살하려고 했다는 것도.

리세라의 정보만 감추고 거의 다 밝혔다.

“실제로 여기, 베르크라는 놈이 엘프의 장로들에게 받은 명령서가 있습니다. 엘프어로 쓰여 있지만요.”

백작은 아주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마찬가지인 로데릭이 말했다.

“엘프들이 여차하면 우리들을 싹 제거하려고 하겠군. 만약 2차, 3차 침공이라도 오면 우린 버틸 수 없어.”

“그쪽은 종족 전체인데 우리는 인간의 일부니까요. 머릿수로는 상대가 안 되죠.”

백작이 내가 내민 명령서를 가리켰다.

“이 명령서를 증거로 고발한다면? 엘프들을 막을 수 있지 않겠느냐?”

“엘프들도 아주 얼간이는 아니라서요. 알리시아를 데려오는 데 방해되는 걸 모두 제거하란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적혀 있어요. 우리 리브라타를 직접 지목한 건 아니니까 빠져나갈 여지가 있죠.”

“으으음.”

백작과 로데릭이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나를 빤히 본다.

“엄마 닮아서 제가 좀 잘생기긴 했죠?”

“리젠, 방법이 없겠느냐?”

백작이 진지하게 물었다.

“내 목으로 해결된다면 기꺼이 내놓겠다. 하지만 엘프들은 우리 집안의 기둥뿌리까지 남겨 두지 않을 생각인가 본데…….”

“아버지,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엘프들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걸 보느니 가문의 존망을 걸고 끝까지 맞서 싸우겠습니다.”

로데릭이 강하게 반발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버지가 그렇게 돌아가시면 형이 바로 백작인데?”

“리젠! 그게 할 소리냐!”

로데릭이 정색하고는 불호령을 때렸다.

정말 화난 얼굴이라서 나도 슬쩍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진정하라는 의미다.

“미안합니다. 방금은 좀 시험해 본 말이었으니까 그만 화내요.”

“뭐? 시험?”

“방책을 마련했습니다. 일단 4황녀 리세라가 리브라타에 머무는 동안 엘프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합니다. 물론 이건 임시방편, 본질적인 해결책은 못 됩니다.”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다크엘프들을 끌어들이겠습니다.”

“……뭐?”

“으음.”

둘 다 깜짝 놀란 얼굴.

좀 생각한 백작이 말했다.

“엘프와 다크엘프는 서로 사이가 나쁘지. 엘프들이 우리들을 지원하기는커녕 몰살하려고 했다면 힘을 빌릴 만하지. 일리가 있구나.”

“다만 다크엘프들도 단물이 빠지면 가차 없이 우리를 내칠 수 있다. 그게 문제 아니냐?”

로데릭의 지적.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세부적인 건 제가 잘 조절해 보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전권을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다. 리젠, 네 말에 따르마.”

“나도 이견은 없다만…… 아까 시험이라는 말은 뭐냐?”

로데릭이 나를 쏘아보았다.

사실 화낼 말이긴 했지.

나는 턱을 긁으면서 말했다.

“아, 일을 진행하다 보면 아무래도 내 존재가 부각될 것 같아서요. 그러면 내가 형님을 제치고 백작 자리를 노린다고, 이런저런 풍문들이 떠돌 수 있으니까. 미리 예방 차원에서 말을 던져 본 겁니다.”

“……이놈이.”

로데릭이 나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냥 네가 아버지 이어서 리브라타 백작 해라, 해.”

“히이이이이익.”

“진짜 싫어하는 얼굴 하지 말고. 그냥 네 마음대로 해라.”

로데릭은 투덜거렸다.

장남인 자기를 제치고 내가 이래저래 의사 결정을 하면 불화 생길까 봐 해 둔 말인데.

이제 나를 확실히 믿어 주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백수가 되고 싶다는 형님의 굳은 결심을 이 아우가 몰라뵈었군요. 하지만 날백수의 꿈! 이 막내는 절대 양보할 수 없습니다.”

“둘 다 안 하겠다면 내가 좀 오래 해야겠구나.”

백작까지 거들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로데릭도 애써 근엄한 얼굴을 지키려다가 결국 웃는 걸 보고 나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즐거웠다.

그래, 권력보다 사람이 우선 아니던가.

내가 바라던 것, 황제로서 얻지 못한 게 지금 여기에 있었다.

한참 웃고 나서.

백작이 말했다.

“만약 지원이 필요하다면 칼비나에게 연락해 보는 건 어떠냐?”

“아, 누님…… 말입니까?”

나는 귀로만 들었던 상대.

장녀 칼비나 리브라타.

지금 리브라타 저택을 떠나서 제국군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이 이력만 봐도 상당한 별종이다.

로데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 됩니다, 아버지. 녀석이 괜히 끼어들면 일만 더 커집니다. 대책 없는 녀석 아닙니까.”

“이 녀석아. 여동생에게 말이 그게 뭐냐. 막내도 저렇게 하루가 다르게 변했는데, 그 애도 많이 변했을 거다.”

“제국군은 안 됩니다.”

나는 잘라 말했다.

두 사람이 주목하자 나는 이유를 설명했다.

“두 분 다 아시겠지만 제국군 내부에서만 엄중히 관리되어야 할 폭탄이 유출되어서 크로셀 후작에게 들어갔습니다. 이는 제국군 안에서도 누수가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만약 제국군에게 접근해야 한다면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

“우리가 섣부른 액션을 취했다가는 제국군 안의 칼날이 칼비나에게도 미칠 수 있습니다. 결코 만만히 볼 일이 아닙니다.”

백작은 놀란 얼굴로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럼 더 필요한 건 없느냐?”

“회계장부를 좀 보고 싶은데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리가 파했다.

나와 복도를 걷던 로데릭이 문득 말했다.

“참 의젓해졌구나, 리젠. 왜 이렇게 변한 거냐?”

“예?”

“……아니, 괜한 말인가? 그냥 네가 하루하루 달라지는 게 놀라워서 말이다.”

로데릭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방금 칼비나 이야기가 나오니 웃음을 싹 거두고 정연하게 말하는 게,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원숙하고 노련한 정치가를 보는 것 같던데.”

“온갖 여자랑 침대에서 놀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요. 형님도 질펀하게 놀아 보쉴?”

“이 녀석아.”

로데릭은 어깨동무를 하더니 창밖을 보며 말했다.

얼굴을 보고 말하기는 부끄러운지.

“아무튼 네가 정신을 차리고…… 이리 온갖 재주를 발휘하면서 힘써 주니 아버지도, 나도 참 든든하다.”

“걱정 마세요. 내 꿈은 미래의 백수, 형님을 실컷 일하게 하고 등쳐 먹는 게 목표니까요.”

“고맙다, 이 녀석아.”

로데릭은 내 어깨를 툭툭 치고는 먼저 걸어갔다.

잠깐 그 등을 본 나는 복도의 의자에 앉았다.

손님이 복도에서 기다릴 경우를 위해서 설치해 둔 거다.

편하게 앉은 나는 서류를 확인했다.

“어디 보자…….”

리브라타 가문의 회계장부.

이 귀족 가문의 벌이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이다.

“수입은 별로군. 지출 내역이 작년 4월 15일 리젠 50만 원 지출. 5월 9월 리젠, 85만 원 지출…….”

왜 리젠 이름으로 돈이 나가지?

계속 살펴본 나는 기가 막혔다.

“치료비와 합의금이었냐?”

이 몸의 원래 주인, 리젠 리브라타는 임자 있는 여자만 건드리다가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백작은 그걸 무마하고자 계속 돈을 쓴 것이다.

“진짜 막내 놈이 집안 재산 다 날려 먹었네.”

리브라타 영지는 수입은 변변찮은데 리젠 때문에 돈이 계속 나갔다.

저택 사람들이 날 처음에 무시하던 것, 그리고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니 몹시 기뻐한 이유가 새삼 이해가 됐다.

장부를 덮어 버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자, 어쩐다…….”

앞으로 돈이 필요하다.

부르작에게 3천만 원 수표를 받아 냈을 때는 당분간 문제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딸을 챙겨야지.

리세라는 거동이 불편한 애다.

황녀로서 품위를 유지하는 데 돈이 들어가고.

그 이전에…….

“내 딸이 얕보이는 건 절대 못 참지.”

누구보다 예쁜 옷 입고 매일 맛있는 걸 먹여 줘야 할 것 아닌가?

당연히 집은 연못과 정원이 딸린 곳이어야 하고.

정작 리세라는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불평을 안 했지만.

보안 문제로 엘프 시녀들을 하나만 남기고 돌려보냈는데도 수긍하고.

물론 리세라도 황녀니 나름 재산이 있겠지만.

“그래도 못 해 줬던 만큼 잘해 주고 싶은데…….”

돈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다.

황도로 올라가는 데에도 돈이 들어간다.

리브라타는 가난해서 황도에 별장도 없다.

숙소를 따로 잡아야 하고, 체류비도 팍팍 빠지고.

“그리고 올라가서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보고, 또 애들 챙기고.”

일단 내가 할 일은 간단하다.

100년 사이에 변한 걸 하나하나 확인하고, 내 아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확인한다.

그 과정에서 아내들은…… 뭐 모르겠고.

아내와 갈라선 이혼남도 애들 주말접견권은 절대 포기 못 하잖아?

딱 그 심정이다.

“뭘 해도 돈은 필요하지. 돈 들어갈 곳 천지네. 거금이 필요해.”

그래서 회계장부를 살펴본 건데, 리젠 놈이 다 까먹으셨네.

돈이 필요한데, 집에 돈이 없다.

나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엘프들에게 내놓으라고 한 30억, 계약서는 여전히 존재하지. 하지만 받아 내는 게 쉽지 않고 시간도 들어갈 테고.”

이제 리브라타와 엘프는 척을 졌다.

원래 엘프들은 계약서를 들이밀어도 자기 멋대로 미루는 놈들이고.

고민하는데 가룰이 다가왔다.

“리젠 도련님, 하인켈이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뭔데?”

“기다리시는 손님이 오늘 오후에 도착 예정이라고 합니다.”

다크엘프 상급자가 온다는 것.

쥐어짜서 정보를 얻어 낼 예정이다.

“그리고 아멜리아가 말씀드리라고 하는데요. 귀족원의 사자가 오늘 오후에 도착 예정이라고 합니다.”

“두 놈이 동시에 온다고?”

“한쪽을 내일 오라고 할까요?”

“아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돈을 단숨에 벌 계획이!

“오늘 둘 다 본다.”

“그럼 시간을 조절하라고 할까요?”

“둘 다 도착하면 응접실에 의자 붙이고 나란히 앉혀 놔. 꼭 그래야 한다고 아멜리아에게 전해.”

가룰이 의아하게 물었다.

“어, 그러면 문제 되지 않습니까?”

“아니, 이걸로 다 해결된다.”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가룰도 호위로 데리고 다닐 텐데 최소한의 눈치는 있어야지.

미리 교육을 시켜 놔야 나중에 편하게 굴려 먹는다.

“귀족원에서 나왔으면 귀족, 크로셀 후작의 일을 뒤늦게 처리하겠다고 달려오는 놈이지. 반대로 다크엘프는 하인켈의 문제를 알아보면서도 우리 정보를 털어 내려고 하는 놈이고. 그런 두 놈을 동시에 두면?”

“뽀뽀라도 합니까?”

“…….”

이놈이 미쳤나.

내가 어이없이 보자 가룰은 얼른 말했다.

“아, 아니.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서로 손발이 맞냐고 말하려던 겁니다.”

“외롭냐? 여자라도 소개해 줘?”

“외롭지 않…… 아니, 외롭지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가룰이 눈에 힘 꽉 주고 외쳤다.

나는 재차 설명했다.

“야, 둘 다 소속 집단에서 사자로 보낸 애들이야. 그러면 당연히 눈치 좋고 화술 좋고 뽀뽀도 잘하는 애들만 골라서 보냈겠지?”

“말씀을 들어 보니 그렇……. 그러니까 말이 잘못 나왔습니다.”

“그래, 두 놈을 한자리에 두면 서로 눈치 싸움 벌이고 탐색전 엄청 벌일 거다. 서로 머릿속으로 주판알 신나게 튕기면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유리할지 생각하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기들이 들고 온 정보 갱신하고, 우리 리브라타에 대한 생각과 태도를 바꾸게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내 몸값이 팍팍 올라가지.”

“……?”

가룰이 의아해하자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귀족원에서는 우리 집안이 12가문의 최약체, 북방의 별 볼 일 없는 백작 집안이라고 생각해. 운 좋게 크로셀을 잡았다고 생각하겠지. 한데 와 보니 다크엘프가 있다? 그 연유가 뭔지 최대한 탐색하겠지.”

“예, 그렇겠죠.”

“한편 다크엘프의 사자는 하인켈에게 올라오던 보고가 딱 끊겨서 현장 파악하려고 왔어. 그런데 귀족원의 사자가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궁금해하지.”

“그래도 귀중한 정보를 섣불리 말하지 않으려고 할 텐데요? 나름 뽑아서 보낸 사람들이니까.”

가룰치고는 용케 생각을 했다.

“맞아. 하지만 그건 1차원적인 생각이다. 초반에만 그렇고 정보 교환을 시도할 거야. 상대에게 적게 주고 나는 많이 받는 단수 싸움을 벌이겠지.”

“그럼 누가 이깁니까?”

“……너 진짜 남자답다.”

정보와 탐색전 이야기하는데 누가 이기냔 소리가 대뜸 나오냐?

가룰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칭찬으로 들은 모양이다.

나는 혀를 차고는 말했다.

“그 정보 교환전에서 누가 이길지는 나도 모르지. 하지만 둘 다 머리 돌아가는 놈일 테고, 속으로는 생각 하나를 하겠지.”

“그게 뭡니까?”

“보란 듯이 자기 두 사람을 모으고 싸움 붙인 리브라타는 보통이 아니다. 그냥 산골짝의 촌놈들이 아니었다. 그 생각에다가 내가 기름을 뿌린다.”

나는 웃으면서 결론을 내렸다.

“나에게 투자할 가치가 있다고. 돈이 얼마나 들건 사들이자고. 옆 놈보다 팍팍 불러서라도 확보하자고 생각하게 만든다.”

“아, 경쟁 붙이시는 거군요! 경매처럼요!”

가룰은 그제야 이해했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내가 매번 나 잘났다고 보여 주는 것도 귀찮거든.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뜸만 들여도 경쟁적으로 더 많이 부르게 될 거다.”

황제가 돈이 필요하면 어떻게 하냐고?

알아서 바치라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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