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34)
감히 내 딸을
「하오니 부디 이 편지를 감추시고 교섭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도와 드리고 싶습니다만 일부러 제가 모르게 일을 멋대로 진행할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공공연하게 움직인다면 오히려 이들의 움직임을 부추기게 될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하고 부디 사람이 다치는 일이 없길 빕니다.」
침대에 누운 나는 몇 번이고 편지를 읽었다.
딸아이, 리세라가 은밀하게 보낸 편지였다.
세탁물 수거함에 넣어서 보낸 덕분에 다른 엘프들을 속이고 나한테까지 올 수 있었다.
“참…….”
애가 영특해!
리세라가 웨인과 베르크가 수상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걸 알고는 급히 나에게 보낸 것이다.
그녀가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직접 적은 편지, 이걸 감춰 두고 엘프들과 교섭해 보라는 이야기였다.
황녀가 직접 쓴 것이라면 법정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는다.
리세라는…… 리브라타의 위기를 감지하고는 자기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수를 짜낸 것이다.
“음…….”
슬슬 밤이 깊었으니 준비해야지.
내가 편지를 접어서 품에 넣자 상대가 말을 걸었다.
“3시간째 그 편지만 읽고, 또 읽는 거 알아요?”
이 침실의 주인, 알리시아 크로셀이었다.
검은 바탕에 흰색 프릴의 메이드복을 입은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뾰로통하게 보고 있었다.
“대체 누가 보낸 편지인데 그렇게 좋아해요?”
“비밀이지. 아무튼 준비는 다 했어?”
“준비랄 게 있나요. 어차피 설명은 다 들었으니까.”
나는 알리시아에게 딱 필요한 만큼만 설명했다.
내가 웨인과 베르크에게 편지를 보냈고, 낚인 엘프들이 알리시아를 탈환하려고 올 것이라고.
의자 등받이에 턱을 괸 알리시아는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묘하게 삐진 얼굴이다.
“안 놀아 줘서 심심해?”
“……설마 지금 상황에서 그러겠어요?”
“나중에 시간 나면 놀아 줄게. 근데 왜 그런 거 입고 있어?”
알리시아가 입은 건 메이드복이다.
알리시아는 흠칫하다가 말했다.
“다, 당신이 입으라고 했잖아요?”
“그랬나? 언제 그랬지?”
내가 무성의하게 말하자 알리시아는 순간 상심한 얼굴을 했다.
이지적인 아가씨지만 남자 경험은 없는지 이런 작은 말에도 바로 동요한다.
“아, 그렇지. 우리 파혼식 할 때 말했지? 생각 이상으로 잘 어울리네. 하지만 그거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게 생각났군.”
“……뭔데요?”
알리시아는 티 날 정도로 기쁜 얼굴을 하다가 내 시선에 얼른 표정을 정돈했다.
웃음을 못 감춘다.
아, 이거 반응이 순진해서 놀리기 딱이네?
나는 대놓고 음흉한 미소를 띠었다.
“문제, 남자는 어떻게 입은 여자를 가장 좋아할까요?”
“……설마 그 뻔하고 저질적인 소리 하려는 건 아니죠?”
“상품 있으니까 맞혀 봐.”
“……다 벗은 거?”
“틀렸습니다.”
알리시아는 나에게 의심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정답은 이불 걸친 여자.”
“예? 그게 무슨…….”
“남자가 여자의 이불을 걸친 모습을 본다는 건, 자기와 한 이불을 덮었다는 거지. 애인, 아내, 그리고 딸아이.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들.”
알리시아는 당했다는 얼굴이다가 천천히 턱을 끄덕였다.
“……감동적인 이야기도 할 줄 아네요.”
“내가 생각보다 감동적이고 가정적인 남자더라고.”
나는 웃으면서 문 쪽을 보았다.
투시력.
열원들이 보인다.
왔다.
나는 문으로 향하면서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엘프들이 이기면 얌전히 따라.”
“그런 말하지 마요.”
알리시아가 불쑥 말했다.
그녀는 앉은 자세를 고치고는 나를 똑바로 보았다.
“이겨요.”
“그러려고.”
나는 가볍게 말하고는 침실을 나섰다.
삐걱.
문을 열고 나가니 엘프 넷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뒤에 있는 건 붉은 머리카락의 엘프.
베르크였다.
“내가 나오길 기다려 주네?”
“최후의 만찬과 섹스는 즐기게 배려해 줘야지. 그리고 안에서 싸우다가는 크로셀의 딸이 죽을 수도 있고.”
베르크는 턱을 긁으면서 말했다.
“편지는 봤다. 우리가 안 오면 크로셀 딸을 감춰 버리겠다고. 그런데 우리가 싸울 필요가 있나?”
“…….”
“우린 그냥 크로셀 딸만 데려가면 돼. 그걸로 끝이지. 애당초 네가 우리 엘프들과 적대할 이유가 없잖아?”
“나한테 머리 뭉개지더니 뇌 손상이 왔냐?”
베르크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난 강한 사람을 좋아하거든. 우린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생각해 보니 굳이 피 봐서 해결할 이유가 없더라고.”
“…….”
“그냥 크로셀 딸만 넘겨줘. 돈? 필요하면 융통해 주지. 여자? 엘프 여자라면 내가 알아봐 줄 수도 있어. 또 리브라타에 지금 이상의 지원을 약속하지.”
나는 혀를 찼다.
“그런 거라면 너희들 싹 다 죽이고 받으면 되지.”
“욕심이 지나친데. 설마, 우리들을 전부 다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싹 죽이고 귀를 잘라서 장로들에게 보낼 거다. 니들이 좋아하는 엘프식 경고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리세라 황녀를 살려 두고 보호할 거야. 허튼짓했다가는 엘프들이 벌인 인체 실험을 만천하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할 거고.”
“황녀가 협조하지 않을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다. 이제 이야기 끝났냐?”
“……이해를 못 하겠군. 좋게 끝날 수 있는 일을 왜 피를 보려고 하지?”
“좋게 끝나?”
나는 엘프들을 혐오스럽게 노려보았다.
“니들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나 있냐? 이 개새끼들이 감히…….”
아빠, 아빠! 이거 봐요!
막! 꽃이 예쁘게 폈어요! 막 많이 폈어요!
여기 꽂아 둬도 돼요?
꽃을 양팔 가득 안고는 집무실로 들어오던 내 딸.
흙투성이가 된 팔.
너무 욕심을 부려서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인데도 아이는 웃고 있었고.
나는 얼른 일어나서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매일 일만 하고 밥도, 술도 혼자 먹는 일과.
사는 게 텁텁해도 그래도 애가 있어서 좋았는데.
그냥 좋았는데.
“감히 내 딸을 건드려!”
포효.
나는 마력을 일으키면서 앞으로 뛰어나갔다.
상대는 넷.
죄다 하나같이 숙련된 전사.
거기다가 베르크는 1급, 위험한 놈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투시력이 있다.
나는 가장 앞에 있는 놈이 단검을 꺼내면서 팔과 왼쪽 다리에 마력을 일으키는 걸 포착했다.
퍽!
자세를 낮춘 나는 팔을 놈의 다리 사이로 집어넣으면서 걷어 올렸다.
“억!”
첫 번째 놈을 적에게 던져 버린 나는 그대로 벽을 차고, 이어서 천장을 찼다.
아크로바틱한 움직임.
내 경험과 마력, 그리고 염동력이 있어서 가능했다.
나는 다시 천장을 차면서 수직으로 내리 떨어지며 검을 찔러 넣었다.
“크헉!”
두 번째 놈의 정수리에 단검을 꽂은 내 등에 세 번째 놈이 덤벼든다.
나는 팍 엎드리면서 두 번째 놈의 다리를 잡아채고는 던져 버렸다.
막 숨통이 끊긴 시신이 날아가자 놈은 잽싸게 상반신을 숙여서 피했다.
내 수법에는 이미 익숙해졌다는 듯이.
하지만 그게 내가 바라는 바였다.
바닥에 누운 나는 손바닥 하나로 바닥을 쳐올리면서 몸을 날렸다.
“으억!”
막 상반신을 펴던 세 번째 놈이 기겁했다.
사람이 무슨 용수철도 아닌데, 말도 안 되지.
하지만 마력과 염동력의 결합이라면 가능하다!
퍼어억!
나는 그대로 팔로 놈의 목을 휘감고 쓰러트렸다.
놈이 부지불식간에 상반신에 마력을 돌리자 나는 바닥을 차고는 재주를 넘었다.
퍼어어억!
내 양 무릎이 놈의 복부를 찍었다.
마력이 담긴 일격, 내장이 작살났으리라.
“크어억!”
세 번째 놈이 괴로워하며 몸을 틀었다.
좁은 복도, 염동력으로 관성과 중력을 멋대로 농락하는 날 막을 수 없다.
전신을 마력으로 방어하면 모를까?
하지만 이놈들은 지금 그걸 못 쓴다.
날 죽인 다음에, 딴 사람들을 죽일 생각이니까.
여력을 아껴 둬야 하니까.
“어디 우리 집에서 깝쳐!”
그러니까 나한테 죽는 거다.
나는 세 번째 놈이 흘린 칼을 잡아서는 대뜸 목에 꽂아서 마무리했다.
“…….”
이 과정에서 베르크는 가만히 서 있었다.
홀린 듯이.
“……뭐야, 너?”
내게 묻는 질문.
아직 살아 있는 첫 번째 놈이 시선을 주는데도 베르크는 나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뭐 그렇게 세? 인간 맞아? 뭐 중력을 무시하고 휙휙 날아다니네?”
“…….”
염동력 덕분에 나는 이런 좁은 공간, 실내에서 전투력이 휙 올라간다.
물론 이걸 말해 줄 이유는 없지.
서로 교차하는 시선.
그 순간…… 베르크는 자기 옆에 있던 엘프를 휙 내게 집어 던졌다.
“음?”
순간 가려지는 시야.
나는 반사적으로 얼른 뒤로 뛰어 피했다.
푸우우욱!
그 순간 엘프의 몸통을 뚫고 칼날이 날아왔다.
“으아아아아!”
아니, 관통한 그대로 나를 찌르려고 달려든다!
내가 급히 자세를 낮추면서 베르크의 다리를 잡아채려고 하자, 베르크는 확 뒤로 물러났다.
푸우욱!
쏟아지는 피.
시야가 가린다.
하지만 나는 그것보다 지금 베르크의 움직임이 황당했다.
사람을 던지고 출발한 다음에 그걸 찌른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움직임이다.
“바람의 가호.”
“아, 내가 쓸 줄 아는 건 아니야. 그저 황녀가 좀 특별하더군. 잡종이라서 그런가?”
“…….”
베르크는 휘파람을 불었다.
자기 동료를 제물로 삼았는데도 전혀 꺼림칙한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 덤비면 유리할 텐데, 내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뭐냐?”
“너야말로 뭐야? 리젠 리브라타. 알아보니까 마력 한 방울도 없는 놈이라던데 저번부터 펑펑 쓰고. 거기다가…… 아주 희한한 검술을 쓰네.”
“…….”
“아까 한 권유는 취소한다. 너 같은 놈하고 안 싸울 수가 없지! 무조건 싸워야지!”
번들거리는 눈.
내가 일어나자 베르크가 말했다.
“이런 실력을 감추고 있던 놈이 왜 무모한 싸움을 걸지? 설사 나나 웨인을 이겨도 미래는 없을 텐데? 설마 진짜로 황녀가 불쌍해서, 그 잡년 하나 구하겠다고 이러는 거야?”
“…….”
속 보이는 도발이다.
내가 심드렁하게 보자 베르크는 열을 다해서 떠들었다.
“아, 걱정하지 마. 널 죽인 다음에 그 잡종은 웨인이 가질 테니까. 하여간 자식, 숫기가 없어서. 그냥 확 술이라도 먹이고 자빠트리면…….”
“너, 게이냐?”
“…….”
베르크가 덜컥 굳었다.
나는 초능력을 쓰다 보니 사람의 언동에 민감하다.
단순한 놈은 말하는 것만 봐도 감정이 뻔하고.
“황녀를 말할 때는 질투하고, 웨인이라는 놈을 말할 때는 섭섭해하네? 앞뒤가 반대 아니냐?”
“뭐, 뭐? 뭐? 뭐?”
베르크가 꼴사납게 허둥거린다.
나는 더러운 거라도 본 것처럼 고개만 뒤로 물렸다.
“아, 그거냐? 괜히 센 단어, 천박한 표현을 쓰면 내가 동성애자라고 의심받진 않겠지, 그거? 그럴수록 눈살만 찌푸려지고 티 난다는 걸 모르냐?”
“너, 너, 무슨 말도 안 되는 모함…….”
“자기가 좋아하는 웨인이 황녀를 좋아하는 게 질투 나서 더러운 소리나 하고 있었네. 남자의 질투가 추하다는 게 이거네?”
“……이 개새끼가!”
베르크가 폭발하면서 달려들었다.
낚였다.
바람의 가호를 쓰는 적.
사람이 보고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이동하고 공격한다.
지금의 나에게는 벅찬 상대다.
전신으로 마력방어를 해도 적도 마력검을 쓸 테고.
그러니까 덤벼드는 타이밍을 유도하고 카운터 친다!
베르크가 확 가까워지자, 나는 염동력을 발휘했다.
염동결계, 2식.
수직으로 작용하는 중력을 강하게 만든다.
“뭐…….”
내 가슴을 단숨에 찌르려던 베르크가 굳어 버렸다.
아무리 날쌘 모기라도, 거미줄을 빠져나갈 수는 없다.
베르크는 반사적으로 전신에 마력을 둘렀지만 나는 그냥 앞으로 검을 푹 찔렀다.
마력검.
3계위의 마력검이 적의 마력방어를 뚫고 가슴에 박힌다.
“뭐 이런…….”
쑤우욱.
나는 베르크의 가슴에서 검을 뽑아냈다.
파각!
치명상이다.
비틀거리면서 물러난 놈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베르크는 믿을 수 없단 얼굴로 자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뭐야, 이거. 설마, 각성 능력? 뭐 이런 게 다 있지?”
“…….”
끝났다.
바람의 가호는 가속 능력, 치명상을 입었는데 쓰면 더 빨리 죽는다.
놔두면 평소처럼 죽을 테고.
나는 무시하고 몸 상태를 점검했다.
염동력의 사용, 또 염동결계가 순간 정신력을 너무 많이 잡아먹었다.
다음 싸움에서 초능력은 무리다.
베르크가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비밀, 비밀로 해 주라.”
“싫은데? 당연히 말할 건데?”
웨인에게 이걸 비밀로 해 달라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이놈을 용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난 황제라서 이런저런 비판, 비난, 심지어 욕설도 들었다.
그건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내 딸에게 지저분한 소리를 한 놈은 절대 용서 안 한다.
베르크는 자기 옷 안쪽을 더듬더니 종이 뭉치를 내 발치로 던졌다.
“그건 장로들의 명령서다. 알리시아를 데리고 오고, 여차하면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거.”
“용케도 받아 냈군.”
“나나 웨인도 토사구팽 당할지도 모르니까, 그거라도 쥐고 있어야지. 그거 줄 테니까…….”
베르크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았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내가 웨인이라는 놈에게 진실을 말할까 봐 두려운 모양이었다.
“……제발. 제발. 내가 잘못했어. 말하지 마.”
“그럼 말을 곱게 썼어야지.”
푹.
나는 투시력으로 놈의 폐를 찾아내고는 가볍게 찔렀다.
어차피 놔둬도 죽을 놈.
하지만 내 딸에게 더러운 말을 한 건 용서가 안 된다.
“허억. 어허어윽.”
바람 빠지는 소리.
목을 움켜잡은 베르크가 쓰러져서 사지를 버둥거렸다.
생물의 본능, 숨 쉬려고 몸이 발악하지만 폐에 구멍이 뚫렸으니 불가능하다.
천천히 찾아오는 질식사.
1초, 1초가 지옥.
누구나 당장 죽여 달라고 애원할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넌 마지막까지 괴로워해라.”
베르크가 애걸하며 올려 보았지만 나는 무시하고 앞으로 걸었다.
남은 건 한 놈.
100년의 시간을 넘어서
딸아이를 구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