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고인 황제놀음 (33)
100년하고도 하루
방침 정리는 끝.
멜리우스가 필요한 정보들을 말했다.
“엘프들이 알리시아를 확보하려는 건 수혈 목적이다. 정기적인 수혈로 체질 개선, 이라고 장로들은 말하더군.”
“그럼 엘프들도 알리시아를 죽일 수 없군. 살려 놔야 꾸준히 피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래, 수혈받는 걸 멈추면 시력은 느리게나마 회복될 거다.”
“시력의 자연 회복은 불가능하지 않나?”
그러니 천족의 1급, 특급 치료약을 구해 볼까 했는데.
멜리우스가 설명했다.
“천리를 어긋나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
“그럼 일단 정리한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자연 회복이고…….”
“가장 문제는 황녀를 호위하는 베르크와 웨인이다. 둘 다 3계위의 마력검을 다루지. 리브라타의 병사들이 죄다 덤벼도 당해 낼 수 없다.”
마력의 강함은 계위로 구별하고, 숫자가 커질수록 강하다.
단계가 오를수록 마력을 이용해서 할 수 있는 일도 늘어나고.
내가 정리했다.
“마력이야 오래 살면서 다루면 꾸준히 늘어나지만 컨트롤 능력은 별개지. 3계위의 마력을 가졌다고 해도 마력검은 1, 2계위밖에 못 쓰는 놈도 종종 있고.”
“그래, 둘 다 깨달음을 얻어서 3계위의 마력검을 다룰 정도다. 전후 세대 중에서도 뛰어나다. 장로들이 황녀님에게 호위로 붙일 만해.”
“이거면 안심이냐?”
내가 가볍게 마력을 불러일으켰다.
역시나 3계위.
멜리우스는 침묵했고 하인켈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크로셀 후작을 물리치셨으니까 당연하긴 했지만…… 정말 3계위셨군요?”
“뭘 그리 놀라? 오래 살다 보면 다들 익히는 건데.”
“인간들 중에서 3계위는 드무니까요. 마력전승이라면 모를까. 리젠 도련님은 그럼 독자적으로 3계위를 이룩하신 천재라는 건데…….”
“기업 비밀이다. 이거 보고하지 마라.”
“저도 죽을 판에 발 담갔으니 입에 지퍼 채웁니다.”
내 농담에 하인켈이 씩 웃었다.
멜리우스가 담담하게 말했다.
“인간이 약관의 나이에 3계위, 천재로군. 너 역시 웨인, 베르크와 동급이라고 치고. 상황을 잘 만들면 어찌어찌 되겠지. 하지만 그 뒤에는 어쩔 생각이지?”
“엘프들의 보복, 후환이 두렵지 않냐고?”
“그건 다음 일이다. 가장 문제는 4황녀가 동의하느냐다. 나 역시도…….”
멜리우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지금의 너처럼 하려다가 실패했으니까.”
“어쩌다 그랬는지 말해 봐. 타산지석으로 삼게.”
멜리우스가 무겁게 말했다.
“제국의 구심점인 황제. 그가 서거한 통곡의 날 이후, 황실에도 구멍이 뻥 뚫렸다. 4황녀는 그 혼란에서 몸을 피하고자 엘프에게 의탁했다. 엘프들 역시 하프엘프를 정령수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리세라 카라카스는 엘프의 피가 섞인 황제의 딸, 그녀를 포기한다는 건 자멸이니까.”
“다른 종족과의 패권 다툼에서 밀릴까 봐 무서워서 리세라를 받아 줬다? 하프엘프라는 게 마음에 안 드는데도?”
“……그래, 그렇지.”
멜리우스는 탄식했다.
“원래도 삐걱거리던 결합. 그런데 황녀의 강제적인 체질 개선 계획이 나오면서 상황은 끔찍해졌다. 나는 뒤늦게 알고 반대했지만 이미 진행 중이었고. 결국 나는 장로들의 감시를 피해서 4황녀를 탈출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하지만 정작 황녀님은 내 청을 거절했다. 엘프들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혼란에 빠진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처음부터 알고 했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리세라는 사전에 각오하고 엘프들에게 합류한 것이다.
멜리우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녀님은 엘프들의 폭주를 막는 소임을 다하시겠다고 했다. 그분이 그러고 계신 동안에는 엘프가 더 무모한 일은 벌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일리가 있었다.”
“…….”
“결국 나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오지에 처박혔지.”
멜리우스가 나를 보며 물었다.
정답을 달라고.
“자, 리브라타의 아들. 어떻게 할 거냐? 설사 네가 호위들을 다 정리하더라도…….”
“폭로한다.”
“뭐!”
멜리우스가 눈을 크게 떴다.
듣던 하인켈도 기겁했다.
“자, 잠깐만요. 이 스캔들이 터지면 수습이 안 됩니다! 엘프들이 끝장나는 건 둘째 치고 4황녀는 물론이고 6황후 전하, 아니, 황실의 위엄과 권위가 무너질 수도 있어요! 지금 제국의 체제가 흔들린다고요!”
“그럼 다들 죽도록 일하겠네.”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미 정했다.
“이딴 꼴을 보니 싹 엎어 버리지. 나는 여차하면 폭로할 각오로 시작한다.”
“……만약 엘프들이 힘으로 리젠 도련님을 막으려고 하면요?”
“지금 호위 둘이 1급 전사지? 본보기로 죽이면 함부로 못 한다. 또 여차하면 이 진실을 세상에 폭로할 거라고 엘프들을 협박한다. 실험은 자동적으로 중지, 황녀는 리브라타에서 보호한다. 시간이 지나면 시력을 되찾을 거니 끝.”
“그러니까 황녀 전하가 거부한다면? 본인이 자청한 일인데?”
“그건…….”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이 인체 실험을 당하는데 가만히 있냐?
무조건 막아야지.
여차하면 내 정체를 밝혀서라도.
하지만 이건 내 결심, 대외적으로는 다른 이유를 대야 한다.
“원래 변고는 동의 없이 일어나는 거야. 황녀 전하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역도들을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처단했다고 사후 보고 올린다.”
“쿠데타군요?”
“그냥 청소야. 방 청소.”
명색이 전직 황제인데 쿠데타는 아니잖아?
나는 정리했다.
“엘프들이 치고 빠지는 유격전 벌이면 귀찮아져. 그러니 하룻밤 사이에 싹 없앤다. 대가리는 둘, 웨인과 베르크를 정리하는 게 문제다.”
“작전은요?”
“이러려고 엘프들을 모조리 서관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웨인과 베르크를 잡고 황녀를 보호할 테니 너희들은 동관에서 대기해라. 엘프들이 빠져서 덤비면 잡고.”
3계위의 마력검까지 다루는 놈들에게 일반 병사, 기사를 보내 봐야 죽으란 소리다.
또 혼란이 커지면 리세라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내가 처리하는 게 가장 낫다.
하인켈이 곤혹스럽게 말했다.
“적들이 그렇게 움직여 줄까요? 둘이 동시에 덤비면 도련님도 어렵지 않겠습니까?”
“놈들이 원하는 건 알리시아, 우리가 확보해야 하는 건 리세라다. 그리고 웨인과 베르크도 황녀를 보호해야 해. 판이 벌어지면 둘 중 하나는 알리시아를 잡으러 오고, 남은 놈이 황녀를 보호할 거다.”
“아.”
“나는 기다리다가 한 놈을 잡고, 마저 남은 놈을 잡은 다음에 황녀를 확보한다. 1 대 2가 아니라 1 대 1을 두 번 치른다.”
하인켈이 감탄해서 나를 보았다.
하지만 지휘관으로 수없이 싸웠던 나로서는 단순했다.
적이 뭘 원할지 생각해라.
나는 하인켈에게 물었다.
“너, 밖에다가 소식 전할 수단 있지?”
“……음, 직업 비밀인데요.”
“판이 벌어지면 엘프들은 널 무조건 죽일 거다. 암살여왕에게 지금 이 상황이 알려지는 건 막아야 하니까.”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살여왕도 실험 내용까지는 몰랐을 거야. 알았다면 너한테 알리시아의 피를 확보하라고 지령을 내렸겠지. 엘프들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으니까.”
“아.”
하지만 하인켈은 그런 적이 없다.
실제로 지금도 놀란 반응이었고.
“……아니, 리젠 도련님. 진짜 천재입니까? 뭐 이렇게 국면을 팍팍 파악하십니까?”
“감동한 눈으로 보지 마. 너처럼 보는 놈들이 나중에 뭔 일만 생기면 나한테 해결해 달라고 하더라.”
“아니, 진짜 그러고 싶어지는데요.”
그래서 내가 은퇴하고 싶었지.
하지만 이젠 다르다.
이놈도 일 시켜야지.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널 미끼 삼아서 웨인과 베르크를 낚는다. 죽기 싫으면 숨어 있어라.”
“원래 현장 요원이 파리 목숨이지만 너무 팍팍 거시는군요.”
“샌드위치 내 몫까지 줄게, 인마.”
하인켈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각별히 주의하면서 숨어 있겠습니다. 누가 인질로 잡혀도 나서지 않고요.”
“그래. 그럼 멜리우스, 내가 편지를 써 줄 테니 네가 엘프들에게 전달하고.”
“알겠다. 그 전에.”
멜리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만 수납장을 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내게 검을 건네준다.
“이걸 써라.”
“범용검인가?”
마력검을 제대로 쓰려면 사용자에게 딱 맞춘 검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건 가격이 고가다.
그래서 급박한 상황에서 예비로, 혹은 돈 없는 이들이 적당히 쓰려고 개발한 게 범용검이다.
“3계위도 몇 번은 버틸 거다.”
“없는 것보단 낫네. 돌려 달라고 하지 마라.”
“황녀 전하만 안전해질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멜리우스의 말.
나, 시릭 카라카스를 회상할 때처럼 뜨거운 목소리였다.
나는 검을 받고는 선언했다.
“시간 오래 끌 거 없어. 내일 밤중에 정리한다.”
100년을 기다리고.
마지막 하루의 기다림.
* * *
저녁.
천년제국의 4황녀 리세라 카라카스는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었다.
“상황이 급해졌습니다. 황녀 전하.”
말하는 상대는 웨인.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유달리 청각이 예민해졌다.
소리가 들려오는 높이로, 상대가 무릎을 꿇고 말한다는 것까지 파악할 정도로.
“귀족원에서 이미 리브라타를 향해서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는 최대한 빨리 알리시아를 확보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폭력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장로님들이 저에게 해 주신 약속, 한데 지금 그게 깨졌고 다시금 깨지려고 하고 있군요.”
“…….”
“제가 이상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얕잡아 보나요, 웨인?”
리세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어떤 일이건 희생이 있는 건 당연하지만 동시에 당연시해서는 안 됩니다. 황제 폐하께서 종종 하셨던 말씀, 한데 당신은 지금 아주 어두운 생각을 품고 있군요.”
“…….”
상대의 목소리, 음색만 들어도 가늠할 수 있다.
웨인은 뭔가 숨기고 있다.
황녀인 그녀에게?
아니, 황녀라는 권위조차도 덧없는 것이다.
시릭 카라카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모든 것이 바뀌었고, 황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리세라는 엘프들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갈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를 홀로 둘 수는 없었다.
리세라는 문득 불안해졌다.
“설마…… 이곳에 피를 뿌릴 겁니까? 아니, 장로들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으로 당신과 베르크를 동시에 보낸 겁니까? 패트릭이 무례한 일을 저지른 건 또 뭐고요? 전부 다 계획된 일이라는 겁니까?”
“…….”
엘프는 오래 계획한다.
당장 그녀의 몸을 억지로 변화시키는 이 계획은 장장 50년이 넘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장로들은 약조까지 깨고 제국에 풍파를 일으키려고 하는군요. 이런 일을 벌이고도 눈가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죄송합니다. 곧 끝날 일입니다.”
“웨인, 기다리세요.”
하지만 웨인은 일어나서 나갔다.
문밖으로.
막아야 한다.
“웨인!”
리세라는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문이 닫혔다.
급작스럽게 일어난 바람에 균형을 잃은 리세라는 앞으로 넘어졌다.
딱딱한 감촉.
부축해 줄 시녀들은 이미 물린 상태다.
그녀는 혼자다.
리세라는 쓰러진 채로 눈을 깜빡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이 따끔거려서.
“…….”
비참하니까 울까?
황녀 이전에.
잡종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못 들은 척해야 하고.
몸이 깎여 나가는 고통을 참았는데도 장로들은 약속을 어기고 피를 뿌리려고 한다.
이들은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고, 앞으로 저지르려고 하는가?
어둠 속에 혼자 남은 황녀가 뭘 막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
절로 나오는 목소리.
다시 한 번 뵙고 싶었다.
사람들은 천하를 추상처럼 호령하는 시릭 카라카스를 칭송하지만 그녀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달랐다.
난감하고 쑥스럽게 웃는 사람.
장난치기 좋아하고.
이쪽에서 바보처럼 웃으면 더 바보처럼 웃어 주는 사람.
“아버지.”
리세라는 속으로 되뇌었다.
너무나 그립지만 이젠 다시 뵐 수 없다.
그렇다면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딸로서.
“그래.”
리세라는 천천히 바닥을 짚고는 일어났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할 수 있다.
호흡을 고르고.
각오를 다진다.
“밖에 있습니까?”
포기할 순 없다.
막을 수 없다면 힘을 빌려야 한다.
아까 이야기를 나눴던 리브라타의 아들.
이상할 정도로 편안했던 상대에게.
“예. 황녀 전하.”
“쓸 것이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알려야 한다.
모든 것을.
결판 하루 전.