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35)
밤의 노래
저택 서관.
나는 전진하면서 투시력으로 사방을 살폈다.
투시력으로 열원 감지를 하면, 일반적인 매복은 다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이때마다 초능력을 써야 한다는 건데…….
이제 간당간당하다.
“아, 나 진짜 약해졌네.”
내가 계속 쉭, 쉭, 베어 넘기는 거야 워낙 경험이 많고 초능력의 보조 덕분이다.
이러다 진짜 강적 만나면 고생하겠는데.
“그래도 베르크를 잡았고 나름 사투였으니까…….”
3계위 이상을 바라볼 수 있으려나?
나는 긴가민가하면서 전진했다.
복도에 보이는 열원.
“왔습니까?”
침착한 목소리.
웨인이었다.
혼자 기다리고 있었다.
“……베르크는 죽었나 보군요. 방심하지 말라고 당부했건만.”
“나머지 엘프들은?”
“이미 그쪽에 가 있을 겁니다.”
“우리 쪽도 준비 다 해 놨는데?”
하인켈과 멜리우스, 가룰과 기사와 병사들.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대기하고 있었다.
내가 지형을 파악하고 함정도 몇 개 짜 줬고.
엘프들이 강해도 잡을 수 있다.
웨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리 준비해도 엘프의 유격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쪽에 절 막을 자가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직접 왔다. 너만 죽이면 끝, 남은 떨거지로는 뭘 못 하거든.”
“제가 보기에도 당신만 잡으면 끝입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의아했는데, 베르크를 잡았으니 정말 보통 실력이 아니군요.”
웨인이 당당하게 말했다.
“제가 승리하면 즉시 리브라타 가문을 몰살할 예정입니다.”
“왜 기다리는데?”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제가 패했을 경우에 황녀님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뭔 개소리야?”
“황녀님은 지금 방 안에 잠들어 계십니다. 지금 이 군사행동은 어디까지나 호위인 우리들의 독단입니다.”
나는 웨인을 어처구니없이 보았다.
자기편이 리브라타 인간들을 학살했다가, 일이 꼬이면 황녀의 입장이 아주 곤란해지니까 미루고 있단 소리 아닌가?
“아니, 그렇게까지 황녀 걱정해 주는 양반이셨어? 와! 인체 실험은 괜찮고 대외적인 입장이 곤란해지는 건 안 된다?”
“…….”
“와! 죽여주는 배려심이라서 진짜 죽여 버리고 싶다!”
“……체질 개선입니다.”
웨인은 발끈했다.
적이 흥분하면 나쁠 거야 없지만.
이어지는 소리가 가관이었다.
“인간 주제에 뭘 압니까? 우리라고 황녀님의 귀중한 옥체에 해를 입히고 싶었는지 압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엘프는 제국 내에서 밀려나고 말 겁니다. 그런 불상사를 막고자 스스로 몸을 바치신 황녀님의 고결한 희생을 모욕하다니!”
“고결한 희생?”
나는 인상을 팍 썼다.
황제로서, 아버지로서 절대 넘어갈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럼 얼른 너부터 고결하게 자살해라. 내가 박수 쳐 줄게.”
“말장난을…….”
“네가 리세라를 위해서 뭘 했냐?”
나는 딱 잘랐다.
하는 소리, 짓만 봐도 어떤 놈인지 대충 각이 나온다.
“옆에서 안타까운 표정이나 지으면서 가끔 이빨이나 깠겠지. 하지만 넌 그저 동조자에 불과해.”
“뭐? 나라고 좋아서…….”
“좋아서 지켜봤잖아. 베르크란 놈이 나대는데도, 엘프들이 대놓고 흉악한 인체 실험을 꾸미는데도 눈 감고 귀 막고 모른 척하면서 가끔 쫑알거리는 게 고작이지.”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입으로만 착한 척하는 위선자 새끼야. 너 따위가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 마라.”
“나, 나는 엘프로서…….”
“변명 말라니까? 멜리우스는 계획을 막으려고 했고, 리세라를 탈출시키려고 했다. 그게 실패해서 이런 오지에 처박힌 거고. 근데 넌 그냥 구경만 했지.”
“…….”
웨인은 이를 악물었다.
변명할 말이 없자 1차원적인 소리가 나온다.
“……황녀님은 넘겨 드릴 수 없다.”
“눈먼 황녀지. 그렇게 만든 건 네놈들이고.”
웨인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나는 일갈했다.
“그리고 내가 리세라의 눈을 트게 하려고 왔다! 덤벼!”
웨인은 비명과 고함을 지르면서 덤벼들었다.
노란 마력이 어린 검, 3계위의 마력검.
거기다가 전신에도 마력을 둘렀다.
확실히 베르크보다 위다!
파바박!
나는 얼른 뒤로 물러나면서 피했다.
나 역시도 3계위의 마력검으로 겨룰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쓰는 검은 범용검, 오래는 못 버틴다.
실제로 베르크를 끝장내면서부터 느낌이 안 좋았다.
“황녀님은 누구에게도 넘겨줄 수 없어! 절대로! 그분한테는 내가 필요해! 오로지 나만이 그분을 지켜 드릴 수 있어!”
웨인은 바로 따라붙으면서 검을 날렵하게 휘둘렀다.
정석적으로 찌르고 피하는데 틈이 없다.
아니, 사실 보이는데 마력과 정신력이 고갈돼서 파고들기 힘들다.
오히려 그러니까 단판 승부!
“공주님 지키는 왕자 기분 내는데, 세상없어도 넌 아니야.”
챙!
나 역시 작심하고는 마력검을 발동했다.
서로 맞부딪치는 칼날.
하지만 웨인의 검은 멀쩡하고, 내가 임시로 쓰는 검은 끼기긱 비명을 지른다.
앞으로 서너 번이면 끝날 거라고.
웨인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래, 베르크의 말이 맞았어. 여기서 널 죽이고…… 황녀를 내 여자로 만들겠어! 그러면 돼!”
“그러니까 내가 허락 못 한다고.”
“네가 뭔데!”
웨인이 재차 검을 내리쳤다.
하지만 나는 왼손으로 놈의 오른팔을 붙들었다.
3계위와 3계위의 힘 대결.
하지만 나는 정신력을 바닥까지 쥐어짜서 염동력을 발휘했다.
“크으으윽!”
버둥거리는 웨인이 무릎을 날렸다.
마력이 담긴 일격.
나는 그냥 맞았다.
방어에 마력을 돌릴 여력이 없으니까.
배 속이 찢어지는 충격.
하지만 나는 놈의 팔을 붙든 손을 놓지 않았다.
질 수 없다.
황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질 수 없다!
내가 이를 악물고 마력을 바닥까지 끌어 올리는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두근!
나는 웨인을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가 누구냐고?”
“놔, 놔!”
웨인이 재차 무릎을 날리려는 순간, 나는 마력 전부를 검 끝에 모았다.
노란색이던 마력이…… 녹색으로 확 불타오른다!
“애 아빠다, 이 새끼야.”
푸우욱.
4계위의 마력검이 웨인의 마력방어를 뚫고 가슴을 관통했다.
“컥!”
웨인의 비명.
나는 그대로 검을 겨드랑이로 빼내고는 이어서 목을 쳤다.
파가각!
그 직후, 내 검이 산산조각이 났다.
“후우우.”
범용검은 범용검, 4계위까지 건 순간 한계였다.
마무리한 나는 상태를 살폈다.
복부를 맞았지만 별문제는 없다.
“4계위인가…….”
실전을 거치면 마력은 성장한다.
저번에도 4계위가 목전이긴 했는데…… 역시 너무 성장이 빠르다.
심장에 손을 얹었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 나중의 일.
지금은 리세라가 우선이다.
침실.
커다란 침대에 리세라는 옆으로 누워서 자고 있었다.
얇은 잠옷, 가는 팔다리.
“감기 걸릴라.”
나는 얼른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었다.
그래도 리세라는 눈을 뜰 기미가 없었다.
방 안을 감도는 은은한 냄새, 바닥의 향로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면향이네.”
일단 맡으면 푹 잠든다.
엘프들은 리세라가 오늘 일을 막으려고 할까 봐 억지로 재워 버린 것이다.
향로를 끈 나는 의자를 가져와서는 침대 옆에 앉았다.
“남은 건…….”
엘프 두엇이 남았지만 다른 놈들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혹시나 상황이 벌어지면 종을 쳐서 연락할 테고.
나야 여기서 리세라를 지키고 있으면 된다.
나는 딸아이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미안하고 또…….”
리세라를 설득하기 위한 말은 이미 다 준비해 뒀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모르고 잠든 걸 보니 참 착잡했다.
결국 리세라는 엘프가 혹여나 난동을 부리는 일을 막기 위해서, 참고 버틴 것이다.
빛을 잃으면서도.
내가 세운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누구세요?”
잠에 취한 목소리.
리세라가 눈을 떴다.
향로를 끄니 깬 것이리라.
눈이 보이지 않으니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 것이겠지.
“…….”
한참 생각하던 나는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래도 곧 정신을 가다듬고는 리젠으로서 할 말을 하려는데…….
리세라가 내가 앉은 의자 쪽을 돌아보았다.
“……아빠?”
“…….”
숨이 막혔다.
시릭 카라카스는 100년 전에 죽었다.
다들 아는 사실, 리세라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수면향에 취한 리세라는 절실하게 부르고 있었다.
느닷없이 한밤중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기척.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아빠면 좋겠다고.
“……아빠예요? 아빠 맞죠?”
세상없어도 이 질문을 어찌 무시할까.
쉬다 보니 정신력이 좀 회복되었다.
나는 염동력으로 내 목, 성대를 슬쩍 건드렸다.
평소와 완전히 다른 목소리가 나오게.
“그래, 나란…….”
“……정말 아빠라면 증거를 대 보세요.”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리세라는 침대에 양손을 짚더니 경계했다.
전에 보여 주던 성숙한 모습은 사라지고, 잔뜩 독이 오른 아기 고양이 같다.
“……의사에게 이빨 보이러 갈 때처럼 굴지 마라. 지금 감동적인 장면 아니었니?”
“아빠인 척하는 귀신 잡귀, 칠죄신의 수하일 수도 있으니까요.”
“……아빠 맞아. 이 녀석아.”
각오하고 정체를 밝혔는데.
정작 리세라는 내가 수긍한 순간 안면 몰수하고 경계했다.
나는 허탈하기도 하고 헛웃음도 나왔다.
“세라야, 좀.”
“제 애칭이야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요.”
“아니…….”
남들 앞에서는 성숙하고 단아하더니만, 나한테는 완전히 토라진 소녀네.
하지만 이게 맞다.
이게 내가 기억하는 딸아이였다.
나는 오랜 기억을 뒤적거렸다.
“낯선 사람이 사탕 주면 어떻게 하라고?”
“먹고 튀라고요.”
“거짓말하지 마. 손목까지 깨물어 버리라고 했지.”
“그거 하나만으로는 못 믿겠는데요.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꽃은요?”
“우리 세라가 꺾어 주는 거라면 뭐라도…….”
“틀렸어요.”
“…….”
틀렸냐?
하지만 정작 리세라는 소리 지르거나 하지 않았다.
외려 침착하게,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하지만 이만 저승으로 돌아가 주세요.”
“내가 시릭 맞다니까. 제발 믿어 줘라.”
나는 애가 타서 다시 말했다.
리세라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아빠가 엄마에게 제일 감추고 싶어 하는 건 뭔데요?”
“어느 엄마인지 모르겠지만 대답은 하나지. 성인 남자들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저한테 들켰잖아요.”
“그래서 비밀로 해 주라고 했잖아. 다시 말하는데 집무실 서재, 안쪽 서랍까지 뒤지는 건 좀 너무하거든? 내가 이중 바닥이라도 만들어야 해? 북 커버만 바꿔 두면 됐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황궁에서, 딸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이야기하던 시절로 돌아간 기분으로.
리세라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빠.”
“응.”
“……아빠 맞네요.”
“그래, 아바마마 같은 소리는 짜증 나.”
뚝.
젖어 드는 침대 시트.
리세라의 어깨가 떨리는가 싶더니만…… 그녀는 내 쪽을 향해서 팔을 힘껏 뻗었다.
몸까지 던지면서.
“아빠!”
와당탕!
나는 즉각 일어나서는 얼른 리세라를 받아 들었다.
자칫하면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리세라는 펑펑 울면서 애타게 물었다.
“어, 어떻게? 도, 돌아가셨잖아요. 유령, 유령이에요? 다른 사람들 말처럼 아빠는 늘, 늘 나를 보고 있었던 거예요?”
“진작 알리지 못해서 미안하다.”
나는 딸아이가 원하는 답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세상 어떤 아버지라도 다 이럴 것이다.
리세라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 저 정말 열심히 했는걸요. 갑자기 아빠가 돌아가셨다는데…… 그래도 열심히 했어요. 엄마는 쓰러지시고, 다른 어머니들도 힘겨워하시고. 가족들은 다들 서먹해졌지만…… 그래도 힘냈어요.”
“…….”
나는 그저 딸아이를 끌어안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준비해 온 말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소리를.
“그래, 너무 잘했단다. 하지만…… 아빠는 세라가 더는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
“네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일이건, 나는 네 몸이 상하길 바라지 않는단다. 네가 건강하고 씩씩하게만 자라 주길 바라.”
“괜찮아요. 눈이야 다 끝나면 나을 테니까. 아빠가 걱정하지 않으셔도…….”
“세라야.”
나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무슨 이유가 있어도 네가 그러길 바라지 않아. 부탁이다. 다시는 그러지 말아라.”
“…….”
“네가 어엿하게 자란 모습을 보니 나는 참으로 기쁘다. 하지만 어른이라고 무조건 참는 게 아니야. 예전부터 말했잖니?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키면 엿 먹이고 다른 직장 알아보라고.”
리세라는 주저하다가 물었다.
“……화나셨어요?”
“내 딸이 다치는데 화가 안 나겠니?”
“엄마, 아니 어머니도 말리셨어요. ……어머니 혼내지 마세요.”
나는 속을 삭이고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리세라는 나를 꼭 끌어안고는 말했다.
“……정말로 아빠 맞죠?”
“그래.”
“계속 있어 주실 수 없어요?”
“난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을 거다.”
내가 진심을 담아서 일렀다.
리세라는 내 가슴에 고개를 꾹 파묻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아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미안하고, 고맙고, 그리고, 그리고…… 보고 싶었어요. 정말, 정말로.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결국 다시 울음을 터트린다.
떨어지는 눈물이 말 이상을 알려 준다.
흐느끼는 리세라에게서 흘러나오는 남색 아우라.
심장마저 바치는 절실한 애정.
서로 나눌 말과 마음은, 이걸로 충분하다.
나는 아우라를 흡수하면서 리세라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쓰으윽.
리세라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내가 가볍게 재운 것이다.
초능력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대증요법이었다.
“모두 다 잘 될 거다.”
딸아이를 끌어안은 나는 조용히 불렀다.
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 리세라는 나와 만났던 일을 그저 꿈으로 치부하겠지.
죽은 아빠가 찾아온 꿈.
자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꾸는 꿈이라고.
잊어버리겠지.
“괜찮아, 내가 돌아왔으니까.”
그러니 앞으로 몸 건강히, 무탈하게 지냈으면 한다.
그저 지금만이라도 편하게 잠들기 바라는 마음에.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가 나온다.
우는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 보겠다고 부르던 자장가.
날이 밝을 때까지.
그저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