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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고인 황제놀음-36화 (36/230)

두 번 고인 황제놀음 (36)

정리정돈하게

다음 날.

엘프들은 정리되었고, 뒤처리가 시작되었다.

저택 안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시체를 치우고 핏자국을 닦고.

다들 바쁘게 움직였다.

물론 나는 노는 중이다.

저택 현관에 흔들의자를 놓고, 앉아서 커피 마시기.

남들 다 땀나게 일하는 중에 맛보는 오후의 여유!

“아, 농땡이 치니까 진짜 좋다.”

“붙잡았던 엘프들을 돌려보내도 괜찮을까?”

옆에 선 로데릭이 걱정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대로 된 전사들은 다 죽였고 남은 건 잔챙이들입니다. 돌려보내는 게 우리에게 이롭습니다.”

“그래?”

“예. 엘프들은 네 개 부족 연합체고,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밖에서야 잘 모르지만요.”

리세라가 인체 실험으로 내몰린 것도 내부 정치적인 문제가 상당히 개입했으리라.

내가 마무리를 지었다.

“돌려보내면 이번 일에 대한 추궁, 그리고 책임 소재를 따지면서 내부에서 소란스러울 겁니다. 당분간 엘프들은 함부로 준동하지 못할 겁니다.”

“…….”

그래도 로데릭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여차하면 엘프들 전부가 적으로 돌아설 테니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가 4황녀 리세라를 데리고 있으니 엘프들도 대화를 우선할 겁니다. 결국 교섭 사절을 보내겠지만 그것도 내년이겠죠.”

“황녀님은 어떻게 설득하지?”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시릭으로서 리세라를 안아 주고 마음을 풀어 주었지만.

리젠으로서는 따로 말해야 한다.

로데릭이 말했다.

“머지않아 귀족원의 사자가 도착한다고 한다. 그들과 협조해서 엘프들을 견제하는 게 어떨까?”

“귀족원이라…….”

나는 잠깐 생각하곤 말했다.

“황도에서 열린다는 원탁회의, 12가문이 모인다는 날이 머지않았죠?”

“그래, 이제 다음 달이지. 우리도 올라갈 채비를 해야 할 테고.”

“그러면 이번에 귀족원과 이야기를 해 보고 간부터 좀 보죠. 그리고…….”

“실례합니다, 리브라타의 아들.”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

엘프 시녀였다.

다른 시녀들은 돌려보냈지만 저 여자 하나는 남았다.

리세라의 거동 문제도 있고 해서 나도 허락했다.

시녀가 조용하게 말했다.

“황녀님이 뒤뜰에서 뵙고자 하십니다.”

“곧 간다고 해.”

“…….”

엘프 시녀는 잠자코 몸을 돌렸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제가 가서 황녀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형님은 집안 정리를 마무리하고,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눠 주세요. 계속 정신없는 일이 터져서 혼란스러워하실 테니까.”

로데릭은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 힘내고. 다 끝나면 저녁이나 같이 먹자.”

“뭐? 형이 저녁 풀코스를 대접하는 것도 모자라서 여자까지 소개시켜 준다고? 그것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여자라고?”

“……이 녀석아.”

내가 호들갑을 떨자 로데릭이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마주 웃은 나도 어깨를 한 번 치고는 몸을 돌렸다.

리브라타 본가의 뒤뜰.

정원.

따뜻한 바람에 꽃들이 휘날린다.

그 가운데에 리세라가 서 있었다.

“…….”

어젯밤의 일은 그저 환상이다.

당분간은 리젠으로서 대해야 한다.

내가 다짐하고 다가가자 리세라가 돌아보았다.

얼굴을 가리던 면사는 없다.

“안녕하세요.”

담담한 인사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리세라는 품에 꽃을 가득 안고 있었으니까.

어린 시절처럼.

“죄송합니다. 아멜리아를 통해서 허락을 구했지만 역시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나요?”

“아뇨, 어차피 정원 한번 싹 갈아엎을 생각이었습니다. 노동력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건가요?”

리세라의 차분한 물음.

당연하지만 간밤의 상황을 다 알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말하기로 했다.

“황녀님은 유괴되셨습니다. 앞으로 몸값을 받아 내야겠죠.”

“그건 어려울 겁니다. 장로들은 당신이 기력이 쇠할 때까지, 어쩌면 늙어 죽을 때까지 관망할 수도 있으니까요.”

“상호 평화라니, 아주 좋은 일이군요.”

“왜 그러셨나요?”

리브라타가 12가문이라고 해도 약체.

그게 아니라도…… 인간 귀족 가문 하나가 엘프 전체를 적으로 돌린다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다.

물론 나도 이런저런 대비책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남이 보면 미친 짓이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4황녀님을 데리고 황도로 올라가서 원탁회의에 참석할 생각입니다.”

“그리고요?”

“12가문의 최약체였던 리브라타가 4황녀와 동행이라고? 평판이 갑자기 수직 상승하겠죠. 우리 가문은 아주 잘나갈 거고, 그 막내아들인 저도 고점을 돌파! 저한테 알랑방귀를 뀌는 이들이 산처럼 몰려올 테고 저한테 안기고자 하는 미녀들이 바다처럼 몰려올 겁니다.”

나는 씩 웃었다.

“돈, 여자, 명예 완전 정복! 황녀님 덕분에 앞으로 잘 먹고 잘살 겁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위해를 가하지 않을 테니 많은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질에게 감사받는 유괴범이라니.

리세라가 나에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멜리우스에게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이런 큰 위험을 무릅써 주시다니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에이, 황녀님은 그저 나한테 버프 주는 토템입니다. 그냥 가볍게 협조해 주시면 됩니다.”

“웨인과 베르크는 제 호위이자 감시였습니다. 그들은 엘프의 전후 세대 중에서도 뛰어난 이들, 큰 고비를 넘기셔야 했을 겁니다.”

“제가 도박을 워낙 좋아해서요.”

리세라는 그래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간밤에 그리운 꿈을 꾸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습니다. 어긋난 일에 동조한 것도 결국 잘못이라고요.”

“누구나 방편을 떠올리고 유혹을 느낍니다.”

아, 리세라의 마음이 바뀌면 얼른 지지해 줘야 하는데.

정작 말이 반대로 나온다.

딸아이의 마음이 다치면 어쩌나.

이걸로 자책하면 어쩌나 싶어서.

“전부 저와 엘프들에 의해서 빚어진 일, 앞으로 있는 힘을 다해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당신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마음껏 써 주셨으면 합니다. 리브라타의 아들.”

“그냥 편하게 계세요. 황궁보다야 못하겠지만.”

리세라는 고개를 들고는 나를 보았다.

아니, 허공을 보고 있었지만 내가 발을 움직여서 시선을 맞췄다.

소리로 알았는지 리세라는 희미하게 웃었다.

“……말과 달리 마음이 정말 다정하신 분이로군요.”

“비밀입니다. 들키면 다들 호구로 알고 등쳐 먹으려고 하거든요.”

“비밀로 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이걸 받아 주세요.”

리세라가 내미는 꽃다발.

물망초.

나는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품에 안고 있으니 향이 물씬 밀려온다.

그리고 기억이 났다.

리세라가 나에게 가장 처음으로 꺾어 준 꽃이 물망초였다는 걸.

리세라가 말했다.

“황도로 올라갈 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황도의 아버지 무덤에 꽃을 바치고 싶습니다. 그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이미…….”

충분히 받았단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입니다. 황제의 취향을 속속들이 파헤쳐서 완벽한 꽃다발을 반드시 완성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리세라는 내게 다시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걸어갔다.

떨어져서 지켜보던 시녀가 얼른 달려와서는 부축한다.

우두커니 선 나는 향에 취해, 추억을 떠올렸다.

물망초.

딸아이가 나에게 처음으로 주었던 꽃.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고.

그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품에 가득 안긴 꽃다발을 꼭 안았다.

딸아이를 안아 주던 것처럼.

옛날처럼 힘껏.

리젠의 침실.

꽃병에다가 물망초를 꽂은 나는 의자에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할 일들.

“4계위에 다다랐다. 초능력은 계속 수련하고. 리세라는 구해 냈고. 이다음 스텝은…….”

내가 시릭 카라카스라고 밝힐까?

보통 일단 안 믿겠지.

하지만 증거를 대서 믿게 한다면?

“……으음.”

모든 일이 해결될까?

전혀 아니다.

전생의 나, 시릭은 제국 최강이었다.

전쟁을 거치고 제국을 세우면서, 나는 말 안 듣는 놈은 때려눕혀서 부하로 삼았다.

그들은 내 힘에 눌리고 용인술에 말려서 따랐고.

“하지만 지금 나는 약하지.”

만약 내가 시릭이라는 걸 안다면?

내 귀환에 기뻐하며 충성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약해진 걸 알고는 이용하려고 할 수 있지.

최악의 경우에는 죽이려 할 수 있고.

100년 사이에 다들 변한 것 같으니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감추면서 계속 힘을 키운다. 그리고 필요하면 밝힌다. 이걸 기본으로 두고…….”

머릿속에서 제국의 지도, 각 세력을 떠올린다.

내가 엘프들을 잡고 리세라를 구해 낸 걸로 각계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해 보는 것.

황제 시절에 매일 하던 일이지만…….

“음, 안 되겠군.”

내 정보는 100년 전이다.

최신 정보가 필요하다.

계속 갱신되면 더 좋고.

똑똑.

노크 소리.

하인켈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보통 아멜리아가 와서 하인켈이 뵙고 싶어 한다고 용건을 전해 줄 텐데.

하인켈은 주저하며 말했다.

“그게 좀 조심스럽게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위쪽에 보고를 어떻게 올리냐고?”

“…….”

하인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인켈은 다크엘프의 현장 요원, 정기적으로 자기가 파악한 정보를 윗선에 올려야 한다.

올리지 않으면 추궁이 들어오고.

“다크엘프 상층부에서는 이미 크로셀 후작의 사건, 그리고 이번 사건으로 리브라타를 주목하고 있겠지.”

“예. 말씀하셨던 대로 얼버무리고 있긴 합니다만, 슬슬 한계입니다.”

“모두는 모두를 위해. All for All.”

다크엘프의 정신, 그들의 방침을 이르는 말이다.

하인켈은 쓴웃음을 지었다.

“리젠 도련님은 정말로 우리들을 잘 아시는군요. 예, 다크엘프는 위부터 아래까지 모두가 하나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너는 계속 일탈 행동을 벌여 왔지. 사실 지금까지 리브라타를 너무 적극적으로 도와줬어.”

“별거 아닙니다. 현장의 판단이니까요.”

“징계위원회라도 열리면 넌 끝장일걸.”

“에이, 다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신경 쓰지 마시죠.”

하인켈은 멋쩍은지 머리를 긁었다.

태연한 것 같지만 하인켈은 오늘 당장이라도 암살당할 수 있었다.

다른 다크엘프에 대한 본보기로.

하인켈도 어제 목숨을 걸고 엘프들과 싸우고 마무리를 지었다.

충성에는 답을 줘야 한다.

“하인켈, 네 성이 뭐냐?”

“…….”

하인켈이 깜짝 놀랐다.

나는 이미 아는 걸 새삼 말했다.

“다크엘프는 언제나 뭉쳐서 움직인다. 모두는 모두를 위해서, 그에 저항하는 이들은 제거된다. 그게 종족의 생존 방식이지.”

엘프가 농촌 마피아라면 다크엘프는 도시 스파이다.

다크엘프들은 위부터 아래까지 똘똘 뭉쳐서 오로지 존속만을 추구해 왔다.

“하지만 집단주의인 다크엘프들도 개인의 이탈을 존중해 주는 예외가 있지. 심지어 잘하면 죽지 않을 수도 있고.”

“…….”

“바로 상대에게 성을 알려 주고 충성을 바치는 것, 그 다크엘프는 그 어떤 개인플레이도 용납받는다.”

나는 하인켈을 보며 말했다.

“이런다고 다크엘프들이 널 무조건 살려 준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일단 해명할 기회를 받을 순 있지. 또 최악의 경우라도, 배신자 소리만큼은 안 들어.”

정보를 캐내면서 언제나 죽음과 마주하는 현장 요원들.

그들에게는 그들의 명예와 신념이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배신자의 오명을 벗을 수 있다면 다크엘프에게는 복된 일이었다.

하인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위험합니다. 만약 다크엘프들의 추적이 시작된다고 해도 저만 죽고 끝날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하시는 걸 해 버리면 도련님까지 제 관계자로 휘말립니다.”

“그러려고 하는 말이야.”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너는 제국의 안위를 염려했다. 크로셀 후작을 막으려고 했고, 또 엘프의 황녀가 잘못되는 걸 보고 참지 못했지. 그게 다크엘프의 현장 요원으로서는 실격일지 몰라도…… 제국민으로서는 합격이다.”

“…….”

“훌륭하다. 몇 번이고 치하해도 모자란다. 네 분골쇄신의 결단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는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볍게 머리를 숙여 보였다.

황제 시절에 했던 대로.

하인켈이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제,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칭찬받을 일이 결코 아닙니다.”

“고개를 숙이지 말고 가슴을 펴라. 목숨을 걸고 대의를 택하는 결단을 갖춘 인재는 귀한 법이니까.”

하인켈은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를 마주 보았다.

“하인켈, 내 눈에는 지금 제국이 엉망으로 보인다.”

“……예.”

“정리정돈을 해야겠다. 따라와라.”

내 말에 하인켈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씩 웃었다.

“야, 분위기 잡느라 힘들다. 얼른 대답 좀 해 줘라.”

털썩.

하인켈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는 예를 취해 보였다.

“저는 람베르트의 하인켈입니다. 지금부터 리젠 도련님, 아니 주군을 따라서 어떤 일도 개의치 않겠습니다.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모두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서 길을 닦겠습니다. 행여 버리신다고 하더라도 결코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맙다.”

나는 짧게 말하고는 하인켈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다크엘프들에게 보고 올려. 너는 리브라타에게 성을 밝히고 충성하게 되었다고.”

“예? 그러면…….”

“널 제거하고 날 죽이려고 오겠지. 하지만 그 전에 간을 보려고 할 거다.”

나는 가볍게 말했다.

“하인켈이라는 현장 요원이 등을 돌릴 정도의 뭔가가 여기에 있다고. 좀 더 급이 높은 놈이 올 거다. 그놈을 턴다.”

정보가 필요하다고?

다크엘프를 쥐어짜 내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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